제632화
라온은 용암이 솟아오르는 검은 바위 위에 앉은 채 시선을 내렸다.
[끼륵….]
화산보다 더 거대해 보였던 불사조는 힘이 모두 빠져서 닭보다도 작아진 상태로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이름.”
[…….]
이름을 말하라고 손가락을 까딱였지만, 불사조는 넋이 나간 듯 부리만 벌렸다.
“대답.”
[뺘, 뺙?]
목소리를 낮게 가라앉히자, 불사조는 겁에 질린 것처럼 병아리 소리를 흘렸다.
“다시 묻지. 이름.”
라온이 서늘한 눈동자를 내리며 미간을 좁혔다.
[카, 카이얀입니닷!]
불사조는 인간들을 겁에 질리게 만들었던 날카로운 부리로 본인의 이름을 내뱉었다.
“카이얀이라….”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고서 두 번째 물음을 던졌다.
“나이는?”
[처, 천 년이 지난 후부터는 딱히 세지를 않았는데요.]
카이얀은 본인의 나이를 모르는 게 민망한 듯 날개로 뒤통수를 긁적였다.
[거기다 여기가 특수한 장소라 나이를 알기는 좀 어려워서….]
“모르면 끝나?”
[…….]
“대답.”
[뺘, 뺙!]
녀석은 겁에 질린 표정으로 부리를 떨었다.
“정확하지 않아도 상관없어. 대충이라도 말해봐.”
[사, 살아온 세월만 따지면 삼천 년이 좀 넘은 것 같아요….]
불사조는 억지로 나이를 계산한 듯 눈을 질끈 감은 채 대답했다.
“삼천 년….”
처음 보았을 때부터 크기와 화력이 일반적인 불사조와 격이 다르다고 느꼈는데, 예상했던 대로 굉장히 오래 살아온 놈이었다.
“넌 여기서 뭘 하고 있었지?”
[약속을 이행하고 있었어요….]
“무슨 약속?”
[이곳에 머물면서 들어오는 사람들을 시험하는 일이에요.]
카이얀이 날개로 부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제가 허락해주는 인간만 아래층으로 내려갈 수 있죠.]
“역시 문지기였나.”
녀석은 죽어가면서 본인의 허락 없이는 이곳을 벗어날 수 없다고 외쳐댔다. 예상대로 이곳에서 수문장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지금 내가 뭘 보는 거지?”
버렌이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지금 불사조를 심문하는 게 맞아?”
“불사조를 부활시켜 가며 전투 연습을 시킨 건 괜찮았고?”
마르타가 놀라는 것도 빠르다며 콧방귀를 뀌었다.
“난 이제 저 대주가 무슨 짓을 한다고 해도 놀라지 않을 거 같아.”
그녀는 라온의 뒤통수를 보며 머리를 쓸어내렸다.
“존잘 라온.”
루난은 잘한다는 듯 손뼉을 쳤다.
“너와 약속을 한 사람은 누구지?”
라온이 카이얀을 굽어보며 턱짓을 했다.
[저, 저기….]
카이얀이 떨리는 고개를 억지로 들어올렸다.
[그것 때문인데, 저도 하나만 여쭤봐도 될까요?]
“뭔데?”
[저를 부활시킬 때 사용했던 불꽃을 자세히 볼 수 있을까요?]
말투가 완전히 변했다. 불사조가 이렇게 부드럽게 말할 수 있을 줄은 몰랐다.
“너를 부활시킬 때 사용했던 불꽃?”
[저와 약속을 한 인간과 비슷한 느낌이 들어서….]
“…….”
라온은 카이얀의 말을 들으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역시 지그하르트의 초대 가주가 한 일인가?’
이 불사조를 문지기로 세워둔 것도 지그하르트의 선조였던 것 같다.
다른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도록 기막을 친 후 만화공의 불꽃을 일으켰다.
화아아아아!
만화공 천화에 이르며 연한 금빛이 휘감긴 불꽃이 불사조의 두 눈동자에 어렸다.
[역시….]
카이얀은 아직 빨간색에 더 가까운 만화공의 불꽃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미숙하지만, 그 인간의 후예였군. 다만 성격은 정반대….]
“뭐?”
[뺘, 뺙! 아닙니닷!]
녀석은 또 맞을까 봐 겁이 난 듯 날개를 파르르 떨었다.
“그 사람이 여길 만든 거지?”
[그렇습니다. 혼자는 아니고, 여럿이서 만든 것 같지만….]
“음….”
그 기억은 진짜였다. 선조와 그의 동료들이 이 공간을 만든 게 맞았다.
“너는 왜 수문장 역할을 받아들인 거지?”
[빚을 졌습니다….]
“빚?”
[그 인간이 동족 아이들을 구해주었습니다. 그가 아니었다면 다른 인간들의 손에 잡혀서 노예가 되었겠죠.]
“그런가.”
선조는 인간에게 잡힌 불사조를 구해주었던 것 같다. 여기저기 안 끼는 일이 없다. 정말 방랑벽이라도 있었던 것 같다.
[어차피 저도 삶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제안을 받아서 이곳의 수문장이 되었죠.]
“그 사람이 네게 요청했던 것을 그대로 말해봐.”
[적절한 시험을 내려서 합격하면 밑층으로 내려보내고, 불합격하면 재시험을 치를 수 있게 돌려보내라고 했어요.]
라온이 떨림이 멈춘 카이얀의 눈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좀 감이 잡히네.’
지그하르트의 초대 가주는 지그하르트의 후인 모두를 위해서 이 공간을 만든 것 같았다. 시험이라고 한 것을 보니, 확실했다.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아?”
[뺘, 뺙?]
“너 우리를 봤을 때 진짜 살기를 드러냈잖아.”
카이얀은 시험이 아니라, 이곳의 인간을 모조리 죽일 듯한 살기를 내뿜었다.
내가 녀석을 여러 번 죽이며 교보재로 사용한 것도 그때 진짜 살기를 느꼈기 때문이다.
[그, 그건 제 의지가 아니었습니다.]
“의지가 아니다?”
[얼마 전에 이곳을 찾아낸 인간들이 있었습니다. 놈들은 이 땅을 지나가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진법과 결계를 뒤틀었습니다. 그중에서 저도 감당을 할 수 없는 괴물이 있어서….]
그게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데루스 로베르트.’
첫 번째 층에서 느꼈던 대로 데루스 로베르트가 직접 이곳에 왔던 게 분명했다.
‘역시 여기는 정상적인 무덤이 아니야.’
이곳이 본래 지그하르트의 훈련소나, 도검존의 무덤이었다고 해도 지금은 데루스 로베르트가 만든 함정에 불과했다.
“혹시 놈의 얼굴은 봤나?”
[순식간에 잡혀서 보지 못했습니다. 강하기도 강했지만, 얼굴에 뭘 쓰고 있었어요….]
카이얀은 아직도 두려움을 느끼는 듯 꽁지를 떨었다.
“그렇군.”
라온이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실망할 필요 없었다. 데루스 로베르트가 이곳에 본인의 흔적을 남겼을 리가 없으니까.
[더, 덕분에 저도 정신을 차렸습니다. 아래층으로 내려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카이얀이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뒤로 물러섰다.
“어딜 가.”
라온이 손을 뻗어서 카이얀의 목을 잡았다.
[뺘악!]
“무슨 병아리도 아니고.”
모르는 사람이 보면 괴롭히는 줄 알 것 같았다.
-괴롭히는 거 맞잖느냐!
라스가 고개를 저었다.
-저 불쌍한 것. 본왕이라면 한입에 먹어주었을 텐데….
녀석은 안타깝다는 듯 입맛을 쩝쩝 다셨다.
“후….”
깊게 한숨을 내뱉고서 카이얀의 깃털을 뽑았다.
[뺘약….]
깃털을 연달아 뽑자, 카이얀이 눈물을 글썽거렸다.
[저, 정말 절 먹으시려는 겁니까? 지금은 살이 없어서 맛없을 텐데….]
“그게 아니라….”
-잘 생각했느니라!
라온이 고개를 저을 때 라스가 움켜쥔 주먹을 들어 올렸다.
-본왕은 지금 어마어마한 것을 깨달았느니라!
‘뭔데?’
불안했지만, 혹시 몰라서 라스를 보았다.
-네놈은 저 불새 계속 부활시킬 수 있지?
‘그래.’
-그럼 깃털 하나만 남기고 저놈을 먹은 뒤에, 그 깃털로 다시 부활시키고! 또 먹은 뒤에 또 부활시키면 되느니라!
라스의 입에서 홍수가 흘러내렸다.
-야들야들한 고기가 끝없이 나오느니라! 전 대륙의 기아 문제 해결! 닭구이 무한리필이니라!
녀석의 눈동자가 훼까닥 돌아갔다.
-저 병아리 놈도 먹어달라고 하지 않았더냐! 당장 본왕의 입에!
뻐어어억!
라온이 라스의 입에 주먹을 밀어 넣었다.
‘이 식충아! 이거나 먹고 입 다물어!’
* * *
“후우.”
델프로스가 이마를 부여잡은 채 새하얀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분의 말씀이 맞았군….”
그는 깨져버린 수정구를 보며 입술을 씹었다.
“예?”
사비대주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분께서 혹시라도 라온 지그하르트가 무덤 안에 들어온다면 최대한 빠르게 제거하라고 하셨다. 초월자와 맞먹는 위험도라고 생각하라고 하셨지.”
“그, 그런데 왜….”
“다른 놈들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델프로스가 깨져버린 수정구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실제로 무덤 안에 라온 지그하르트보다 강한 놈이 최소 다섯이다. 그 괴물들을 놔두고 이제 갓 20살을 넘은 애송이를 살핀다는 건 말이 안 되잖느냐!”
그도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는 듯 입술을 씹었다.
“거기다 그냥 죽여서는 도움도 안 돼. 참으로 귀찮은 놈이다.”
“그렇다면 다음 층에서 있는 함정과 몬스터를 모두 광풍대 쪽으로 몰아넣는 건 어떻겠습니까?”
사비대주가 고개를 숙이며 다가왔다.
“아무리 라온 지그하르트가 강하다고 해도 광풍대 전원을 보호하지는 못할 겁니다. 아니, 만약 라온이 앞에 서서 모든 함정과 몬스터를 처리하면 그게 더 좋습니다. 놈의 체력과 오러를 소모시킬 수 있을 테니까요.”
그는 그 방법뿐이라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래. 지금은 그 방법뿐이겠지.”
델프로스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하겠습니다.”
사비대주가 고개를 끄덕이고서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델프로스가 짜증이 돋은 듯 관자놀이를 매만지고 있을 때였다.
챠라라락!
어둑한 방의 우측 구석에서 쇠사슬 소리와 함께 지옥의 악마가 우는 듯한 괴이한 소음이 울렸다.
우우우우!
델프로스가 차분히 시선을 돌려 조금 전 소리가 울린 곳을 바라보았다. 무언가를 지키는 듯, 혹은 가두는 듯. 회색 안개가 휘감긴 공간에서 검은 안광이 번뜩였다.
“아직 네 차례가 아니다.”
델프로스는 검은 안광과 눈을 맞추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주인공은 마지막에 나오는 법이니까.”
* * *
라온은 훈련생 시절 카멜룬에서 샀던 낡은 쇠반지를 용암에 살짝 담갔다.
반지는 용암 속에서도 녹지 않고 멀쩡한 모습을 유지했다.
치이이이익!
얼마나 지났을까. 반지의 표면에서 기이한 울림이 일어났다.
녹아내리는 게 아니다. 황색 녹이 벗겨지고, 반지 위로 신비로운 문양이 새겨지기 시작했다.
‘됐어.’
라온은 황금빛으로 번쩍이는 반지를 불사조의 깃털로 감았다. 깃털이 컸기 때문에 깃털 3개로도 반지의 모든 부분을 감쌀 수 있었다.
우우우우웅.
반지는 불사조의 깃털 속에서 강렬한 열기를 뿜어내며 작은 떨림을 일으켰다. 이 떨림이 멈춘다면 자연스럽게 반지의 봉인이 풀리게 될 것이다.
‘그럼 이번에는….’
멀린에게 받았던 반지를 꺼내서 똑같이 용암 속에 담가보았다.
‘이건 안 되는군.’
용암에 한참 동안 담가도 별 반응이 없었다. 이 반지도 특별한 봉인이 새겨져 있지만, 아무래도 해제 방식이 다른 것 같았다.
‘다른 방법을 찾아야겠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멀린의 반지를 다시 손가락에 꼈다.
“카이얀.”
라온은 손을 탁탁 털고서 뒤에서 떨고 있는 카이얀에게 손짓했다.
[뺙?]
“문 열어.”
[뺘악!]
카이얀이 부리를 까딱이고서 사람의 손바닥만 한 날개를 길게 펼쳤다.
쿠구구구구!
용암이 톱니 모양으로 갈라지고, 뻘겋게 달아오른 대지 위로 다음 층으로 내려갈 수 있는 차원의 문이 열렸다.
[저 통로로 들어가시면 3층 미로에 도착하실 수 있을 겁니다.]
“미로?”
[예에. 3층은 미로입니다. 함정과 몬스터를 피해서 길을 찾아야 하지요.]
“흠….”
라온이 카이얀에게 시선을 돌려 광풍대를 바라보았다.
“먼저 내려가.”
“알겠습니다. 1조부터 차례로 진입한다!”
버렌이 고개를 끄덕이고서 손짓을 하자, 광풍대가 차례로 구멍에 들어갔다.
[그, 그럼 조심히 가십시오, 저는 이만….]
“무슨 소리야.”
라온이 고개를 저으며 오른손을 뻗었다. 도망치려는 듯 파닥거리는 카이얀의 목을 잡았다.
[뺘, 뺙!]
“어디 가냐?”
[저, 저는 할 일을 모두 마쳤으니….]
“네가 안내를 해줘야지. 미로라는 걸 알면 대충 길도 안다는 거잖아.”
[뺘악….]
불사조는 불안한 듯 눈동자를 굴렸지만, 어디에도 녀석을 구할 사람이 없었다.
-잘했느니라!
라스가 잘했다며 손을 흔들었다.
-무한리필 닭구이를 놔줘서는 안 되지!
‘그거 아니라고.’
-뭐가 아니라는 것이냐! 저놈 타고 있지?
‘그렇지?’
-무한으로 되살아나지?
‘그것도 그렇지….’
-그럼 무한리필 닭구이 맞잖느냐!
‘…….’
이젠 설명하기도 귀찮아서 그냥 무시했다.
[제, 제가 길을 대충 알기는 하는데, 빨리 움직이려면 필요한 게 있어서….]
“됐고. 따라와.”
[삐야아아아악!]
라온은 카이얀의 목을 움켜쥔 채 3층으로 향하는 구멍 속으로 내려갔다.
….
아직 2층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구멍이 열렸음에도 들어가지 못한 채 멍하니 서 있었다.
“안 내려가냐?”
“…가도 의미가 없잖아.”
“그러니까. 시험으로 나온 불사조를 납치하는 인간들이 있는데, 우리가 뭐 하나라도 챙기겠냐고!”
“난 포기할래.”
“나도. 그냥 여기에 있다가 집에 갈란다….”
그날 용암의 방에서 3층으로 내려간 사람은 광풍대가 유일했다.
* * *
이젠 떨어지는 감각이 조금 익숙해졌다. 몸에 힘이 쭉 빠졌다가 돌아오는 것을 느끼며 눈을 뜨자, 땅 전체에 깔린 갈색 모래가 보였다.
라온이 시선을 들어 올리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이곳이 미로인가?’
눈앞에 거대한 벽이 세워져 있어서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벽의 색도 전부 회색이라, 위치를 파악하는 게 쉽지 않아 보였다.
‘어디….’
태화보를 운용하여 가볍게 땅을 박찼다.
터어어엉!
벽을 넘어가려 했지만, 보이지 않는 천장이 있는 것처럼 벽 너머로 갈 수도, 볼 수도 없었다.
아예 나아갈 수 없게 막아둔 것 같았다.
“해봤는데, 벽은 못 넘는 거 같다.”
리메르도 벽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강기로도 깨지지 않습니다.”
마르타가 벽을 내리쳤던 검을 회수하며 혀를 찼다.
“얼지도 않아.”
루난도 실망한 듯 고개를 떨궜다.
“여길 제대로 가려면 얼마나 걸리지?”
라온이 카이얀을 살짝 흔들었다.
[제, 제가 안내해도 반나절은 넘게 걸릴 겁니다.]
“반나절이라….”
이곳에 들어온 후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먼저 간 이들은 아마 이 미로를 통과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시간이 많이 끌렸기에 최대한 빨리 내려가야 했다.
“빨리 갈 방법은 없나?”
[예전에 그 인간이 벽에 손을 짚고 무슨 짓을 하면 미로의 끝으로 갈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근데 그게 뭔지는 저도 잘 몰라서….]
“무슨 짓이라….”
라온이 입맛을 다시며 벽을 살폈다. 겉보기에는 길을 막고만 있는 평범한 벽이었다.
다만 카이얀의 말을 들으니,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왔다.
화아아아아!
라온이 불의 고리와 만화공을 동시에 운용했다.
지그하르트의 불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화염을 손에 일으킨 채 선조가 보여주었던 결계를 벽에 그렸다.
우우우우웅!
뚝을 무너뜨린 물길처럼 나아간 불꽃이 미로의 벽 위에 선명한 결계를 그렸다.
완성된 결계가 황금빛으로 번쩍이더니, 소용돌이치는 듯한 통로를 열었다.
다음 층으로 내려갈 수 있는 구멍과 비슷한 형태였지만, 색이 달랐다.
“되는군.”
[뺘, 뺘악!]
키야인이 당황한 듯 날개를 파닥이다가 주저앉았다.
[그, 그 문이다! 이걸 어떻게!]
녀석의 반응을 보니, 미로의 끝으로 가는 길이 맞는 것 같았다.
“뭐, 뭐야 이건!”
“대주님! 무슨 짓을 한 거예요!”
“왜 오자마자 문이….”
광풍대도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란 듯 눈을 부릅떴다.
“여, 여기 들어가도 되는 거예요?”
도리안은 겁을 먹은 듯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우리에겐 자격이 있어.”
“그게 무슨 말….”
“나중에 설명해줄게. 일단 가자.”
라온이 옅게 웃고서 먼저 불꽃의 통로로 들어갔다.
다른 통로처럼 떨어지는 게 아니라, 걸어서 갈 수 있는 외길이었다. 신기하게도 이 무덤에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따스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알현실의 카펫처럼 붉은 선을 따라서 걸어가자, 입구와 같은 형태의 불꽃의 통로가 보였다.
천천히 그곳을 나오자, 눈앞에 거대한 벽이 솟구쳐 있었고, 그 중심에는 네 번째 층으로 갈 수 있는 구멍이 보였다.
“간단하네.”
라온이 옅게 웃으며 네 번째 층으로 향하는 통로를 보고 있을 때였다.
좌측의 벽 뒤에서 새하얀 손이 튀어나왔다. 오싹함이 느껴지는 검은 서리와 함께 이곳과 어울리지 않는 어린 외모의 여성이 미끄러지듯 다가왔다.
설괴후.
흑탑의 층주이자, 그랜드 마스터에 오른 마인이 미로의 끝에 도달해 있었다.
“네가 왜 여기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잘 되었구나.”
설괴후가 아릿한 미소를 그리며 투명한 손가락을 세웠다.
“밖에서 끝을 못 내서 아쉬웠거든.”
“나도 아쉬웠는데.”
“뭐?”
“수하들만 수련시키느라, 내 몫이 조금 부족했거든.”
라온이 소리 없이 제천검을 뽑았다. 그의 붉은 눈동자 속에서 황금빛 광망이 솟구쳤다.
“무한 리필은 아니더라도 애피타이저 정도는 되어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