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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612화 (611/653)

제612화

쥬벨은 주디엘의 앞을 막아선 남자를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라온 지그하르트라고?’

라온 지그하르트는 현재 대륙에서 가장 유명한 무인 중 하나다.

신성이라고 불려도 어릴 나이에 그랜드 마스터를 꺾고, 광룡을 사냥한 괴물. 이 오지에 박혀 있으면서도 모를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소문이 과장이 아니었어.’

실제로 본 라온 지그하르트의 패기와 무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내게 향하는 기파가 아님에도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였다.

‘거기다….’

쥬벨이 입술을 떨면서 시선을 들어 올렸다. 오늘은 달이 없어야 하는 밤이건만, 라온이 나타남과 동시에 해와 달이 동시에 떠올랐다.

어둑한 하늘을 채운 태양과 달빛에서 쏟아지는 광휘가 무력 이상의 신비를 발했다.

뒤에서 보는 것만으로 등골이 오싹할 정도의 전율이 돋아 올랐다.

나만이 아니라, 이곳에 있는 모든 무인과 암살자들이 라온의 존재감에 짓눌린 것 같았다.

‘저런 남자가 누나의 주군이라니….’

주디엘의 반응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녀가 모신다는 주인이 저 라온 지그하르트라는 것을.

첩자로 살았다는 누나가 어떻게 용살자와 만났는지 상상조차 되질 않았다.

“누….”

쥬벨이 주디엘을 부르다가 멈춰 섰다. 그녀의 표정은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해 보였다.

반가움, 죄송스러움, 슬픔, 기쁨, 감사함이 모두 섞여 검게 보일 정도였다.

“누나.”

“쥬벨.”

주디엘이 어벙하게 서 있는 쥬벨의 손을 잡았다.

“이제 괜찮아.”

그녀는 동생의 손을 꼭 잡은 채 지금까지 보여주지 못했던 안도의 웃음을 보였다.

스란 부족과 암살자들의 살기를 온몸으로 느끼고 있음에도 조금도 겁을 먹지 않은 것 같았다.

“라온 님이 지켜주실 거야.”

주디엘은 라온의 등을 보며 잔잔한 미소를 그렸다. 그를 완벽하게 신뢰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여기서 기다리자.”

“…….”

쥬벨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주디엘의 손에서 전해지는 온기를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이런 건방진 놈!

라스가 라온의 머리를 부여잡으며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런 거만한 말은 본왕 같은 마계의 군주나 할 수 있는 것이니라!

‘나보고 농락의 마왕이라며.’

-농락의 마왕은 개뿔!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애송이가 어딜 감히!

‘참 까다롭다니까.’

라온은 버둥거리는 라스를 밀어내고, 스란 부족의 장으로 보이는 중년인을 바라보았다.

“지금 그 말 진심인가.”

스란 부족장이 이쪽을 노려보며 바드득 소리가 날 정도로 이를 갈았다.

“정말 이 인원을 모두 상대하겠다고? 그것도 홀로?”

“그렇소.”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고서 한 발 앞으로 나갔다.

“평소라면 그 패기에 감탄이라도 해주었겠지만, 지금의 내게 그런 여유 따위는 없다!”

스란 부족장이 입술을 씹으며 주먹을 말아 쥐자, 푸른 기운이 그의 전신을 휘감았다.

빛으로 이루어진 사람의 형상을 뒤집어쓴 듯한 모습. 강신이라 불리는 주술이었다.

“놈을 제압하고, 암살자들은 모조리 죽여 버려라!”

그는 말 그대로 이성을 잃은 것처럼 사납게 달려들었다. 뒤에서 대기하던 스란 부족의 무인과 주술사들도 함께 땅을 박찼다.

스으으으으!

암살자들 역시 물러설 생각이 없다는 듯 손에 쥔 단검과 비수에 살의를 담은 채 그림자를 타고 접근해왔다.

피이이이잉!

뒤에 있던 암살자들이 비수를 쏘아냈다. 검게 물든 칼날이 빛살이 되어 쇄도해왔다.

콰아아앙!

라온은 비수를 보지도 않았다. 검계현신으로 이뤄낸 공간의 압력으로 암살자들이 날린 비수를 종잇조각처럼 뭉개버렸다.

“흐아아아!”

다만 스란 부족장의 공세는 비수처럼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의 주먹이 기이한 투로로 꺾였다. 복부를 노리는 것 같았다.

라온이 권풍을 일으키는 스란 부족장의 주먹을 향해 신검을 내질렀다.

쩌어어어엉!

신검과 주먹이 맞부딪치며 쇳덩이가 깨지는 듯한 굉음이 울렸다.

‘무겁군.’

손아귀가 뜯겨 나갈 정도로 묵직한 주먹이다. 부족장을 맡아도 손색없는 무위였지만, 이자에게 밀리기에는 내게 걸려 있는 게 너무도 많았다.

치이잉!

흔들리는 손아귀에 굳건한 의념을 담아내며 신검을 내리쳤다.

쿠우우웅!

신검의 칼날 위에서 타오르는 불길이 벼락처럼 떨어지며 스란 부족장의 주먹과 그의 몸을 동시에 밀어냈다.

“허….”

스란 부족장도 본인이 이렇게 쉽게 밀려날 줄은 몰랐다는 듯 눈만 꿈벅였다.

화아아아아아!

라온이 신검으로 반원을 그리자, 검날에서 피어난 불꽃이 둥글게 응집되며 화염의 방패를 세웠다.

캬아아아앙!

스란 부족민들이 제각기 주술이나 오러를 쏘아냈지만, 염주벽은 최강의 방어 초식답게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치이이잉!

암살자들은 기회를 잡았다는 듯 비수를 날리고서 몸으로 돌진해왔다.

수십 개의 비수가 칼날의 소나기가 되어 떨어져 내렸다.

치이이잉!

라온은 기울어졌던 마검을 세웠다. 검신에서 피어난 은빛 서리가 신기루처럼 번져나간다.

쩌어어억!

쏟아지던 비수가 모조리 박살 나고, 가장 먼저 달려들었던 두 명의 암살자가 손에 쥔 단검과 함께 반으로 갈라졌다.

쩌어어어억!

고작 검을 두 번 휘두른 것만으로 스란 부족과 암살자들이 넋을 놓은 것처럼 멈춰 섰다.

압도라는 단어가 무엇보다도 잘 어울리는 상황이었다.

“멈추지 마라!”

스란 부족장은 불길에 밀려났음에도 굴하지 않았다.

다시 주먹을 말아 쥔 채 보법을 밟았다. 그의 명령을 받은 부족민들도 전력을 끌어내며 달려들었다.

콰아아아아아!

그들의 강렬한 공세에 길게 세워두었던 염주벽이 산산조각으로 깨져나갔다.

“크아아아!”

스란 부족장은 왼발을 축으로 오른발을 뻗어왔다. 검을 휘두르는 것보다 더 날카로운 각법이 허리를 파고들어 왔다.

‘살의가 없군.’

야만적이면서도, 투로가 잘 다져진 상승의 무학이었지만, 부족장은 이런 상황에서도 나를 죽이는 게 아니고, 제압하려고 들었다.

그렇다면 나도 그에게 살의를 드러내서는 안 된다.

‘물론 대충해서도 안 되지만.’

라온이 스란 부족장을 향해 나아가며 신검을 쥐고 있는 손아귀에 힘을 풀었다.

치이이잉!

붉게 젖은 칼날이 가늘게 흔들리며 꿈결 같은 선을 그렸다.

검계현신에서 펼쳐지는 은검몽. 검극에 어린 불꽃이 찬연하게 번뜩이며 스란 부족장의 마나 흐름을 갈랐다.

쩌어어어억!

스란 부족장을 덮고 있던 푸른 기운이 마른 낙엽처럼 바스러진다. 강신 자체가 풀려버린 것이다.

“아….”

스란 부족장은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강신이 풀린 게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쿠구구구구!

스란 부족민들은 멈춰버린 부족장을 대신하여 오러와 주술을 내질렀다.

한 부족답게 기예들이 조화롭게 응집되며 강렬한 기운을 흩뿌렸다.

라온이 눈앞으로 밀려오는 스란 부족의 기예를 향해 신검을 겨누었다.

만화공 천화.

무금향.

악을 제압하는 화염의 감옥이 길게 입을 벌리며 스란 부족민들이 쏘아낸 오러와 주술의 응집체를 가두었다.

콰아아아아앙!

불길의 감옥 속에 갇힌 스란 부족의 오러와 주술이 폭발하며 허공에 수십 줄기의 유성을 그렸다.

“뭐, 뭐야 저건!”

“말도 안 되는….”

“저, 저걸 어떻게 뚫으라는 거야….”

스란 부족장과 부족민들은 머리카락 한 올조차 상하지 않은 라온을 보며 눈동자를 떨었다.

스으으응!

다만 암살자들은 공포와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듯 더 날카로운 살의를 뿜어내며 다가왔다.

라온이 암살자 쪽으로 시선을 돌릴 때 양쪽으로 퍼져 있던 암살자들이 품에서 하얀 종이를 꺼냈다. 마법이 깃들어 있는 스크롤이었다.

암살자들이 스크롤을 찢자, 사방에서 화염이 폭발하며 라온과 스란 부족을 에워쌌다.

불길이 높은 나무 위까지 치솟으며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는 불의 지옥을 만들어냈다.

우우우우웅!

불의 벽들이 겹겹이 쌓이며 어느새 하늘까지 이어지는 불꽃의 선을 그렸다. 마치 새장과도 같은 형상이었다.

“커흑!”

“흐으윽….”

“저, 저놈들부터 막아야 했는데….”

하늘까지 불길에 막히게 되자, 무인이나, 주술사들조차 숨을 쉬기 어려운 듯 가슴을 부여잡고, 무릎을 꿇었다.

“의미없는 짓이다.”

반면 라온은 담담한 눈빛으로 신검을 들어 올렸다. 새장 형태의 불길을 향해 검을 겨누자, 사위를 불태우던 불꽃이 그의 손아귀로 빨려 들어갔다.

‘이런 방식으로도 쓸 수 있군.’

이건 불의 정령왕 이프리트의 힘을 받으며 얻은 두 번째 효과였다.

만화공의 불꽃보다 약한 화력의 불길은 내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게 되었다.

화아아아아아!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을 것 같았던 불꽃의 새장이 가라앉는다. 눈앞을 가득 채웠던 화염의 벽은 불씨 하나 남기지 않은 채 지워졌다.

“허어….”

“부, 불꽃이 손으로 빨려 들어갔어!”

“꼭 화염을 조종하는 것 같았는데, 불의 신의 축복이라도 받은 건가?”

스란 부족장과 부족민들은 놀랍다 못해 신성스러운 라온의 모습에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크으으….”

“빌어먹을!”

“저 괴물은 대체 뭐야….”

죽음조차 무서워하지 않던 암살자들도 더 이상 다가오지 못한 채 단검을 쥐고 있는 손을 떨었다.

“아직 만족하지 않았을 테니, 더 와도 상관없소.”

라온은 얼마든지 덤비라고 말하며 스란 부족장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아….”

스란 부족장은 한참 동안 라온을 노려보다가 한숨을 뱉었다.

“됐네. 자네가 힘 조절을 했다는 건 알고 있어. 진심으로 했다면 우리 모두 죽었겠지. 더 하는 건 시간 낭비야.”

그는 여기까지라며 고개를 저었다. 스란 부족민들도 족장을 따라서 무기를 내리고, 강신을 풀었다.

“어디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지 해보게.”

“그 전에 할 일부터 끝내고 오겠습니다.”

라온이 암살자들을 바라보았다. 스란 부족과 달리 저들은 포기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적당히 하려고 했는데….’

저 중에는 스스로 암살의 길에 들어선 놈도 있지만, 주디엘의 동생처럼 원치 않은 상태에서 암살자가 된 자도 있을 것이다.

일부러 처음에 선동을 한 놈들만 잔인하게 죽였지만, 제대로 하지 않으면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았다.

‘힘의 차이를 보여주는 게 좋겠지.’

라온이 마검으로 암살자들을 겨누었다. 칼날 위를 질주하는 서리가 초승달처럼 굽어지며 대지를 가르는 선을 그렸다.

콰과과과!

잿빛과 불꽃으로 가득했던 대지 위로 순백의 서리가 차오른다.

무시무시한 서리의 파동이 암살자들이 반응할 틈도 없이 그들이 밟고 있는 땅과 다리를 모조리 얼려버렸다.

“끄아아악!”

“이, 이게 무슨!”

“느끼지도 못했는데 대체….”

찰나의 순간에 바닥만이 아니라, 암살자들의 다리까지 얼려버린 신기에 이곳에 있는 모두가 눈을 부릅떴다.

라온은 암살자들을 모두 제압한 것을 확인하고 스란 부족장에게 시선을 돌렸다.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지그하르트의 광풍 부대주 라온이라고 합니다.”

눈을 부릅뜨고 있는 스란 부족장에게 고개를 숙였다.

“크흠. 그건 알고 있네.”

스란 부족장이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장포는 형님. 아니, 맹주의 것이고, 맹주가 그대에게 넘겨주었다는 것을 들었으니까.”

“역시 그랬군요.”

“다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야. 무슨 오해가 있었는지 말해보게.”

그는 무슨 말이라도 들어주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성을 뚫고 나왔던 분노가 가라앉은 듯한 모습이었다.

“주디엘.”

라온의 부름에 주디엘이 동생의 손을 잡은 채 앞으로 나왔다.

“네가 설명하도록. 어떻게 이런 상황이 벌어진 것인지.”

“알겠습니다.”

주디엘이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나왔다.

“저희는 어릴 적에 헤어진 남매입니다. 전 동생이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알고….”

*     *      *

“크으윽….”

콜린은 홀로 전쟁을 멈춰버린 라온을 보며 입술을 씹었다.

‘저 괴물 놈이 대체 왜 여기에 있는 거야!’

다 끝난 계획이었다.

쥬벨이 도망쳐준 덕분에 더 완벽한 상황이 만들어졌는데, 저놈이 나타나면서 모든 것이 망가져 버렸다.

‘이게 말이 돼?’

홀로 불길을 잡고, 스란 부족과 암살자까지 막아내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다.

‘그것도….’

많은 피를 보지도 않았어.

암살자 중에서도 죽은 이는 다섯이 채 되지 않고, 스란 부족은 부상자조차 없다.

라온이 보이는 것 이상의 무력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대로라면 다 끝이야.’

스란 부족장은 이미 라온에 대한 호감을 보이고 있었다. 이대로 상황이 종료되면 쥬벨은 살고, 암살자들은 모두 잃는 최악의 상황이 될 것이다.

‘어쩔 수 없군.’

지금 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해서는 마지막 방법을 쓸 수밖에 없었다.

“스란 부족 내부에 불씨는 심어 놨겠지?”

스란 부족의 주술사와 무인들이 모두 마을 밖으로 나온 틈을 이용하여 마을 내부에 불씨를 심어두었다.

마을 안에 있는 건 대부분 노인과 아이들이었기에 불씨가 터진다면 스란 부족이 다시 미쳐서 날뛸 것이 분명했다.

“예. 설치를 끝냈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2조장이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터트려.”

콜린이 마을에 불을 지르라는 듯 손가락을 까딱였다.

“알겠습니다.”

2조장이 신호를 보내자, 잠시 후 스란 부족의 마을 안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콰아아아아앙!

좁은 공간에서 터진 불길이 마을을 휘감은 채 이글거리며 타올랐다. 평범한 인간은 절대 살아남을 수 없는 지옥도가 만들어졌다.

“어…?”

“아아아아악!”

“안 돼!”

“저 안에 아이들이 있다고!”

주디엘의 말을 듣고 있던 스란 부족장과 부족민들이 비명을 지르며 마을로 달려갔다.

“좋아. 이제… 어?”

콜린이 천공까지 솟구치는 불길을 보다가 입을 떡 벌렸다.

날카로운 인상의 중년인이 거대한 불길을 가르고, 마을 안에 있던 사람들을 외부로 내보내고 있었다.

“저, 저놈은 또 뭐야!”

스란 부족도 아니고, 생판 모르는 인간이 튀어나와 사람들을 구하다니, 대체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다.

“죽여! 저놈을 죽이라고 전해!”

콜린의 청발의 중년인을 가리키며 악을 질렀다.

“뭐해! 당장 죽이라고 전하라니까!”

하지만 2조장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너 뭐 하는….”

콜린이 뒤를 돌아보는 순간 2조장의 몸에서 머리가 뚝 떨어졌다.

그 뒤를 채우는 건 피보다 진한 빛을 띤 붉은 눈이었다.

스으으으.

라온이 피 한 방울 묻지 않은 검을 내리며 고개를 틀었다.

“쥐새끼가 이곳에 숨어 있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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