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13화
리스른은 소리 없이 스란 부족의 마을 안으로 들어가며 미간을 찌푸렸다.
‘처음 본 사람을 부하처럼 부릴 줄이야.’
라온은 스란 부족과 암살자들이 싸우는 전장으로 달려가면서 내게는 이 마을에 가 있으라는 지시를 내렸다.
마을 안쪽에 큰 폭발을 일으킬 불씨가 숨겨져 있다는데, 솔직히 믿기지 않았다. 외부라면 몰라도 마을 내부에 불씨를 숨겨두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니까.
“음….”
생각해보니, 라온은 처음부터 내가 따라오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다. 불에 타오르는 숲에 들어올 때도 왜 따라왔냐는 듯한 표정을 보였었다.
‘이유가 뭐지? 설마 무학에 관한 정보를 빼낼 것 같아서인가?’
암살자와 정보원으로 살아온 자신의 눈썰미는 최상위 무인보다도 뛰어나기에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보다는 속이 좁군.’
현재 암시장과 지그하르트는 반 동맹 관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게 우스웠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정말 라온이 마을을 보호하기 위해서 이곳에 보냈을 수도 있기에 적당한 탈출 경로를 만들고 있을 때 어둑한 하늘 위로 황금빛 태양과 달이 떠올랐다.
‘저게 뭐….’
어처구니가 없어서 입이 저절로 벌어지는 순간 태양과 달 밑에서 무시무시한 오러의 폭풍이 몰아쳤다.
라온이었다. 불꽃과 서리로 타오르는 장검을 든 그가 전장의 중심에 서서 스란 부족의 주술사들과 암살자들을 동시에 막아내고 있었다.
특별한 검술을 사용하는 것도, 거대한 오러를 운용하지도 않았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투로의 검격이건만 스란 부족은 강신이 풀린 채 비틀거렸고, 암살자들은 일검을 견디지 못하고 종잇장처럼 찢겨 나갔다.
마지막에는 수십여 명의 암살자들을 바닥과 함께 얼려버렸다.
검으로 저런 신기를 이뤄내다니, 수많은 전장을 다녔던 자신조차 보지 못했던 광경이었다.
그 이후에 라온에게 무기를 들이미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고작 검 몇 번 휘두른 것으로 전장의 악의와 살의가 사그라들었다.
라온 지그하르트라는 괴물 하나가 전쟁을 종식해버린 것이다.
‘잠깐….’
라온이 싸우는 모습을 보니, 저 정도 무력을 지닌 자가 무학이 드러나는 것을 꺼릴 리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정말로?’
리스른이 빠르게 기감을 열었다. 연하게 타오르는 불길 주변에서 마을로 다가오는 암살자들의 기척이 느껴졌다.
암살자들은 일정 거리에 멈춰서서 미세한 오러의 파동을 일으켰다. 그 파동이 마을 안쪽으로 스며들더니,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쿠와아아아아앙!
어마어마한 불꽃의 벽이 솟구치며 마을 전체를 휘감았다. 열기가 너무 지독하여 호흡이 저절로 멈춘다.
숨을 쉴 수도, 밖으로 도망칠 수도 없는 화염의 감옥이 세워졌다.
“뭐, 뭐야!”
“갑자기 왜 여기에 불길이….”
“모두 나와! 이대로 있다간 다 죽어!”
마을에 남은 노인들이 집에 숨어 있던 아이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하지만 불길이 너무 거세서 어쩔 줄을 모른 채 입술만 씹었다.
치이이이잉!
리스른이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았다. 검기와 검풍을 일으켜서 미리 준비해두었던 탈출로를 열었다.
“이쪽으로 나가십시오!”
그의 외침에 스란 부족의 노인과 아이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누, 누구신지는 모르겠지만, 고맙소!”
“모두 이쪽으로 오거라!”
“불이 더 번지기 전에 빨리 나가!”
부족민들은 처음에는 의심하는 듯한 모습이었지만, 적이 구해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 듯 열어놓은 길을 통해 불에 휩싸인 마을을 벗어났다.
리스른은 달려 나가는 스란 부족의 노인과 아이들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진짜였다고?’
이게 말이 돼?
홀로 전쟁을 종식시킬 무력이 있을 수도 있다. 암살자들이 숨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도 있다.
하지만 마을 안에서 아직 타오르지도 않은 불씨들을 찾아내다니,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를 할 수 없는 능력이다.
괴물이나, 천재 수준이 아니라, 신이 들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리스른이 마지막으로 마을을 벗어나며 시선을 돌렸다.
라온을 찾으려는데, 그는 이미 사라졌고, 슬픔과 분노를 눈에 담은 스란 부족의 무인과 주술사가 달려오는 모습만 보였다.
다만 그들은 마을 사람들이 무사한 것을 확인하고서 눈동자에 힘을 푼 채 이쪽으로 다가왔다.
“감사합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은인!”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스란 부족장과 무인들이 다가와서 고맙다고 말하며 고개를 숙여왔다.
“아, 아니 저는….”
리스른은 자그마한 머뭇거림도 없이 고맙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보며 손끝을 떨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이런 인사를 받는 건 처음인데.
암살자로 살다가, 정보원이 되었기에 살면서 누군가에게 고맙다거나, 감사하다는 인사를 받아본 적이 없었다.
진심이 담긴 사람들의 인사를 받으니, 가슴이 간질간질한 오묘한 감각이 차올랐다.
나쁜 기분이 아니었지만, 사실은 확실하게 전해주어야 했다.
“제가 한 게 아닙니다.”
리스른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라온 님이 혹시 모르니, 마을을 보호하라는 지시를 내리셨습니다.”
“음, 그가….”
“허….”
“여기까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건가?”
스란 부족장이 신음을 흘리며 라온이 있던 곳을 돌아보았다. 부족민들도 놀란 눈빛으로 라온을 찾았다.
리스른은 그 시선을 따라가며 고개를 저었다.
‘정말이지 종잡을 수가 없는 사람이야.’
* * *
라온은 복면을 쓴 채 눈동자를 떠는 암살자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이놈이 수장이로군.’
이곳에 있는 암살자들 모두가 고수였지만, 무력만 보았을 때는 앞에 있는 암살자가 가장 강했다.
이놈이 오늘 일을 벌인 살수들의 머리가 분명했다.
“네, 네가 여길 어떻게….”
“환살대라고 하던데.”
주디엘은 쥬벨이 속해 있던 암살대의 이름이 환살대라고 했었다.
“너희가 노리는 게 뭐지?”
“무, 무슨 소리냐!”
환살대주가 뒤로 물러서며 마른침을 삼켰다.
“너희들은 암살이 아니라, 싸움을 걸어왔어. 암살자가 정면에서 달려들다니, 불나방과 다를 게 없잖아.”
라온이 환살대주를 보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분명 다른 목적이 있어.’
암살자는 계획이 어그러지면 물러서지, 이렇게 미친 듯 돌진해오지 않는다. 놈들이 노리는 건 스란 부족의 암살이 아니라 다른 것 같았다.
“개소리!”
환살대주의 외침에 주변에 숨어 있던 암살자들이 소리 없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쪽이 진짜였군.’
살기를 숨길 줄도 알고, 기척을 완벽하게 죽이는 것을 보면 조금 전에 상대했던 암살자들보다 최소 두 수 이상의 실력을 지닌 놈들이었다.
이런 암살자들을 여기에 박아둔 것을 보니, 놈들의 목적이 스란 부족의 암살이 아니라는 게 더 확실해졌다.
피이이잉!
어둠에 몸을 숨긴 암살자들이 비수를 쏘아냈다. 빠르면서도 난해한 투로가 겹겹이 이어지며 흡사 그물과도 같은 형상을 이뤘다. 제대로 익힌 비도술에 많은 경험까지 더해진 상승의 수법이었다.
‘그래도….’
의미는 없지만.
라온은 암살자들이 쏘아낸 비수의 그물 속으로 들어갔다. 비수들이 이뤄내는 살의를 두 눈에 담으며 제천검을 들어 올렸다.
은빛으로 명멸하는 검신이 어둠을 가르는 궤적을 그렸다.
콰드드득!
제천검이 거침없이 뻗어나가며 검진을 이룬 채 쏟아지던 비수의 그물이 단번에 쪼개버렸다.
일그러지는 암살자들의 눈동자를 보며 진혼검을 뽑았다. 붉은 칼날이 검집을 스치며 청아한 울림을 일으켰다.
우우우우웅!
청각을 파고들어 신경을 으깨버리는 소리의 검식, 청우였다.
“커헉!”
“아아아악!”
“끄으윽!”
암살자들은 신경이 조각나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무기를 떨어뜨린 채 무릎을 꿇었다.
라온이 만화공을 일으켰다. 단전에서 치솟은 불꽃을 손아귀에 휘감은 채 제천검을 그으려 할 때 환살대주가 움직였다.
그가 손을 가볍게 뻗어내는데, 오러가 실린 단검이 수십 줄기의 빛살이 되어 공간을 가르고 들어왔다. 암살대의 대주를 맡기에 손색없는 실력이었다.
“정신 차려! 이놈도 힘이 빠졌어!”
환살대주가 제천검의 투로를 막아서며 외쳤다. 청우의 충격에 혼이 빠졌던 암살자들이 정신을 차리고 다시 단검을 움켜쥔 채 달려들었다.
보법이 쾌속했다. 숨 한 번 내쉴 틈에 놈들의 단검이 목과 심장을 향해 짓쳐 들고 있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라온이 피식 웃으며 눈썹을 내렸다.
“너희가 감당할 수준은 아니야.”
시야를 넓게 했다. 다가오는 비수와 암살자들을 한눈에 담으며 좌측으로 젖혀두었던 제천검을 세웠다.
섬뜩할 정도로 예리한 칼날이 불길에 탄 지평선을 따라 펼쳐졌다.
검은 장포가 펄럭임과 동시에 어둠이 뜯겨나간다. 암살자들의 목이 일검에 갈라져 바닥을 굴렀다. 단 하나의 검격에 열이 넘는 암살자들의 숨통이 끊어졌다.
“어, 어떻게….”
환살대주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동자에 핏줄을 세웠다. 방향도 다르고, 거리도 달랐던 암살자들이 일검에 죽은 것을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말했잖아.”
라온이 환살대주에게 다가가며 고개를 저었다.
“너희가 감당할 수준이 아니라고.”
“크윽!”
환살대주가 뒤로 보법을 밟았다. 그의 몸이 어둠에 녹아내린 듯 순식간에 사라졌다.
‘도망쳐야 해!’
검계현신을 사용하면 오러의 8할 이상이 소모된다고 들었는데, 저 괴물에게는 아무런 영향이 없는 것 같았다.
정면에서 싸우는 건 무리다. 어떻게 해서든 이곳을 벗어나야 했다.
전력으로 보법을 밟으며 나아가려는데, 이상하게도 시야가 변하질 않았다. 꼭 그 자리에서 멈춰있는 것 같았다.
‘뭐, 뭐지?’
입술을 떨며 뒤를 돌아보는데, 자신의 다리가 보이질 않았다. 그걸 깨달은 순간 몸이 기울어지며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밀고 들어왔다.
“으아아아아악!”
환살대주가 말라붙은 수풀을 움켜쥐며 비명을 질렀다. 다시 다리를 보는데, 무릎 아래가 잘려 나간 채 시뻘건 피를 토하고 있었다.
저벅.
라온은 제천검을 내린 채 환살대주에게 다가갔다.
“덫에 걸린 쥐가 살 방법은 다리를 자르는 것뿐이지.”
시선을 내려서 환살대주와 눈을 마주쳤다.
“물론 넌 다리를 잘라도 살 수 없겠지만.”
“으으….”
그는 공포와 고통에 질린 듯 안색이 창백하게 변해 있었다.
“말하라.”
라온이 환살대주의 등에 손을 얹은 채 턱을 틀었다.
“너희가 노렸던 건 뭐지?”
“흐흐….”
환살대주가 신음 같은 웃음을 흘리며 시선을 들었다.
“어차피 날 죽일 생각이겠지?”
“암살자라면 쉽게 죽느냐. 어렵게 죽느냐의 차이도 중요하다는 걸 알 텐데?”
“웃기지 마라. 애송아. 내 죽음은 내가 결정한다.”
그가 비웃음을 흘리며 히죽였다.
“아니, 네 숨통은 네 것이 아니야.”
라온이 코웃음을 치며 환살대주의 턱을 뽑아버렸다.
“허억….”
“암살자라는 놈들은 구시대적이라니까.”
그 말을 하며 환살대주의 이빨에 끼워둔 독약을 빼냈다.
“네, 네놈이 어떻게….”
환살대주는 이빨 속 독약을 찾아낸 걸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기본이잖아.”
라온은 독약을 뒤로 던져버리며 고개를 저었다.
“쉬운 길은 거절했으니, 어려운 길로 보내주지.”
그 말을 하면서 환살대주의 등을 통해 만화공의 열기와 글래시아의 냉기를 밀어 넣었다. 두 기운을 퍼뜨리며 직접 개발한 고문법을 운용했다.
“크으으….”
몸을 굳어서 말을 할 수 없음에도 환살대주는 격한 신음을 흘리며 전신을 떨었다. 고통 때문에 그의 눈동자에 핏발이 오르기 시작했다.
라온은 환살대주의 등을 깔고 앉은 채 라스에게 손짓했다.
‘한 시간 버틸지 내기할래? 맞히면 구슬 아이스크림 세트로 사줄게.’
-틀리면?
‘네가 나한테 모든 능력치 주는 건 어때?’
-그 정도라면 나쁘지 않군.
라스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암살자 놈들의 대가리니까. 한 시간은 충분히 버티겠지.
녀석은 한 시간 이상을 버티는 데 건다며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럼 난 한 시간 안쪽으로.’
라온인 픽 웃으며 환살대주에게 가하는 고문의 강도를 높였다.
-야이 사기꾼 자식아!
라스가 빽 소리를 지르며 멱살을 잡았다.
-고문의 강도를 높이는 건 반칙이잖느냐!
‘강도를 높이면 안 된다는 조건은 없었잖아.’
-그건 기본적인 조건이잖아!
‘아, 그래? 난 몰랐는데. 다음에 할 때는 참고할게.’
-뭔 놈의 인성이….
녀석은 어이가 없다는 듯 입을 떡 벌렸다.
“흐어억….”
환살대주가 더 이상 견디기 어려운지 숨이 끊어지는 듯한 신음을 흘렸다. 눈동자를 보니, 고문만 멈추면 뭐든 말해줄 기세였다.
“진작에 그럴 것이지.”
라온이 고문을 풀고, 환살대주를 일으켰다.
“네 이름은?”
“코, 콜린. 콜린입니다.”
콜린은 아예 넋이 나간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크으윽! 네놈은 정말 농락의 마왕이 맞느니라!
라스는 분한 듯 이를 바득 갈았다.
[<분노>와의 내기에서 승리하셨습니다.
라스가 인정하자마자 바로 내기에 승리했다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본왕이 부를 때는 나오질 않더니, 이럴 때는 더럽게 빠르네! 진짜 깨부수든가….
[모든 능력치가 3포인트 상승합니다.]
라스가 미간을 찌푸릴 때 메시지가 추가로 올라왔다.
-어? 왜 1포인트가 아니라, 3포인트가 오른 것이냐?
‘몇 포인트인지도 이야기 안 했잖아. 시스템 마음이겠지.’
-그건 말할 필요도 없잖느냐! 당연히 1포인트로 생각해야지!
‘아, 그래? 그럼 다음에는 참고하라고 할게.’
라온이 메시지를 보낸 시스템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진짜 돌아버리겠네!
라스가 참지 못하고 하늘을 올려보며 억까라고 소리를 질렀다.
라온은 분노를 폭발시키는 라스를 내버려 둔 채 콜린에게 손짓했다.
“그래서 너희가 노리던 건 뭐지? 스란 부족의 암살 같은 소리 하지 말고.”
“위, 위기를 만드는 거였습니다.”
“위기를 만들어?”
“그게….”
콜린이 답을 하려고 할 때 그의 심장에서 푸른 빛이 일렁이더니, 그대로 가슴이 갈라졌다.
푸카아아악!
뒤늦게 터진 핏물이 이 상황이 현실임을 보여주었다.
라온은 무너지는 콜린의 시체 뒤에서 섬뜩한 안광을 발하는 남자를 보았다.
‘카룬?’
이곳에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한 중무전주 카룬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 인간이 왜 여기에….’
임무에 나갔다고 했던 카룬이 이곳에 있는 이유를 모르겠다.
‘이곳에 있는 이유… 잠깐!’
쥬벨이 카룬을 벗어난 게 아니었다면?
쥬벨이 암살자가 되어서 카룬이 그를 외부에 팔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것 같다. 이 환살대라는 암살집단 자체가 카룬의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 그게 맞아!’
쥬벨도, 주디엘도 처음부터 카룬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한 거야.
카룬의 등장과 스란 부족에 위기를 만든다고 했던 콜린의 말을 조합해보니, 하나의 가정이 떠올랐다.
‘스란 부족이 불에 타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 카룬이 나타나서 모두를 구한다면?’
카룬은 야수연맹의 은인이 되고, 지그하르트에서도 어마어마한 실적을 올릴 수 있게 될 것이다.
실제로 스란 부족을 습격하려던 암살자들은 숫자만 많았지, 그리 강하지 않았다. 그들을 버림 말로 써서 카룬 본인의 실적을 올리려고 했던 게 분명했다.
‘저자가 이렇게까지 한 이유는 나 때문이겠지.’
최근 나는 많은 실적을 쌓아 후계자 후보가 되어도 이상하지 않다는 소리를 듣고 있다.
기묘해진 가문 내부의 분위기에 위기감을 느낀 카룬이 실적을 만들기 위해서 이 계획을 짠 게 분명했다.
‘화룡점정은 콜린의 입을 막은 거야.’
카룬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콜린을 죽여서 입을 막은 것으로 이 모든 사태가 본인의 짓이라는 것을 증명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중무전주님.”
라온이 타오르는 속을 가라앉히며 카룬의 서늘한 눈동자를 마주했다.
“이런 곳에서 뵙게 될 줄은 몰랐군요.”
“임무 완수 후 복귀 중에 불이 번지고 있기에 와보았다.”
그리 이상하지 않은 대답이다. 실제로 그는 임무를 나가 복귀했을 때도 가문에 없었으니까.
“그런데 왜 이놈을 죽이신 겁니까?”
“암살자잖느냐. 암살자는 죽기 직전까지 방심해서는 안 되는 놈들이다.”
카룬은 당연한 것을 왜 묻냐며 고개를 저었다.
라온은 천천히 다가오는 카룬을 보며 입술을 씹었다.
‘날 죽일 생각인가?’
위험한데….
카룬의 담담한 표정을 보자, 등골 사이로 오싹한 소름이 흘러내렸다.
지금 이곳에 있는 건 나와 카룬 둘 뿐이다. 여기서 그가 덤벼들며 살 가능성이 아예 없었다.
‘검계현신을 써도 못 이기니까.’
카룬의 무력은 부왕보다도 위다. 전력으로 싸워도 밀릴 텐데, 검계를 써서 힘이 빠진 지금이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도망쳐야 하나? 아니, 등을 보이면 더 위험해.’
조금 전 카룬의 검술은 인지하기도 전에 콜린을 베었다. 섣부르게 움직였다가는 일검에 목이 날아갈 것이다.
“라온 지그하르트.”
카룬은 검을 휘두르면 닿을 거리까지 다가와서 차디찬 눈빛을 드러냈다.
“그에게 무엇을 들었지?”
“글쎄요.”
라온이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가.”
카룬의 눈빛이 어둑하게 가라앉는다. 지금 이곳에서 끝을 보려는 것 같았다.
라온이 제천검과 진혼검을 쥔 손에 힘을 주며 방어를 준비할 때 하늘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떠올랐다.
쿠와아아아아앙!
집채만 한 백호가 숲 사이로 파고들어 와 웅대한 포효를 터트렸다. 그 위에 타고 있던 남자가 라온과 카룬의 앞에 내려섰다.
백호에게도 밀리지 않는 우람한 덩치와 부리부리한 눈매 그리고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짓누르는 듯한 패도적인 기세에 라온이 본인도 모르게 손을 떨었다.
“으음….”
카룬도 그의 등장까진 예상하지 못한 듯 미간을 찌푸린 채 뒤로 물러섰다.
라온이 마른침을 삼키고서 백호의 등에서 내려온 남자를 불렀다.
“야수연맹주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