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26화
라온은 총기가 느껴지는 데닝로즈의 눈동자를 마주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그 미친놈들이 오지 않는 게 더 이상한 일이지.’
성검련은 검과 검술을 성스럽게 여기며 상승 검술을 얻기 위해서는 부모 형제도 죽일 수 있는 정신 나간 놈들이다.
도검존의 유산을 얻기 위해서는 육황의 안방에도 침입할 놈들이기에 오지 않았다면 그게 더 이상했을 것이다.
“성검련에서 누가 온 거죠?”
“귀마검주 크로이에요.”
데닝로즈가 서류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렸다. 맨 위에 크로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고, 그 아래에는 그의 행적에 대해 적혀 있었다.
“성검련이 모습을 감추기 전에 마스터 최상급까지 올라갔던 인물이죠.”
“크로이….”
귀마검주 크로이에 대해서는 전생에서도 들어보았다. 보법이 뛰어나서 그의 진짜 무기는 검이 아니라, 발이라는 소리가 있을 정도였다.
“그럼 지금은 그랜드 마스터에 올랐을 가능성도 있겠군요.”
“리스른 님을 기억하시나요?”
데닝로즈는 귀마검주에 대해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리스른의 이름을 꺼냈다.
“당연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리스른은 주디엘을 구하러 갈 때 스란 부족까지 안내해주었던 암시장 소속 요원이었다. 암살자 출신이었고, 내 지시를 잘 따라주었기에 확실하게 기억에 박혀 있었다.
“그분도 귀마검주의 보법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고 하더군요. 무덤 지도의 전 주인인 백사우도 보법과 은신술에는 일가견이 있는데, 단번에 뒤를 잡혔다고 했으니, 검술은 몰라도 보법만큼은 그랜드 마스터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거예요.”
데닝로즈는 조심해야 할 인물이라며 손가락으로 서류를 두드렸다. 그녀의 무거운 마음이 둔탁한 소리가 되어 울리는 것 같았다.
“그럼 귀마검주는 이미 도검존의 무덤에 들어갔겠군요.”
무령귀객, 백사우와 달리 귀마검주는 뛰어난 무력까지 있으니, 단번에 도검존의 무덤을 찾아서 들어갔을 것 같았다.
“아뇨.”
데닝로즈가 잔잔한 눈빛으로 고개를 저었다.
“귀마검주도 이동만 하고 있어요. 아직 지도를 완벽하게 해석하지는 못한 것 같아요.”
“해석?”
“사실 해석이라기보다는 수백 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면서 변해버린 지형을 찾지 못하는 거죠.”
“아….”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갔다. 도검존이 죽은 후 수백 년이 지났으니, 지도를 만들었을 때와는 많은 게 바뀌어 무덤의 위치를 찾지 못하는 것 같았다.
“무령귀객과 백사우 모두 지그하르트와 발카르 왕국이 맞닿는 중립 지역에서 움직이면서 점점 서쪽으로 향했어요.”
데닝로즈가 어조를 높이면서 지도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지금 귀마검주 크로이는 이곳에 있죠.”
그녀의 손가락이 지그하르트와 발카르의 거의 끝부분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조금만 더 나아가니 흑탑이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저희 암시장의 예측대로라면 무덤은 이 주변에 있을 거예요.”
데닝로즈가 손가락을 굴려서 지그하르트와 발카르 왕국, 흑탑으로 삼각형을 그렸다. 세 세력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중립지였다.
“현재 이 주변은 육황오마만이 아니라, 중립 세력과 은거 고수들까지 나타나서 아비규환이에요. 도검존의 무학에 눈이 먼 무인들이 일반인들을 학살까지 하고 있죠.”
데닝로즈는 상황이 좋지 않다며 콧잔등을 찌푸렸다.
라온은 데닝로즈가 짚어준 지역을 확실하게 되새긴 후 아공간 주머니에서 미리 챙겨두었던 금화 주머니를 꺼냈다.
묵직한 금화 주머니가 올라가자 테이블이 흔들렸다.
“이건….”
“이 일에 관한 모든 정보를 실시간으로 사겠습니다.”
“추적은 가능하지만, 정말 가실 건가요? 제가 듣기로는 정찰 임무를 맡으셨다고 들었는데….”
“정찰 임무를 맡았으니까 가야죠.”
라온은 조금 전 데닝로즈가 손가락으로 짚었던 지도를 매만졌다.
“보물에 눈이 먼 돼지들을 그냥 놔둘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도검존의 무덤도 좋고, 귀마검주를 잡는 것도 좋지만 가장 우선시 되어야 할 건 가문의 영역을 지키는 일이다. 지그하르트의 안전을 위협하는 놈들을 놔둘 수는 없었다.
“쉽지 않을 거예요. 육황오마는 당연히 위험하고. 시대를 등진 전대 고수에, 이름을 감춘 은거 기인까지 나타나고 있으니까요.”
“괜찮습니다.”
라온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 정도도 이겨내지 못한다면 어차피 내년에 죽을 테니까요.”
“생사결….”
데닝로즈는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은 듯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말려봐야 듣지 않으시겠군요.”
그녀가 한숨을 내쉬며 뒷목에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그럼 암시장의 이름을 걸고, 최선을 다해서 보조해드려야겠네요. 가장 먼저 귀마검주의 위치를….”
“아뇨. 그건 다음입니다.”
라온이 사선으로 그은 손가락으로 지도를 짚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 * *
라온은 데닝로즈를 만난 후 5연무장으로 향했다.
연무장에서 대기하던 광풍대 검사들이 단상 앞으로 모였다.
아직 휴가가 끝나지 않았음에도 검사들은 수련복을 입은 채 이마에서 땀을 흘리고 있었다.
모두 딱 하루만 휴식을 취한 후 자발적으로 수련을 시작한 것이다.
저 녀석들도 이제 자신과 다를 바 없는 수련광이 되어 있었다.
“대주님.”
마르타가 정중한 자세로 고개를 숙였다.
“1조 전부 왔습니다.”
그녀는 부대주였을 때와 다르게 확실한 존칭과 예를 보였다. 가장 따르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예상외였다.
“2조도 다 왔어요.”
루난이 맹한 눈으로 손을 올렸다. 존칭이지만, 존칭 같지 않았다.
“3조도 전부 왔습니다.”
버렌이 마지막으로 나오며 고개를 숙였다.
“수고했다.”
라온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주고서 광풍대 전원을 살폈다. 연무장에서 수련을 하고 있었기 때문인지 휴가 중에 소집을 지시했음에도 불만을 가지는 사람은 없어 보였다.
아니, 딱 한 명 있었다.
“주, 죽겠네. 세상이 두 개로 보여.”
단상에 기대고 앉아 있던 리메르가 손을 저었다.
“힘들어 죽겠는데 왜 부르는 거야….”
리메르는 이틀이 지났는데도 숙취가 다 가시지 않았는지 머리를 부여잡은 채 끙끙 앓았다.
라온은 리메르를 무시하고 광풍대를 굽어보며 입술을 뗐다.
“모두 알고 있겠지만, 원탁회의에서 임무를 배정받았다.”
“들었어요! 정찰 임무잖아요!”
도리안이 손을 들어 올렸다.
“정찰이라니, 듣기만 해도 마음이 편하네요. 아무 일도 없을 것 같아.”
그는 안전한 임무를 받아줘서 고맙다며 웃었다.
“지루하겠네.”
마르타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혀를 찼다.
“누가 지그하르트 영역에 쳐들어오겠냐고.”
“그건 모르는 일이지.”
버렌이 마르타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지그하르트라는 이름이 무적은 아니다. 너도 충분히 겪었을 텐데?”
“흥.”
“가문의 영역을 수호하고, 탐색하는 고귀한 임무다. 모두 정신 차려.”
그는 정돈된 음성으로 광풍대의 사기를 다잡았다.
‘카룬 때문인가.’
카룬이 사고를 쳤기 때문인지 버렌의 성격이 조금 더 딱딱해진 것 같았다. 평소보다 어깨가 무거워 보였다.
“걸으면서 잘 수 있어.”
루난은 수면 시간이 두 배가 되겠다며 눈을 끔벅였다. 버렌의 말이 끝나자마자 저런 소리를 하다니, 얘도 일관성 하나는 대단했다.
짜악.
라온이 손뼉을 쳐서 광풍대의 시선을 모았다.
“3조장의 말이 맞다.”
버렌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들은 사람도 있겠지만, 현재 대륙에는 도검존의 무덤이라는 폭풍이 일어나고 있다.
“저도 들었습니다. 벌써 난리가 났다고 하던데요?”
크레인이 손을 번쩍 들었다.
“그렇지만 그 무덤은 우리랑 상관없잖아.”
“맞아. 우리는 그냥 정찰만 하면 되는데.”
그 외에 다른 사람도 무덤에 대해 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상관있다. 도검존의 무덤 위치가 지그하르트의 영역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다는 게 정설이니까.”
“그, 그게 정말입니까?”
버렌이 그런 사실은 몰랐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다른 검사들도 헛바람을 흘리며 입을 벌렸다.
“그래. 우리의 임무는 지그하르트의 영역을 순환하며 위험이 될 요소를 파악하고 제거하는 것. 즉, 이번 일과 큰 관련이 있다.”
“대주.”
마르타가 입매를 말아 올리며 단상 앞으로 다가왔다.
“처음부터 그거 노리고 정찰 임무 받은 거죠?”
라온은 대답없이 옅게 웃었다.
“역시 우리 대주는 미쳤다니까.”
마르타는 미쳤다는 말과 다르게 시원한 웃음을 그렸다. 단순한 정찰보다 훨씬 마음에 든다는 표정이었다.
“원탁 회의 자체가 처음이면서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한 건지….”
버렌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진짜 난 사람은 난 사람이네.”
“저 얍실함이 이럴 때는 좋다니까.”
“도검존의 무덤이라….”
다른 광풍대 검사들도 흥미가 있는 듯 연한 미소를 그리며 무덤에 관하여 떠들었다.
“…….”
리메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뒤에서 조용히 라온과 광풍대를 지켜보았다. 그의 입가에 잔잔한 웃음이 떠올랐다.
“잡담은 나중에 하고.”
라온이 다시 광풍대의 시선을 모았다.
“도검존의 무덤 자체도 위험하겠지만, 주변으로 수많은 괴물들이 모여들고 있기에 힘든 여정이 될 것이다. 아직 휴가가 끝나지도 않았으니….”
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이번 임무는 지원자를 받겠다. 가고 싶지 않은 사람은 가문에서 휴식을 취해도 좋아.”
진심이었다. 아직 휴가도 끝나지 않았기에 모두를 데리고 가고 싶지는 않았다.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마르타가 미간을 구기며 앞으로 튀어나왔다.
“댁한테 3주 동안 괴롭힘당했던 걸 풀 때가 왔는데, 그걸 왜 마다해!”
그녀는 당장 적을 쳐부수고 싶다며 뿌드득 소리가 나도록 주먹을 말아쥐었다.
“맞는 말이야.”
버렌이 어금니를 지그시 씹었다.
“3주 동안 지옥에서 수련했는데, 그 효과는 누려야지!”
그 역시 쌓인 스트레스를 풀어야겠다며 검병을 다잡았다.
“모두 한숨도 못 자게 할 거야.”
루난은 다른 놈들도 못 자게 하겠다고 외치며 눈을 부릅떴다. 그래봐야 맹한 눈이라 딱히 무섭지는 않았다.
“저도 갑니다!”
“놓고 가면 기어서라도 쫓아갈 겁니다!”
“모조리 죽이겠어!”
“아니, 목을 물어뜯어 주지.”
조장들만이 아니라, 광풍대 전원이 사나운 기세와 함께 이를 갈았다.
그들의 눈동자는 사람이 아니라, 개. 그것도 미쳐버린 광견을 보는 것처럼 누렇게 번뜩였다.
“으으윽….”
도리안은 마지막까지 손을 안 들고 눈치를 보다가 어쩔 수 없이 거수했다.
‘기세는 좋다만….’
라온은 반쯤 돌아간 광풍대의 눈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다들 미친 것 같지?’
-이게 양심에 털이 났나. 네놈이 미치게 만들었잖느냐!
라스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헛바람을 흘렸다. 녀석은 점점 더 진하게 타오르는 광풍대의 광기를 보며 미간을 구겼다.
-서커스 사육사도 밥은 주고, 잠은 재워 미친 자식아!
‘…….’
* * *
지그하르트와 중립 지역에 걸쳐 있는 루센 마을.
마을 사람 전체가 과수원을 공동 경영하면서 살아가는 작은 마을에 유례없이 많은 무인이 들어섰다.
“이곳이다. 모조리 뒤져라.”
흑마를 타고 있는 중년인이 매서운 눈빛을 드러내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백란 사막에서 죽음의 바람이라 불리는 흑적단의 단주 불란트였다.
“예!”
“모든 문을 개방해!”
“개미 새끼 한 마리 놓치지 말고 찾아!”
검은 두건을 쓴 마적들이 말을 탄 채로 마을을 부수고, 사과나무를 꺾었다.
지닌 무기는 달랐지만, 마적들의 눈동자에는 모두 욕망이라는 불길이 차올라 있었다.
콰드득!
루센 마을 사람들이 소중하게 키워낸 사과가 말발굽에 으깨고, 터져나갔다. 사과나무가 끝없이 잘려 나가며 과수원이 휑하게 보일 지경까지 되었다.
“대, 대체 왜 이러십니까!”
루센 마을의 촌장이 흑마를 타고 있는 불란트에게 다가갔다.
“제발 멈춰주십시오!”
“저 나무들이 죽으면 저희도 죽습니다!”
“돈이라면 드리겠습니다!”
마을 사람들도 촌장의 뒤를 따라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죽고 싶나.”
불란트의 이마를 가로지르는 검상이 기괴하게 꿈틀거렸다. 물음이 아니다. 한마디만 더 하면 정말 죽일 기세였다.
“으윽….”
“아….”
무인이라는 존재를 경험해보지 못한 촌장과 마을 사람들은 퍼렇게 질린 입술을 떨며 물러섰다.
“단주님.”
왼쪽 눈에 안대를 찬 흑적단의 부단주가 불란트에게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
“과수원의 나무를 모두 자르고, 집도 뒤졌는데 아무것도 없습니다. 정말 이곳이 맞습니까?”
“귀마검주가 백사우를 죽일 때 본 지도에서 분명 이쪽에 표식이 새겨져 있었다.”
불란트는 확실하다며 턱을 저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는데….”
“불을 질러라.”
“예?”
부단주가 무슨 말이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무는 베었어도 아직 수풀 때문에 제대로 살필 수가 없잖느냐. 모조리 불을 질러라.”
“하지만 이 근방은 지그하르트의 땅입니다. 혹시라도 놈들이 나타난다면….”
“지그하르트도 지금은 귀마검주 쪽으로 정신이 팔려 있을 것이다. 빠르게 처리하면 그만이야.”
불란트는 속전속결로 처리하고 가자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음, 알겠습니다.”
부단주도 그게 좋겠다고 생각한 듯 고개를 끄덕이고 수하들을 모았다.
“과수원과 마을에 불을 질러라.”
“분부대로.”
회색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던 네 명의 마법사가 손아귀에 어려 있던 불길을 쏟아냈다.
뻘겋게 타오른 화염은 짐승처럼 달려가 마을과 과수원 전체를 휘감았다.
“무, 물! 물을 퍼와! 어서!”
촌장은 턱을 떨면서 물을 가져오라고 외쳤다. 그는 두려움을 이겨내고 무릎으로 기어서 불란트에게 다가갔다.
“제발 그만해주십시오! 제가 가진 돈을 모두 드리겠습니다! 제발….”
그가 손을 비빌 때 불란트가 어깨에 걸치고 있던 창을 그었다.
푸카아아악!
촌장이 가슴에 시꺼먼 구멍이 뚫린 채 기울어졌다.
“꺼허헉!”
그가 가슴의 상처를 막으려고 했지만, 핏물은 둑이 무너진 것처럼 계속해서 흘러내렸다.
“꺄아아아악!”
“촌장님!”
“아아….”
마을 사람들은 촌장이 죽은 것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멍하니 주저앉았다.
“이것들도 다 처리해라.”
“예!”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역시 이게 편하지.”
“지그하르트 따위 알 바냐고.”
마적단은 일이 편해졌다고 섬뜩한 미소를 그린 채 말을 몰았다.
불에 달궈진 창이 마을 사람들을 찌르려는 찰나 과수원 입구 쪽에서 거대한 폭음이 터졌다.
쿠와아아앙!
입구에서 경계를 서던 마적들이 몸통이 갈라진 채 불길 속으로 처박혔다.
“뭐냐….”
불란트가 회색 연기 속을 노려보며 아래로 내려둔 창을 들었다.
“길을 열어라.”
회색 연기 속에서 솟구친 그림자가 나지막한 목소리를 흘린다.
오연한 음성이 땅을 내딛는 순간 세 명의 검사가 튀어나왔다.
쿠와아아앙!
가장 먼저 돌진해온 흑발흑안의 여검사가 앞으로 검을 내뻗는다. 검극에 해일과도 같은 거대한 기운이 응집되다가 단숨에 터져나간다.
불란트 주변을 지키던 부단주와 정예 호위의 몸이 갈기갈기 터져나갔다.
촤아아아악!
뒤를 따라온 청발의 검사가 하늘에 걸린 초승달처럼 유려한 빛을 그린다. 인세에 없을 정갈한 선이 뻗어나가며 방어를 준비하던 마법사들의 목이 장난감처럼 뚝 끊어졌다.
화아아아아!
마지막에 걸어 나온 보랏빛 눈동자의 여검사가 검으로 바닥을 쓸었다. 칼날의 끝에 어린 서리가 바람을 타고 뻗어나가며 마적과 말의 다리를 모조리 얼려버렸다.
“네, 네놈들은 뭐….”
불란트가 뒤로 물러서다가 검사들의 옷에 박힌 불타는 검의 문양을 보며 입술을 떨었다.
“지, 지그하르트?”
그가 헉 소리를 내며 창을 다잡았다.
“지그하르트가 왜 여기에!”
그의 외침에 답을 하듯 갈라진 회색 연기에서 서늘한 걸음 소리가 울렸다.
저벅.
부단주의 몸을 터트린 흑발의 검사도, 마법사의 목을 벤 청발의 검사도, 마적단 전체를 얼려버린 보라빛 눈동자의 검사도 모두 물러섰다.
세 사람의 뒤로 떠오르는 건 태양보다 진하게 타오르는 붉은 눈. 그 눈을 마주한 것만으로 심장이 터질 것처럼 꽉 조여들었다.
“자, 잠깐!”
“그냥.”
금발적안의 남자가 담담히 고개를 저었다. 알고 있다. 저런 괴물들을 부리는 젊은 검사는 딱 한 명이니까.
“라온 지그하르….”
“운이 없었다고 생각해.”
섬뜩한 파공음과 함께 불란트의 목이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