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21화
“음?”
글렌은 이치에 맞지 않은 말을 들은 것처럼 눈살을 찌푸렸다.
“대주님!”
라온이 앞으로 달려가서 리메르의 어깨를 잡았다.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갑자기 대주 자리를 왜 넘긴다는 건데요!”
카룬의 일이 해결되어서 마음 편하게 별관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는데, 갑자기 대주 자리를 넘긴다고 하니 머리가 어지러웠다.
“때가 됐잖아.”
리메르가 뒤를 돌아보며 씩 웃었다.
“네 시녀와 그 동생을 위해서 중무전주와 대립할 정도라면 누가 와도 광풍대를 지켜낼 수 있을 거야. 난 너를 믿는다.”
그는 진심이라는 듯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너무 갑작스럽습니다.”
라온이 리메르를 보며 입술을 씹었다. 대주 자리에 오르는 건 상관없었다. 말만 부대주지 대주의 업무를 도맡아 했으니까.
내가 당황한 건 대주 자리를 받아서가 아니라, 리메르가 광풍대를 떠나려고 하는 것 때문이었다.
“의수도 달아놓고, 왜 은퇴하시겠다는 거죠? 무슨 문제라도 생긴 겁니까?”
리메르의 오른팔을 보며 눈동자를 가늘게 좁혔다.
“아니.”
리메르가 의수를 풍차처럼 돌리며 고개를 저었다.
“팔팔해. 원래 손보다 나을 정도야.”
“그런데 왜….”
“은퇴하는 게 아니야.”
그가 라온의 어깨를 잡으며 웃었다.
“나는 뒤로 물러나고, 네가 대주로 올라갈 뿐이야. 자리만 바뀌는 거지.”
리메르는 아직 광풍대를 떠날 생각이 없다며 머리를 흔들었다.
“가만히만 있어도 돈이 나오는 꿀 직장을 왜 때려치우겠어!”
그는 아직 갚아야 할 빚이 많다며 손가락을 비볐다.
“아….”
라온이 잔잔한 리메르의 눈동자를 보며 턱을 끄덕였다.
‘그거였군.’
리메르가 아예 광풍대를 떠난다는 건 줄 알았는데, 다행히 대주 자리만 물려 줄 생각인 것 같았다.
“넌 잘 할 수 있을 거다.”
리메르는 의수가 아닌 피가 흐르는 왼손으로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흠….”
“라온 지그하르트를 대주에 올리겠다고?”
“뭐, 실력은 충분하지.”
“솔직히 리메르보다 더 잘할걸?”
리메르의 말에 먼저 반응한 건 간부들이다. 그들은 괜찮아 보인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아리스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원래부터 라온이 광풍대주 아니었어?”
“그러네. 나도 라온이 광풍대주라고 생각했는데.”
“난 이미 넘긴 줄 알았어.”
“임무 보고서도 라온이 올리지 않나?”
그녀만이 아니라, 다른 간부들도 이상함을 느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소리야! 아직 광풍대주는 나야!”
리메르가 헛소리 말라는 듯 손을 저었다.
“흠….”
셰릴이 턱을 매만지며 리메르의 앞으로 나왔다.
“연무장 관리 누가 해?”
“라온이.”
“광풍대 인원 배치 누가 해?”
“라온이.”
“임무 중에 중간 보고 누가 올려?”
“라온이….”
“복귀 이후에 보고서랑 회계처리는?”
말하면서 화가 돋는지 셰릴의 목소리가 점점 가라앉았다.
“라, 라온이.”
리메르도 돌아가는 분위기를 느낀 듯 마지막에 가서 말을 더듬었다.
“네가 사람이냐?”
“엘픈데?”
“닥쳐!”
셰릴이 무릎을 꿇고 있는 리메르를 시원하게 걷어차 버렸다.
“…….”
글렌은 셰릴이 리메르를 더 잘 팰 수 있게 살짝 옆으로 물러나 주었다.
“저, 저건 밑에 있는 애들이 하는 일이잖아! 대주로서 할 일은 확실하게 하고 있다고!”
리메르는 저건 전부 부대주가 할 일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럼 내가 물어볼게.”
아리스가 미간을 찌푸린 채 리메르의 우측에 섰다.
“임무를 진행할 때 계획은 누가 짜냐?”
“라온이지!”
“임무 중 판단은 누가 내려?”
“라온….”
“전투 시 적의 수장은 누가 맡아?”
“그, 그것도 라온….”
“야이! 기생충 새끼야!”
그녀도 결국 참지 못하고, 주먹으로 리메르의 머리를 찍어버렸다.
뻐어어억!
땅이 무너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리메르의 목이 거북이처럼 승모근 안쪽으로 쑥 들어갔다.
“끄아아악!”
리메르가 그만 때리라는 듯 비명을 질렀지만, 아리스는 멈추지 않았다.
“아무것도 안 하네! 그러니까 다들 라온을 대주로 알았지!”
“넌 죽는 게 나아!”
셰릴이 다시 달려와 리메르를 짓밟았다.
“…….”
글렌은 이번에도 리메르를 더 잘 밟을 수 있도록 물러섰다.
“그, 그러니까 넘긴다고!”
리메르가 손을 휘저어서 셰릴과 아리스의 발길질에서 벗어났다.
“가주님 말 좀 해줘요!”
“음….”
글렌이 미간을 구긴 채 고개를 저었다.
“나도 라온이 광풍대주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진지하기 그지없는 상황에서 저런 말을 하는 것을 보면 진심인 것 같았다.
“아, 미치겠네!”
리메르가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가주님은 그러시면 안 되죠! 내가 얼마나….”
“시끄럽다.”
글렌이 입매를 비튼 채 뇌전을 뻗어냈다.
콰르르르릉!
리메르는 뇌전에 얻어맞아 검게 그을린 채 바닥을 굴렀다.
“월급만 축내는 놈이.”
글렌은 검게 타버린 리메르를 걷어 차버리고, 라온의 앞으로 다가갔다.
“라온 지그하르트.”
“예. 가주님.”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는 정말 대주 역할을 할 수 있냐고 묻는 듯 눈썹을 내렸다.
“현재 광풍대는 지그하르트만이 아니라, 대륙 전체의 관심을 받고 있다. 조장들은 마스터에, 조원들은 익스퍼트 최상급이지. 곧 마스터에 오를 녀석들도 몇 보이고.”
글렌이 차분히 손을 저었다.
“관심을 받는다는 게 항상 좋은 일은 아니다. 광풍대는 그만큼 많은 적을 만들었으니까. 언제나 누군가가 너희를 구해줄 수는 없는 법. 너는 네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서도 수하들을 지키는 벽이 될 수 있겠느냐.”
글렌은 단순히 대주의 역할이 아니라, 더 먼 곳을 바라보며 질문을 해왔다. 그가 광풍대를 잘 보고 있었다는 게 느껴졌다.
“가주님의 말씀대로 광풍대는 적이 많습니다. 하지만 적이 두려워 숨는다면 지그하르트의 검사라고 할 수 없겠지요. 싸우지 않아도 적들이 저희를 두려워서 피하게 만드는 광풍대를 이루겠습니다.”
라온은 그리 말하며 오른 주먹으로 왼 가슴을 두드렸다.
“그리고 수하들을 지키는 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비틀거리며 일어서는 리메르를 보며 웃었다.
“다른 건 몰라도 그것만큼은 확실하게 배웠습니다.”
“그런가.”
글렌은 라온과 리메르를 차례로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이지만 기운이 돌아온 듯한 안색이었다.
“잘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의외로 시작부터 칭찬을 하며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의외였지만 상황이 상황이니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이 시간 부로 라온 지그하르트를 광풍대주로 임명한다.”
글렌의 선언을 들은 간부들이 진중한 박수를 보내왔다.
“축하한다.”
“축하해.”
셰릴과 아리스가 옆으로 다가오며 연한 미소를 그렸다.
“실력에 비해 많이 늦었군.”
“앞으로 잘 부탁해.”
“다음 대주 회의에서 보도록 하지.”
“거기서는 선배의 무서움을 알게 될 거다.”
간부들도 웃으며 축하를 보냈다. 직계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미간만을 구겼다.
“가주님.”
라온이 글렌의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
“송구하지만,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부탁?”
“예. 주디엘과 쥬벨의 보호를 요청드려도 되겠습니까.”
“도, 도련님!”
“저희는 괜찮습니다!”
글렌에게 직접 보호를 부탁할 줄은 몰랐는지 주디엘과 쥬벨이 눈을 부릅뜬 채 손을 저었다.
“아니.”
글렌이 두 사람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니, 부담 가질 필요 없다.”
그는 걱정하지 말라며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지.”
글렌은 피로에 젖은 얼굴로 등을 돌렸다.
“너희 모두 따라오거라.”
그는 아리스와 발데르, 데니어를 차례로 부르며 가주전으로 돌아갔다.
“라온.”
리메르는 글렌이 사라지자마자, 벌떡 일어나서 옆으로 붙었다. 그에게서 탄내가 줄줄 흘렀다.
“너도 대주가 되었으니, 이제 내가 알려줄 게 좀 있다.”
“말씀하십시오.”
“일단 회계처리….”
“그거 제가 하잖아요.”
“어, 그러면 보고서….”
“그것도 제가 하는데요.”
“그럼 가끔씩 가주님 말동무….”
“그건 계속하셔야죠.”
들어보니 무엇 하나 도움이 되는 게 없었다.
“저도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뭔데?”
“이제 제 밑에 오셨는데, 제 훈련 감당하실 수 있겠어요?”
“억….”
리메르가 그건 생각하지 못했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훈련은 좀… 음? 잠깐만.”
그가 머리를 빠르제 저었다.
“그것도 하지 않았나? 너 나도 맨날 불러서 훈련 시켰잖아.”
“…그러네.”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니, 나는 한참 전부터 대주로 살고 있었던 것 같았다.
“하아….”
“음….”
어이가 없어서 한숨을 내쉬는데, 리메르가 씩 웃으며 엄지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월급 도둑 꿀맛!”
“이 인간아!”
라온이 참지 못하고 리메르를 걷어찼다. 참으로 매를 부르는 인간이었다.
-월급 도둑이 무엇인데, 꿀맛이라는 거냐! 당장 먹으러가자!
지루한 듯 하품하던 라스가 펄쩍 뛰어올랐다.
라온이 리메르와 라스를 보며 눈을 질끈 감았다.
‘아, 피곤해….’
* * *
라온은 쥬벨, 주디엘을 데리고 별관으로 돌아갔다. 이미 가문에 도착했다는 소식이 퍼졌기 때문인지 실비아와 시녀들이 별관의 정원 앞에 나와 있었다.
“주디엘!”
실비아가 거침없이 달려 나와 주디엘을 끌어안았다.
“마님….”
주디엘은 실비아의 품에 안긴 채 입술을 꾹 씹었다. 억지로 감정을 내리누르는 것 같았지만, 그녀의 눈동자에 옅은 물기가 차올랐다.
“걱정했어. 말이라도 해주고 가지.”
실비아는 주디엘의 안고 있는 손으로 등을 쳤다.
“그래도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야. 잘 돌아왔어.”
“…죄송합니다.”
주디엘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죄송하다는 말을 연달아 내뱉었다. 실비아의 어깨가 조금씩 젖어 들어갔다.
“주디엘!”
“언니!”
“괜찮은 거야?”
“다친 곳은 없고?”
헬렌과 유아를 비롯한 시녀들도 모두 뛰어와 주디엘과 실비아를 감쌌다.
그들은 사정보다 주디엘이 무사하다는 것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주디엘. 어디에 갔었던 거야!”
“괘, 괜찮으세요?”
엔시아와 시얀도 다가와서 주디엘의 안색을 살폈다.
“음….”
쥬벨은 주디엘을 감싼 시녀들을 보며 떨리는 손으로 손목을 꽉 잡았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누나를 걱정해주고 있었던 것에 감격한 것 같았다.
“라온.”
실비아가 주디엘의 등을 매만지며 시선을 올렸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돌아오면 설명해준다고 했지?”
“그런 말은 안 했는….”
-했다고 하거라! 이 분위기 못 읽는 자식아!
라스가 뒤통수를 후려쳤다.
-이게 마족인지 인간인지….
녀석은 왜 이리 감이 없냐며 미간을 찌푸렸다.
‘끄응….’
라온이 라스에게 얻어맞은 뒤통수를 매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희는 빠져 있을게요.”
헬렌이 다른 시녀들을 데리고 돌아가려고 할 때 실비아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다 같이 들어. 가족끼리는 숨겨서는 안 되니까.”
그녀는 누구 하나 빼놓지 않고 모두를 정원의 바닥에 앉혔다.
라온은 실비아를 보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조금 달라지신 것 같네.’
아니, 저게 어머니의 원래 성격일지도.
실비아는 단전을 회복한 이후로 전보다 더 당당하고 굳건해졌다.
본인이 내게 가르쳐주었던 지그하르트의 검사다운 모습이었다.
‘더 많이 바뀐 건 무력이지만.’
그녀는 벌써 마스터 중급. 아니, 상급에 거의 다다른 경지를 회복했다.
아무리 인공단전에 그랜드 마스터급 마나가 있었다고 해도 어마어마할 정도로 빠른 성장이었다. 글렌의 자식 중 최고의 재능을 가졌다는 말이 실감이 났다.
“이제 말해봐.”
실비아는 모든 사람을 차례로 본 후에 고개를 끄덕였다.
“시작은 꽤 옛날로 돌아가요. 저는 주디엘이 왔을 때….”
라온은 정원에 있는 모두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말해주었다.
“죄송합니다.”
주디엘은 모든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무릎을 꿇고, 땅에 머리를 박았다.
“저는 마님과 모두를 속였습니다. 정말 드릴 말씀이….”
“그만.”
실비아는 주디엘의 말을 막고 다시 그녀를 안아주었다.
“힘들었지.”
그녀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주디엘의 어깨가 바들바들 떨렸다.
시녀들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주디엘과 실비아를 함게 끌어 안았다.
“네가 쥬벨이구나.”
실비아가 주디엘을 안은 채로 고개를 들어 쥬벨을 보았다.
“처,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쥬벨은 당황한 듯 입술을 떨었다.
“별관에 온 걸 환영해.”
실비아가 쥬벨을 보며 햇살이 아롱진 꽃잎처럼 환한 미소를 그렸다.
그녀는 쥬벨이 암살자로 살았다는 것을 들었음에도 무서워하지도, 화를 내지도 않고, 그저 포용해주었다.
다른 시녀들도 주디엘의 동생을 환영하는 미소를 그렸다.
실비아와 시녀들이라면 깊은 상처를 입은 쥬벨과 주디엘을 받아들여줄 거라 생각했는데, 예상보다 더 잘 대해주었다. 그저 고마울 뿐이었다.
“돌아가자.”
실비아가 쥬벨과 주디엘의 손을 잡고, 별관으로 향했다.
“너희들을 위해서 별관의 별미를 준비했으니까!”
그녀는 조금만 기다리라며 방긋 웃었다.
-밥! 별미! 맛난 거!
라스는 화가 난 듯 팔짱을 끼고 있다가 밥이라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누구보다 빨리 별관으로 날아갔다.
‘역시 이곳이 마음이 제일 편하네.’
라스는 실비아와 시녀들의 뒷모습과 살랑거리는 라스의 꼬리를 보며 픽 웃었다.
-빨리 오거라! 네놈이 안 먹으면 본왕도 못 먹는다고!
‘간다. 가.’
* * *
넝마의 성자 페드릭은 침중한 눈빛으로 카룬의 전신을 훑었다.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군.’
글렌은 정말 카룬을 죽이려고 한 듯 내부에 씻기 힘든 상처를 새겨놓았다. 조치가 조금만 늦었어도 폐인이 되었거나, 죽었을 것이다.
‘뭐, 그럴 만도 하지만.’
카룬은 인간이 해서는 안 될 일을 저질렀다. 아들을 죽기 직전까지 몰아간 글렌의 고뇌와 고통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페드릭은 눈썹을 구긴 채로 손가락으로 카룬의 급소 부위를 두드렸다.
화상을 입은 듯 붉게 달아오른 카룬의 전신 모공에서 검은 핏물이 방울진 채 흘러내렸다.
그는 이마에서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손가락을 멈추지 않았다. 시간을 잊은 듯 마나 회로를 자극하던 손이 멈춘 건 은은한 달빛이 창가에 부딪칠 때가 되어서였다.
“후우….”
페드릭이 손을 내린 후 카룬의 입에 약을 넣어주었다.
“끄으….”
차를 마시는 시간 정도가 지나자 카룬이 천천히 눈을 떴다. 고통이 심한지 신음을 흘리며 입술을 떨었다.
“이제야 깼군.”
페드릭이 카룬의 이마를 만지며 한숨을 내쉬었다.
“성자님?”
“황천길은 보고 왔느냐.”
“음….”
카룬은 글렌에게 맞았던 기억이 떠올랐는지 눈매를 찡그렸다.
“대체 왜 그런 것이냐.”
“…….”
그는 아무 말도 없이 다시 눈을 감았다.
“뭐 됐다. 지금은 네 잘못을 따지려고 온 게 아니니까.”
페드릭은 다시 카룬의 상태를 살피고서 고개를 저었다.
“네가 아무리 그랜드 마스터라고 해도 내상이 너무 심하다. 완치되려면 몇 달로도 안 될 거다.”
“알고 있습니다.”
카룬 역시 본인의 몸 상태를 알고 있는지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고비는 넘겼지만, 네 내부는 걸레와 다를 바가 없어. 한동안 오러 연공도 하지 말도록.”
“예….”
“그럼 새벽에 다시 오마.”
페드릭은 잠시 카룬을 바라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감사… 합니다.”
“쉬거라.”
그는 손을 젓고서 병실을 나갔다.
“후.”
카룬은 그제서야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오러는 살아 있군.’
페드릭의 말대로 단전과 마나 회로가 넝마가 된 듯 찢겨졌지만, 복구 불가능한 상처는 아니었다.
많은 시간이 걸리긴 하겠지만, 회복은 가능할 것 같았다.
‘아버지가 직접 움직이실 줄이야….’
강한 징계가 내려올 수도 있다는 생각은 했지만, 직접 손을 쓸 줄은 몰랐다. 글렌에 대한 예측을 바꿔야 할 것 같았다.
“하아….”
“후회하십니까?”
카룬이 한숨을 내쉴 때 병상 아래에서 간드러진 음성이 울렸다.
우우우웅.
검은 그림자 속에서 잔잔한 빛이 일렁이더니, 먼지 하나 묻지 않은 새하얀 로브를 입은 남자가 떠올랐다.
“너….”
카룬은 남자를 본 적 있는 듯 놀라지 않은 채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게 진즉에 저희와 손을 잡았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요.”
로브를 입은 남자가 고개를 저으며 비웃음을 흘렸다.
“이곳에는 어떻게 들어왔지?”
“저희는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습니다.”
로브의 남자는 대답하기 싫은 듯 고개를 저었다.
“어떠십니까? 지금이라도 저희의 손을 잡는 건.”
그가 얼음장처럼 새하얀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 하신다면 라온 지그하르트를 지우고, 지그하르트의 가주로 만들어드리겠습니다.”
“큭!”
카룬이 로브의 남자를 보며 비웃음을 흘렸다.
“내어 준 정보도 이용 못 하는 버러지들 따위가?”
“그거 섭섭하네요. 당신의 정보가 잘못되었기 때문이잖습니까.”
로브의 남자가 고개를 저었다.
“어찌되었든 이제는 결정을 내리셨겠죠?”
그가 카룬을 향해 투명한 손아귀를 뻗었다.
“이제 당신에게 주어진 방법은 하나뿐….”
“개소리 말고 꺼져라.”
카룬이 시뻘게진 눈동자로 로브의 남자를 노려보았다.
“가주가 되고 싶으신 거 아니었습니까?”
“되고 싶지. 아니, 될 것이다. 하지만 그건 내 힘으로 이뤄야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가 짐승처럼 이를 바드득 갈았다.
“지금 상태로는 힘들 텐데요. 아니 불가능합니다.”
“나는 카룬 지그하르트다. 가주가 되지 못해 내 손으로 지그하르트를 멸망시킬지라도, 외부의 쓰레기들과 손을 잡을 생각은 없다.”
카룬은 그것만큼은 양보할 수 없다는 듯 힘없는 육체로 주먹을 말아쥐었다.
“하.”
로브의 남자가 고개를 저었다.
“정말이지 지그하르트 인간들의 자존감은 하늘을 찌르네요.”
그가 앞으로 내민 손을 모아 수도를 세웠다.
“날개가 뜯긴 날벌레가 주제를 몰라도 너무 몰라. 주제 파악을 못 하는 벌레는….”
로브의 남자가 날을 세운 수도로 카룬을 향해 내리찍었다.
“밟아 죽여야지!”
그 순간 붉은 뇌전이 번쩍이며 로브 남자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콰드드득!
글렌 지그하르트. 가주전에 있어야 할 그가 로브 남자의 손목을 뼈째로 으깨버렸다.
“창을 열어두면 안 되지.”
글렌의 붉은 눈동자가 창가로 스며든 달빛을 짓눌렀다.
“벌레가 들어왔잖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