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623화 (622/653)
  • 제623화

    도리안이 포복 자세로 어둑해진 숲을 바라보았다. 마른침을 꼴깍 삼킨 후 소리가 나지 않도록 천천히 기어서 거북이 등껍질처럼 둥근 바위 뒤로 돌아갔다.

    “후우우….”

    바위에 등을 기댄 채로 참았던 숨을 내뱉었다.

    ‘정말 죽겠네.’

    도리안이 이마에서 흐르는 식은땀을 닦으며 고개를 저었다. 집중력 강화 훈련이 시작한 지 이틀이 지났고, 지금까지 여섯 번의 죽음을 경험했다.

    마르타한테 걸린 게 한 번, 도괴에게 잡힌 게 한 번 그리고 라온을 마주친 게 네 번이었는데, 라온을 만날 때마다 먼지가 나도록 얻어맞아서 이젠 기척을 죽일 힘도 없었다.

    ‘내년에 생사결 잡혀 있는 사람 맞아?’

    부왕과의 생사결이 멀지 않았는데, 본인 수련을 놔두고 광풍대의 훈련에 전력을 다한다는 게 신기했다.

    매번 느끼지만, 소심한 자신과 아예 그릇이 다른 사람이었다.

    ‘대주가 저렇게 나오는데, 대충 할 수도 없고.’

    라온이 바쁜 시간을 쪼개서 광풍대의 훈련에 집중하는 이유는 하나다. 임무에 나갔을 때 한 명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서.

    그의 마음을 알기에 이 훈련을 가볍게 여길 수가 없었다.

    ‘이제 이동해야지.’

    한 장소에 계속 머무는 건 좋은 방법이 아니다. 적당히 쉬다가 움직이려고 엉덩이를 들썩일 때 바닥에 검은 그림자가 졌다.

    “어…?”

    도리안이 입술을 떨며 시선을 올렸다. 바위 위에 두 개의 빨간 달이 떠 있었다. 아니, 저건 달이 아니다. 라온의 붉은 눈이었다.

    “끼아아아악!”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려고 했지만, 라온의 발에 어깨가 눌려서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퍼어억!

    라온이 수도를 세워 거침없이 도리안의 명치를 찔렀다.

    “끄아아아악….”

    오러를 이용하여 방어하려 했지만, 라온의 공격은 오러를 뚫고 들어와 내부에 강렬한 충격을 일으켰다. 쇠망치로 얻어맞은 듯 몸에 힘이 빠졌다.

    ‘대, 대체 뭐야 이건….’

    오러를 부수는 것도 아니고, 아예 무시해버리는 공격이라니 어이가 없었다.

    “점점 익숙해지네.”

    라온은 무슨 실험을 하는 것처럼 본인의 손을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걸로 일곱 번째인가?”

    “왜 나만 따라오는 건데요….”

    도리안이 허리를 굽힌 채로 울먹였다.

    “아쉽게도 이번에는 널 찾아온 게 아니야.”

    “네?”

    “이 밑.”

    라온은 조금 전까지 도리안이 숨어 있던 바위의 아래를 가리켰다. 그는 옅은 미소를 그리며 거세게 발을 굴렀다.

    쿠우우우웅!

    산이 무너지는 듯한 굉음이 터지며 바닥에 거대한 균열이 벌어졌다. 시꺼멓게 가라앉은 구멍 속에서 리메르와 크레인이 튀어나왔다.

    “허억!”

    “어, 어떻게….”

    리메르와 크레인은 어떻게 이 밑에 있는 것을 찾았냐는 듯 입을 떡 벌렸다.

    “조용히 자야지. 코를 골면서 자면 어떻게 합니까.”

    라온이 리메르의 입에서 흘러내리던 침을 가리키며 고개를 저었다.

    “이 미친놈아! 귀가 왜 이렇게 좋은 건데! 네가 엘프냐!”

    “아니, 사람인데.”

    그는 어깨를 가볍게 돌리고서 제천검을 뽑았다.

    “크레인. 이제 방법이 없다. 싸우자!”

    “아, 알겠습니다!”

    “네가 앞을 맡아. 나는 뒤에서 기습을 준비하마.”

    “예!”

    크레인이 입술을 깨문 채 앞으로 나왔다. 그는 결사의 각오를 한 듯 눈동자를 빛냈다.

    “하아.”

    라온은 그런 크레인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뒤를 봐라.”

    “그런 말을 해도 안 넘어갑니다. 저도 그동안 놀고 있지만은 않았습니다!”

    크레인은 끝까지 싸우겠다는 듯 두 손으로 검을 잡고 오러를 전력으로 끌어냈다. 그의 칼날에 모인 검기가 응집되며 선명한 검사를 일으켰다.

    “그게 아니라. 네가 믿는 엘프 도망쳤다고.”

    라온이 손을 휘휘 저었다.

    “어….”

    크레인이 뒤를 돌았다. 그는 든든하게 지켜줄 것 같았던 리메르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눈을 부릅떴다.

    “이 망할 엘….”

    “그렇다고 정말 돌면 안 되지.”

    라온은 크레인이 뒤를 돈 틈을 이용하여 검신으로 복부를 후려쳤다.

    퍼어어억!

    크레인은 제천검에 얻어맞아 바닥에 처박혔다. 그는 팔다리를 부들부들 떨며 비명을 질렀다.

    “끄아아아악!”

    “부대주가 도망친 건 사실이지만, 그대로 포기하면 안 되지. 끝까지 싸우든 기회를 봐서 도망치든 빠르게 판단을 내려야 했어.”

    라온은 크레인의 이마에 죽었다는 표식을 새기고서 리메르가 도망친 방향을 살폈다.

    흔적을 따라 움직이려고 할 때 우측 수풀 뒤에서 마르타가 달려 나왔다.

    “이제 도망치는 것도 질린다. 덤벼!”

    마르타는 당장 싸우자는 듯 손가락을 까딱였다.

    “저 성격은 도통 변하질 않네.”

    라온이 마르타의 등장을 예측한 듯 피식 웃으며 제천검을 휘돌렸다.

    “벌칙을 받고 싶다면 그렇게 해주는 수밖에.”

    그는 제천검을 중단에 세운 채 태화보를 밟았다. 찰나의 순간에 마르타의 앞에 이르러 광아검을 내쳤다.

    은색 칼날에 깃든 오러가 마르타의 목덜미를 물어뜯을 것처럼 사나운 이빨을 드러냈다.

    치이이이잉!

    마르타는 광아검의 흐름을 읽은 듯 광폭화를 일으키며 검을 내뻗었다.

    쩌어어어엉!

    검과 검이 맞부딪치며 강렬한 폭음이 터져 나왔다. 마르타는 전력을 다해서 검격을 일으켰지만, 만화공의 불꽃을 이기지 못하고, 검식 자체가 꺾여나갔다.

    “으윽….”

    마르타의 검이 아래로 기울여지려는 순간 좌측 나무 위에서 서리의 파도가 내리쳤다.

    콰아아아앙!

    은빛 냉기가 사위를 휘감으며 제천검의 압력을 풀어냈다.

    “…….”

    루난이 나무 위에서 내려오며 마르타의 옆에 붙었다.

    “분명 개인전이라고 했을 텐데?”

    라온이 제천검에 스며든 냉기를 태우며 눈썹을 내렸다.

    “적의 적은 동료.”

    루난은 지금부터 마르타와 동료가 되었다며 라온에게 검을 겨누었다.

    “…….”

    라온은 루난의 애검 설화를 지켜보다가 뒤편으로 제천검을 뻗어냈다.

    쩌어어어엉!

    소리 없이 다가오던 버렌이 설풍검결을 얻어맞고 멀리 튕겨 나갔다.

    “크윽….”

    버렌은 바닥에 손을 짚으며 인상을 구겼다.

    “기습도 안 먹히네.”

    “너는 또 뭐지?”

    “그냥 길을 좀 막으려고 했을 뿐이야.”

    그는 크레인과 도리안에게 빨리 물러나라는 듯 손을 저었다.

    “그런가.”

    라온이 마르타와 루난, 버렌을 차례로 보며 옅게 웃었다.

    ‘셋 다 이 훈련이 무슨 의미인지 잘 알고 있군.’

    지금 진행하는 집중력 강화 훈련은 단순히 집중력과 실전 경험을 끌어 올리는 게 목표가 아니다.

    임무에 실패하여 산개하여 도망칠 때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를 경험시키기 위한 훈련인데, 이 셋은 수하들을 위해서 시간을 끌려고 앞에 나선 것이다.

    “대견하기는 하지만….”

    라온은 제천검 위로 버렌, 마르타, 루난의 강기를 합친 것보다 더 거대한 검강을 일으킨 채 태화보를 밟았다. 경악하는 세 사람의 눈동자를 보며 입매를 말아 올렸다.

    “봐줄 생각은 없어.”

    *     *      *

    글렌은 호랑이 바위 위에 서서 라온과 세 조장의 전투를 지켜보았다.

    “허허….”

    로엔이 글렌의 옆으로 다가가며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대주가 되자마자 하는 일이 훈련이라니, 라온 님의 일관성은 따라갈 수가 없군요.”

    그는 라온이 대견하다는 듯 부드러운 눈빛을 보였다.

    “스스로 느낀 바가 있으니, 아이들에게도 가르치려는 것 같네요.”

    셰릴이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느낀 바라면….”

    “전력의 부족.”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라온과 광풍대는 몇몇 임무에서 다른 사람의 개입 덕분에 살아남았어요. 항상 그런 운을 기대할 수는 없으니, 임무 실패 시에 도망치는 방법을 가르치려는 것 같네요.”

    “확실히 그렇군요.”

    로엔도 이제 이해가 된다는 듯 허허 웃었다.

    “신기한 건 제 코가 석 자일 텐데, 다른 검사들을 신경 쓴다는 거예요. 배짱이 얼마나 두둑한 건지.”

    셰릴은 부왕과의 생사결을 생각한 듯 눈매를 찌푸렸다.

    “선하신 거죠. 자기 자신보다 남을. 동료를 먼저 생각하시는 겁니다. 저것도 다시 없을 재능이죠. 실비아 님을 꼭 닮았군요.”

    로엔이 셰릴의 말을 받으며 큼지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말을 멈추고 바위 위로 시선을 들었다.

    “커험….”

    글렌은 뺨을 붉게 물들인 채 헛기침을 뱉었다.

    “뭐,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니지만, 괜찮기는 하네.”

    그는 솟구친 입꼬리를 바들바들 떨었다.

    “대주가 되었으니, 저 정도 책임감과 자신감은 있어야지.”

    글렌은 탁 풀린 눈빛으로 라온을 보며 끝이 보이지 않는 미소를 그렸다.

    “후후.”

    셰릴과 로엔은 서로 눈을 마주치며 가벼운 웃음을 흘렸다.

    “가, 가주님!”

    라온이 버렌과 루난, 마르타를 차레로 쓰러뜨렸을 때쯤 리메르가 바위 위로 올라왔다.

    “라온 좀 말려요! 내가 왜 여기에 있어야 하는 건데요!”

    리메르는 땀에 젖은 앞머리를 뒤로 넘기며 비명을 질렀다.

    “광풍대 부대주로 산다고 한 건 네놈의 선택이었지?”

    “그, 그렇지만….”

    “부대주가 대주의 명령을 듣는 건 당연하잖느냐. 뭐가 불만이지?”

    글렌은 라온에 대한 불만을 말하면 죽일 듯한 눈빛을 손가락을 비볐다. 그의 손아귀에서 붉은 뇌전이 번뜩였다.

    “꼭 불만이 있다는 게 아니라.”

    “만약 이 훈련에서 도망친다면 한 달 동안 내가 직접 너를 봐주도록 하마.”

    “윽….”

    리메르는 그 말을 듣자마자 미간을 구기며 뒤로 물러섰다.

    “정말이지! 할배나 손주나 똑같아! 이 망할 지그하르트!”

    그는 질린다고 외치며 뒤로 물러섰다.

    “크흐흠!”

    글렌은 지그하르트 욕을 먹고도 기분이 좋다는 듯 솟구친 입매를 감추지 않았다. 그의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어…?”

    리메르가 글렌의 미소를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서, 설마 지금 할배랑 손주가 똑같다고 해서 좋아한 거야? 진짜 미치겠네!”

    그는 어이가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쓸데없는 소리 마라!”

    글렌은 붉어진 얼굴을 감춘 채 콧잔등을 찌푸렸다.

    “저놈을 빨리 밑에 데려다 놓아라!”

    “예.”

    “알겠습니다!”

    로엔과 셰릴이 고개를 끄덕이고서 리메르를 팔로 잡고 다시 아래로 끌고 내려갔다.

    “지겨워! 지겹다고!”

    “할아버지와 손주가 똑같다라….”

    글렌은 소리를 지르는 리메르의 등을 보며 큼지막한 미소를 그렸다.

    “나쁘지 않군.”

    *     *      *

    쿠와아아아앙!

    버렌, 마르타, 루난이 차례로 쓰러져서 바닥에 내리꽂혔다.

    “확실히 예전보다는 나아졌네.”

    라온은 세 사람의 구겨진 눈동자를 마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에….”

    “끄으윽!”

    “망할!”

    루난, 버렌, 마르타는 대답할 힘도 없는 듯 바닥에 머리를 박은 채 손가락만 꿈틀거렸다.

    “다만 시간을 벌어야지 너희가 죽는다면 대에 치명적인 손해다. 어떻게 살아나가야 할지 끊임없이 고민하도록.”

    라온은 세 사람에게 조언을 해주고서 다른 광풍대를 찾기 위해서 산 아래로 내려갔다.

    검사들의 기척을 느끼기 위해서 기감을 펼칠 때 우측에서 아주 작은 움직임이 느껴졌다.

    산짐승 같아서 잠시 기다리자, 수풀을 헤치고 금빛 털의 담비가 튀어나왔다.

    ‘담비?’

    이 산에 담비가 있었나?

    북망산에 여러 동물이 사는 건 알고 있었지만, 담비를 보는 건 처음이었다.

    담비는 사람을 겁내지도 않고, 먹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달려왔다.

    ‘설마….’

    -그 설마가 맞느니라!

    라스가 눈을 부릅떴다.

    -광녀가 분명하느니라!

    녀석은 비명을 지르고서 얼음 꽃팔찌 안으로 몸을 숨겼다.

    “라온!”

    담비의 작은 입에서 간드러진 음성이 튀어나왔다. 예상대로 멀린이었다.

    그녀는 허리를 세운 채로 방실 웃었는데, 담비의 모습이었기에 원치 않게도 귀엽게 보였다.

    “후우.”

    라온이 바로 기막을 쳐서 소리를 죽인 후 담비를 데리고 수풀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는 어떻게 왔어?”

    “네가 있으니까. 그리고….”

    멀린은 당연한 것을 왜 묻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주가 된 것도 축하해줘야지.”

    “허….”

    라온이 멀린의 반들거리는 눈동자를 보며 헛바람을 흘렸다. 가끔 보면 멀린이 비연회보다 더 정보가 빠른 것 같았다.

    “대주가 된 것을 축하해. 다음에는 가주도 될 수 있을 거야!”

    멀린은 지그하르트의 가주가 되는 것을 구슬 아이스크림 가게의 점장이 되는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역시나 감당하기 어려운 정신이었다.

    “어쨌든 고마워.”

    대주가 된 것을 축하해주기 위해서 왔다고 하니, 일단 고맙다고 말했다.

    “그 말을 하기에는 일러.”

    멀린이 싱긋 웃으며 털 속에서 금빛으로 반짝이는 반지 하나를 꺼냈다.

    “이건….”

    “선물이야!”

    “선물?”

    “대주 기념 선물!”

    그녀는 다시 한번 축하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머리카락이랑 같은 색으로 준비했어.”

    멀린이 바람에 흩날리는 금빛 머리카락을 가리켰다.

    “음….”

    라온은 멀린이 꺼낸 금색 반지를 보며 눈을 끔벅였다.

    ‘첫 선물이 멀린이라니.’

    대주가 된 이후로 축하는 많이 받았지만, 선물을 받는 건 처음이었다. 어처구니가 없으면서도 고마웠다.

    다만 정보를 얻는 것과 실제 선물을 받는 건 다르기에 함부로 손을 내밀 수가 없었다.

    “받아. 그리 대단한 건 아니니까.”

    멀린은 팔이 아프다며 반지를 흔들었다.

    “그래. 고마워.”

    기껏 준비한 선물을 받지 않는 것도 실례라고 들었고, 대단하지 않다고 말했기에 손으로 반지를 받았다.

    아무 무늬도 없이 단조로운 형태가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잘 보관할게.”

    “보관하는 게 아니라, 껴. 그거 아티팩트야.”

    멀린이 반지를 보며 웃었다.

    “어? 아티팩트?”

    “그것도 고대의 아티팩트지.”

    “대단한 게 아니라며!”

    “나한테는 싸구려야.”

    그녀는 눈동자를 굴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마법사한테는 도움이 안 되거든.”

    “그러면….”

    “그래. 무인 전용 반지야. 손에 응집된 오러를 증폭시켜 주거든.”

    “음….”

    라온이 반지에 오러를 밀어 넣고서 눈매를 찌푸렸다.

    ‘정말이군.’

    반지에 스며든 오러가 증폭된 채로 되돌아왔다. 그녀의 말대로 오러의 증폭 효과가 있는 상급 아티팩트였다.

    ‘그런데 이거….’

    왠지 그 반지랑 비슷한데.

    예전에 암시장에서 구했던 싸구려 반지와 형태가 닮았다. 그 반지도 아직 봉인을 풀 곳을 발견하지 못해서 놔두고 있는데, 이것도 그쪽 같았다.

    ‘설마 그것과 같은 봉인인가?’

    아무래도 불사조가 있는 장소를 빨리 찾아봐야 할 것 같았다.

    ‘어쨌든 보통 물건은 아니로군.’

    라온은 반지를 소중하게 챙기고서 멀린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선물을 잘 받은 게 기쁘다는 듯 웃고만 있었다.

    “요즘 에덴은 어때? 잘 지내고 있어?”

    “난 별일 없어. 임무로 시간만 때우고 있지.”

    “타천이 널 의심하고 있을 텐데?”

    “대놓고 지랄하지는 않아서 괜찮아.”

    그녀는 도망칠 구멍도 새로 만들어 놨다며 걱정말라고 손을 저었다. 이제 에덴에 아무런 관심도 없는 것 같았다.

    “대신 다른 곳에서 일이 많던데.”

    “다른 곳?”

    “응. 오마가 움직이면서 중립 세력이 많이 무너졌어. 전쟁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지. 최근에는 도검존의 무덤이 발견되었다는 소문도 있고.”

    “도검존의 무덤이라고?”

    라온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도검존이 무엇이냐? 맛있어 보이는 이름인데?

    라스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음식이 아니라, 수백 년 전에 대륙 최강을 논했던 불렸던 무인이야. 검과 도를 모두 사용하는데, 둘 다 초월 수준이라고 들었어.’

    검과 도는 비슷해 보이지만, 완전히 다른 무기다.

    찌르기 위주의 검과 달리 도는 베기 위주였기에 둘 다 잘 다루기 힘든데, 도검존은 검과 도를 자신의 몸처럼 다뤘다고 한다.

    수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이명이 회자될 정도이니, 초월급을 한참 넘어선 무인임이 분명했다.

    “그래.”

    멀린이 허리를 긁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도검존의 무덤이 새겨진 지도가 나돌고 있어. 지금은 무령귀객이라는 놈이 가지고 있다던데. 육황오마 전부 쫓고 있을걸.”

    그녀는 딱히 흥미가 없는 듯 고개를 저었다.

    “무령귀객….”

    “인사도 했고 선물도 줬으니, 난 이만 가볼게.”

    멀린은 이제 가야 할 시간이라며 손을 흔들었다.

    “앞으로도 계속 지켜보고 있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

    그게 더 걱정된다고 하고 싶었지만, 선물까지 받아서 입을 다물어야 했다.

    “그리고 이 아이는….”

    라온이 멀린의 입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무슨 말이 나올지 긴장하며 주먹을 쥘 때 그녀의 입술이 다시 달싹였다.

    “발톱 정리를 좀 해달래.”

    “바, 발톱?”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기에 눈을 부릅떴다.

    “발톱이 너무 길게 자라서 오히려 사냥에 방해가 된다고 하더라고. 잘 자르고, 다듬고, 색도 좀 칠해줘.”

    멀린은 담비를 잘 챙겨달라고 말하고서 사라졌다.

    캬악.

    담비가 옆으로 다가오며 앞발을 내밀었다. 빨리 발톱을 깎아달라는 듯한 모양새였다.

    ‘이제 담비 발톱 정리까지 해야 하나?’

    라온이 담비의 발을 보며 눈을 질끈 감았다.

    ‘내 팔자야….’

    멀린과 담비 덕분에 북망산에 잠시간의 평화가 찾아왔다.

    *     *      *

    라온은 5 연무장의 단상 위에 서서 뒤를 돌았다.

    ‘죽기 직전의 표정이네.’

    광풍대 검사들은 하루종일 산책을 하고 돌아온 강아지처럼 죽을 듯한 얼굴로 어깨를 굽히고 있었다.

    “다 끝났으니, 허리 펴.”

    “그 끝이 일주일이 아니라, 3주가 걸렸잖아요.”

    “이 마왕!”

    “사악….”

    버렌과 마르타가 이를 바득 갈았고, 루난이 비틀거리며 주저앉았다.

    “뭔 훈련을 3주 동안 해. 저 귀신 같은 놈은….”

    리메르도 볼이 움푹 들어간 채 바닥에 대 자로 누웠다.

    라온은 거지꼴이 된 광풍대를 보며 피식 웃었다.

    저들의 말대로 훈련이 예상보다 진행이 잘 돼서 계속 연장을 하느라, 어느새 3주가 지나버렸다.

    분명 길고 힘든 시간이었지만, 연달아 경험을 쌓은 덕분에 지금의 광풍대는 정면에서 싸우는 것만이 아니라, 기습과 도주에도 능해졌다.

    이제 보다 강한 적이 나타나도 무조건 앞에서 싸울 게 아니라, 도망치며 기회를 엿볼 수 있게 되어 마음이 조금 놓였다.

    “그동안 수고했다.’

    라온이 광풍대의 지친 눈동자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3일 동안 휴식.”

    “휴식이다!”

    “드디어….”

    “악마에게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어!”

    광풍대는 노예 처지에서 해방된 것처럼 하늘을 올려다보며 울부짖었다.

    “그 전에.”

    라온이 웃고 있는 광풍대 전원을 향해 손을 저었다.

    “자, 잠깐. 설마 또 훈련이야?”

    “저 악마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어.”

    “맞아. 해가 떠 있으니까 훈련을 하자고….”

    광풍대는 아직 중천에 떠 있는 태양을 보며 입술을 떨었다.

    “밥은 먹어야지.”

    그 말을 하며 다시 손뼉을 치자, 연무장 밖에서 사람들이 들어와 천막과 테이블을 깔고, 갓 만든 듯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요리들을 차리기 시작했다.

    “어…?”

    “뭐, 뭐야 이건.”

    “갑자기 무슨….”

    “회식 하자며.”

    라온이 놀란 광풍대를 보며 입매를 말아 올렸다.

    “훈련 잘 끝낸 포상이다.”

    -우와아아아!

    가장 먼저 기뻐하는 건 광풍대가 아니라, 라스였다.

    -대체 언제 이런 준비를 했던 것이냐!

    녀석은 천막 아래에서 차려지는 음식과 디저트들을 보며 혀를 날름거렸다.

    ‘너 잘 때.’

    -이 얌생이 녀석! 본왕은 너를 믿고 있었느니라!

    라스는 음식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되도 않는 아부를 퍼부었다.

    “수고 많았다. 잘 먹고, 3일간 푹 쉬고 오도록.”

    “오오!”

    “이번 대주는 이런 점이 좋다니까!”

    “구두쇠였던 전 대주보다 훨 났지!”

    광풍대는 인사를 할 새도 없이 요리가 채워지는 테이블로 달려갔다.

    “이 술까지 가져온 건가?”

    “와, 다 고급이네!”

    도괴와 리메르는 술이 있는 곳으로 가서 바로 술잔을 들었다.

    “아이스!”

    루난은 보랏빛 눈동자를 옅게 빛내며 구슬 아이스크림이 있는 곳으로 뛰어가 접시에 원하는 만큼 아이스크림을 담기 시작했다.

    “큼.”

    마르타가 루난의 옆으로 다가가서 머리를 긁적였다.

    “뭐가 맛있냐.”

    그녀는 훈련 중간중간 도와주었던 루난이 고마웠다는 듯 먼저 다가왔다.

    “이거.”

    루난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마르타에게 초록빛의 아이스크림을 건넸다.

    “색이 좀 이상한데, 정말 맛있어?”

    “응.”

    “흠….”

    마르타는 색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까딱이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 입 먹었다.

    “크으윽! 이 망할 년이! 나한테 독을 먹여!”

    그녀는 민트초코의 화함에 미간을 꾸긴 채 루난에게 달려들었다.

    “맛알못.”

    루난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또다시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제 자매나 다름없네.”

    버렌은 루난과 마르타의 술래잡기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소고기 소녀가 맛을 모르는구나. 저 귀한 것을!

    라스는 마르타가 뱉은 민트초코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너희가 특이한 거야.’

    라온이 음식을 즐기는 광풍대를 보며 웃고 있을 때 술병을 통째로 든 리메르가 옆으로 다가왔다.

    “돈 좀 들였겠네.”

    “괜찮아요.”

    별거 아니라고 말하며 손을 저었다.

    “근데….”

    리메르가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너한테 말을 안 한 게 하나 있다.”

    “뭐죠?”

    “대주가 되면 간부 회의에 나가야 하거든.”

    “알고 있습니다.”

    대와 단의 여러 사항을 결정하는 회의가 있다는 것을 들어본 적 있었다.

    “처음이니까 준비해야죠. 잘 알려주세요.”

    “근데 그게.”

    리메르가 입맛을 다시다가 술병을 통째로 비우고 말을 이었다.

    “오늘이다.”

    “예…?”

    “그 간부 회의 오늘이라고. 3시간 뒤면 시작이야.”

    그가 하늘을 올려보며 고개를 저었다.

    “진짜?”

    “응. 진짜.”

    “…….”

    -이, 일단 먹고! 먹고 이야기해라!

    라스가 음식부터 먹자고 외쳤지만, 음식을 담은 접시를 내려놓고 눈을 깊게 감았다가 떴다.

    “그걸 왜 지금 말하는 겁니까?”

    “지금 생각났으니까.”

    리메르는 놀리듯이 턱을 치켜들었다.

    “후우….”

    라온이 입술을 씹으며 음식 접시를 다시 들었다.

    “사실 저도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응? 뭔데?”

    리메르가 비싸 보이는 술병을 뜯으며 고개를 저었다.

    “보통 회식비는 은퇴하는 사람이 내는 거 아시죠?”

    라온은 그가 술을 마시자마자 비릿한 미소를 그렸다.

    “어…?”

    리메르는 불길한 눈빛으로 입술을 떨었다. 그의 입에서 술이 주르르 흘러 떨어졌다.

    “여기 음식값이랑 술값 전부 대주님 앞으로 달아놨습니다.”

    라온이 손을 흔들자, 식당 주인과 술집 주인이 동시에 리메르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그, 그걸 왜 지금 이야기해?”

    “지금 물어봤잖아요.”

    “야이!”

    리메르가 분통을 터트리려다가 본인이 했던 일이 생각난 듯 입술을 씹었다.

    “다들 동작 그만! 먹지 마! 먹지 말라고!”

    그가 악을 지르며 뷔페로 달려갔다.

    “누구 평생 설거지하는 꼴 보고 싶어! 그만 먹어!”

    “간부 회의라….”

    라온은 발버둥 치는 리메르에게서 시선을 돌리며 입맛을 다셨다.

    “재밌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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