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20화
라온은 알현실을 나서는 글렌을 보며 몸을 일으켰다.
‘어디를 가시는 거지?’
글렌은 카룬에 대한 징계를 내리지 않고, 갑자기 알현실을 나가버렸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내 생각과는 다른 징계를 내리실 생각인가?’
그가 카룬에게 내릴 징계는 정직과 중무전의 봉문으로 예측했다.
하나 더 추가하자면 중무전의 실적과 자금을 광풍대에 몰아주는 정도.
카룬은 후계자에 가장 가깝고, 직계의 수장이나 다름없는 위치에 서 있기에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글렌은 그렇게 끝낼 생각이 없다는 듯 패도적인 기파를 뻗어내며 알현실을 벗어났다. 징계와 관계없는 내가 오싹해질 정도였다.
“크으….”
카룬이 입술을 꾹 씹은 채 시선을 돌렸다. 주디엘과 쥬벨을 차례로 노려보는 그의 눈동자가 칼날을 씌운 듯 섬뜩했다.
“기다려라. 이대로는 끝나지 않을 테니까.”
그는 딱 두 마디를 던지고서 글렌을 따라 알현실을 나섰다. 표정에는 여유가 없었지만, 걸음은 흔들림 없이 당당했다.
라온은 끝까지 침착한 카룬의 걸음걸이를 보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언제까지 당당할지 궁금하군.’
처음부터 여기서 카룬을 퇴장시킬 생각 따위는 없었다.
글렌이 카룬에게 징계를 내린다고 해도, 그의 끝을 보는 건 내가 해야 한다. 징계는 징계고 개인적인 복수는 따로였으니까.
주디엘과 쥬벨의 삶을 농락하고, 별관을 위협한 카룬과 중무전은 내 세력과 무력으로 직접 무릎 꿇릴 것이다.
“오늘 송장 하나 치우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
아리스가 노을빛 머리를 벅벅 긁고서 글렌의 뒤를 따라갔다.
“가주님이 화가 단단히 나셨는데.”
리메르가 옆으로 다가와서 픽 웃었다.
“쉽게는 안 끝나겠어.”
“설마 연무장에 가는 겁니까?”
라온이 리메르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아리스과 리메르의 말을 들으니, 글렌이 가는 곳이 어디인지 예측이 되었다.
“그래. 지금 본인 손으로 아들 패겠다고 선언하셨잖아.”
그가 가볍게 주먹을 휘둘렀다.
“말로만 하는 사람이 주먹을 쥐었으니, 꽤 위험할지도.”
리메르가 어깨를 툭 치고서 알현실을 벗어났다.
“가주님이 직접 검을 휘두르시는 건가…?”
“빠, 빨리 따라가!”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요즘은 사건 사고가 끊이질 않는군.”
직계와 간부들도 창백해진 표정으로 달려 나갔다.
“일어나.”
라온이 아직도 당황한 채 무릎을 꿇고 있는 주디엘과 쥬벨의 팔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우리도 가야지.”
“괘, 괜찮을까요?”
쥬벨은 너무 커져 버린 상황에 당황한 듯 입술을 떨었다.
“혹시 이번 일 때문에 도련님께 문제라도 생기면….”
주디엘도 걱정이 되는 듯 입술이 파랗게 질려 있었다.
“내 걱정은 나중에 하고 일단 움직이자.”
라온이 두 사람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서 앞으로 걸어갔다.
“너희들의 인생을 망친 놈이 신나게 얻어맞는 꼴을 놓쳐서는 안 되지. 1등석에서 보자고.”
* * *
글렌은 가주전 뒤편에 세워진 연무장으로 걸어가며 천천히 눈을 내리감았다.
‘모두 내 탓이다.’
카룬의 인성이 저렇게 망가져 버린 것은 자신이 그를 제때 잡아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리스와 카룬이 어렸을 적에는 두 아이가 하고 싶어 하는 것을 모두 해줬고, 그들의 고삐를 제대로 잡아주어야 할 시기에는 마에 빠져서 스스로를 통제하기도 바빴다.
교육에 가장 중요한 시기를 놓쳤기에 오그람의 말대로 자식 농사를 똥 밭에서 지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
아리스는 자유로운 성격 덕분에 가문을 벗어나서 스스로의 삶을 쟁취했지만, 카룬은 달랐다.
그는 아리스가 해야 할 일까지 도맡아 하면서 신뢰를 쌓은 후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는 뒤편에서는 더럽고 추한 일을 가리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그걸 알면서도 카룬을 건드리지 않았다. 바꾸는 것도 어렵지만, 그를 그렇게 만든 내가 통제를 거는 것 자체가 우습게 여겨졌다.
솔직히 난잡한 세상에 카룬 같은 녀석이 있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 일은 너무 과했어.
아무 죄도 없는 아이들을 데리고 와 첩자와 암살자로 키우고, 그들을 언제라도 던져버릴 수 있는 버림 말로 사용하다니, 참을 수가 없었다.
특히 그 일을 겪은 게 라온과 그의 시녀였다는 것에 더더욱 화가 났다. 평소처럼 적당한 징계로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후….”
연무장의 중심에 서서 뒤를 돌았다. 카룬이 어금니를 깨문 채 맞은편에 서 있었고, 아리스를 비롯한 간부들은 외곽에 물러나 마른침을 삼키고 있었다.
평소라면 카룬의 명예를 생각하여 간부들을 모두 돌려보냈겠지만, 이번 일은 모두의 앞에서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글렌은 뒤늦게 온 라온과 주디엘, 쥬벨에게 속으로 미안하다는 말을 던지고서 카룬에게 시선을 돌렸다.
“카룬 지그하르트.”
중무전주가 아니라, 카룬의 이름을 부르며 한 발 앞으로 나왔다.
“예. 가주님.”
카룬은 아버지가 아니라, 가주님이라 대답하며 고개를 숙였다.
“사람이 사람으로 살기 위해서는 지켜야 할 선이 있다.”
글렌이 가볍게 손을 젓자, 그와 카룬 사이의 땅에 가느다란 선이 새겨졌다. 두껍지도, 얇지도 않지만, 눈에 확 띄는 형태의 선이었다.
“이 선을 넘느냐 마느냐에 따라서 인간과 마가 갈리게 되지.”
“…….”
카룬은 대답 없이 바닥에 새겨진 선을 바라보았다.
“그 선을 구별하는 건 쉽다. 넘어야 할지 넘지 말아야 할지 스스로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까.”
글렌이 머리를 뒤로 넘기며 미간을 찌푸렸다.
“너는 이번에. 아니, 그 전부터 이 선을 넘었다.”
그는 바닥에 그어놓은 선 앞에 서서 카룬을 굽어보았다.
“네 필요에 의해서 저 아이들을 죽였다고 해도 난 별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네 판단에 의하여 가문의 인사를 죽였다고 해도 적당히 넘어갔을 것이다. 다른 세력의 무인을 납치했어도 무마시켜주었을 것이야. 그 모두는 인간의 선을 벗어난 일이 아니니까. 허나….”
글렌이 주먹을 말아쥐자, 연무장 전체가 진동하며 바닥에 그어진 선이 뚝 끊어졌다.
“네놈은 사람의 삶을 농락하고 조롱했다. 신이나, 악마가 해야 할 일을 인간의 몸으로 저질렀지.”
그가 장포를 걷고 진천검을 뽑아 들었다. 천지가 울리는 듯한 어마어마한 기파가 치솟으며 사위로 검붉은 뇌전이 번쩍였다.
“이대로 끝을 내고 싶지만, 너를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내 탓도 있으니, 기회를 주마.”
글렌이 가볍게 검을 긋자, 연무장 바닥에 새로운 선이 새겨졌다. 전보다 얇으면서도 길쭉한 선이었다.
“네가 한 발이라도 이 선을 넘어온다면 아무런 징계 없이 넘어가 주마. 누구도 따지지 않게 해주지.”
그는 그 말을 하면서 진천검을 내렸다.
“진심이십니까?”
카룬이 글렌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나는 한 입으로 두말하는 사람이 아니다. 준비가 되었다면 검을 뽑아라.”
글렌은 지금 한 말을 지키겠다는 듯 주변에 있는 간부들을 돌아보았다.
스르르릉.
카룬이 입술을 깨문 채 검을 뽑아 들었다. 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바로 의념과 강환을 일으켰다.
“온 힘을 다하거라. 그렇지 않으면….”
글렌이 진천검을 세웠다. 하늘을 찌를 듯이 들어 올린 진천검을 그대로 내리쳤다.
“죽게 될 테니까.”
검극에 어린 오러가 번쩍이는 순간 카룬의 앞으로 검붉은 벼락이 작렬했다.
쿠와아아아아앙!
* * *
라온이 분노의 마안을 운용하여 시야를 차단하는 뇌전 속을 살폈다.
콰아앙!
카룬이 몸을 가누지 못한 채 뒤로 튕겨 나갔고, 그가 운용하던 강환이 넝마가 된 것처럼 뜯겨나가 있었다.
“으으윽….”
카룬은 손아귀를 부르르 떨며 입가에서 흘러내린 피를 닦았다. 단 일검을 막은 것만으로 내상을 입은 것이다.
“고작.”
글렌이 뇌전이 일렁이는 진천검을 휘저으며 고개를 틀었다.
“고작 그 수준으로 타인의 인생을 농락한 것이냐.”
“흐읍!”
카룬이 숨을 들이마신 채 글렌이 없는 우측으로 보법을 밟았다.
전방의 뇌전을 향해 검격을 뻗어낸다. 고귀하면서도, 절도 있는 검식 속에서 치솟은 강환이 뇌전의 벽을 뚫어냈다.
치이이잉.
그가 나아가는 기세 그대로 바닥에 새겨진 선을 넘으려고 할 때 글렌이 나비를 쫓는 듯한 가벼운 검식을 일으켰다.
검극에서 줄기줄기 뻗어나간 뇌전이 카룬의 검격을 깨부수고, 그를 그대로 찍어눌렀다.
쿠와아아아앙!
카룬이 전신에 두르고 있던 강환의 방패가 으깨지며 그가 발로 찬 공처럼 바닥을 굴렀다.
“커흐흑!”
카룬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은 바닥의 선을 보며 피를 토했다.
“카룬.”
글렌이 진천검을 내리며 가는 숨을 내뱉었다.
“네게는 무의 재능이 있었다. 네 시간을 무를 위해 사용했다면 지금의 아리스보다 높은 곳에 있었을 것이야.”
글렌은 검만이 아니라, 입으로도 카룬을 후려 팼다.
“저는 그저 가주가 되고 싶었을 뿐입니다!”
카룬이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켰다. 핏물 때문에 그의 이가 모두 뻘겋게 보였다.
“될 수 있었다. 아리스는 가주 자리에 관심이 없었으니, 네가 그와 같은 경지에 섰다면 후계자가 되었겠지. 허나 너는 네 자신이 아닌 다른 곳에 눈을 돌리고 있었다. 가장 가까운 길을 놔두고 마를 향했기에 지금 그 수준밖에 이루지 못한 것이다.”
글렌은 미간을 구긴 채 카룬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마주했다.
“잘못 온 길은 돌아가면 되지만, 너는 검은 진흙에 발을 디뎠다. 후회한다고 되돌릴 수 없지.”
“크윽….”
“일어나라. 네가 해온 일들은 이 정도로 용서를 받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는 아들이 아니라, 적을 보는 듯한 냉랭한 눈빛으로 손가락을 까딱였다.
“아직 시작도 안 했으니까.”
나지막한 음성과 동시에 벼락이 떨어진다.
“이익!”
카룬이 벼락을 피하기 위해서 바닥을 굴렀다. 하지만 글렌의 뇌전은 살아 있는 것처럼 나선으로 꺾이며 카룬의 허리를 찍어버렸다.
쿠와아아아아앙!
카룬이 망치에 찧은 못처럼 허리가 꺾인 채 전신을 떨었다. 그의 입과 허리에서 핏물이 줄기줄기 뿜어져 나왔다.
라온은 그 모습을 보며 손끝을 떨었다.
‘진심이시군.’
카룬은 외상보다 심한 내상을 입고 있었다.
마나 회로 전체가 손상되었고, 단전도 큰 충격을 받은 상태. 지금 여기서 멈춘다고 해도 몇 개월은 요양해야 할 것이다.
“후욱….”
카룬은 그대로 누워 있을 법한데도, 다시 일어나서 글렌의 앞에 섰다.
추한 인간이지만, 자존심 하나는 인정할 만했다.
“크아아아아아!”
그가 악을 지르며 달려 나갔다. 근육과 마나 회로가 파열되어 전신에서 피를 흘리면서도 앞으로 검을 내질렀다. 검극에서 파도와도 같은 거대한 기류가 솟구쳤다.
지금의 내가 전력을 다해도 막아낼 수 없는 초상승의 검식이었다.
하지만 글렌은 그 검식을 보면서도 흔들리지 않았다.
차라도 마시는 듯한 담담한 눈빛으로 진천검을 치켜든다.
이전처럼 강렬한 뇌전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순수한 검술. 화려하지도, 무겁지도 않은 진중한 검식이 하늘을 향해 승천했다.
쩌어어어어억!
카룬의 검격이 박살 나고, 그의 검이 유리 조각처럼 깨져나갔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뜨는 그의 가슴에서 시뻘건 핏물이 치솟았다.
라온은 글렌의 검식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창궁검이다.’
그것도 내가 아직 익히지 못한 초식.
지금 글렌은 본래 사용하던 뇌전의 검술이 아니라, 내게 알려주었던 창궁검의 검식으로 카룬의 검을 깨부쉈다.
이 와중에 가르침을 내리는 건 아니겠지만, 자그마한 깨달음이 머리를 자극했다.
“크헉….”
카룬은 곧 죽을 것처럼 숨을 헐떡이며 무릎을 꿇었다.
‘아직 아니지.’
라온은 카룬을 보며 미간을 좁혔다.
‘빨리 일어나.’
카룬이 죽기를 바라서가 아니다.
글렌의 검식을 조금 더 보고 싶었다. 직접 결투할 때보다 공부가 되고 있기에 이대로 끝난다면 너무 아쉬울 것 같았다.
-진짜 미친놈이니라….
라스가 질렸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 상황에서도 수련이냐!
녀석은 제발 좀 참으라며 머리를 헝클었다.
라온은 라스의 손을 무시하고 다시 일어선 카룬을 보았다.
그는 강환을 폭발시킨 후 선을 향해 달려가다가 다른 창궁검의 초식을 얻어맞고, 다리가 부러진 허수아비처럼 쓰러졌다.
“끄으으윽….”
카룬은 이제 통증을 견디기 힘든지 상처를 부여잡은 채 열이 차오른 신음을 흘렸다. 그는 너무도 멀어 보이는 바닥의 선을 보며 피나도록 입술을 씹었다.
“카룬 지그하르트.”
글렌이 카룬을 절망시킨 선 앞에 서서 고개를 저었다.
“이 선조차 넘지 못하는 주제에 타인의 삶을 농락한 것이냐.”
“…….”
카룬은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를 떨궜다. 피를 너무 흘려서 정신이 없는 것 같았다.
“네가 무엇을 만들었고, 어떤 짓을 해왔는지 전부 가져오거라.”
“…아, 알겠습니다.”
카룬이 피를 토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검게 죽은 피를 보니, 내상이 극심해진 것 같았다.
“데니어, 발데르.”
“예.”
데니어와 발데르가 마른침을 삼키고서 글렌의 앞에 섰다.
“현무전과 진무전을 동원하여 중무전 전체를 수색하라. 사소한 것 하나도 놓치지 말고 전부 조사하도록.”
“알겠습니다.”
“예!”
두 사람은 빠르게 대답하며 고개를 숙였다.
“지금부터 중무전을 봉문하고, 카룬 지그하르트에게는 정직을 내린다. 기간은 정하지 않겠다.”
기간을 정하지 않겠다는 건 평생 갈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알겠습니다.”
카룬은 죽을 듯 창백한 표정임에도 다시 허리를 세운 채 고개를 숙였다. 저 상태에서도 일어서다니, 인내심만큼은 나와 비교해도 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리고.”
글렌이 진천검을 검집에 넣고서 시선을 내렸다.
“네가 농락한 이들을 모두 데리고 와서 직접 사과해라.”
“크흐….”
카룬은 대답하지 못하고, 입술을 씹었다.
“싫다면 다른 선택도 있다. 물론….”
“하겠습니다.”
그는 다른 선택이 무엇인지 알아차린 듯 고개를 숙였다.
라온은 카룬의 상태를 살피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죽기 직전이군.’
글렌은 카룬에게 무기한의 정직을 명했지만, 그게 아니었어도 그는 한참 동안 자기 힘으로 서지도 못할 것 같았다.
“우리는 오마가 아니라, 육황이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있을 수 있는 최소한의 선을 지켜라.”
“크흐….”
카룬은 글렌의 마지막 말에 대답하지조차 못한 채 눈을 감고 쓰러졌다. 하지만 그의 마지막 신음은 꼭 비웃음처럼 들렸다.
“데리고 가라.”
글렌의 손짓에 대기하던 무인들이 카룬을 업고 연무장을 달려 나갔다.
“너희 역시 명심하도록.”
그가 간부들을 차례로 보며 고개를 저었다. 꼭 무언가를 겁내는 것처럼 계속해서 선을 지키라고 말했다.
“역시 네가 오니까 사고가 일어나네.”
라온이 조용히 글렌을 지켜보고 있을 때 리메르가 다가왔다.
“예?”
“네가 온다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하늘이 어두워지더라고. 이 정도는 아니라도 사고가 터질 줄 알았지.”
그는 하늘을 가리키며 입매를 말아 올렸다.
“그래서 딱 좋은 날이야.”
리메르가 피식 웃으며 등을 돌리려는 글렌의 앞에 섰다.
“가주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뭐지?”
글렌은 다시 등을 돌려서 리메르를 바라보았다.
“사실 고민을 좀 많이 했습니다. 제 욕심이든, 바람이든. 하지만 오늘 일을 보고 확신했습니다. 이제 넘겨도 될 것 같네요.”
리메르가 무릎을 꿇고, 의수를 왼쪽 가슴에 얹었다.
“저는 오늘부로 광풍대의 대주 자리에서 물러나고….”
그가 확신을 담은 눈빛으로 글렌의 붉은 눈을 마주 보았다.
“라온 지그하르트를 광풍대주로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