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30화
녹아내리는 황금색 불꽃의 잔해 위로 지그하르트 초대 가주의 등이 떠오른다.
깊은 우물을 내려다보는 것처럼 주변은 흐릿했지만, 선조의 모습만큼은 선을 덧댄 것처럼 선명했다.
자주 봐서 이제는 그의 등이 익숙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선조는 누구와도 싸우지 않았다. 아예 검을 들지도 않은 채 동료로 보이는 사람들과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평소와 다르군.
초대 가주의 기억을 볼 때 그는 항상 누군가와 싸우고 있었고, 표정은 심각하게 굳어져 있었다.
하지만 지금 선조는 작은 미소를 걸친 채 나를 이 세계로 불러왔던 느티나무 아래의 구멍을 살피고 있었다. 이전에 본 기억들과는 많이 달랐다.
숲도 굉장히 밝아.
선조가 있을 때의 첫 번째 층은 지금과 다른 모습이었다.
숲이라는 지형 자체는 같았지만, 대낮처럼 훤했고, 몬스터도 보이지 않았다.
선조는 직사각형의 구멍을 만든 후 몸을 일으켰다. 그가 숲을 걸어 다니며 지시를 내리자, 마법사와 주술사들이 황색 대지에 기형학적인 마법진이나, 주술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로브를 입은 마법사 중에는 예전에 해령화를 얻은 동굴의 기억에서 보았던 작은 체구의 여성 마법사도 있었다.
선조는 모두에게 지시를 내린 후 숲의 중앙에 서서 검으로 바닥에 뭔지 모를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검으로 진법을 새기는 건가?
지그하르트 검사에게는 검계현신이 있으니, 마법사나 주술사처럼 마나를 이용하여 검진을 새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조를 포함한 사람들의 얼굴에는 은은한 미소가 피어나 있었다. 꼭 무언가를 기대하는 듯한 웃음이었다.
우우우웅!
조용히 선조의 검진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심장이 크게 약동했다.
여덟 개의 불의 고리가 자연스럽게 공명하며 선조가 그렸던 진법을 뇌리에 새기기 시작했다.
선조의 검에서 이어지는 불꽃의 검진은 대지만이 아니라, 내 심상의 세계 속에도 뜨거운 열기를 전했다.
선조가 결계를 완성하고, 바닥에서 검을 뗀 순간 눈앞으로 다시 한번 황금빛 불꽃이 타올랐다.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는 뜻이었다.
불길의 폭풍이 시야를 먹어 치우는 것을 보며 미간을 구겼다.
마지막도 다르군.
기억에서 보았던 선조는 항상 마지막에 나를 바라보았지만, 지금 그는 등을 돌린 채 동료들에게 돌아가고 있었다.
처음 예상대로 이 기억이 이전과는 다르다는 뜻이었다.
머릿속에서 선조가 그렸던 검진을 떠올리며 눈꺼풀을 내리감았다.
* * *
라온이 차분히 눈을 떴다. 새하얀 구멍 아래에서는 더 이상 불길이 올라오지 않았다.
-또 어디에 갔다 온 것이냐!
라스가 뭘 하고 왔냐는 듯 눈매를 찌푸렸다.
-제 몸을 놔두고 대체 어딜 싸돌아다니는 건지 모르겠느니라!
‘선조님 좀 만나고 왔어.’
-선조? 그놈의 선조는 관광객이냐? 왜 가는 곳마다 찾는 것이냐!
‘방랑벽이라도 있나 봐.’
가볍게 손을 젓고서 하얀 구멍 안으로 시선을 던졌다.
‘불꽃의 기억대로라면 이곳은 초대 가주와 그의 동료들이 만든 곳이었군.’
도검존이 이곳을 무덤으로 삼았는지는 모르지만, 이 땅을 최초로 만든 건 지그하르트의 초대 가주였다.
리스른이 말했던 도검존이 존경했다는 무인은 지그하르트의 선조였던 것 같다.
‘다만….’
둘의 시간이 겹치지는 않았을 텐데.
지그하르트의 초대 가주가 언제까지 살았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도검존은 한참 후에 태어난 인물이다. 어떻게 연이 닿았는지 모르겠다.
“안 들어가고 뭐 하십니까?”
버렌이 뒤로 다가와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돌아가야겠어.”
“에? 여기까지 와서요?”
크레인이 무슨 말이냐는 듯 눈을 부릅떴다.
“확인해야 할 게 있어서.”
라온이 흙이 묻은 손을 털고서 선조의 기억을 따라 그가 결계를 새겼던 장소로 향했다.
숲은 여전히 어두웠지만, 기억이 너무 생생하여 그 장소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결계는 보이지 않는군.’
횃불을 비쳐 보아도 선조가 검으로 그렸던 결계는 씻은 듯 사라졌다. 하긴 그게 남아 있었다면 그것도 웃기는 일이었다.
라온이 바닥에 손을 얹은 채 불의 고리와 만화공을 운용했다.
순수한 불길을 꺼내 들어 선조가 새겼던 검진의 형태를 그대로 따라서 그렸다.
우우우우웅!
심장이 울린다. 선조의 결계를 보았을 때처럼 가슴이 두방망이질 쳤다. 선조의 검진은 이 땅 안쪽에서 여전히 살아 있었다.
‘다만….’
변했어.
선조의 검진은 처음 그가 새길 때와는 흐름이 달라져 있었다.
많은 시간이 지났기에 결계가 사라지거나, 마나의 흐름이 꼬일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그것과 달랐다.
아예 다른 기운이 선조의 결계 내부에 스며들어 있었다.
‘설마 도검존이….’
아니야.
이건 도검존의 기운일 수가 없어.
오직 그림자로 살아온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악의 넘치는 기운. 내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음습한 마나였다.
라온이 검게 물든 땅에서 손을 떼며 입술을 씹었다.
‘또 네놈이냐?’
데루스 로베르트.
* * *
회색 안개로 뒤덮인 공간.
금박이 입혀진 찻잔을 쥐고 있던 중년 남성이 왼손으로 책을 들어 올렸다.
그가 조심스러운 손길로 책을 펼쳤을 때 검은 야행복을 입은 무인이 그림자에서 솟구쳤다.
“델프로스 님.”
야행복의 무인이 다급하게 고개를 숙였다.
“문제가 생겼습니다.”
“차분히.”
델프로스라 불린 남성이 가볍게 손을 저었다.
“차분히 말씀하세요. 사비대주.”
“아, 네.”
사비대주가 고개를 끄덕이고서 자세를 바르게 했다.
“문제가 무엇입니까.”
“주요 인물 대부분이 계획대로 2층에 도착했습니다. 다만 한곳의 움직임이 조금 이상합니다.”
“한곳?”
델프로스가 책을 살짝 내렸다. 그는 활자 위로 보이는 시선으로 사비대주를 굽어보았다.
“지, 지그하르트의 광풍대입니다.”
사비대주는 델프로스의 눈을 마주하지 못하고 마른침을 삼켰다.
“공검대도 2층으로 내려갔는데, 놈들은 계속 1층에 머물러 있습니다.”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가 입술을 깨물며 말을 이었다.
“놈들 중에 부상자는 하나도 없습니다.”
“라온 지그하르트만이 아니라, 전부?”
“예….”
“그게 말이 됩니까?”
델프로스가 책을 내리고 시선을 들었다.
무덤의 첫 번째 층은 체력과 오러를 소모시키고 작은 부상을 만들기 위해서 조형한 곳이다.
수를 헤아리기 어려운 몬스터와 덫이 박혀 있는데, 부상자가 하나도 없다는 게 믿기질 않았다.
“저, 정말입니다.”
사비대주가 떨리는 눈동자로 고개를 저었다.
“제대로 말하자면 부상을 입기는 했지만, 바로 치료해서 아무런 의미도 없었습니다.”
“독 중에는 벨라의 꽃이나, 렘판의 독이 있었을 텐데 어떻게….”
“놈들에겐 그 독의 해독제가 있었습니다.”
“설마 펠렌과 로세렌의 잎이 있었다는 겁니까?”
“그것도 꽤 수량이 많아서 다른 부상자에게 나눠주기도 하고….”
“개소리를!”
“저, 저도 믿고 싶지 않지만 사실입니다.”
그는 입술을 씹은 채 허리를 굽혔다.
“후….”
델프로스가 손을 뻗어 찻잔을 쥐었다. 찻잔이 바스러질 것처럼 거칠게 진동했다.
“그래도 어둠 속에서 몬스터와 싸우고, 덫을 피하느라 체력과 오러의 소모는 심할 겁니다. 정신적인 피로도 깊어졌을 테니, 2층에서 조금 더 건드린다면….”
“그게….”
사비대주가 쩝 입맛을 다시며 시선을 들었다.
“그놈들은 거의 지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건 또 무슨….”
“광풍대는 다가오는 몬스터를 상대하는 것을 넘어서 직접 몬스터를 찾아가서 싸웠습니다. 싸우면서 웃고 있던 놈들도 이, 있어서….”
그는 전투에 미친 광견을 보는 듯했다며 헛바람을 흘렸다.
“놈들보다 강한 세력은 많지만, 그런 광기는 처음 보았습니다….”
“찾아가서 싸웠다고? 진짜 미친개인가?”
델프로스는 머리를 쓸어 올리며 미간을 구겼다.
어둠, 강화된 몬스터, 덫과 함정 그리고 독까지. 모두 인간의 심리와 체력에 피로를 전해주는 것들이다.
대륙을 떵떵 울리는 초고수들도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는데, 즐거워하면서 싸웠다고 하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거기다 도검존의 유산을 노리고 있을 텐데, 몬스터를 찾아서 싸웠다는 것도 이해가 되질 않았다. 정말 광견병이라도 걸렸나 싶었다.
“어, 어떻게 할까요?”
사비대주는 본인도 감당이 안 된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두 번째 층에서 ‘붉은 곳’으로 보내세요.”
“붉은 곳? 라온 지그하르트는 불꽃에 강한 저항력을 지니고 있을 텐데….”
“괜찮습니다.”
델프로스가 다시 여유롭게 찻잔을 들며 비릿한 미소를 그렸다.
“그놈의 불꽃은 아무리 저항력이 높아도 소용없으니까요.”
* * *
글렌은 라온과 대련을 했었던 북망산 초입의 공터에 서서 잔잔히 흘러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가주님.”
채드가 글렌의 뒤편으로 다가가 허리를 굽혔다.
“광풍대의 움직임이 잡혔습니다.”
“흠, 아이들은 무얼 하고 있지?”
글렌이 차분하게 등을 돌렸다. 최대한 담담한 표정을 연기하려는 듯 보였지만, 그의 눈동자는 잘게 흔들렸다.
“무덤을 찾는 무인들에게 습격당하는 마을을 구한 후 도검존의 무덤으로 향했다고 합니다.”
채드가 글렌의 눈을 보며 턱을 살짝 내렸다.
“마을을 구했다?”
“예. 바로 도검존의 무덤 지도를 지닌 귀마검주에게 갈 줄 알았지만, 먼저 사람을 살리려고 한 것 같습니다. 지그하르트 영역이 아닌 마을에도 도움을 주었다더군요.”
그는 라온이 기꺼운 듯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덕분에 지그하르트 주변 마을에서 광풍대의 이름이 칭송받고 있다고 합니다.”
“제 예측이 틀렸군요. 라온이 그 임무를 받았을 때 당연히 도검존의 무덤을 노리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셰릴이 채드를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라온 도련님이 도검존의 무덤을 노리고 있는 건 맞을 겁니다. 다만….”
로엔이 잔잔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분이 맡으신 임무는 지그하르트 영역의 정찰. 임무대로 사람을 먼저 구하셨을 뿐일 겁니다.”
그는 라온의 행동이 대견하다는 듯 허허 웃었다.
“도검존의 무덤이면 나도 조금 욕심이 나는데, 거기서 선후를 가리다니, 참 신기한 녀석이네요.”
셰릴도 감탄했다는 듯 입매를 말아 올렸다.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면서도 눈동자를 굴려서 글렌을 살폈다.
“크허험!”
글렌이 헛기침을 내뱉으며 상체를 반쯤 돌렸다. 그는 입꼬리를 고무줄처럼 늘리며 고개를 저었다.
“임무를 맡았으니, 그 정도는 해줘야지. 별것도 아니잖느냐.”
별것도 아니라는 말과 달리 글렌의 얼굴은 흥분과 만족으로 인해 어느새 뻘겋게 변해 있었다.
“후후.”
셰릴과 로엔은 그런 글렌의 반응이 재밌는 듯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저, 그런데….”
채드가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도검존의 무덤에 들어간 인원들의 무력 수위가 정상 범주를 한참 넘어섰습니다. 라온 도련님이 무덤에 들어간 이후에도 육황오마만이 아니라, 전대 고수들도 무더기로 진입했는데, 괜찮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는 라온과 광풍대만이 아니라, 공검대도 걱정된다는 듯 미간을 구겼다.
“확실히 제가 이름을 들어본 놈들도 몇 있더군요.”
셰릴이 채드의 말에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라도 잠시 다녀올까요?”
“그럴 필요 없다.”
글렌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위험할 것이다. 함정이든, 도검존의 무덤이든 위험하지 않은 게 더 이상하지. 다만 라온은 그런 위험이 있다는 걸 알고 갔다.”
지금까지 라온에게 위험한 일이 많았지만, 대부분은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었다.
이번에는 위험한 곳이라는 것을 알고 갔으니, 스스로 위기를 이겨내는 게 옳았다.
“항상 도와줄 수는 없는 일. 이번에는 지켜보도록 하지.”
글렌은 누구도 보낼 생각이 없다는 듯 팔짱을 꼈다. 다만 그의 어깨는 걱정으로 인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로엔과 셰릴은 그 모습을 보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반면 채드는 소매 속에서 주먹을 꼭 움켜쥐고 있었다.
‘기회다.’
미래의 주군에게 점수를 딸 기회야!
* * *
라온이 불의 고리가 회전하는 왼쪽 가슴에 손을 얹었다. 불꽃으로 박동하는 심장 속에서 반가움과 분노가 동시에 타올랐다.
‘역시 함정이었군.’
이제 확실해졌다. 이곳은 도검존의 무덤이 아니다.
처음엔 지그하르트의 선조에 의해서 만들어진 공간이었겠지만, 데루스 로베르트에 의해서 목적을 알 수 없는 공간으로 바뀌었다.
‘목적이라….’
데루스가 노리는 게 뭔지 모르겠군.
워낙에 정신이 나간 놈이었기에 몇 가지 예측은 할 수 있었지만 무엇 하나 확신을 가질 수 없었다.
‘다만 뭐가 어떻게 되었든….’
네 생각대로는 되지 않을 거야.
아무것도 몰랐다면 모를까. 이 무덤 자체가 데루스의 계획이라면 절대 그냥 놔둘 수 없었다.
이곳에 도검존의 유물이 있든 없든 상관없이 무슨 짓을 하더라도 놈의 계획을 망쳐버릴 것이다.
“돌아가자.”
라온이 뒤에 선 광풍대에게 손짓했다.
“뭔가 바뀐 거 같네.”
리메르가 옆으로 다가오며 옅은 미소를 보였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보다 흥분한 얼굴인데?”
“네. 조금 흥이 나네요. 그런데….”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고서 리메르를 바라보았다.
“요즘 왜 이렇게 조용하신 겁니까?”
“조용하다니?”
“아예 끼어들지 않고 뒤에서 지켜만 보고 계시잖아요.”
“네가 대주니까.”
리메르가 어깨를 으쓱였다.
“부대주로서 대주의 명령에 따를 뿐이야.”
그는 해야 할 일을 할 뿐이라며 웃었다.
“웃기시네!”
마르타가 고개를 저었다.
“귀찮아서 뒤에 박혀 있는 것뿐이잖아요!”
“아, 들켰나?”
리메르가 헤헤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라온은 그런 리메르를 보며 눈매를 좁혔다.
‘평소와 달라.’
리메르는 장난을 치는 눈빛이 아니라, 진중한 시선을 드러냈다.
마르타의 말과 달리 귀찮아서가 아니라, 대주로서 나를 신뢰하는 것 같았다.
‘조금 부담되네.’
광풍대만이 아니라, 리메르도 일방적인 신뢰를 보여주자, 복수심으로 타오르던 심장에 따스한 감각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의 신뢰가 부담이 아니라, 믿음으로 느껴졌다.
‘그래. 지금은 흥분할 때가 아니야.’
라온은 마음을 안정시킨 후 뒤를 돌았다. 느티나무 아래에서 번쩍이는 2층 입구를 가리키며 고개를 저었다.
“이 밑에 뭐가 있는지는 모른다.”
그 말을 하면서 소리가 흘러가지 않도록 두꺼운 기막을 쳤다.
“지금부터 이곳을 도검존의 무덤이 아니라, 적진으로 생각해라. 다가오는 모든 것을 경계하도록. 설사 같은 광풍대라고 해도.”
리메르 덕분에 모두를 제대로 이끌 용기가 났다. 머리에서 생각했던 말을 그대로 던졌다.
“그게 무슨….”
버렌이 이해를 할 수 없다는 듯 눈매를 찌푸렸다.
“알겠습니다.”
“넹.”
마르타와 루난은 질문을 하지 않았다. 무슨 말이라고 해도 따르겠다는 듯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설명하기에는 복잡해. 하나만 말해주자면 이곳은 무덤이 아니라, 외부에 의해서 오염된 장소다. 적의로 가득한 던전이라고 생각하는 게 좋을 거야.”
라온은 가볍게 설명하고서 다시 뒤를 돌았다.
“내 말 명심하고 따라오도록.”
짧게 호흡을 고르고서 하얀 구멍 속으로 몸을 던졌다.
우우우웅!
처음 무덤에 들어올 때처럼 몸에 무게가 사라지고, 끝없는 공간 속으로 떨어져 내린다.
처음과 다른 건 주변이 어둡지 않고 밝다는 것뿐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발이 땅에 닿는 감각이 느껴졌다. 첫 번째 층과 달리 딱딱했다. 큰 바위나 쇠를 밟은 느낌이었다.
눈을 뜬 후 처음으로 본 광경은 부글거리면서 솟구치는 용암의 물결이었다.
불씨가 차오른 핏빛 바람과 지독한 열기로 솟구친 아지랑이가 허공을 가득 채웠다.
용암지대. 그것도 숨이 막힐 정도의 열기가 타오르는 폭염의 땅이었다.
“뭐, 뭐야!”
버렌이 주변을 둘러보며 미간을 구겼다.
“어두운 숲을 지나왔더니, 이번에는 용암이야?”
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하아, 그래도 밝은 건 좀 낫네.”
마르타는 낫다는 말과 달리 이마에서 흐르는 땀을 닦으며 이를 갈았다.
“에엑….”
루난이 급격히 피로해진 얼굴로 혀를 쭉 내밀었다.
“더운 거 싫어….”
그녀는 냉기로 얼음을 만들어서 뺨에 비볐는데, 동그란 얼음은 금세 녹아서 미지근한 물이 되어 버렸다.
“요, 용암?”
“대체 왜 이 지하에 화산이 있는 거지?”
“뭐가 뭔지 모르겠군.”
“벌써 힘드네. 대체 도검존은 뭐 하는 놈이야!”
광풍대보다 먼저 들어간 무인도, 광풍대의 뒤를 따라온 무인들도 용암지대를 보고 놀란 듯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일단 지형을 파악하고 움직인다. 아래로 내려가는 길을 찾기보다 이곳에서 안전하게 움직일 수 있는 루트를….”
라온이 광풍대에게 목적을 말하려고 할 때였다.
쿠구구구구구!
호수처럼 넓은 용암 구덩이가 지진이 난 듯 출렁이다가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퍼어어어어엉!
해일처럼 솟구친 용암 위로 세계수의 한쪽 면을 뜯어낸 듯한 장대한 날개가 솟구친다.
끝이 보이지 않는 날개의 중심에서 푸른빛 안광이 번쩍였고, 불꽃에 타오르는 황금색 부리가 가슴을 옥죄이는 듯한 웅대한 포효를 터트렸다.
불사조. 불길 속에서 영구히 살아간다는 영물이자, 신물이 용암의 파도를 걷어내고 그 거대한 위용을 드러냈다.
“아아….”
용암조차 녹여버리는 불사조의 화염에 이곳에 있는 모두의 눈에 경악이 차올랐다.
“부, 불사조다!”
“그것도 보통 놈이 아니야….”
“저건 드래곤 수준이잖아!”
“도, 도망쳐!”
이곳에 먼저 당도한 무인들도, 뒤에 떨어진 무인들도 기겁하며 뒤로 물러섰다.
“어….”
“저게 불사조라고? 레드 드래곤이 아니라?”
“미, 미쳤네….”
“저걸 어떻게 잡아….”
광풍단조차 당황하여 퍼레진 입술을 떨었다.
다만 오직 한 사람.
라온은 분노한 듯 핏빛 불꽃을 토해내는 불사조를 보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렇게 찾아다녔는데, 이곳에 있었네.’
내 뜨거운 먹잇감이.
입맛을 다시고 있을 때 라스가 폴짝 뛰었다.
-불사조 구이! 네놈도 드디어 맛을 알았구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