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618화 (617/653)
  • 제618화

    라온은 가문으로 복귀할 준비를 모두 마친 후 숙소를 나왔다.

    “준비는 다 끝났어?”

    주디엘과 쥬벨은 한참 전에 준비를 끝냈는지 숙소와 가까운 나무 밑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예. 전 딱히 가져온 게 없으니까요.”

    주디엘이 손에 들고 있던 작은 보자기를 보여주며 옅게 웃었다. 표정이 살아 있다. 동생을 만난 이후로 감정의 둑이 터진 것 같았다.

    “저도 무기와 야행복밖에 가져온 게 없어서 이대로 가면 됩니다.”

    쥬벨이 단검을 숨겨둔 허리춤을 가리키며 어색한 미소를 그렸다.

    “남매라서 그런지 웃는 모습도 비슷하네. 가자.”

    라온이 두 사람에게 손짓하고서 마을의 출구로 향했다. 나가는 문이 보이기도 전에 열을 맞춰서 서 있는 스란 부족민이 보였다.

    “부족장님.”

    라온은 부족민들의 중심에 서 있는 스란 부족장에게 다가가서 고개를 숙였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덕분에 잘 쉬고 갑니다.”

    “쉰 거 맞나? 매일 맞는 것만 봤는데.”

    부족장이 라온의 위아래를 훑어보며 피식 웃었다.

    “저는 그게 쉬는 겁니다.”

    “역시 패기 하나는 제일이로군. 나는 아직도 자네가 꿈에서 나와. 그날 밤에 본 자네의 붉은 눈동자는 평생 잊을 수 없을 거네.”

    그는 싸움을 막을 때 보였던 기세가 아직도 느껴진다며 어깨를 떨었다.

    “죄송합니다. 그때는 급해서….”

    “아니, 고맙네.”

    부족장이 라온의 손을 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당시에는 나도 크게 흥분했었어, 자네가 아니었다면 우리 아이 중에서도 죽은 놈들이 많았을 거야.”

    그는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말하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앞으로 힘든 일이 있다면 언제든지 연락하게. 자네가 부른다면 나와 이 녀석들이 모든 일을 제쳐두고 달려갈 테니까.”

    스란 부족장이 양팔을 펼쳐서 부족 전체를 가리켰다.

    “그게 무슨….”

    “우리 스란 부족은 절대 은원을 잊지 않네. 자네 덕분에 모두가 살았으니, 부족 전체가 목숨을 빚진 셈이지. 생을 모두 걸어서라도 자네를 돕겠네.”

    “맞습니다! 언제든지 말만 하십시오!”

    “밥을 먹다가도 달려가겠습니다!”

    “저는 똥 싸다가도 갈 겁니다!”

    “언제라도 괜찮으니 말만 해주십시오!”

    스란 부족민들도 꼭 돕겠다는 듯 움켜쥔 주먹을 들어 올렸다.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주디엘을 쫓아 온 거라….”

    “이유가 어찌 되었든 자네가 우리를 살린 건 맞지 않나. 부담가지지 말게. 목숨에는 목숨이니까.”

    “음….”

    라온이 고개를 저었다. 부담가지지 말라고 말하면서 목숨 이야기를 하니 손이 떨릴 정도로 부담이 되었다.

    “맞는 말이다!”

    우측에 세워진 마을 식당 뒤편에서 땅을 울리는 듯한 목소리가 울렸다.

    오그람이 몽둥이 같은 크기의 고기를 씹으며 문을 걷어차고 나왔다.

    “연맹주님?”

    -저, 저거!

    라스가 오그람의 고기를 가리키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본왕도 저 고기가 먹고 싶으니라!

    녀석은 자기도 저렇게 게걸스럽게 고기를 뜯어 먹고 싶었다며 어깨에 매달렸다.

    ‘가만히 좀 있어봐.’

    라온은 라스를 쳐낸 후 오그람을 바라보았다.

    “맞는 말이라고 하신 건….”

    “은혜를 입었다면 은혜를 갚아야 하는게 맞잖느냐!”

    오그람이 성인 남자의 팔뚝만 한 고기를 뜯고서 다가왔다.

    “거절할 필요도, 부담을 가질 필요도 없다. 당연한 것을 받는 것뿐이니까.”

    그는 시원하게 웃으며 어깨를 두드렸다.

    “맞아.”

    가로나가 오그람의 옆에서 붙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얼굴 전체에 멍이 들어 있음에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우리 야수연맹은 그 어떤 세력보다도 은원이 뚜렷해. 형제가 스란 부족을 구했으니, 저들이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거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라온이 한 발 뒤로 물러서며 스란 부족장과 부족민을 살폈다.

    오그람이나 가로나의 말처럼 저들에게서 거짓된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작든 크든 모두가 진심으로 내게 도움을 주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야! 형제를 위해서라면 내 뼈와 살을 모두 바칠 수 있어!”

    가로나가 본인의 가슴을 두드리며 언제라도 부르라고 외쳤다.

    “그건 좀 참아줘.”

    라온이 두 손을 빠르게 저으며 마주 선 사람들을 살폈다.

    ‘또 인연이 쌓인 건가.’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우연이 겹치며 이들과도 좋은 인연으로 연결된 것 같았다.

    가로나의 말대로 이 이상 거절한다면 이들에게도 실례가 되기에 마음을 정하고 앞으로 나왔다.

    “감사합니다. 스란 부족의 호의는 고맙게 받겠습니다.”

    라온이 스란 부족 전체를 보며 고개를 숙였다.

    “물론이네! 형제와도 같다고 생각하게나.”

    스란 부족장이 마주 고개를 숙이며 구김없는 미소를 보여주었다.

    라온은 스란 부족과 인사를 나눈 후 쥬벨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 눈빛의 의미를 알아차린 녀석이 앞으로 나왔다.

    “죄송합니다!”

    쥬벨은 스란 부족을 향해 직각이 되도록 허리를 굽혔다.

    “저는 여러분 모두를 속였습니다. 드릴 말이 없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괜찮다.”

    스란 부족장이 담담하게 고개를 저었다. 다른 부족민들도 눈빛에 악의를 보이지 않고 평온한 시선으로 쥬벨을 바라보았다.

    “예?”

    쥬벨은 저런 반응을 예상하지 못한 듯 눈을 부릅떴다.

    “너처럼 살았다면 누구라도 그렇게 되었을 것이야. 용기를 내어줘서 고맙다.”

    스란 부족장이 쥬벨의 앞으로 다가갔다.

    “다음에는 필립이 아닌, 쥬벨로서 찾아오거라.”

    그는 그 말을 하며 쥬벨의 어깨를 잡아주었다.

    “…….”

    쥬벨이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의 어깨가 가늘게 떨리며 따스한 땅을 적시는 비가 내렸다.

    “형제여!”

    가로나가 라온의 옆으로 다가와서 어깨를 걸쳤다.

    “격해무를 이뤘다고 들었는데, 비법을 좀 알려다오!”

    그는 부탁한다며 손을 들었다. 질투 같은 것은 보이지 않는다. 정말 조언만을 구하고 있었다. 순수함을 넘어서 보기만 해도 마음이 편해지는 사람이었다.

    “너 자신을 믿어.”

    라온은 지금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조언을 해주었다. 격해무는 스스로 깨달음을 얻어야 하기에 이 이상의 힌트를 준다면 오히려 평생 얻지 못할 수도 있었다.

    “나 자신?”

    가로나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형제여! 더 쉽게! 더 편하게 설명을….”

    “멍청한 놈!”

    오그람이 다시 질문을 해오는 가로나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꾸에엑….”

    쇳덩이가 찌그러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가로나가 픽 쓰러졌다.

    “그 정도 조언이면 충분하지. 쉬운 길 따위는 없다!”

    오그람은 미간을 찌푸린 채 쓰러진 가로나를 어깨에 걸쳤다.

    “그간 고생했다.”

    “아닙니다.”

    “나도 마지막으로 조언을 해주자면 가끔은 어려운 길을 택해야 더 멀고 깊은 곳으로 갈 수 있다. 이놈처럼 되지 말거라. 그리고….”

    그가 품에서 누런 종이 하나를 꺼냈다.

    “이건 너희 가주에게 주는 편지다. 꼭 놈에게 보여주도록.”

    “알겠습니다.”

    오그람의 편지를 받아서 안쪽 주머니에 넣었다.

    “그럼 가라.”

    그는 빨리 떠나라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라온은 오그람에게 고개를 숙인 후 뒤를 돌았다. 각자 미소와 눈물을 보이는 주디엘과 쥬벨을 보며 손을 털었다.

    “돌아가자. 지그하르트로.”

    *     *      *

    리메르는 5 연무장의 중심에 서서 의수로 검을 뽑아 들었다. 예전과는 전혀 다른 감각. 하지만 정신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기본 검술을 펼치듯이 가볍게 검을 휘둘러보았다. 햇살이 아롱진 칼날이 유려한 빛무리를 그리며 떨어져 내렸다.

    검신의 뒤를 이어서 쏟아지는 바람이 바닥에 깊은 검흔을 새겼다.

    ‘나쁘지 않군.’

    리메르가 입맛을 다시며 의수의 마나 회로에 조금 더 진한 오러를 담았다. 단전에 깃든 바람의 기운이 요동치며 손아귀를 통해 강대한 바람을 뿜어냈다.

    ‘좋은데.’

    감각만 익숙해지면 원래 팔이랑 큰 차이 없겠어.

    엔시아가 만든 의수는 본래 가지고 있던 팔만큼이나 움직임이 자연스러웠고, 바람의 기운을 이용하는 건 오히려 더 강했다.

    팔 내부에 박혀 있는 세계수의 가지가 바람의 기운을 증폭시켜줬기 때문인 것 같았다.

    ‘내가 내 팔을 쓴다는 게 이리 좋은 일이었다니.’

    내 손으로, 내 검을 펼친다는 게 이렇게 웃음이 나오는 일일 줄은 몰랐다.

    인간은 상실을 겪어야 행복을 얻는다고 하더니, 그게 정말이었다.

    ‘유지가 아니라, 더 강해질 수도 있겠어.’

    처음에는 광풍대에 방해만 되지 말자고 다짐했는데, 의수를 단 이후로 막혔던 무학의 길이 천천히 열리고 있었다. 이대로 계속 수련한다면 전성기도 뛰어넘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토록 바랄 때는 안 주더니, 삶은 참 신기해.’

    얻고자 할 때는 무시하고, 포기했더니, 지금에 와서야 빛이 보인다. 무학의 신은 너무도 까탈스러웠다.

    치이이잉!

    리메르가 눈매를 좁히며 손아귀에 응집된 바람의 기운을 폭발시키듯 내질렀다.

    후우우우웅!

    은빛 검신 위로 피어난 녹색 광풍이 천공을 스치고 내려오며 선연한 바람을 일으켰다. 땀방울이 가득한 광풍대의 이마를 식혀주는 다정한 바람이었다.

    리메르는 검을 내리고서 의수의 어깨를 매만졌다. 연결 부위가 부드러워서 조금도 부담이 없었다. 평생 떼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큰 빚을 졌군.’

    그것도 두 사람 모두에게.

    의수를 만들어준 엔시아에게도, 의수의 재료를 끝까지 챙겨 와준 라온에게도 고마울 뿐이었다.

    리메르는 두 사람에게 무엇을 해주어야 할지 고민하면서 검을 검집에 넣었다.

    후우.

    숨을 고르며 오러를 안정시킬 때 연무장 문이 열리고, 도리안이 들어왔다.

    “라온 님이 복귀 중이래요!”

    도리안은 광풍대 모두에게 손을 흔들며 환히 웃었다.

    “흠….”

    리메르는 갑자기 어둑해지는 하늘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그놈. 오늘 왠지 사고 칠 것 같은데?’

    *     *      *

    중무전주의 집무실.

    쿵쿵.

    화려하면서도 중후한 분위기를 두른 중무전주의 집무실 바깥에서 거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라.”

    중무전주 카룬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까딱였다.

    노크와 달리 조심스럽게 문이 열리고, 그의 집사가 들어와 고개를 숙였다.

    “라온 지그하르트가 복귀하고 있다고 합니다.”

    “꽤나 늦었군.”

    “야왕에게 무학을 배웠다는 이야기가 있더군요.”

    “너구리도 아니고, 주는 건 다 처먹는 모양이지.”

    카룬이 긴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그래서 지금 가주전으로 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가주님의 호출인가?”

    “예.”

    “그놈 복귀 때마다 불러대는 게 가문 행사가 됐군.”

    그는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저 그런데….”

    집사가 슬쩍 눈동자를 굴렸다.

    “이대로 가만히 있어도 되는 겁니까? 라온 지그하르트가 주디엘이 중무전 소속이었다는 것을 말한다면….”

    “연결 고리는 끊고, 증거도 모두 지웠잖느냐. 놈 혼자 말해봐야 의미 없는 일이야.”

    카룬은 모든 상황을 점검한 듯 담담하게 고개즐 저었다.

    “그리고 내 생각이지만, 놈은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예?”

    “라온 지그하르트는 제 사람을 누구보다 소중히 여기지. 그 둘에게 피해가 갈 수도 있기에 놈은 조용히 물러날 게 분명하다.”

    “그건….”

    “그래. 내게 거래를 거는 것이지. 이번 일을 묻어둘 테니, 주디엘과 그 동생을 건드리지 말라는 거래. 똑똑한 놈이니 무엇을 해야 할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는 라온의 생각을 모두 예측한 것처럼 눈빛을 가라앉혔다.

    카룬은 얼마 남지 않은 찻잔을 비우고 일어섰다.

    “그럼 가지. 문제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려면 달라져서는 안 되니까.”

    “모시겠습니다.”

    집사가 집무실의 문을 열었다.

    카룬은 지그하르트의 문양이 새겨진 화려한 제복을 걸치고, 집무실을 나섰다. 그의 눈빛이 어둠을 노리는 올빼미처럼 서늘하게 번쩍였다.

    '라온 지그하르트.'

    너는 그래서 내게 안 되는 것이다.

    *     *      *

    라온은 가주전으로 들어가며 좌측으로 눈동자를 돌렸다. 단상에서 가장 가까운 기둥 앞에 선 카룬을 보았다.

    ‘평온하네.’

    그는 내가 아무 말도 할 수 없다고 판단한 듯 담담한 눈빛으로 전방을 바라보고 있었다.

    ‘생각이 뻔히 보여. 그리고 보통은 당신 생각이 맞겠지.’

    주디엘과 쥬벨을 보호하려면 그게 정석이니까.

    ‘하지만 나는 보통 인간이 아니야.’

    저 짜증 나는 표정을 으깨버리겠다고 다짐하면서 가주전의 중앙에 섰다.

    “가주님을 뵙습니다.”

    가주전의 중앙에 서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가주님을 뵙습니다!”

    뒤에서 따라온 주디엘과 쥬벨이 함께 고개를 숙였다. 미리 교육 시켜 놓았다니, 다행히 떨지 않고 제대로 된 예를 보였다.

    “일어나라.”

    글렌의 부름에 고개를 들었다. 그는 마네킹이라도 된 듯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시선을 내렸다.

    “라온 지그하르트.”

    “예.”

    “근처에서 수련한다고 해놓고, 왜 스란 부족이 있는 곳까지 간 것이냐.”

    글렌이 주먹으로 턱을 괸 채 고개를 까딱였다.

    '이제는 무슨 뜻인지 알겠어.’

    저 표정과 자세의 의미는 이곳에 있는 이들에게 어떤 일을 겪고 왔는지 말하라는 뜻이었다.

    “처음부터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라온이 고개를 숙이고서 뒤에 있는 주디엘을 가리켰다.

    “제게는 전속 시녀가 한 명 있습니다.”

    “주디엘이라고 합니다.”

    주디엘이 앞으로 나오며 허리를 굽혔다.

    “그녀에게는 어렸을 때 헤어진 동생이 한 명 있습니다. 저는 그 사실을 알고, 동생을 어떻게든 찾아주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암시장에 정보를 요청하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라온은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간략하게 설명해주었다.

    “…그렇게 되어서 둘과 함께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모든 일을 설명하자, 가주전 내에 잠시간의 침묵이 맴돌았다.

    “큼, 약속을 하고, 약속을 지킨다.”

    글렌이 담담하게 읊조렸다. 이상한 추억이라도 떠올랐는지 그의 입꼬리가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렸다.

    “굉장히 쉬운 일이지만, 또한 굉장히 어려운 일이지.”

    “맞습니다!”

    아리스가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리는 시대에 시녀의 약속을 저렇게 끝까지 따라가서 지키는 녀석은 다시 없을 거예요.”

    그녀는 대견하다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개인적으로 의미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멋지기는 하군.”

    “그래. 무인다운 행동이었다.

    “홀로 암살자와 스란 부족을 모두 막았다는 말을 들으니, 피가 끓는군.”

    다른 대주나 단주들도 잘했다는 듯 웃거나 손가락을 치켜올렸다.

    “지그하르트의 검사다운 행동이었다! 물론 난 약속 자체를 하지 않았겠지만!”

    발데르는 잘했지만, 본인은 하지 않았을 일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

    “수고했다. 잘했어.”

    카룬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데니어는 자그마한 미소만 보였다.

    “커흠! 분명 개인적인 일이었지만, 육황 중 하나에 은혜를 입혔으니, 공이 아니라고 할 수 없구나.”

    글렌은 헛기침을 하면서 손으로 입을 가렸다. 동시에 말도 빨라졌는데, 신기하게도 발음이 뭉개지지 않았다. 입을 크게 벌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라온 지그하르트에게….”

    “가주님.”

    라온이 가슴에 손을 올린 채로 고개를 숙였다.

    “아직 드려야 할 말씀이 남아 있습니다.”

    “뭐지?”

    “제 시녀가 어릴 적에 동생과 헤어졌다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그래.”

    “그 일을 벌인 자가 따로 있습니다. 크흑!”

    그 말을 하며 글렌과 비슷하게 입을 틀어 막았다.

    “우애가 좋은 남매를 생이별하게 만든 쓰레기 같은 놈이….”

    라온이 분노와 서글픔을 모두 담아내며 입술을 씹었다. 눈물을 글썽이며 주먹으로 바닥을 내리쳤다.

    “흐윽….”

    “으….”

    주디엘과 쥬벨도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채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게 누구냐!”

    발데르가 당장 쫓아가겠다는 것처럼 주먹을 들었다.

    “다른 건 몰라도 그놈은 내가 처리해주지!”

    “너는 가만히 있어, 내가 죽여버릴 테니까.”

    아리스가 이를 바득 갈았다.

    “다 입 다물어라.”

    글렌이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며 미간을 구겼다. 그의 붉은 눈동자에 뇌광이 비치는 듯 했다.

    “말해라. 어떤 놈이 그런 일을 벌인 거지?”

    “음….”

    분하다는 듯 입술을 깨물며 카룬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 시선을 따라 알현실에 있는 모두의 눈동자가 카룬에게 돌아갔다.

    라온은 급격하게 찌그러진 듯한 카룬의 눈동자를 보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얄미움의 마왕이 강림했군….

    라스가 바다 같이 넓은 어깨를 억지로 좁히는 라온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냥 검 때려치우고 연기나 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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