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14화
라온은 갑작스럽게 나타난 거대한 체구의 남자를 보며 눈썹을 내렸다.
‘이분이 왜 여기에 오신 거지?’
야생의 맹수와도 같은 사나움과 세상에 홀로 독존하는 듯한 패기를 지닌 남자는 오직 한 명뿐이다.
육황회의에서 만났던 야수연맹주, 야왕 오그람이 확실했다.
다만 오그람이 머무는 연맹은 스란 부족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텐데, 그가 여기에 나타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너 저 사람이 이곳에 오는 걸 알았어?’
-당연한 것 아니더냐.
라스는 당연한 것 좀 묻지 말라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근데 왜 말 안 해줬어?’
-본왕이 왜 말해줘야 하는 것이냐!
‘삐졌구만.’
-삐지기는 무슨!
녀석은 그렇게 말하면서 고개를 홱 돌렸다. 조금 전에 놀려서 삐진 것 같았다. 마왕치고는 속이 너무 좁았다.
“라온. 그리고 카룬인가.”
오그람은 라온과 카룬을 번갈아 보며 입매를 말아 올렸다.
“둘 다 오랜만이로군. 그런데….”
그는 시선을 돌려 목이 떨어져 나간 암살자들의 시체와 잿빛 가득한 숲을 굽어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게 다 무슨 일이지?”
그는 아직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것 같았다.
“아무것도 듣지 못하신 겁니까?”
라온이 오그람을 보며 눈을 끔벅였다. 아무래도 오그람은 스란 부족이 있는 곳에 들리지 않고, 바로 이곳으로 온 것 같았다.
“저쪽은 상황이 다 끝난 것 같고, 여기는 아직 진행 중인 것 같아서 이곳으로 왔다.”
오그람은 팔짱을 낀 채로 당당히 고개를 저었다. 팔뚝이 너무 거대하여 꼭 터질 것 같은 핏줄이 돋아났다.
“라온. 네가 말해 보거라. 이곳에서 무슨 일이 터진 거지?”
“저한테 들으셔도 되겠습니까? 스란 부족장도 있는데.”
“그 장포의 의미를 모르는 것이냐?”
그가 라온이 입고 있는 흑룡포를 가리켰다.
“네게 흑룡포를 준 것은 너를 믿겠다는 의미다. 나는 내 물건을 남에게 함부로 내어주는 사람이 아니야.”
오그람은 흑룡포의 비늘이 돋아난 것을 보며 입매를 말아 올렸다.
“흑룡포도 너를 주인으로 받아들였으니, 더욱 믿을 수 있겠군. 빨리 말해 보거라.”
그는 답답하니, 어서 입을 털어보라며 고개를 까딱였다.
라온은 당당히 선 오그람을 보며 속으로 헛웃음을 흘렸다.
‘성격이 시원하다 못해 추울 정도네.’
딱 한 번 만났을 뿐인데, 흑룡포를 주었다고 신뢰하겠다니, 내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성격이다. 멋있으면서도 따라 할 수는 없는 사람이라고 느꼈다.
“…….”
카룬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조용히 서 있었다. 살기등등했던 눈빛 역시 가라앉아 있었다.
오그람이 앞에 있는 이상 그가 움직일 일은 없어 보였다.
‘날 신뢰할 리는 없고, 증거가 없다는 건가.’
쥬벨은 환살대 뒤에 카룬이 있는지 모르고, 주디엘은 중무전 소속 상사에게 지시를 받았지 카룬에게 직접 명령을 받은 적은 없다.
카룬이 모든 일을 조종했다는 물증이 없기에 함부로 그의 이름을 꺼내는 건 좋은 방법이 아니다.
자칫 잘못하면 역공을 당할 수도 있기에 지금은 차분히 증거를 모아서 한 번에 뒤통수를 칠 때를 기다려야 했다. 물론 오늘 그냥 넘어갈 생각은 없지만.
“그럼 제가 아는 부분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라온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앞으로 나왔다.
“제 시녀에게는 어릴 적에 헤어진 동생이 있습니다. 전 그녀에게 동생을 찾아주겠다고 약속을 했고….”
오그람에게 지금까지 있었던 사실들을 모두 설명했다. 거짓 없이 확실하게 증거를 밝힐 수 있는 것들만 말해주었다.
“…….”
카룬은 주디엘이 첩자로 왔다가 내게 포섭된 것 밝혔음에도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역시나 물증이 없다는 걸 아는 것이다.
“…그렇게 되어 여기에 있던 암살자들까지 처리했습니다.”
“크하하하하!”
모든 말을 끝냈을 때 오그람이 오른손으로 머리를 부여잡으며 거침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오러가 실려 있지 않음에도 소리가 너무 커서 고막이 터질 것 같았다.
“시녀의 부탁 때문에 동생을 찾아주고, 여기까지 와서 전쟁을 막았다? 역시 내 눈은 틀리지 않았군. 네게는 야수연맹의 혼이 흐르고 있어!”
그가 솥뚜껑만 한 손바닥으로 어깨를 연달아 두드렸다. 꼭 망치에 얻어맞는 듯한 충격에 저절로 인상이 구겨졌다.
“야수연맹의 혼이요?”
“의리 말이다! 무인이라면 의리가 있어야지! 네게는 그 토대가 보인다!”
오그람이 주먹으로 본인의 가슴을 후려쳤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저 주먹 한 번으로 이미 숨이 끊어졌을 것이다.
“고맙다. 스란 부족이 지금까지 살아 있는 건 네 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어.”
“아닙니다.”
“아니기는! 네가 오지 않았으면 다 죽었을 것이야!”
그는 괜한 겸손 떨지 말라며 어깨를 잡았다.
“카룬.”
“예. 연맹주님.”
“너는 왜 여기에 있는 거지?”
“가문의 임무를 완수한 후 복귀 중에 이곳에서 불이 번지는 것을 보고 와보았습니다.”
카룬은 했던 말을 반복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래? 지그하르트의 검사들은 하나 같이 의리가 넘치는군!”
오그람은 마음에 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라온은 그런 카룬을 보며 잔잔히 입꼬리를 올렸다. 저 여유로운 표정은 그리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가지. 저쪽 녀석들에게도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으니까.”
오그람은 라온의 어깨를 잡은 채로 스란 부족이 모여있는 마을로 향했다. 백호는 그의 말을 알아들은 듯 천천히 뒤로 따라붙었다.
“카룬. 너도 따라오거라.”
“저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딱히 한 일도 없으니까.”
“아니 될 말이지.”
카룬이 고개를 저으며 물러가려 했지만, 오그람이 고개를 저었다.
“한 게 없다고 해도 이곳까지 와준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이다.”
오그람은 거절을 거절한다며 카룬에게 손짓했다.
“…….”
카룬은 눈매를 찌푸렸지만, 오그람에게 대꾸하지 못하고, 느릿한 걸음으로 뒤를 따라갔다.
“형님!”
오그람이 마을 앞에 가자마자, 스란 부족장이 달려 나왔다.
“형님이 여기는 어떻게….”
“너랑 조용히 술 한잔하려고 왔는데, 숲이 이 꼬라지더구나.”
그는 스란 부족장과 깊은 친분이 있는 듯 어조가 부드러웠다.
“아!”
스란 부족장이 오그람의 옆에 인형처럼 잡혀 있는 라온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은인! 다시 와주셨군요!”
그는 라온을 향해 두 무릎을 꿇고, 상체가 바닥에 닿도록 허리를 굽혔다.
패자가 승자에게 부복하는 듯한 모습. 야수연맹의 부족민들이 진심으로 감사를 전할 때의 인사였다.
“이러지 마십시오.”
라온이 고개를 저었다. 훨씬 나이가 많은 사람이 두 무릎을 꿇고 절을 하니, 부담스러웠다.
“부담 갖지 마라. 숲 전체에 퍼진 불을 끄고, 암살자들을 처리했으면 이 정도 인사는 받아도 모자라지 않아.”
오그람은 그냥 편히 인사를 받으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게 전부가 아닙니다.”
스란 부족장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뭐?”
오그람이 무슨 말이냐는 듯 눈매를 찌푸렸다.
“은인께선 전쟁을 막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마을 내부에 생길 문제까지도 대비했습니다.”
스란 부족장이 어벙하게 서 있는 리스른을 가리켰다.
“저분을 보내서 마을에서 불이 터지는 것도 막아냈죠. 저희도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었습니다.”
그는 라온의 대비 덕분에 노인과 아이들이 불길에 휩싸인 마을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일을 말해주었다.
“허….”
오그람이 라온에게 시선을 돌리며 헛웃음을 흘렸다. 이 정도까지 해줬을 줄은 몰랐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마을 안에 불씨가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아차린 거지?”
“이런 짓을 벌인 암살자 놈들이라면 뭐든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라온은 카룬이 듣고 있기에 불의 정령왕의 능력이 아니라, 예측인 것처럼 말했다.
“크하하하하!”
“으….”
오그람이 옆으로 다가와서 라온의 등을 두드렸다. 본인은 격려의 뜻이었겠지만, 얻어맞는 라온은 뼈가 부러지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정말이지 물건이구나!”
“감사드립니다! 은인!”
스란 부족장만이 아니라, 스란 부족민 모두가 무릎을 꿇고 절을 하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
오그람은 시원한 미소를 그리다가 어정쩡하게 서 있는 주디엘과 쥬벨을 바라보았다.
“이쪽이 네 시녀인가?”
“맞습니다.”
라온이 주디엘과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생이 많았구나.”
오그람은 미소를 유지한 채 주디엘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다행히 본인의 힘을 아는지 가볍게 쳤다.
“예? 아, 네….”
주디엘은 의미를 모른 채 분위기를 맞추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네 시녀를 첩자로 보낸 건 어디지?”
오그람은 주디엘을 보자, 이전에 묻지 않았던 질문을 꺼냈다.
“어….”
주디엘은 여기서 그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
라온은 바로 말을 하지 않고, 뒤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무표정을 한 카룬을 힐끔 보고서 입술을 열었다.
“중무전이었습니다.”
“중무전?”
오그람이 턱을 매만지다가 카룬에게 눈동자를 굴렸다.
“중무전은 네가 운영하는 곳 아닌가?”
“…맞습니다.”
카룬은 아무것도 몰랐다는 듯 눈동자를 부릅뜬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군.”
오그람이 피식 웃은 순간 그의 손이 무채색으로 번쩍이며 극쾌의 권격이 뻗어나갔다.
치이이잉!
카룬은 이 상황을 예측이라도 한 듯 검을 뽑아 들어 오그람의 권격을 막아섰다.
쩌어어엉!
하지만 오그람의 힘이 워낙에 강했기에 카룬은 부러질 듯 휘청이는 검과 함께 열 걸음 이상 뒤로 밀려났다.
“네 짓이었나.”
오그람은 카룬을 죽이기라도 하겠다는 듯 날을 세운 듯한 섬뜩한 안광을 번뜩였다.
“아닙니다.”
카룬은 담담하다 못해 냉정해 보이는 눈빛으로 고개를 저었다.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지랄.”
오그람이 미간을 구긴 채 직접 움직여서 카룬에게 주먹을 날렸다. 그의 주먹이 신장처럼 부풀며 대지에 다리를 못 박는 듯한 어마어마한 압력을 일으켰다.
쿠와아아아앙!
막대한 충격이 폭발하며, 카룬이 거칠게 밀려나 한쪽 무릎을 꿇었다.
“정말입니다.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카룬이 핏줄기가 흘러내리는 입술을 깨물며 시선을 들었다. 여전히 당당한 모습이었다.
“저도 아닐 거라 생각합니다.”
라온이 잔잔한 눈빛으로 고개를 저었다.
“중무전주께서는 제 걱정을 하시느라, 다 잡아놓은 암살자의 수장을 죽이시더군요. 저렇게 배려심이 뛰어난 분이 이런 잔인한 일을 저지르셨을 리가 없습니다.”
카룬을 보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크윽….”
카룬의 잔잔하던 표정이 처음으로 변했다. 이쪽을 노려보며 살의를 담은 눈빛을 드러냈다. 가주전에서 자주 보았던 눈동자라 아무렇지도 않았다.
-와….
라스가 턱을 부르르 떨었다.
-얄밉느니라. 얄미워서 뺨을 후리고 싶느니라!
녀석은 카룬이 아니라, 내가 더 얄밉다며 이를 갈았다.
“노린재 같은 놈!”
오그람은 라온의 말에 담긴 의미를 알아차리고, 가볍게 쥐었던 주먹에 힘을 주었다.
단숨에 뻗어나가는 권격에 하늘을 깨부술 파천의 힘이 담긴다. 정면에서 맞는다면 그랜드 마스터라고 해도 죽을 수 있는 패악적인 위력이었다.
우우우우웅!
카룬이 이를 악물고 검을 들었다. 강렬한 의념이 실린 검신이 그의 앞에 강환으로 이루어진 두터운 검막을 세웠다.
콰아아아앙!
오그람의 주먹은 카룬의 검막을 무시해버리고, 처음의 힘 그대로 그의 복부에 처박혔다.
북을 덮은 가죽이 찢겨나가는 듯한 굉음과 함께 폭격을 맞은 듯 먼지 폭풍이 치솟았다.
후우우욱!
오그람이 손짓을 하자, 먼지 폭풍이 단숨에 사그라들고, 카룬의 모습이 드러났다.
“커헉….”
카룬은 얻어맞은 배를 부여잡은 채 검은 피를 토하고 있었다. 심각한 내상을 입은 것 같았다.
라온은 카룬이 아니라, 오그람의 권파가 지나간 방향을 살피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방어 무시의 공격인가?’
조금 전 오그람의 권격은 카룬의 검막을 뚫고 지나갔다.
상대의 방어를 무시하고 본인이 지닌 힘을 모두 꽂아 넣는 필살의 기예 같았다.
저런 능력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역시나 대륙의 무학은 광활했다.
“네놈을 여기서 죽이고 싶다만 그럴 수는 없겠지.”
오그람은 더러운 것이 묻은 듯 주먹을 털어내며 미간을 찌푸렸다.
“허나 증거를 찾는다면 내가 네놈을 직접 죽이러 가겠다.”
그가 이를 바드득 갈며 카룬을 노려보았다. 무식하고, 뒤를 생각하지 않고 행동하는 듯했지만, 전부 계획하고 움직이는 게 분명했다.
야수연맹이라는 거대한 연합체의 수장다운 모습이었다.
“꺼져라.”
“저는 정말 아닙니다.”
“닥치고 꺼져.”
“후….”
카룬은 라온을 죽일 것처럼 노려보다가 오그람의 시선에 짓눌린 듯 등을 돌렸다.
“도련님.”
주디엘이 라온의 곁으로 다가와서 어깨를 떨었다.
“괜찮을까요?”
“괜찮아. 이건 보험이니까.”
“보험이요?”
“그래. 중무전주와 문제가 생겼다는 걸 모두가 보았으니, 만약 우리가 복귀하는데 문제가 터지면 카룬이 가장 먼저 의심을 받을 거야. 발데르 같은 바보가 아니라면 우리를 건드릴 일이 없어. 오히려 보호를 해줘야겠지.”
라온이 피식 웃었다. 현재 카룬은 그 누구보다 나를 죽이고 싶지만, 또 죽여서는 안 되는 상황이었다.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아….”
주디엘도 이제 이해가 가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허….”
리스른도 무슨 말인지 알아들은 듯 헛바람을 흘렸다. 흡사 공포에 질린 듯한 표정이었다.
-얌생이 놈.
라스는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미간을 깊게 구겼다.
-이젠 네놈의 얍실함에 질리느니라.
‘그러냐.’
라온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을 때 오그람이 다가왔다.
“이리 오거라.”
오그람이 다시 어깨를 잡았다. 무슨 쇳덩이가 어깨를 짓누르는 느낌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축제나 열자꾸나!”
그는 언제 화를 냈다는 듯 시원한 미소를 그렸다.
“예? 축제라니요. 아직 할 일이 남았습니다. 생포한 암살자들에게 증언을 받아야 하고, 상황 정리도….”
“그런 건 밑에 녀석들에게 맡기면 된다! 우리는 즐기면 되고!”
오그람은 라온을 억지로 끌고 불이 꺼진 스란 부족의 마을로 들어갔다. 어찌나 힘이 강한지 지금 내 근력으로도 버틸 수가 없었다.
“연맹에 연락해서 내 창고에 있는 술을 모조리 가져오라고 해! 안줏거리도 전부!”
그의 외침을 들으며 라온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거 빠져나가기가 쉽지 않겠는데….’
-안주!
라스는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주 맛난 것으로 가져오라고 전하거라!
‘아까 나한테 질린다고 했지.’
라온이 한숨을 내쉬며 라스의 머리를 쳐냈다.
‘네가 더 질려….’
* * *
비연회주 채드가 알현실의 문을 경쾌하게 두드렸다. 그의 안색은 즐거운 일이라도 있는 듯 영롱한 빛을 띠었다.
쿠구구구.
묵직한 문이 열리고, 로엔이 평소의 웃음을 보이며 고개를 숙였다.
“비연회주님이시군요. 들어오시지요.”
그는 어서 오라는 듯 문 안쪽을 가리켰다.
“감사합니다.”
채드는 로엔에게 마주 인사를 하고서 알현실의 카펫을 밟고 중앙으로 향했다.
“가주님을 뵙습니다.”
글렌이 싫어하기에 정식 인사는 하지 않고, 고개만 숙였다가 들었다.
“무슨 일이냐.”
글렌은 냉랭한 눈빛으로 고개를 까딱였다. 전처럼 다리를 떨지는 않지만, 라온이 가문에 없기에 그의 표정은 좋아 보이지 않았다.
“오늘 광풍….”
“라온이 복귀라도 한 것이냐!”
그가 허리를 묻고 있던 옥좌에서 다급하게 등을 뗐다. 당장 뛰쳐나갈 기세였다.
“그, 그건 아닙니다.”
“흠.”
글렌은 김빠진 눈빛으로 다시 옥좌에 허리를 기댔다.
“대신 광풍부대주가….”
“라온이 맞군!”
그가 다시 허리를 세우고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조금만 더 숙이며 그대로 쓰러질 것 같았다.
“무슨 일이냐! 답답하게 굴지 말고 빨리 말해!”
“라온 님께 보고서가 왔습니다.”
“보고서?”
글렌이 무슨 말이냐는 듯 눈매를 찌푸렸다.
“수련하러 간 녀석이 보고서를 보냈다고?”
“아무래도 라온 님이 또 공을 세우신 듯합니다.”
채드는 그 말을 하면서 품에서 하얀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우우우웅!
글렌이 손가락을 까딱이자, 채드가 가지고 있던 보고서가 그의 손으로 빨려 들어갔다.
“오!”
편지를 펼치고 그 내용을 확인한 글렌의 얼굴이 방실거리며 펼쳐졌다.
“허….”
채드는 귓불까지 올라간 글렌의 입꼬리를 보며 입을 동그랗게 벌렸다.
‘사람의 표정이 저렇게 바뀔 수도 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