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25화
아리스는 임무를 고르라는 말이 진심이라는 듯 방긋 웃으며 손에 든 서류를 흔들었다.
“으….”
라온은 팔랑이는 서류를 보며 입술을 꾹 내리눌렀다.
‘창피해….’
실비아에게 아기 연기를 할 때 이후로 오랜만에 창피하다는 감정이 든다. 얼굴이 뜨겁다. 거울을 보면 뺨이 뻘겋게 달아올라 있을 게 분명했다.
-와아….
라스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고개를 떨었다.
-본왕도 나름 많은 망나니를 만나 봤다만, 저런 개망나니는 처음이니라. 귀때기와는 다른 의미로 사고뭉치이니라.
‘그렇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 망나니들은 핏줄의 고귀함만을 가지고 난동을 부리지만, 아리스는 핏줄에 능력까지 겸비하고 있다.
육황인 지그하르트에서도 그녀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글렌 뿐이었다.
“못 고르겠으면 이모가 골라줄까?”
아리스가 들고 있던 서류를 쭉 훑어내리다가 하나를 위로 들었다.
“이거 좋네. 남북맹의 거렁뱅이들이 우리 영역인 파린 강까지 정찰을 왔다는데. 가서 조지고 와. 부왕을 잡는 예행연습을 하는 거지.”
그녀는 남북맹주와 부왕에게 경고를 보내자며 웃었다.
“이것도 괜찮은데. 북서쪽의 토논 평원에 몬스터들이 모이고 있다네. 광풍대가 단체 훈련을 했으니까. 대규모 전쟁에 참여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그리고….”
아리스는 그 외에도 서류의 내용을 하나씩 말해주며 괜찮은 임무들을 골라주었다.
“어….”
“뭐, 뭐지?”
“이게 맞나?”
간부들은 멍한 눈동자로 아리스와 라온을 번갈아 보았다.
“미친개한테 물리기 싫으면 그냥 가만히 있어라.”
발데르는 입 닥치라는 듯 간부들에게 주먹을 들어 올렸다. 본인 외의 희생자를 늘리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누가 미친개야!”
아리스가 미간을 구긴 채 발데르의 허리를 후려쳤다.
“흡!”
발데르는 바닥에 처박혔다가 벌떡 일어나서 근육이 두드러지는 자세를 취했다. 근육 덕분에 아프지 않다는 것 같은데, 더 없어 보였다.
“끄응….”
라온이 손가락으로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매만졌다. 점점 더 창피해져서 손이 떨릴 지경이었다.
“저기 아리스 님.”
아리스에게 제발 그만하라고 말하려고 할 때 데니어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누님.”
데니어가 아리스에게 다가가며 고개를 저었다.
“진정하시죠. 이런 일은 라온에게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너도 방해하려고?”
“그게 아닙니다. 누님의 말씀대로 처음 온 대주에게 배려해주는 것도 좋고, 임무를 먼저 고를 수 있게 해주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그가 이쪽을 돌아보며 눈썹을 가라앉혔다.
“그건 라온이 정해야 합니다. 누님이 다 떠먹여 주고, 골라준다면 저 아이의 성장에는 자그마한 도움도 되지 않을 겁니다. 원탁회의마다 누님이 계실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평소 데니어에 대한 평판이 어찌 되었든 지금 그가 한 말은 이곳에 있는 모두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정론이었다.
다만 아리스는 정론을 싫어하는 자유인이었다.
“흐음.”
아리스가 천천히 시선을 돌려서 데니어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눈동자는 닮았지만, 또한 닮지 않았다.
“너 말 잘한다.”
그녀가 턱을 모로 틀며 입술을 말아 올렸다.
“말 잘해서, 먹고 싶은 것도 많겠어.”
“누, 누님?”
데니어는 무슨 말인지 이해를 하지 못하고 눈을 끔벅였다.
“네가 한 말은 틀리지 않아. 맞는 말이지. 다만 네가 그 말을 하니까. 왜 내숭을 떠는 것 같지?”
아리스는 어깨를 돌렸다. 주먹이라도 날릴 듯한 모양새였다.
라온이 헛바람을 흘렸다. 데니어의 말을 듣고 물러나 줬으면 좋았겠지만, 예상대로 아리스는 판을 더 크게 키우려는 것 같았다.
“후….”
데니어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뒤로 물러서며 방어태세를 취했다. 그의 발밑에서 석벽이 치솟은 듯한 굳건한 기운이 타올랐다.
쿠구구구구!
아리스가 서류를 뒤로 던지며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전신에서 투신과도 같은 사나운 패기가 이글거렸다.
‘결국 이것밖에 없나.’
라온이 한숨을 내쉬고서 아리스를 바라보았다. 목에 힘을 준 채 입술을 열었다.
“이모.”
이모라고 말을 하자마자, 아리스의 어깨 위로 피어나던 섬뜩한 기파가 씻은 듯 사라졌다.
“응. 우리 조카!”
아리스는 언제 화를 냈냐는 듯 방실거리며 웃었다.
“무슨 일이니?”
그녀는 데니어를 압박할 때와는 달리 따스하게 차오른 음성으로 손을 흔들었다.
“와, 목소리 달라진 거 봐. 내숭은 자기가 부렸구만.”
“닥쳐!”
발데르는 아리스에게 툴툴거리다가 정강이를 걷어차였다.
“크헉!”
그가 정강이를 잡고 바닥을 굴렀다. 정강이는 근육으로도 보호하지 못하는 것 같다.
“저도 현무전주님의 말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라온은 굴러다니는 발데르를 보다가 아리스에게 시선을 올렸다.
“제가 신입이고, 선임도 없어서 이모가 챙겨주시는 건 감사하지만, 이런 특별 취급까지는 안 해주셔도 됩니다. 다른 간부들과 같이 정당한 방식을 통해서 임무를 받겠습니다.”
챙겨주는 아리스에게는 미안하지만, 여기서는 이렇게 나가는 게 맞다.
“그래? 본인이 그렇다면 뭐, 어쩔 수 없지.”
아리스는 손을 휘휘 저은 채 다시 발데르의 자리에 앉았다. 조금도 섭섭해하지 않고, 오히려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았다.
‘예상대로네.’
아리스가 본래 성격 이상으로 막무가내라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말려주기를 바랐던 것 같다.
‘나 때문이겠지.’
그녀는 아리스 지그하르트를 말린다는 점과 자기 힘으로 임무를 받겠다는 것을 앞세워서 나를 간부들에게 좋은 모습으로 인식시키고 싶었던 게 분명했다.
즉, 내 평판을 올려주는 게 목표였던 것이다.
“고맙다. 라온.”
데니어는 본인의 뜻을 알아주어서 고맙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서 자리에 앉았다.
“크으응….”
발데르가 정강이를 매만지다가 일어나서 다시 아리스의 뒤에 섰다.
“다른 건 몰라도 저놈의 저런 성격은 마음에 들어. 무인답잖아.”
그는 10분 전에 버릇없다고 했던 것을 잊은 듯 마음에 든다며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성격이 너무 단순해서 오히려 감을 잡기 힘들었다.
“그럼 계속 진행해.”
아리스는 만족스럽게 웃고서 날렸던 서류를 채드에게 넘겼다.
“가, 감사합니다.”
채든느 떨리는 손으로 서류를 받으면서 눈동자는 이쪽을 향했다. 주먹을 쥐는 모습이 꼭 무언가를 다짐하는 것 같았다.
“그럼 임무 배정을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채드는 아리스의 눈치를 보며 서류를 정리했다.
발데르는 여전히 아리스의 뒤에 서 있었다. 다른 사람의 자리를 뺏어도 될 텐데, 서 있는 걸 보면 참 특이한 사람이었다.
“아리스 님이 저 대신 임무를 설명해주셔서 길게 말씀드릴 필요는 없겠군요. 파린 강을 넘보는 남북맹을 몰아낼 임무를 맡고 싶으신 간부는 거수하여 주십시오.”
“…….”
조용하다. 아니, 싸늘하다. 간부들 모두가 아리스와 내 눈치를 보고 있었다.
라온이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숙였다. 모두에게 저 임무에 아무런 흥미도 없다는 모습을 보였다.
“그럼 우리가 맡지.”
우측에 앉아 있던 전검대주 라테인이 손을 들어 올렸다. 반대하는 사람이 없었기에 전검대가 임무를 맡게 되었다.
“다음 임무는 토논 평원에 모이는 몬스터 토벌입니다. 대형 몬스터와 소형 몬스터가 모두 모이는 것을 보면 대장급 몬스터가 태어난 것 같습니다. 이 임무를 맡고 싶으신 간부는 거수해 주십시오.”
“…….”
이번에도 누구도 손을 들지 않았다. 바로 눈을 감았다.
“토벌 임무는 저희가 하겠습니다.”
트레빈이 손을 들었다. 이번에도 반대하는 사람이 없었기에 철전대가 토벌 임무를 맡게 되었다.
“오늘 원탁 회의는 빠르게 진행되서 좋군요. 그럼 계속 가보겠습니다.”
채드는 가지고 있던 서류를 차례로 읽었고, 긴장이 풀린 간부들은 임무들을 하나씩 채갔다.
“아, 이게 왔군요.”
채드가 입가에 깊은 우물을 만들며 서류를 들었다.
“처음 대륙 정세를 말씀드릴 때 설명했던 도검존의 무덤에 관한 임무입니다.”
그가 서류를 툭툭 치며 입맛을 다셨다.
“저희는 지그하르트입니다. 세상 그 어떤 무학도 저희의 검에는 닿을 수 없지만, 현재 도검존의 무덤의 위치를 아는 백사우는 지그하르트의 영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습니다.”
“그게 정말인가?”
“예. 저희 영역 내부는 아니지만 근접한 곳에 있죠. 혹시라도 지그하르트 인근에서 무덤이 발견된다면 큰 문제가 생길 수도 있기에 사전에 조치가 필요합니다.”
채드는 백사우에게 지도를 회수하고, 무덤의 개방 여부에 대한 판단을 내릴 사람이 필요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도검존의 무덤 지도를 회수하거나, 무덤 내부에 들어가야 할 수도 있기에 상당히 위험한 일이 될 겁니다. 그래도 임무를 맡고 싶으신 간부는 거수하여 주십시오.”
“나!”
발데르가 바로 손을 들어 올렸다.
“우리 진무전이 간다!”
“넌 안 돼.”
데니어가 한숨을 뱉으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간다면 가는 거야! 도검존 따위가 아니라, 지그하르트가 최강이라는 것을 보여주겠다!”
발데르는 무덤의 보물을 얻는 게 아니라, 무덤에 오는 사람을 패기 위해서 가겠다며 주먹을 쥐었다.
“우리는 아직 중무전의 조사를 끝내지 못했어. 가주님의 명령을 잊은 거냐.”
“아….”
발데르는 이제야 조사 임무가 떠오른 듯 입을 동그랗게 벌렸다.
두 전주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자, 임무가 할당되지 않은 간부들이 손을 들어 올렸다.
라온이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겠지.’
도검존의 무덤은 지금까지 나왔던 임무들과는 격이 달랐다.
무덤을 정복하면 얻게 될 명예와 재물, 그리고 도검존의 무학은 그 무엇과도 비견될 수 없었다.
아무리 지그하르트의 간부라고 해도 끌리는 게 당연했다.
-너는 손 안 드는 것이냐? 저거 노리고 있었잖느냐.
라스가 뭐 하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라온.”
아리스도 이 임무를 고르라는 듯 손가락을 까딱였다.
라온은 아리스가 아니라, 채드가 든 서류를 살피며 입맛을 다셨다.
‘조금 전에 지그하르트 근처라고 했지.’
채드는 도검존의 무덤에 갈 수 있는 지도를 지닌 백사우가 지그하르트 영역 근처에서 움직이고 있다고 말했다.
그걸 잘 생각해보면 이 임무를 맡지 않고도 도검존의 무덤을 노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쪽이 훨씬 편하겠어.’
라온은 결국 손을 들지 않고,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았다.
“단주님들의 참여는 감사하지만, 이번 임무는 위험하니, 대 이상이 가는 게 좋을 듯 합니다.”
“끙….”
“아쉽군.”
“좋은 기회였는데.”
채드의 조언에 거수하던 단주들이 손을 내렸다. 남은 간부는 둘이었다.
공검대주 세레나와 직계 소속 영랑대의 대주 드로넨이다.
드로넨과는 알현실에서 자주 마주쳤지만, 대화를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굉장히 과묵한 인물이었다.
“두 분 다 양보를 할 생각은 없어 보이는군요. 급한 임무다 보니, 대련을 하기에도 좋은 상황이 아닙니다. 투표로 결정하지요.”
채드는 두 사람의 이름을 부르며 이 임무를 누가 맡는지에 대한 투표를 시작했다.
“공검대가 임무를 맡는 게 좋다고 생각하시는 분은 거수해주십시오.”
“나!”
아리스가 세레나를 지지하자, 눈치를 보던 중립 간부들 대부분이 손을 들었다.
드로넨의 차례가 되지 않았음에도 결정이 난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럼 도검존 무덤에 관한 임무는 공검대에서 맡겠습니다. 그리고… 헉!”
채드가 서류를 뒤로 넘기다가 어깨를 움찔거렸다.
“죄송합니다. 중간에 일이 많아서 이 임무를 잊었군요.”
그가 첫 번째로 꺼냈던 서류를 다시 들어올렸다.
“처음에 말씀드렸던 지그하르트 영역의 수색 임무입니다. 이 임무를 맡고 싶으신 분은 거수를….”
“제가 하겠습니다.”
라온이 바로 일어나서 손을 들어 올렸다.
“어?”
“정찰을 가겠다고?”
“갑자기 왜?”
발데르가 잡무라고 할 정도인 정찰 임무를 맡겠다고 하자 원탁에 앉은 간부들 모두가 눈을 부릅떴다.
“현무전주님과 진무전주님의 말씀대로 지금은 할 수 있는 것부터 하는 게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후배된 입장으로서 이번 정찰은 저희 광풍대가 맡겠습니다.”
“어, 음.”
발데르는 라온이 본인의 말을 따른다고 하자 당황한 듯 눈을 끔벅였다.
“아, 안 그래도 되는데.”
그는 또 얻어맞을까 봐 걱정된 듯 아리스에게서 한발 물러섰다.
“네 말대로 하고 싶은 것을….”
“아뇨. 천천히 정찰을 하면서 지그하르트가 어떤 곳인지 다시 한번 되새기고 오겠습니다.”
라온은 고개를 저으며 이 임무를 맡겠다고 선언했다.
“크! 역시 성격 하나는 마음에 든다니까!”
발데르는 아리스가 가만히 있는 것을 보고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정찰도 중요한 임무다! 확실하게 끝내고 오도록! 그리고 다음 원탁에서는 내가 네 임무를 챙겨주마. 가장 좋은 것으로 배정해주지.”
그는 본인만 믿으라는 듯 가슴을 두드렸다.
“후후.”
반면 아리스는 정찰 임무를 받은 의도를 알아차린 듯 연한 웃음을 그렸다.
“…….”
데니어 역시 내 생각을 파악한 듯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반대는 역시 없군요. 그럼 정찰 임무는 광풍대에서 맡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채드는 원탁에 앉은 간부들의 반응을 살피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라온은 확연히 달라진 간부들의 눈동자를 보며 연한 미소를 그렸다.
* * *
“라온 놈. 말이야.”
발데르가 원탁 회의장을 나가는 데니어의 뒤에 붙으며 큼지막한 웃음을 흘렸다.
“성격은 마음에 들지 않아? 레이든의 일이 있어서 보기만 해도 짜증 났는데, 요즘에는 볼 때마다 마음에 차는 소리만 하더군. 이럴 줄 알았으면 우리 전으로 데리고 오는 거였는데.”
그는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역시.”
데니어는 발데르의 미소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너는 저 아이의 생각을 읽지 못했군.”
“그게 무슨 말이지?”
“정찰에 관심을 보이지 않던 라온이 왜 갑자기 정찰 임무를 맡겠다고 한 것 같아?”
“놈이 말했잖아. 지그하르트를 돌아보고 싶다고….”
“그게 아니다.”
그가 손가락을 느릿하게 흔들었다.
“현재 도검존의 지도를 가지고 있는 놈이 지그하르트 영역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기 때문이지.”
“그러면….”
“그래. 그 정도 위치라면 정찰이라는 명목하여 도검존의 무덤도 수색할 수 있어. 라온은 그걸 노린 거다. 간부들에게 호감을 사면서 실리까지 추구할 수 있는 길을 만든 거지.”
데니어는 상황 파악이 뛰어나다고 말하며 헛웃음을 흘렸다.
“사실 그 생각은 너를 제외한 모두가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걸 가장 빠르게 판단하고 결정한 건 라온이지. 원탁에 수십 번 참여한 간부들보다 그 아이가 상황 파악이 빨랐다는 게 믿기질 않는군.”
“음….”
“지금 그걸 알아차린 간부들은 농락당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군.”
“그건 아니야.”
발데르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농락이 아니라, 그놈이 대단하다고 생각해야지. 제 능력으로 임무를 얻은 거잖아. 그럼 칭찬해주는 게 맞아. 농락당했다고 조잘대는 건 쥐새끼 같은 속 좁은 것들이지.”
그는 라온의 칭찬을 하는 게 맞다며 웃었다.
“생각할수록 아깝군. 그렇게 머리가 잘 돌아가는 놈이 우리 전에 왔어야 했는데.”
“너는.”
데니어가 그런 발데르를 보며 눈매를 좁혔다.
“질투가 나질 않는 건가?”
“질투?”
“형이 사고를 친 덕분에 라온 지그하르트는 아버지의 신뢰를 더 크게 받게 됐고, 대주의 자리에 앉았지. 아마 내년 생사결에서 살아남는다면 직계가 되고, 광풍대는 전이 될 것이며, 우리와 같은 후계자 후보에 오를 거다. 네 라이벌이 된다는 소리야.”
“흠….”
발데르가 큼지막한 손으로 턱을 긁적였다.
“나도 가주 자리를 원하기는 하지. 되면 좋겠고, 할 수 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하겠지. 뭐, 그 인간 같은 짓은 안 하겠지만.”
그는 카룬을 떠올린 듯 병실이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질투도 느낄 수 있을 테고, 부러울 수도 있어. 다만 내 전력으로 다 부딪쳐서 안 될 정도라면 나보다 지그하르트를 더 크게 키울 놈이라는 뜻이니까. 양보해도 상관없어.”
발데르는 지그하르트가 성장할 수만 있다면 어떤 가주라도 받아들일 수 있다며 고개를 저었다.
“…….”
데니어가 그런 발데르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변하질 않는구나.”
“갑자기 무슨 소리야.”
“지금 그대로 있으라는 뜻이다.”
데니어는 발데르의 어깨를 부드럽게 두드리고서 현무전으로 돌아갔다.
“쉽게 좀 이야기해!”
발데르는 데니어의 등을 보며 미간을 구겼다.
“어렵다고!”
* * *
이틀 후.
라온은 암시장에 부탁한 정보를 받기 위해서 번화가로 나왔다.
상가 구석의 낡은 조각상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마음을 가라앉히는 따스한 나무 향이 느껴졌다.
수가 늘어난 조각들을 세면서 안쪽으로 걸어가자, 카운터에 앉아 있던 주인이 후드를 벗고, 고개를 숙여왔다.
보라색 장미꽃 문양의 안대를 쓴 데닝로즈였다.
“광풍대주 님을 뵙습니다.”
데닝로즈가 입가에 작은 미소를 띄운 채 고개를 숙였다.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라온이 떨떠름한 눈빛으로 데닝로즈를 바라보았다.
“대주가 되셨으니, 그에 맞는 대우를 해야지요.”
데닝로즈는 장사꾼으로서 당연한 일이라며 손을 저었다.
“대주가 되신 걸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라온이 마주 고개를 숙이고 데닝로즈가 안내해주는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지부장님이 직접 오셨군요.”
“대주님의 요청이니, 당연히 제가 와야죠.”
데닝로즈는 손님에 대한 예의라며 웃었다.
“대주에 오르신 이야기를 직접 듣고 싶지만, 시간이 없으니 바로 일 이야기로 들어가죠. 조금 상황이 바뀌었거든요.”
그녀의 외안이 진중한 빛으로 번뜩였다.
“상황이 바뀌었다는 게….”
“이틀 전만 해도 도검존의 무덤 지도를 가지고 있었던 백사우가 죽었고, 그 주인이 바뀌었습니다.”
“이번 주인이 누구죠?”
“성검련.”
데닝로즈의 입술이 짧게 떨렸다.
“지금 도검존의 지도는 성검련의 손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