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22화
카룬은 갑작스럽게 나타난 글렌을 보며 눈을 부릅떴다.
‘아버지가 왜 여기에….’
이 병실은 가주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다.
아무리 글렌이라고 해도 기감 없이 이곳의 기척을 느끼는 건 불가능할 텐데, 어떻게 나타난 건지 모르겠다.
“크아아아악!”
로브의 남자는 뒤늦게 손목의 뼈와 살이 으깨진 것을 느끼고 목이 찢어진 듯한 비명을 질렀다.
“그, 글렌 지그하르트! 당신이 왜!”
“너는 질문을 할 자격이 없다.”
글렌이 로브 남자의 입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뻐어어억!
로브 남자의 이가 옥수수 알갱이처럼 뽑혀 나왔다. 입안에 숨겨둔 독약을 사용하지 못하게 만드는 조치였다.
“으어어억….”
로브 남자는 기괴한 신음을 흘리며 허물어졌다. 글렌이 밀어 넣은 뇌기 때문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어디에서 왔지.”
글렌이 로브 남자를 바닥에 꿇리고서 턱을 틀었다. 짧지만 많은 것을 알 수 있는 질문이었다.
“크흐흑….”
로브 남자는 대답을 하지 않고, 허리를 굽힌 채로 신음만 흘렸다.
“말하기 싫다면 말하지 않아도 좋다.”
글렌이 마음대로 하라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붉은 뇌전이 번쩍이며 로브 남자가 발작을 일으키듯 팔다리를 휘저었다.
“으아아아아악!”
남자의 새하얀 로브에서 붉은 꽃이 피어났다. 글렌이 운용한 뇌기가 그의 전신을 지지며 모공으로 핏물이 흘러나오는 것이다.
“허억….”
로브 남자는 지독한 고통에 숨도 쉬지 못하는 듯 안색이 파랗게 질린 채 헐떡거렸다.
카룬은 그 모습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전신을 통제하고 있어.’
지금 글렌은 뇌기로 저 로브 남자의 전신을 옥죄이고 있었다. 손가락은커녕 호흡도 자기 마음대로 못 하는 것 같았다.
“꽤 심지가 굳은 벌레로군.”
글렌이 담담히 눈빛으로 턱을 끄덕였다.
“버티겠다면 마음대로 해보거라. 지금부터 네 육체는 네 것이 아니니까.”
“크흐흐흐.”
그가 뇌기를 철사처럼 꼬려고 할 때 로브의 남자가 신음과 비웃음을 동시에 흘렸다.
“그럼 내 것이 아니라면 어떨까.”
“음.”
글렌이 이상함을 느끼고 뇌전의 기운을 빠르게 휘돌려 로브 남자를 통제하는 압력을 강화했다.
“커헉!”
하지만 로브 남자는 강화된 억제력을 무시하는 듯 입가에서 살벌한 양의 핏물을 쏟아냈다.
“네, 네놈의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글렌 지그하….”
로브 남자는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고서 숨이 끊어졌다.
“…….”
글렌은 예기치 않은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았다. 가라앉은 눈빛으로 손을 뻗어 로브 남자의 가슴을 갈랐다.
‘무언가가 있어.’
로브 남자의 오러와 근육을 완전히 막았고, 이빨에 숨겨둔 독도 뺏는데, 숨이 끊어진 것을 보면 놈의 심장에 무언가가 숨어 있는 게 분명했다.
피이이익!
핏물 속에 잠기는 로브 남자의 심장 속에서 작게 움직이는 물체를 움켜쥐었다.
지네 같은 모습의 벌레였다. 일반인의 눈에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았지만, 이빨만큼은 기괴할 정도로 컸다.
“레이지 웜인가.”
글렌은 벌레가 힘을 다 쓴 것처럼 늘어지는 것을 보며 미간을 구겼다.
자신이 아는 것과 형태는 조금 다르지만, 심장에 숨는 벌레는 레이지 웜뿐이다. 이 지독한 주술 때문에 이놈의 숨이 끊어진 것 같았다.
‘레이지 웜을 쓰는 단체라….’
오마 중에서 레이지 웜을 쓸 만한 곳은 흑탑과 에덴이지만, 무조건 놈들이라는 보장은 없다.
새로운 단체가 나타났을 수도 있고, 이 로브의 색처럼 백혈교일 수도 있었다.
글렌은 로브 남자의 후드를 걷었다. 역시나 모르는 얼굴이었다. 그는 시체를 내려두고 입을 다물어버린 카룬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 아버지….”
카룬이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전신에 힘이 없어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여기는 어떻게 오신 겁니까.”
“이놈은 누구지?”
글렌은 질문에 답을 하지 않고, 새로운 물음을 던졌다.
“저도 모릅니다.”
카룬이 시체가 된 로브 남자를 힐끔 보고서 고개를 저었다.
“전에 손을 잡자며 접근해온 적이 있었는데, 무시했습니다.”
“무슨 말을 하며 접근을 해왔지?”
“…저를 가주로 만들어주겠다고 했습니다.”
“가주? 어떻게?”
“후계자 후보를 하나씩 제거해주겠다고 하더군요.”
글렌은 그것만 들어도 어떤 내용인지 알겠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그때 라온에 관한 정보를 팔았던 건가.”
“후….”
카룬이 짧게 입맛을 다셨다. 라온에 대해서 묻는다는 건 글렌이 놈과의 대화를 모두 들었다는 뜻이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제대로 된 정보를 주지 않았던 것 같던데. 그 이유는 뭐지?”
“놈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먼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서 가짜 정보를 내어줬습니다. 하지만 정체를 드러내지 않더군요. 꽤 실력이 있는 놈들이었습니다.”
“그런 실력 있는 놈들의 손을 왜 잡지 않은 것이냐.”
글렌은 그게 의문이라는 듯 냉랭한 눈동자로 카룬을 내려보았다.
“저는….”
카룬이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말만 하는데도 고통이 심한지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그는 억지로 입술을 달싹였다.
“저는 북패왕의 아들입니다. 인간을 벗어난 짓을 할지라도, 지그하르트를 배신하는 짓은 할 수 없습니다. 놈에게 말했듯 제가 제 손으로 지그하르트를 없앨지언정 외인들이 이 땅을 밟게 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는 다짐을 하듯이 본인의 진심을 밝혔다.
“…….”
글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차가운 눈빛 그대로 카룬을 지켜보았다.
“넌….”
그가 천천히 말문을 열려고 할 때 페드릭이 거칠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뭐, 뭐야! 왜 사람이 죽어 있는 거야!”
페드릭은 어이가 없다는 듯 비명을 질렀다.
“병실을 옮겨야겠다. 카룬을 본관 근처에 있는 곳으로 이동시키도록.”
글렌이 카룬의 침상을 가리켰다.
“야! 무슨 일인지 말이나 하고 가라고! 이놈은 뭐야!”
“나중에 술이나 한잔하지.”
그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병실을 나갔다.
글렌은 병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셰릴과 로엔에게 다가가서 손에 잡고 있던 레이지 웜의 시체를 내밀었다.
“이건….”
로엔은 손에 떨어진 레이지 웜을 보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특이 형태의 레이지 웜이다. 오마만 염두에 두지 말고, 레이지 웜을 사용한다는 소문이 있는 세력을 모조리 조사해라.”
“예.”
“알겠습니다.”
셰릴과 로엔은 라온의 이야기를 할 때와 달리 진중한 눈빛을 드러내며 가주전 쪽으로 사라졌다.
“시간이 없다고 했나?”
글렌은 별관 쪽으로 시선을 던지며 진천검의 검병을 매만졌다.
“내 시간이 다하기 전에 네놈들의 숨이 먼저 끊어질 것이다.”
지그하르트를 건드린 것을 후회하게 해주지.
* * *
라온은 별관 뒤편의 호수 위에 서서 제천검을 뽑아 들었다. 검을 상단으로 들어 올리려고 할 때 라스가 훅 튀어나왔다.
-크으으으!
라스가 통통하게 살이 오른 배를 매만지며 탄성을 흘렸다.
-역시 집밥이 최고이니라! 먹어도 먹어도 질리질 않는구나!
녀석은 만족스러운 식사였다며 길게 입맛을 다셨다.
-여기에 구슬 아이스크림 하나면 극락에 온 것 같을 텐데. 누가 한동안 맛난 거 사준다고 약속도 한 거 같은데….
라스는 마왕 주제에 극락 타령을 하며 손을 비볐다.
‘그건 지난번이잖아.’
-한 번이 아니었잖느냐! 약속 지키라고!
‘후우, 내일 가자.’
가만히 놔두면 하루종일 수다를 떨 것 같아서 빠르게 손을 저었다.
-크으! 대주가 되더니, 마음도 넓어졌구나! 마왕이 되면 얼마나 통이 커질지 모르겠어.
‘될 일 없거든.’
-그거야 모르지.
라스는 내일 보자며 팔찌 안으로 들어갔다.
라온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서 제천검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손목을 부드럽게 꺾으며 검을 내리쳤다. 청아하게 피어나는 검풍이 호수에 비친 달을 갈랐다.
치이이잉!
달이 쪼개지는 듯한 신비로운 현상이 일어났지만, 라온은 미간을 찌푸린 채 고개를 저었다.
“이게 아니야.”
오늘 보았던 글렌은 기본 검술처럼 단조로운 검식으로 카룬의 상승 검격을 박살 냈다.
감정과 의념을 엮은 듯한 그의 무력을 재현하려고 하는데, 당연하게도 잘 되지 않았다.
‘역시 보는 것과 직접 하는 건 다르네.’
라온은 짧게 혀를 차고서 바닥을 겨누던 검극을 쳐올렸다.
이무기가 하늘로 솟구쳐서 용이 되는 듯한 검격. 글렌이 보여주었던 창궁검의 초식이었다.
치이이이이잉!
검신을 타고 올라간 붉은 기류가 하늘을 쪼개버릴 듯이 솟구치다가 사그라들었다. 혜성처럼 붉은 꼬리가 허공을 적셨다.
‘이것도 아니야.’
지금 내 검술과 달리 글렌의 검은 하늘 그 자체를 이루는 듯 장대했다. 장창과 이쑤시개 이상의 차이였기에 헛웃음이 나왔다.
‘역시 바로 따라 하는 건 무리인가.’
아무리 심상의 세계가 성장했고, 불의 고리가 있다고 해도 초월자인 글렌의 검식과 깨달음을 바로 익히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그게 포기할 이유는 안 되지만.’
자신의 진짜 무기는 남을 따라 하는 재능이 아니라, 될 때까지 반복하는 끈기다. 할 수 있을 때까지 해보겠다고 다짐하며 다시 창궁검을 운용했다.
치이이잉!
첫 시도보다 균형이 어긋나서 미간을 찌푸릴 때 뒤편에서 묵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자세가 흐트러졌다.”
“어?”
라온이 마른침을 삼키며 뒤를 돌았다. 언제 왔는지 글렌이 호수의 앞에 서 있었다.
“가주님?”
그가 온 것을 느끼지도 못했다. 잘못한 게 없음에도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가, 가주님을 뵙습….”
“됐다.”
인사를 하려는데, 글렌이 손을 저으며 호수 안으로 걸어왔다. 물을 밟음에도 땅을 밟는 것처럼 표면에 자그마한 흔들림도 없었다.
“여기는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오그람. 그 멍청이가 네가 내 빚을 대신 갚았다고 했었지.”
글렌은 자존심이 상한다는 듯 미간을 구겼다.
라온은 글렌의 가라앉은 눈빛을 보며 눈을 끔벅였다.
‘음?’
기분이 조금 풀리신 것 같은데.
지금 글렌의 표정은 심각하게 굳어 있지만, 아까 카룬에게 처벌을 내릴 때보다는 훨씬 가벼워진 것 같았다.
“네가 한 일은 절대 가벼운 일이 아니다. 지그하르트와 야수연맹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어도 이상하지 않았어. 네가 그 전쟁을 막은 것이다.”
글렌은 감정을 읽기 어려운 눈빛으로 다가와서 고개를 끄덕였다.
“고생했다.”
“아닙니다.”
그저 주디엘과 쥬벨을 구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렇게 대단한 생각을 하며 저지른 일이 아니었기에 고개를 저었다.
“네가 겸손을 떨어도 했던 일은 변하지 않지.”
글렌이 품에서 책자 하나와 금패 하나를 꺼냈다.
“네 검술들과 창궁검의 해석을 담은 요결이다. 내 나름대로의 생각을 적었지만, 무조건 따르지 말고 이용만 하도록.”
그는 그 말을 하며 책자를 내밀었다. 만든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지 새 책 특유의 냄새가 피어났다.
“아….”
라온이 조심스럽게 책자를 받아서 펼쳐보았다.
유려하면서도 힘 있는 필체로 내가 익히고 있는 무학들의 해석이 적혀 있었는데, 하나같이 상세하고 세밀했다. 글렌이 나를 잘 보고 있었다는 게 느껴졌다.
“생사결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새로운 검술이나, 무학을 익히는 것보다 네 자신을 돌아보는 게 좋을 것이다.”
“가, 감사합니다.”
“크흠, 내가 혼자 한 게 아니니, 그런 인사는 필요 없다.”
글렌은 비연회주와 셰릴도 많이 고생했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그가 천천히 등을 돌렸다. 호수에 비친 달을 밟고 선 채로 눈을 내리감았다.
“대주가 된 것을 축하한다.”
글렌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호수에서 떠났다.
라온은 소리 없이 떠나가는 글렌의 등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이상하게도 손에 쥔 책자가 따스하게 느껴졌다.
* * *
5 연무장의 새벽은 평소와 다르게 분주했다.
“너 그거 들었어?”
버렌이 마르타에게 다가가며 입맛을 다셨다.
“라온이 대주가 된 거?”
“역시 알고 있었군.”
“모를 수가 있냐. 가문 전체가 그걸로 떠들썩한데.”
마르타는 모르면 귀가 먹힌 거라며 고개를 저었다.
“앞으로 좀 편해지겠네. 그 나태한 거렁뱅이 대주가 물러났으니까.”
그녀는 이제야 광풍대가 제대로 돌아갈 것 같다며 웃었다.
“사실 누가 와도 그 대주보다는 낫겠지.”
버렌이 리메르가 낮잠을 자던 단상을 보며 픽 웃었다.
“그래도 신기하지 않아? 여기서 같이 수련했던 놈이 대주가 된다는 게….”
마르타는 옛 생각을 떠올린 듯 자그마한 미소를 그렸다.
“그렇지. 그 꼬맹이 녀석이….”
버렌 역시 옛일을 그리며 턱을 매만졌다.
“그런데….”
그가 마르타의 시선을 따라가다가 미간을 구겼다.
“이제 라온을 어떻게 불러야 하지?”
“어떻게 부른다니?”
“지금까지는 부대주라 이름을 부리기도 하고, 반말도 했잖아. 그 녀석도 별 신경 안 썼고. 근데 대주가 되었으니….”
“뭘 물어.”
마르타가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손을 저었다.
“당연히 대주님이라고 하고, 말을 높여야지.”
“뭐?”
버렌이 마르타를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일 거부할 것 같은 애가 앞장서서 저런 말을 하니, 신기하여 헛바람이 나왔다.
“대주는 대를 앞에서 이끄는 위치야. 지휘 체계가 무너지면 모두의 목숨이 위험해지지. 우리끼리 따로 만난다면 모를까. 대원들의 앞에서는 무조건 대주 대우를 해줘야 해.”
마르타는 이미 결심을 마친 듯 담담하게 읊조렸다.
“라온 대주님?”
루난이 슬금슬금 다가와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앞으로는 라온을 그렇게 불러.”
마르타가 잘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찰녀 조장님?”
루난은 두 번째로 마르타를 가리키며 입매를 아주 살짝 올렸다.
“이 망할 잠탱이가!”
마르타가 이를 바득 갈며 루난에게 달려들었다.
“나찰녀. 화내지 마세여.”
“닥쳐!”
“응.”
루난은 바닥을 얼리면서 훌쩍 뒤로 물러섰다.
버렌은 날뛰기 시작하는 마르타를 보며 눈매를 좁혔다.
‘의외네.’
마르타는 라온에게 계속 반말을 써왔기에 대주가 되었어도 그 태도를 바꾸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누구보다 먼저 라온에게 존중을 보여야 한다고 말했다. 성질 더러운 꼬맹이가 성장한 듯한 느낌이라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쿠우웅!
버렌이 마르타와 루난의 작은 전쟁을 보며 미소를 짓고 있을 때 연무장의 문이 열리고, 리메르와 라온이 함께 들어왔다.
“정렬!”
그는 바로 광풍대를 모은 후 단상 앞으로 달려갔다.
라온은 단상 뒤편의 부대주 석에 서고, 리메르가 앞으로 나왔다.
“모두 들었겠지.”
그는 붉게 달아오른 듯한 광풍대의 눈빛을 마주하며 피식 웃었다.
“어제부로 광풍대의 대주가 바뀌었다.”
리메르는 차분한 눈빛으로 조장들부터 평대원까지 모든 검사들을 차례로 살핀 후 고개를 끄덕였다.
“미리 말하지 못해서 미안하지만, 이제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간 못난 대주를 따라주느라 고생 많았다.”
“정말 고생 많았죠.”
크레인이 리메르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 나태함에 물들지 않은 나를 칭찬하고 싶을 정도지.”
마르타가 눈살을 찌푸린 채 리메르를 보았다.
“여기에 출근 도장을 찍는 것보다 도박장에 찍는 날이 많았으니까.”
버렌은 리메르를 찾기 위해서 도박장을 돌아다닌 게 떠오른 듯 한숨을 내쉬었다.
“졸려.”
루난은 빨리하라는 듯 손을 흔들었다.
“이 자식들아! 분위기 파악 좀 해라! 이런 때는 곱게 보내주는 거라고!”
아름다운 이별을 그리던 리메르의 안색이 노랗게 물들었다.
“그간 대주님이 했던 일이 있는데 어떻게 아름답게 헤어집니까.”
“그리고 떠나는 것도 아니잖아. 부대주 자리로 내려만 가는 거라며.”
“그게 진짜 개꿀 아니냐. 아무것도 안 하고 급여만 타가는 월급 루팡.”
“부러운 삶이네.”
“그만.”
라온은 웅성거리기 시작한 광풍대를 자제시키고 앞으로 나왔다.
“게으름뱅이에, 도박꾼에, 주정뱅이, 거지라고 해도 일단 우리의 대주님이셨다. 자제하도록.”
“…내, 내 편 드는 거 맞지? 응?”
리메르는 어디가 아픈 듯 가슴을 움켜쥔 채 입술을 떨었다.
“일도 안 하고, 훈련도 안 하고, 정비도 안 하셨지만….”
“그만 거기까지! 아프다고!”
그는 글렌에게 얻어맞았을 때보다 더 아픈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대주님.”
라온은 입가에 연한 미소를 그린 채 리메르를 향해 검례를 취했다.
“그동안 고생하셨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그의 외침에 광풍대도 검을 뽑아들고, 리메르에게 검례를 보였다.
장난기가 모두 사라졌다. 예의와 진중함만을 담은 인사가 5연무장을 가득 채웠다.
“음….”
리메르는 흔들리는 눈빛으로 제자였지만, 이제 수하가 된 검사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너희들도 고생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럼 노땅은 뒤로 물러나고, 새로운 대주를 맞이 해야지.”
리메르의 손짓을 따라 라온이 단상의 앞 자리에 섰다.
“새로 대주가 된 라온 지그하르트다.”
라온은 반짝이는 듯한 광풍대의 눈을 마주하며 검례를 보였다.
“앞으로 잘 부탁한다.”
“잘 부탁드립니다!”
조장을 포함한 광풍대는 포효를 지르며 라온을 향해 검을 들어 올렸다. 리메르에게 인사를 할 때보다 배는 큰 목소리였다.
“…나쁜 놈들.”
리메르는 삐진 것처럼 고개를 홱 돌렸다.
“신임 대주로서 내 목표는 광풍대를 광풍전으로 승급시키는 거다. 앞으로 힘든 일이 많겠지만 잘 따라와 주기를 바란다.”
“예!”
“물론입니다!”
전의 승급이 목표라고 하니, 광풍대 모두가 환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대주가 된 기념으로….”
“회식입니까?”
크레인이 기다렸다는 듯 손을 들어 올렸다.
“특별 훈련을 진행한다.”
라온의 뒤를 잇는 말에 5연무장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훈련?”
“이 상황에? 이 분위기에?”
“우리 대주님. 진짜 분위기 못 읽는다.”
루난, 버렌, 마르타가 헛바람을 흘렸다.
“이번 훈련은 일주일간 진행하는 집중력 강화 훈련으로 북망산에서 결투 방식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먼저 추적자와 생존자로 조를 나눠서….”
라온은 준비해 온 훈련의 개요를 모두에게 설명했다. 그의 말이 이어질 수록 광풍대의 안색이 창백하게 젖어갔다.
“이, 일주일간 연속 훈련에 목숨을 건 결투까지 있다는 건 너무 심하잖아요!”
크레인이 겁에 질린 것처럼 눈동자를 떨었다.
“저, 전 그냥 죽을게요.”
도리안이 배 주머니에서 쇠망치를 꺼냈다.
“맞아….”
버렌이 턱을 부르르 떨었다.
“잊고 있었지만, 저 인간 악마였어!”
“그것도 평범한 악마가 아니라, 마왕이라고.”
“마왕의 귀환….”
광풍대는 예전 라온에게 훈련받던 기억이 떠오른 듯 턱을 부르르 떨었다.
“대, 대주님. 라온 님 좀 말려줘요!”
도리안이 리메르를 보며 두 손을 모았다.
“아하하.”
리메르가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이제 대주는 쟤야. 난 바빠서 이만….”
그가 도망치려고 할 때 라온이 길을 막아섰다.
“어디 가십니까?”
“엉? 나는 약속이 있어서 빠질….”
“이번 훈련은 광풍대 전원 참가입니다. 즉, 부대주도 함께해야죠.”
라온이 섬뜩한 미소를 그리며 리메르의 손목을 잡았다.
“아….”
리메르는 수갑처럼 꽉 움져쥔 라온의 손을 보며 헛바람을 흘렸다.
“그, 그런 게 어디 있어! 난 부대주….”
“여기.”
라온은 씩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앞으로 부대주도 모든 훈련에 참가합니다.”
“자, 잠깜만 내가 원하던 건 이게 아니었어! 물려! 물리라고! 나 부대주 안 해!”
부대주의 직함만 가진 채 월급을 받으며 꿀을 빨려고 했는데, 이렇게 훈련에 끌려가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늦었습니다.”
“이 악마 자식아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