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16화
라온은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방울을 닦으며 오그람을 바라보았다. 그는 조금 전에 했던 말이 진심이라는 듯 무던한 안색이었다.
‘정말 그 격해무라는 무학을 알려주신다는 건가?’
야수연맹주가 익히고 있는 초상승의 무학을 외인인 자신에게 가르쳐준다는 게 이해가 가질 않았다.
‘아무리 스란 부족을 도와주었다고 해도 나는 남이니까.’
본래 무가에서도 상승의 무학은 직계와 많은 공을 세운 방계에게만 전수하고, 그 외에는 급이 떨어지는 무학을 가르친다.
지그하르트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공을 세운 외인에게 상승의 무학을 내리기도 하지만, 가주나 후계자 급이 익히는 직계 무학을 전수한 경우는 없었다.
‘그런 초상승의 무학을 알려주겠다고?’
격해무는 오그람에게도 필살의 기예 중 하나일 것이다. 야수연맹의 절기를 외인에게 알려준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지금 하신 말씀….”
라온이 터질 것처럼 빠르게 뛰기 시작한 심장을 가라앉히며 시선을 들었다.
“진심이십니까?”
“내가 헛소리나 할 사람으로 보이나?”
“그건 아니지만….”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다.”
오그람이 시원하게 입매를 말아 올렸다.
“대륙의 무인들은 자신의 무학을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지. 무학이 보여진다면 파훼법이 생겨서 본인이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
요즘 실제로 느끼고 있었다.
예전에는 서리연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많아서 냉기의 칼날로 적의 목을 쉽게 베었지만, 지금은 서리연의 칼날이 두 개라는 것을 알고 방어를 하는 무인들이 늘어났다.
오그람의 말대로 무학이란 많이 드러날수록 방어법과 파훼법이 생기는 법이었다.
“그런데 그게 뭐.”
오그람이 턱을 치켜든 채 고개를 저었다.
“보여졌다고 약해지는 무학은 처음부터 강한 무학이 아니다. 보여져도, 흐름을 읽혀도 제힘을 발휘하는 게 진정으로 강한 무학이라고 할 수 있지.”
“음….”
“전장에 두 번의 기회란 없다.”
그의 가라앉은 눈동자에서 심장을 짓누를 정도의 패기가 치솟았다.
“오직 한 번. 딱 한 번의 기회에 상대의 숨통을 끊어야만 전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격해무는 그것을 위한 기예. 네게 알려준다고, 남에게 보여준다고 약해지는 무학이 아니다!”
오그람은 선언을 하듯이 본인의 가슴을 두드렸다.
“이 야수연맹에 그런 약한 무인과 무학 따위는 없다.”
“아….”
라온이 떨리는 손목을 움켜잡았다. 오그람의 말을 들자, 머리털이 쭈뼛 서는 듯한 소름이 돋아올랐다.
“저 말이 맞다. 궁극의 힘이란 보여진다고 해서 약해지는 게 아니야.”
가로나도 오그람과 같은 생각인지 조금도 놀라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근육 돼지 놈치고 좋은 말을 하는구나.
라스가 고개를 까딱였다.
-진정한 강함이란 어떤 상황에서도 약해져서는 안 되는 것이니라. 본왕은 불길에서 싸우든, 용암 속에서 싸우든 항상 적을 모조리 얼려버렸느니라.
말이 많기는 하지만, 녀석도 오그람의 말에 동의했다.
‘그러고 보니….’
가주님과 라스도 비슷해.
내 목표인 글렌의 검술은 보여진다고 해서 약해지는 검이 아니다. 말 그대로 하늘. 검으로 만드는 하늘을 그 누가 감당하겠는가.
라스도 마찬가지다. 녀석은 잡기술 없이 서리의 힘으로 적을 찍어눌렀다. 그 거대한 기운을 이겨낼 존재 따위는 없어 보였다.
오그람 역시 글렌이나, 라스와 같은 자신감을 가지고 있기에 내게 본인의 무학을 전수하겠다고 물어본 것이다.
‘그렇다면….’
오그람의 생각을 알게 되었기에 마음을 다잡고, 그의 앞에 섰다.
“가르쳐 주십시오.”
라온이 자세를 바로 하고 오그람에게 고개를 숙였다.
“좋다!”
오그람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큼지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민이 길어서 거절하나 했는데 결국 받는구나.”
“가주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데 시간이 걸렸습니다.”
“이해?”
“예. 전장에 두 번은 없다는 말씀이 어떤 뜻인지 깨달았습니다. 제가 어떻게 해야 할지도.”
“크하하하하하!”
그가 머리를 부여잡은 채 시원한 웃음을 터트렸다.
“좋군. 좋아.”
오그람이 고개를 내리며 라온의 흑룡포의 끝단을 매만졌다.
“당시에는 네게 과한 선물을 주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흑룡포가 과한 주인을 만났군.”
“아닙니다.”
“잡설은 그만하고, 바로 시작하지.”
그는 시간은 그만 끌자며 손을 저었다.
“격해무는 바다를 뛰어넘는다는 의미다.”
“바다?”
“그래. 상대가 운용하는 오러의 바다를 뚫고, 이 주먹을 대가리에 박아넣는다는 뜻이지.”
오그람이 주먹을 말아쥐었다. 맞는다면 바로 정신을 잃을 것처럼 단단해 보였다.
“구결은 간단하다. 너라면 밥 먹을 시간 만에 외울 수 있을 것이야.”
“음.”
라온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격해무 같은 초상승의 무학이 간단한 구결로 이루어졌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폭우가 몰아치는 대해도, 고요한 바람이 스치는 연안의 물결도 모두 같은 바다이기에.
해가 타오르고, 달이 차오르는 바다는 자신을 비추는 거울과도 같다.
영혼을 닦아내야 내 안의 작은 바다도 길을 열어주리라.]
….
오그람의 말대로 구결은 짧았다. 하지만 그 안에는 현묘한 정기가 어려 있었다. 이해하기 쉬웠지만, 내가 이해한 게 맞다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
“어때 외웠나?”
“예….”
라온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지금부터는 운용법을 알려주지.”
오그람이 다시 주먹을 말아쥐었다. 그의 두터운 손가락 사이로 무채색의 빛이 번뜩였다.
“운용법인데 왜 주먹을….”
라온이 오그람의 주먹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말했잖느냐. 나와 상대의 바다를 헤쳐야 한다고. 바다마다 그 흐름과 크기가 다르다. 즉, 수많은 경험을 통해 오러의 바다를 뚫어내야 하지. 그걸 가장 빠르게 하는 방법은….”
듣지 않아도 그 뒷말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실전이다!”
오그람이 말아쥔 주먹을 그대로 뻗어냈다. 이전보다 배는 빨라진 주먹이 복부를 향해 쇄도해왔다.
“크윽!”
라온이 만화공의 불꽃으로 오러의 방패를 형성하며 오그람의 주먹을 막아섰다.
“틀렸어!”
오그람은 그게 아니라는 듯 인상을 찌푸린 채 주먹을 끝까지 내질렀다.
뻐어어어억!
그의 주먹은 염주벽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불꽃의 방패를 관통하여 라온의 복부를 후려쳤다.
“커허헉!”
라온이 거센 신음을 흘리며 바닥에 처박혔다.
‘뭐 이런….’
한순간 정신을 놓을 뻔했다. 어마어마한 고통이 밀려와서 손가락 하나조차 움직일 수가 없었다.
“네게 괜히 구결을 알려준 게 아니다. 격해무를 이용해서 막지 않는다면 매번 그 고통을 느끼게 될 것이야.”
오그람은 빨리 일어나라는 듯 손가락을 까딱였다.
“우, 운용법을 알려주신다는 게….”
“그래. 이거다.”
오그람이 주먹과 함께 달려들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맞다보면 몸이 알아서 익히는 법이니까!”
그 말과 함께 오그람의 주먹이 더 빠르고 강하게 날아들었다.
‘역시나….’
라온이 격해무의 구결을 외우며 피나도록 입술을 씹었다.
‘세상에 쉬운 일은 없군.’
-그걸 지금 알았느냐! 마계에서 이런 일쯤은 아무것도 아니니라. 본왕이 마계의 군주가 되었을 때는 더한 고난이….
‘넌 입 좀 다물어!’
* * *
검사들의 열의로 모래가 뜨겁게 달아오른 지그하르트의 5 연무장.
“루난!”
리메르는 연무장 중심에서 고개를 꾸벅이는 루난에게 다가갔다.
“눈 감지 마! 또 자려고 그러는 거지!”
“아냐요.”
루난은 맹한 눈을 끔벅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냐요는 또 무슨 말이냐….”
“꿈속에서 검술 연습했어요.”
“꿈! 지금 꿈이라고 했지!”
“진짜인데.”
그녀는 리메르가 뭐라고 하든 상관없다는 듯 다시 눈을 감았다.
“놔두셔도 됩니다. 저 녀석 자고 일어나면 이상하게 더 강해지더군요.”
버렌이 조는 루난을 보며 픽 웃었다.
“잠만 자면 강해져도 아니고, 짜증 난다니까.”
마르타는 루난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혀를 차고서 본인의 수련을 시작했다.
리메르는 두 사람을 말을 듣고서 다시 루난을 바라보았다. 조는 듯 고개를 까딱거리는데, 그녀 내부의 오러는 전투를 치르는 것처럼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설마….’
경계에 서 있는 건가?
현재 루난의 무력 수위는 마스터 중급. 빠른 이들은 천천히 본인의 심상에 관한 이미지를 잡는 시기인데, 지금 루난이 그 위치에 있는 것 같았다.
‘어릴 때부터 가르친 보람이 있네.’
광풍대가 훈련생인 시절부터 이미지와 상상이 중요하다고 끝없이 말해주었는데, 그 조언이 드디어 효과를 내는 것 같아서 가슴이 찡했다.
‘루난만이 아니야.’
버렌과 마르타도 몰라보게 성장했다. 무력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면도 단단해져서 두 사람도 그리 멀지 않은 시간 안에 중급에 오를 것 같았다.
‘다른 녀석들도 많이 컸고.’
현재 광풍대 전원은 익스퍼트 최상급에 올라 있다.
도리안과 부조장들은 벽에 손을 대고 있는 상태였기에 계기만 있다면 당장 마스터가 되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리메르는 광풍대 검사들을 차례로 살피며 입매를 말아 올렸다.
‘이러다가 진짜 최강의 단체가 되는 거 아니야?’
광풍대가 이 상태로 계속 성장하면 대의 이름으로 전 이상의 무력을 갖추게 될 것 같았다.
‘정말 많이들 컸군.’
처음 저 아이들을 보았을 때가 떠오른다. 맡겨진 꿈을 대신 이루려고 했을 뿐인데, 이제는 그의 꿈이 내 꿈이 된 것 같았다.
“음….”
마르타는 따스한 미소를 짓는 리메르를 보며 눈매를 구겼다.
“대주 왜 저래? 불안하게 왜 웃는 거야?”
“모르겠어.”
버렌이 뺨을 긁으며 고개를 저었다.
“돈 빌려달라고 할 때의 표정 같기도 하고.”
“그거네! 도박하다가 돈 잃은 게 뻔해!”
마르타는 검사들에게 절대 돈을 빌려주지 말라고 경고해야겠다며 혀를 찼다.
“리메르 님!”
두 사람의 생각과 달리 리메르가 순수한 눈빛으로 광풍대를 지켜보고 있을 때 연무장 문이 열리고, 엔시아가 들어왔다.
“완성됐어요!”
그녀는 철로 만든 듯한 회색 의수를 들고 리메르에게 달려왔다.
“그건….”
“뭐겠어요. 당연히 리메르 님의 오른팔이죠.”
“벌써 완성된 겁니까?”
“세이피아로 떠나시기 전부터 준비해 놨으니까요.”
엔시아는 측정과 설계도를 완성한 상태에서 재료인 세계수의 가지와 잎까지 얻었기에 바로 제작할 수 있었다며 웃었다.
“대충 만들어주시는 줄 알았는데….”
“그건 장난이었죠.”
엔시아가 어깨를 툭 치며 고개를 저었다.
“저는 장인이에요. 제 일을 하는데, 대충이나, 장난 같은 건 없어요.”
그녀는 자신감이 넘치는 눈빛으로 직접 만든 의수를 내밀었다.
“옷 벗어보세요. 제가 끼워드릴 테니까.”
“음….”
리메르가 입맛을 다시며 주변을 보았다. 광풍대 모두가 수련을 멈춘 채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
“어쩔 수 없네.”
그는 한숨을 내쉬고서 상의를 벗었다. 상처는 아물었지만, 여전히 흉측해 보이는 어깨를 앞으로 내밀었다.
엔시아는 상처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 리메르의 어깨를 차분히 살폈다.
“이 의수는 리메르 님의 오러로 신경과 이어질 거예요. 아마 진짜 손이 돌아왔다고 생각하실걸요.”
그녀는 본인이 제작한 아티팩트에 자신이 있는 듯 곧바로 의수를 리메르의 어깨에 가져갔다.
의수에 달려 있던 얇은 천 같은 것이 리메르의 어깨에 고무처럼 달라붙으며 피부와 같은 색을 이뤘다.
우우우웅!
의수에서 연한 빛이 돋아나며 회색이었던 팔 부분이 리메르의 피부와 같은 색으로 변해갔다. 사용자를 배려하는 장치 같았다.
리메르가 따끔거리는 어깨를 보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이건….’
의수에 달려 있던 천 같은 것이 피부와 닿는 순간 바늘로 살을 꼬메는 듯한 작은 통증과 함께 팔이 자라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어깨 내부의 신경이 의수의 신경과 맞닿는 듯한 기묘한 감각이었다.
‘어디….’
손가락을 움직인다고 생각하자, 의수의 손가락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생각했던 것보다는 힘이 과하게 들어갔지만, 분명 내 생각대로 손이 움직였다.
“하….”
리메르가 마음대로 움직이는 손을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이걸 진짜 만들었다고?’
너무 진짜 같아서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였다. 이대로라면 전성기는 아니라도, 팔이 잘리기 전까지의 무력은 회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우와….”
“진짜 팔 같은데?”
“의수의 색이 대주님의 피부색으로 변했어.”
“소, 손가락이 움직여!”
광풍대 검사들도 리메르의 팔을 보며 놀란 듯 눈을 부릅떴다.
“그래도 그게 진짜 팔은 아니라, 조심해야 해요. 오러를 조절하는 것도 연습하셔야 하구요.”
엔시아는 직접 의수를 조정해주면서 조심해야 할 점들을 말해주었다.
“오러 없이 검기까지는 버텨도, 강기는 힘들어요.”
“그건 원래 제 팔보다 낫네요. 오러 없이는 검기도 못 버티니까.”
리메르가 피식 웃으며 손을 저었다.
“아, 그건 그렇네요.”
엔시아도 생각해보니 그렇다며 헤헤 웃었다.
“다 끝났어요. 혹시 불편한 점이 있나요?”
“딱 좋습니다. 정말 제 팔이 돌아온 것 같아요.
리메르는 팔이 돌아온 놀라움에 장난을 칠 기색도 없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그렸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 인사는 라온 님께 대신 해주세요. 그분이 가져오신 세계수의 가지와 잎 덕분에 부작용이 줄고, 안정성이 크게 늘었으니까요.”
그녀는 이 일도 라온의 덕분이라며 웃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럼 앞으로도 라온 님께 잘 챙겨주세요.”
엔시아는 그거면 됐다면서 손을 저었다.
“그럼요.”
리메르가 의수로 주먹을 말아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그리할 생각입니다.”
그는 피부의 온기 대신 가슴에서 전해져 오는 따스함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이제 결정을 내렸으니까요.”
“결정이요?”
엔시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결정?”
루난이 리메르를 보며 눈을 끔벅였다.
“새로운 마음으로 도박을 할 결심일지도.”
버렌이 주사위를 던지는 시늉을 하며 웃었다.
“도박장 가서 저 팔 잘려오면 웃기긴 하겠네.”
마르타가 버렌의 말을 받으며 키득였다.
광풍대 모두가 리메르와 조장들을 보며 소리 높여서 웃음을 터트렸다.
“…….”
리메르는 아이들을 보며 기쁨과 아쉬움, 기대가 섞인 작은 웃음을 그렸다.
“곧 알게 될 겁니다.”
* * *
쿠우웅!
라온이 몸을 가누지 못하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으윽….”
더럽게 아프네.
쓰러진 통증은 별게 아니지만, 오그람의 주먹에 닿은 손아귀가 뜯겨나갈 것처럼 아려왔다.
그가 힘을 조금만 더 주었다면 정말 손아귀가 터져 나갔을 것이다.
“쿠에에엑!”
옆에서 들린 비명에 시선을 돌렸다. 가로나도 오그람의 주먹에 얻어맞아서 얼굴로 바닥과 인사를 하고 있었다.
“후우….”
라온이 단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쉽지 않군.’
오그람이 보여주는 격해무의 흐름은 지금까지 익혔던 무학과는 상리가 달라서 불의 고리를 운용하고 있음에도 따라하기가 쉽지 않았다.
수련을 시작한 지 일주일이 지났는데, 감을 잡으려면 백 일이 지나도 부족할 것 같았다.
“의지 하나는 좋구나.”
오그람은 바로 일어난 라온이 마음에 든다는 듯 입매를 말아 올렸다.
“네가 왜 그 나이에 그 경지까지 올라갔는지 알겠어.”
그가 가로나에게 시선을 돌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빨리 안 일어나냐!”
“끄으으….”
가로나가 조금 전에 얻어맞은 가슴을 부여잡고 몸을 일으켰다.
“너희에게 알려줄 건 모두 알려주었다.”
오그람이 나뭇가지 사이에 걸어둔 술잔을 들었다.
“격해무는 무학이라기보다는 순간의 번뜩임. 잘만 맞는다면 세 살짜리도 쓸 수 있고, 안 맞는다면 삼십 년을 수련해도 아무것도 얻지 못할 수도 있지.”
그가 술잔을 비운 후 입매를 비틀었다.
“다만 내게 배운 놈들에게 그딴 결과가 일어나서는 안 되겠지.”
오그람이 말아쥔 왼 주먹을 내민다. 주먹의 틈새 사이에서 무색의 광휘가 폭발할 것처럼 명멸했다.
그는 카룬을 후려 팼을 때보다 더 강한 주먹으로 가로나를 찍어버렸다.
뻐어어어억!
가로나는 제대로 방비조차 못한 채 얼굴을 얻어맞고, 바닥에 처박혔다.
눈이 완전히 돌아갔고, 호흡이 뚝뚝 끊어진다. 전신이 바들바들 떨리는 게 아니었다면 일격에 죽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다음은 네 차례다.”
오그람이 이번에는 오른 주먹을 말아쥐고 라온의 앞으로 다가왔다.
꿀꺽.
라온은 점점 더 강렬한 빛을 일으키는 오그람의 주먹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지금이라도 그만둬야 하나?’
저 주먹에 맞으면 어디가 부러지는 정도가 아니라, 살이 터져 나갈 것 같았다. 어떤 핑계를 대어서 멈춰야 하나 고민할 때 오그람의 눈빛이 보였다.
내게 향하는 신뢰가 비치는 눈동자. 나를 믿어주는 눈빛에 꺼내려던 말을 다시 삼키고, 자세를 다잡았다.
‘지금 맹주께서는 날 위해서 귀한 시간을 내어주신 거야.’
오그람은 진심을 다해서 내게 가르침을 내리고 있었다.
여기서 대충하거나, 시간만 떼우려는 짓은 용서를 빌 수도 없는 큰 실례였다.
쿠웅!
라온이 진각을 밟으며 두 주먹을 쥐었다. 불의 고리를 극성으로 운용하며 설화의 감각까지 일으켰다.
“오십시오!”
“역시 마음에 드는 놈이다!”
오그람이 크게 고개를 끄덕이고서 뒤로 젖혔던 주먹을 내질렀다.
쿠구구구구!
밀려오는 주먹 사이로 번쩍이는 기류에 숨이 막혀온다. 격해무를 운용하지 않아도 영혼이 날아갈 것 같은 강렬한 권파가 시야를 가득 채웠다.
‘물러나지 말고, 끝까지 봐.’
오그람의 주먹에 맺힌 핏줄마저 눈에 들어올 정도로 집중력을 드높이자, 시간이 느리게 흐르기 시작했다.
격해무의 흐름이 아주 천천히 손에 잡힐 것처럼 들어왔다.
[폭우가 몰아치는 대해도, 고요한 바람이 스치는 연안 물결도 모두 같은 바다이기에.]
격해무의 구결을 읊으며 오른 주먹을 말아쥐었다. 주먹에 격해무의 흐름을 얹어 오그람의 권격을 향해 내질렀다.
쿠와아아아아!
주먹과 주먹의 부딪침. 허나 오그람의 격해무는 내가 운용하는 격해무의 벽을 뚫고, 순식간에 피부에 와닿았다.
[해가 타오르고, 달이 차오르는 바다는 자신을 비추는 거울과도 같다.]
‘끊어야 해!’
이길 수는 없더라도 오그람의 흐름을 끊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
라온이 이를 악물며 허무하게 사라지는 오러를 다시 끌어모았다. 심장을 휘도는 고리의 회전이 점점 더 빨라진다.
심장에 피가 쏠리며 세상이 빨갛게 변해갔지만, 억지로 정신을 다잡으며 마지막 구결을 외웠다.
[혼을 닦아내야 내 안의 작은 바다도 길을 열어주리라.]
세상에 오직 나와 오그람만이 있다는 감각을 느끼자, 그의 주먹에 담긴 기운의 흐름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제 알겠어.’
내 안의 작은 바다는 심상이다.
격해무는 나 자신을 먼저 알아야 상대를 뚫어낼 수 있는 무학.
라온은 심상의 세계에 격해무라는 이름의 새로운 검을 꽂으며 흔들리던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허?”
눈을 부릅뜬 오그람을 향해 작지만 굳건하게 말아쥔 주먹을 내질렀다.
쿠우우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