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610화 (609/653)
  • 제610화

    “…벨?”

    주디엘이 가느다랗게 뱉은 말이 이어진 순간 그녀의 이마로 향하던 단검이 급격하게 휘어졌다.

    꺾인 단검이 후드의 우측을 베었다. 갈라진 틈을 통해 주디엘의 뺨에서 핏물이 흘러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뺨이 베인 것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그저 쥬벨만을 바라보았다.

    ‘쥬벨이야. 내 동생이 맞아.’

    눈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지금 앞에 있는 남자는 하나뿐인 동생 쥬벨이었다.

    “너 누구야.”

    쥬벨이 주디엘의 목에 단검을 겨눈 채 섬뜩한 눈동자를 부라렸다.

    “어떻게 그 이름을….”

    그가 단검을 더 가까이 들이밀려고 할 때 주디엘이 머리에 쓰고 있던 후드를 벗었다.

    캬아앙.

    그녀의 얼굴이 드러난 순간 쥬벨이 손에 쥐고 있던 단검을 떨어뜨렸다.

    “누, 누나…?”

    쥬벨 역시 주디엘처럼 얼굴을 본 순간 하나뿐인 혈육을 알아보고 윗니와 아랫니를 마구 부딪쳤다.

    “누나 맞아?”

    “쥬벨.”

    주디엘은 입술을 꼭 씹은 채 쥬벨을 끌어안았다. 지금이 어떤 상황이든, 쥬벨이 무엇을 하려고 했든 신경 쓰지 않았다. 긴 세월 동안 참고, 참던 감정이 터져 나와 스스로를 통제할 수가 없었다.

    “쥬벨. 쥬벨.”

    동생의 이름을 읊조리며 쥬벨을 안고 있는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다시는 그를 놓치지 않도록.

    “으….”

    쥬벨은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주디엘의 등을 쓸며 눈을 내리감았다.

    ‘누나의 향이야….’

    어릴 적 누나의 품에 안겨서 잘 때만 맡을 수 있었던 향이 난다.

    향긋한 꽃도, 달콤한 과일도, 단아한 풀의 향도 아니다.

    햇볕에 잘 말린 이불에서 느껴지는 따스한 향. 다시는 맡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그 다정한 향기에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정말 살아 있었구나.’

    대주에게 주디엘이 살아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믿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생각에 지금까지 버티고 있었는데,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평생 이대로 있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이럴 시간이 없었다.

    “누나.”

    쥬벨이 흐물흐물해졌던 정신을 다잡으며 주디엘에게서 떨어졌다.

    “쥬벨. 정말 살아 있었어….”

    주디엘은 감정을 주체할 수 없는 듯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입술을 떨었다.

    “지금 이러고 있으면 안 돼.”

    쥬벨은 주디엘이 떨어뜨린 종이를 챙겼다. 빠르게 흔적을 지운 후 그녀를 집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후….”

    그는 기감을 풀어서 주변을 살핀 후에 아무런 반응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집합 시간 전에 준비를 끝내놔서 다행이야.’

    오늘이 암살 당일이지만, 아직 집합까지 시간이 남았다. 조금이지만 여유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으음….”

    주디엘도 이제 정신을 차린 듯 붉어진 얼굴로 눈가에서 흘러내린 눈물을 닦았다.

    “그런데 너 대체 뭘 하려던 거니?”

    그녀는 쥬벨의 복장을 살피며 마른침을 삼켰다.

    “…….”

    쥬벨은 얼굴에 쓰고 있던 복면을 벗으며 입술을 씹었다.

    ‘암살자로 살았다고 말을 해야 하는 건가….’

    암살자로 살아가며 사람을 죽였다고 말한다면 주디엘이 너무 슬퍼할 것 같았다. 더 이상 누나의 우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그런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니고….”

    시간이 없다고 말하며 화제를 돌리려고 할 때 주디엘의 입술이 다시 달싹였다.

    “나는 첩자로 살았어.”

    “뭐?”

    첩자라는 말에 쥬벨이 눈을 부릅떴다.

    “위에서 지정해주는 곳에 가서 그곳의 정보를 뽑아 보고를 올렸지.”

    주디엘이 쥬벨을 보며 연한 웃음을 그렸다.

    “내가 뭘 하는 건지 모르겠더라. 날 믿는 사람들을 배신해서 내 목숨을 구제하다니, 살고 싶지 않았어.”

    그녀가 떨리는 손으로 입을 가렸다.

    “죽으려고 했는데, 네가 떠오르니 발길이 떨어지질 않았어. 마지막으로 네 얼굴 한번 보고 가자고 생각하며 새로운 임무를 맡았는데….”

    주디엘의 눈동자가 갑작스러울 정도로 청아한 빛을 띠었다.

    “그곳에서 지금 모시는 분을 만났어.”

    “모시는 분? 우리를 이렇게 만든 인간과 다른 사람이야?”

    “전혀 달라. 나를 구해주신 분이니까.”

    그녀는 작지만 진심이 어린 미소를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분이 누구인데?”

    “…….”

    주디엘은 대답 없이 그저 웃었다. 혹시라도 자신이나, 쥬벨이 이곳에서 죽게 된다면 라온에게 피해가 갈 수도 있기에 그의 이름을 꺼내지 않았다.

    “너는 어때? 어떻게 지낸 거야?”

    “나는….”

    쥬벨이 마른침을 삼키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다시 시선을 내리며 어둠처럼 새까만 야행복을 매만졌다.

    “보다시피 평범하게 살지는 않았어. 누나가 아까 나를 보고 죽어야겠다고 말했잖아. 나도 마찬가지였어.”

    “…….”

    “죽더라도 누나가 잘 살아 있는지 보고 죽자고 생각했지.”

    주디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주먹을 꼭 말아쥔 채 동생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 새끼들 누나가 부잣집에서 편히 쉬고 있다고 했는데….”

    쥬벨은 대주의 능글맞은 얼굴을 떠올리며 미간을 구겼다.

    “…나는 암살자로 살았어. 지금까지 아홉 명을 죽였고, 오늘이 열 번째야. 열 번째 암살을 마치면 돌려보내 준다는데, 그럴 일은 없겠지.”

    그는 이미 본인의 미래를 예상하고 있었는지 비웃음을 흘렸다.

    “오늘?”

    “그래. 스란 부족. 그들 모두를 죽이는 게 우리의 임무야.”

    “스란 부족은 야수연맹에서도 이름난 곳이잖아. 거길 어떻게….”

    “사전 준비는 모두 끝내놨어. 위험하긴 해도 실패할 일은 없을 거야.”

    쥬벨은 이미 다 계획이 되어 있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쥬벨.”

    주디엘이 일어서서 쥬벨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그의 손을 잡고 고개를 짧게 주억였다.

    “도망가자. 이제 이곳에 있을 필요 없잖니. 여기서 벗어나기만 하면 너와 나 둘 다 살 수 있어.”

    “…….”

    쥬벨은 주디엘의 손을 거부하지는 않았지만, 답을 해주지도 않았다.

    “쥬벨?”

    “못 가.”

    그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이미 라벤 마을 주변에 암살자들이 떼로 숨어 있어. 밖으로 도망친다면 마을을 벗어나지도 못한 채 죽게 될 거야.”

    쥬벨이 깊은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누나가 여기까지 올 수 있던 게 기적이야. 아마 다들 곧 있을 임무를 준비하느라 놓쳤겠지.”

    쥬벨이 주디엘의 손을 놓고, 침대 옆의 벽면을 매만졌다. 소리 없이 벽이 열리고, 사람 하나가 숨어 있을 수 있는 작은 공간이 드러났다.

    “누나는 여기에 숨어 있다가 숲에 불이 났다는 소리가 들리면 왔던 곳으로 돌아가.”

    “그게 무슨 소리야! 같이 가야지!”

    “말했잖아. 둘이 함께 빠져나가면 걸릴 수밖에 없어. 마을을 빠져나가기도 전에 목이 떨어질 거라고.”

    그가 다시 주디엘의 손을 잡았다. 따스한 온기에 나오려는 눈물을 참으며 억지웃음을 그렸다.

    “나도 기회를 봐서 빠져나올 테니까. 누나는 먼저 나가.”

    쥬벨은 조금 전 주디엘이 내려온 산을 가리켰다.

    “저 위에서 기다리고 있어. 금방 갈 테니까.”

    “…….”

    주디엘은 더 이상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다시는 헤어지고 싶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런 말을 할 때가 아니었다.

    “그래. 알겠어.”

    고개를 끄덕이고서 낡은 침대에 걸터앉았다. 손바닥으로 옆자리를 치며 이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웃음을 그렸다.

    “잠시 옛이야기나 하자.”

    “음….”

    쥬벨은 그것마저 거절하지는 못하고 주디엘의 옆자리에 앉았다.

    “옛날에 너 내 무릎 안 베면 못 잤던 거 기억나니?”

    “무, 무슨 소리야! 내가 언제!”

    “무릎을 안 줄 거면 팔이라도 달라고 했는데?”

    “아냐!”

    남매에게 주어진 시간은 짧았지만 두 사람의 얼굴에 피어난 웃음은 그 무엇보다도 깊어 보였다.

    *     *      *

    쥬벨의 상사이자, 환살대의 대주 콜린이 작은 수정구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준비는 모두 끝났습니다. 인원도 모두 배치했고, 불씨도 숨겨두었습니다. 예정된 시간에 바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수정구 속에서 수고했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닙니다. 저 그런데….”

    콜린이 입맛을 다시며 눈동자를 길게 굴렸다.

    “정말 3조를 모두 버리실 겁니까?”

    [이럴 때를 위해서 키운 말들이다. 이미 머리가 커질 대로 커져서 살려봐야 도움도 안 돼. 전부 투자하도록.]

    수정구의 남자는 콜린의 요청을 냉정하리만큼 단호하게 잘라냈다.

    “알겠습니다.”

    콜린은 수정구 속 남자의 성격을 아는 듯 바로 고개를 숙였다.

    [그럼 잠시 후에 보도록 하지.]

    “예.”

    콜린은 고개를 숙이고 빛이 사라진 구슬을 덮었다.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찌푸린 후 복면을 쓰고서 몸을 감추고 있던 동굴에서 나왔다.

    “대주.”

    동굴 밖에 있던 암살자들이 앞으로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내부 신호는?”

    “아직입니다.”

    1조 조장인 베른이 고개를 저었다.

    “흠….”

    콜린이 하늘을 올려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잠시 들어갔다가 오겠다.”

    “아직 시간이 남았습니다.”

    “알고 있다. 최종 점검이니, 신경 쓰지 말고 대기하도록.”

    콜린은 그림자 속에 모습을 감춘 채로 마을에 들어갔다.

    마을 안과 숲에 대기하는 암살자들은 이미 준비를 마친 듯 정해진 위치에 숨어서 대기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마을 외곽에 세워진 쥬벨의 집으로 향했다. 그 역시 다른 암살자처럼 정해진 위치에서 은신술을 운용하고 있었다.

    “백구십육 호.”

    콜린이 그대로 지나가려다 말고 눈매를 가늘게 좁힌 채 쥬벨의 집 앞에서 멈춰 섰다.

    “준비는 다 끝냈나?”

    *     *      *

    “그렇습니다.”

    쥬벨이 갑자기 찾아온 콜린을 보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놈 왜 갑자기 여기에 온 거지?’

    조금만 있으면 임무가 시작된다. 그 중심에서 모두에게 지시를 내려야 할 콜린이 왜 이곳까지 찾아온 건지 모르겠다. 등골 사이로 오싹한 불안감이 스쳤다.

    “화탄의 설치는?”

    “완벽하게 끝났습니다. 불씨만 태우면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는 불의 감옥이 만들어질 겁니다.”

    “수고했다.”

    콜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집 앞의 바닥을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뭐지?’

    대체 무슨 생각인지?

    누나를 안으로 들여보내고서 바닥의 흔적을 모두 지웠는데, 콜린은 무언가를 아는 것처럼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점점 더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3조에 관한 계획 때문인데, 잠시 안에서 이야기 좀 하지.”

    “예?”

    쥬벨이 하늘을 올려보며 눈매를 좁혔다.

    “이제 곧 작전 시간이 될 텐데….”

    “괜찮아. 그리 긴 이야기가 아닐 테니까.”

    “…알겠습니다.”

    그는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서 차분히 고개를 끄덕이고서 방으로 들어갔다.

    콜린은 평소처럼 벽에 붙은 의자에 앉아서 등을 기댔다. 다행히 주디엘이 숨은 벽과 반대에 위치한 장소였다.

    “떨리나?”

    “조금은….”

    “열 번째 작업에서도 떨린다니, 간이 상당히 작군.”

    그가 비웃음을 흘리듯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래도 잘 할 수 있을 거야. 지금까지 한 번도 실패가 없었잖아.”

    “…….”

    쥬벨은 대답하지 않고, 낮은 호흡으로 심장에 차오르는 긴장을 풀었다.

    “약속하지. 이게 마지막이야. 이 일이 끝난다면 누나를 보러 갈 수 있을 거다.”

    “그걸 어찌 믿습니까.”

    “믿든 말든 그건 네 자유인데….”

    콜린의 시선이 쥬벨의 옆에 있는 벽으로 흘러갔다.

    “거기에 누굴 숨기고 있는 거지?”

    “무, 무슨 헛소리를….”

    “문 앞의 흔적을 급하게 지웠더라고.”

    “그게 어쨌다는 겁니까. 임무 전에는 당연히….”

    “아니지. 네가 살고 있는 집에 네 흔적을 지우는 게 더 이상하잖아.”

    콜린이 턱을 치켜들며 입매를 비틀었다.

    “조금만 있으면 어차피 다 불에 탈 거기도 하고. 너는 몰랐지만, 수많은 발자국 중에서 이곳으로 이어지는 여자의 흔적도 있었어. 같은 직종인지 흔적이 연하기는 했지만 내가 놓칠 리가 있나.”

    그는 이미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듯 옆에 있는 벽을 바라보며 웃었다.

    “나와.”

    콜린이 단검의 날 부분을 손가락으로 잡은 채 어깨 뒤로 젖혔다.

    “경고는 이게 마지막이다.”

    “후우….”

    쥬벨이 퍼렇게 질린 입술을 씹으며 벽을 매만졌다. 벽이 소리 없이 갈라지고, 다시 로브를 쓴 주디엘이 걸어 나왔다.

    “이 여자는 누구지?”

    콜린이 주디엘을 보며 히죽거렸다.

    “이곳에 와서 여자 근처에도 가지 않은 네가 데리고 온 여자가 누구인지 굉장히 궁금하네.”

    “이 여자는….”

    쥬벨은 대답하다 말고, 조금 전에 매만졌던 벽면 바로 아래를 주먹으로 후려쳤다. 그는 주디엘을 품에 안은 채 창문을 깨고 곧바로 집 밖으로 몸을 던졌다.

    쿠와아아아아앙!

    그 순간 천장과 바닥에서 붉은빛이 번쩍이며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쥬벨과 주디엘은 폭발의 여파에 튕겨 나가 바닥을 굴렀다.

    “미, 미안해.”

    주디엘이 쥬벨을 보며 턱을 떨었다.

    “아니. 내 잘못이야. 저 변태 놈이 그 흔적들을 살피는 것도 염두에 뒀어야 했어. 아니, 지금은 이런 말 하지 말자.”

    쥬벨이 주디엘을 일으켜 세우며 고개를 저었다.

    ‘불씨를 준비해놔서 다행이야.’

    스란 부족 마을 근처에 설치하고 남은 것을 숨겨두었는데, 그 덕분에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콜린이 저 정도로 죽을 리는 없다. 금방 정신을 차리고 쫓아올 게 분명했다.

    “저놈 안 죽었을 거야. 빨리 도망쳐야 해.”

    그는 도망치자는 말과 달리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모르는 듯 입술만 짓씹었다.

    “너 스란 부족 근처 지리를 모두 알고 있다고 했지?”

    “그래.”

    “그럼 그곳으로 가자.”

    주디엘은 어둑한 숲속을 바라보며 눈매를 좁혔다.

    “스란 부족과 이어지는 숲에도 암살자들이 숨어 있어! 그곳에 가기도 전에 잡힐 거야!”

    “밖에는 더 많은 놈들이 있잖아. 갈 곳은 저기밖에 없어.”

    그녀가 손가락을 들어 칼날처럼 솟구친 수풀을 가리켰다.

    “하지만….”

    “저 숲은 누구보다 네가 잘 알고 있다며 난 널 믿어.”

    라온을 보며 배운 게 있다. 모험을 하지 않는다면 그에 대한 보상도 따라오지 않는다. 지금은 위기를 기회로 만들 때였다.

    “생로는 오직 저 숲뿐이야.”

    *     *      *

    라온이 차원문을 열고 나오며 미간을 찌푸렸다. 관문을 여러 번 이동해서 그런지 머리가 지끈거렸다.

    “처음 뵙겠습니다.”

    아려오는 관자놀이를 매만지고 있을 때 청발의 중년인이 고개를 숙여왔다. 침착하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인상적인 남성이었다.

    “암시장 특별 요원실의 리스른이라고 합니다.”

    날카롭게 갈린 눈동자를 마주하자마자 이 남자가 데닝로즈가 말했던 암살자 출신 요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라온 지그하르트입니다.”

    “위명은 익히 들었습니다. 영광입니다.”

    리스른이 절도를 갖춘 미소를 보였다.

    “시간이 없으니, 바로 출발해도 되겠습니까?”

    “시간이 없다는 게 무슨….”

    “마을에 숨은 암살자들이 숲을 불태울 준비를 하고 있더군요. 오늘 아니면 내일 바로 움직일 듯합니다. 불씨들을 치워놓고 싶었지만, 감시가 많아서 쉽게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아뇨. 잘하셨습니다.”

    괜히 건드렸다가는 문제가 커질 수도 있다. 일단 놔두고 뒤처리를 하는 게 나았다.

    “후….”

    라온이 미간을 깊게 찌푸렸다. 리스른은 오늘 아니면 내일이라고 했지만, 준비가 끝났다면 지금 당장 움직여도 이상할 게 없다. 최대한 빠르게 라벤 마을에 도착해야 했다.

    “정말 시간이 없군요. 출발해주십시오.”

    “제가 보법에는 자신이 있는 편인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전력으로 부탁드립니다.”

    리스른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땅을 부드럽게 밀어냈다. 그의 몸은 경쾌하게 뻗어낸 다리와 달리 무서운 속도로 뻗어나갔다.

    과연 보법에 자신을 가질 만한 실력이었다.

    터엉!

    라온은 리스본의 등을 보며 태화보를 밟았다. 한 발을 걸었을 뿐인데 그의 어깨는 어느새 리스른과 같은 위치에 닿아 있었다.

    “어…?”

    리스른은 라온이 이렇게 빠르게 따라올 줄은 몰랐다는 듯 입을 동그랗게 벌렸다.

    “속도를 더 올리셔도 됩니다.”

    라온은 그 상태에서 여유로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윽.”

    리스른은 입술을 깨문 채 속도를 높였지만, 라온은 가뿐하다는 듯 바로 따라붙었다.

    점점 표정이 죽어가는 리스른과 함께  달리고 있을 때, 멀리 보이는 마을이 거대한 불길에 휩싸여 회색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저긴….”

    “저, 저 마을입니다. 벌써 시작했다니!”

    리스른은 이런 상황을 예측하지 못한 듯 눈을 부릅떴다.

    “먼저 가겠습니다.”

    “예?”

    라온은 대답을 듣지 않고, 거칠게 땅을 박찼다. 순간 대지가 뜯겨나가는 소리가 들려오고 그의 육체가 공간을 왜곡시키며 뻗어나갔다.

    “뭐, 뭐야.”

    리스른은 그야말로 붉은 빛살이 된 라온을 보며 입을 떡 벌렸다.

    “뭐 저런 보법이….”

    라온은 리스른의 반응을 무시하고, 길을 뭉개며 나아가 라벤 마을의 입구에 섰다.

    “꺄아아아아아악!”

    “이, 일단 불부터! 불부터 꺼!”

    “강에서 물을 떠오고 있어요!”

    학살이라도 벌어지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었다. 마을 이곳저곳에서 불이 났고, 사람들이 그 불을 끄고 있었다.

    “자, 잠깐! 거기로 들어가면 안 돼!”

    “괜찮습니다.”

    라온은 길을 막으려던 노인에게 고개를 젓고서 불길 안으로 들어갔다.

    마을 외곽을 살피는데, 복면을 쓰고, 야행복을 입은 시체들이 보였다. 가슴에 비수를 맞았는데, 망설였는지 즉사가 아니었다.

    라온은 시체들을 따라 움직이면서 마을과 달리 거대한 불길을 끌어모으고 있는 숲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이 안쪽에 들어가 봐야 무슨 일이 생긴 건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허억, 허억….”

    뒤늦게 도착한 리스른이 옆으로 다가와 가쁜 숨을 내뱉었다. 그의 눈동자는 경악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저쪽이 스란 부족이 있는 곳입니까?”

    라온은 암살자들이 움직인 방향을 가리키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가장 짙은 불길이 피어나는 곳이었다.

    “그,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저희의 예측과는 다른 일이 터진 모양이군요.”

    리스른은 암살자의 시체를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그의 말대로 암살자들이 이곳에서 죽어 있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주디엘과 쥬벨이 만난 게 분명했다.

    -그 녀석 시원시원하네!

    라스는 재밌다는 듯 히죽거렸다.

    ‘저 안에 있지?’

    -그렇느니라. 둘이 같이 움직이고 있는데, 꽤 위험해 보이는군.

    녀석은 주디엘의 토스트가 마음에 들었는지 그녀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저는 안에 들어가 보겠습니다. 리스른 님은 이곳에서 대기해주십시오.”

    라온이 숨을 고르고서 불길에 휩싸인 숲으로 걸어갔다.

    “자, 잠시만!”

    리스른이 턱을 저으며 앞으로 나왔다.

    “스란 부족은 굉장히 경계심이 강합니다. 불이 났고, 암살자들이 있으니 분명 라온 님에게도 살의를 보일 겁니다. 암살자들 사이에 껴서 양쪽에서 공격받을 수도 있으니, 일단 상황을 파악하고….”

    “제가 지금 가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없습니다.”

    라온이 리스른을 부드럽게 밀어냈다. 그의 눈동자에 숲을 휘감은 화마보다 짙은 불길이 타올랐다.

    “저 안에 제 수하가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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