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09화
라온이 데닝로즈가 했던 말을 되새기며 입술을 꾹 씹어 눌렀다.
“지금 암살자라고 하신 겁니까?”
“네.”
데닝로즈가 담담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라온 님의 정보 요청 이후에 그쪽으로 파견을 나가신 요원분은 암살자 출신이세요. 그것도 그 세계에서 꽤 뛰어났던 분이시죠.”
그녀가 뛰어났다고 할 정도라면 은퇴하기 전에 이름을 날렸던 암살자가 분명했다.
“그 요원께서 쥬벨로 보이는 남자와 몇몇 사람들에게서 암살자의 냄새가 난다고 하셨습니다.”
“암살자의 냄새….”
암살자를 가장 잘 파악하는 사람이 누구일까?”
호위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실제로는 아니다.
살수들에게는 특유의 행동거지가 있기에 암살자를 가장 잘 파악하고 알아차리는 사람은 같은 동업자들이었다.
“후….”
라온이 짧은 숨을 내뱉고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그럼 그 암살자 출신 요원분이 쥬벨이 암살자라고 하신 겁니까?”
“맞아요. 그곳에서 채집 일을 하고 있지만, 암살자 같다고 하셨어요. 물론 추측이라 확실하지는 않아요.”
데닝로즈는 추측이라고 말하면서도 눈 한 번 깜빡하지 않았다. 확실하다는 뜻이었다.
“쥬벨의 곁에 있는 사람들도 암살자라고 하셨죠?”
“네. 전부는 아니지만, 상당수가 암살자라고 들었어요.”
그녀는 한두 명이 아니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곳에 죽여야 할 사람이 있다는 뜻이겠군요.”
라온은 열기가 피어나는 찻잔을 매만지며 한숨을 내쉬었다.
“맞아요. 그것밖에 없겠죠.”
데닝로즈가 같은 생각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쥬벨이 머무는 곳은 스란 부족 근처에 있는 라벤 마을이에요. 크지는 않지만, 작지도 않은 중소 규모 마을이죠. 그가 마을에 자리를 잡은 지 1년이 넘어서 이제는 현지인처럼 여긴다고 하더군요. 스란 부족과도 친해져서 초대받기도 하는 것 같아요.”
“음….”
라온은 잔잔하게 흔들리는 찻물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암살자라면 모습을 바꿀 텐데 용케 발견됐군요.”
암살자는 본래의 모습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다. 쥬벨이 이름을 제외한 외모 그대로 정체를 드러냈다는 점이 신기했다.
“스란 부족에 대해서 잘 모르시는군요.”
“야수 연맹의 주술사들이 많은 곳으로만 알고 있습니다.”
“맞아요. 주술사들이 살죠. 다만 그들 중 몇 사람에게는 특이한 능력이 있어요.”
“특이한 능력?”
“네. 심안이라는 안법이죠.”
데닝로즈가 차로 입술을 축이고서 말을 이어갔다.
“심안?”
“마음의 눈이라는 건데, 타인의 진심을 파악할 수 있다고 하더군요.”
“설마 마음을 읽는다는 겁니까?”
-허억?
라스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고개를 들었다.
‘왜 그렇게 놀라? 마계에도 그런 거 없어?’
-무, 무슨 소리냐 본왕도 사실 그런 능력이 있었을 수도 있느니라!
능력이 있는 게 아니라, 있었을 수도 있단다.
거짓말을 잘 하지 않아서 그런지, 쫄보 마왕이라 그런지 허세도 참 요상하게 부렸다.
“수백 년 전에는 정말 마음을 읽는 주술사가 있었다고 하던데, 지금은 겉모습이 진짜인지만을 볼 수 있다고 하더군요. 즉, 외형을 감출 수 없다는 거예요.”
데닝로즈가 마음을 읽는 건 그저 전설일 뿐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크흠! 역시.
라스가 눈동자를 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에게 그런 능력이 있을 리가 없지! 마계에도 그런 능력은 없을 텐데, 어딜 인간 따위가 마음을 읽는….
라온은 주절거리는 라스를 무시하고 데닝로즈를 바라보았다.
“그럼 쥬벨이 본 모습을 드러낸 건….”
“맞아요. 심안을 사용하는 주술사들의 마음을 트기 위해서 본 모습으로 찾아갔을 거예요. 그러다가 저희의 눈에 발견된 거고.”
“그렇군요.”
라온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모든 상황이 이해가 되었다.
‘더욱더 확실해졌군.’
쥬벨처럼 그 마을에 머물며 인심을 얻는 것을 암살자들의 용어로 밑 깔기라고 한다.
그는 밑 깔기로 환심을 산 후에 스란 부족의 누군가를 죽이려는 게 분명했다.
‘하필 암살자인가….’
주디엘의 삶은 전생의 나와 닮았다.
쓰레기 같은 주인에게 목줄이 잡혀서 원치 않는 일을 하는 건 똑같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다만 혈육이 남아 있다는 건 나보다 나았고, 그 혈육 때문에 벗어날 수 없다는 건 나보다 더 좋지 않았다.
주디엘이 내가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해도 내가 그녀를 각별하게 생각하는 건 전생의 내 모습이 보이기 때문인데, 그녀의 동생이 암살자로 살고 있다고 하니 데루스 로베르트가 떠올라 속이 부글거리며 끓어올랐다.
‘위험한 상황이 될 수도 있어.’
좋지 않은 순간에 끼어들게 된다면 내가 암살자로 몰리거나, 암살의 중심에 끼어들게 될 수도 있었다.
‘후우.’
라온이 천천히 눈을 내리감았다. 20년이 넘게 지난 지금도 데루스의 악행들이 바로 전날처럼 떠오른다.
아마 복수를 해도 놈이 내게 했던 일들은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그렇기에 나와 닮은 주디엘과 그녀의 동생에게는 같은 일을 겪게 하고 싶지 않았다.
‘절대로 놈처럼 살지는 않겠어.’
내 수하는 내가 보호해야 한다.
부하를 헌신짝보다도 못하게 생각한 데루스와 다르게 살기로 다짐하며 시선을 들었다.
“주디엘 님은 아직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어요. 라벤 마을에 도착하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변장하거나 외부에 숨어 계실 수도 있어요.”
“그렇겠죠.”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디엘은 첩자 교육을 받았기에 전투에는 약해도 기척을 죽이는 데는 일가견이 있고, 조심스러운 성격이다. 웬만해서는 들키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암살자들이 노리는 건 누구죠?”
“그건 저희도 모르겠습니다.”
데닝로즈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모르겠다고 말하는 건 굉장히 드문 일이었다.
“단순하게 스란 부족장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지만, 정보가 너무 없어요. 아직 그들이 어느 소속 암살자인지도 모르고.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그 정도면 충분해요.”
고개를 저었다. 짧은 시간에 이 정도 정보를 모아준 것만으로도 큰 은혜를 입었다.
“가시는 건가요?”
“당연히 가야죠.”
라온은 찻잔을 모두 비운 후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눈동자 위로 흔들리지 않는 불길이 번뜩였다.
“제 수하의 일이니까요.”
* * *
라온은 라벤 마을로 떠날 준비를 모두 마친 후 방을 나섰다.
“어?”
현관으로 향할 때 복도를 지나가는 엔시아와 시얀을 마주쳤다.
“존잘 라온 님 어디 가세요?”
엔시아가 앞으로 나오며 고개를 숙였다.
“조, 존잘 라온 님!”
시얀도 주디엘을 따라 존잘이라고 외치며 다가왔다.
-쟤들 어렸을 때 헤어진 자매냐?
라스는 친자매보다 더 가까워진 듯한 시얀과 주디엘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지도 모르지.’
라온이 속으로 한숨을 삼키고서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가문 밖에서 수련 좀 하고 오려 합니다.”
“역시 수련이시군요.”
엔시아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었다.
“그런데 라온 님.”
그녀가 입술을 축이며 한 걸음 더 다가왔다.
“저희 라온 전기 이어서 써도 되죠?”
“라온 전기….”
라온은 두 사람이 품에 안고 있는 미완성의 책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용살자 파트와 세이피아의 구원자 파트를 따로 해서 2권을 더 내려고 하는데요.”
엔시아는 이미 구상을 모두 마친 듯 책의 표지도 새로 할 거라며 웃었다.
“허락 안 해도 하실 거잖아요.”
엔시아나, 시얀이나 이런 쪽 행동력은 멀린 수준이라 막든 말든 할 게 분명했다.
“아니죠. 본인의 의사가 없으면 안 할 거예요.”
엔시아는 당연히 당사자의 의견이 가장 중요하다며 고개를 저었다.
“정말입니까?”
“당연하죠.”
“그럼 하지 마세요.”
“아…”
“어….”
하지 말라는 말을 하자마자, 엔시아와 시얀의 안색이 창백하게 굳어졌다. 두 사람은 세상이 무너진 듯한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았다.
“후우….”
라온은 두 사람의 눈을 마주하지 못하고 고개를 저었다.
“마음대로 하세요.”
“네에!”
“감사합니다! 존잘!”
두 사람은 실물이 이곳에 있는데도, 책을 만들 생각에 들떠서 서재가 있는 곳으로 부리나케 달려갔다.
-너 후회할 것이니라.
라스는 후회한다는 말과 달리 부럽다는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그럴지도 모르지.’
픽 웃으며 별관을 나갔는데, 현관의 계단 앞에 실비아가 서 있었다.
“어디 가니?”
실비아가 환한 웃음을 그리며 다가왔다.
“수련 좀 하고 오려구요. 며칠 걸릴 거예요.”
“그래. 잘 다녀오렴.”
그녀는 열심히 하라는 듯 손을 흔들어주었다.
“주디엘에게 안부 전해주고.”
“음….”
주디엘의 이름을 듣고 바로 뒤를 돌았다.
“무슨 말씀이신지….”
“너 주디엘이 휴가를 받았다고 할 때부터 이상했잖아. 엄마가 그걸 모를까.”
실비아는 엄마를 속일 생각을 말라며 웃었다.
“그 아이는 처음 봤을 때부터 신기했지. 차분한데, 뭔가에 쫓기는 듯 보였어. 네 전속이 되면서 얼굴이 좋아졌는데, 다시 조급함을 보이더구나. 위험한 상황에 처한 거니?”
“…그건 가봐야 알 것 같습니다.”
실비아도 어느 정도 상황을 아는 것 같아서 속이지 않았다.
“꼭 데리고 오렴. 맛있는 걸 해놓을 테니까.”
실비아는 주디엘을 무사히 데리고만 와달라며 웃었다.
-맛있는 거?
지루한 듯 하품을 하던 라스가 고개를 바짝 들어 올렸다.
-맛있는 게 무엇이냐!
“다녀올게요.”
라온은 실비아에게 고개를 숙인 후 뒤를 돌았다.
-자, 잠깐만 기다려 보거라!
라스가 실비아에게 달려들며 외쳤다.
-맛있는 게 뭔데! 제발 메뉴만 듣자고!
* * *
장대처럼 길쭉한 나무와 창칼처럼 날카로운 수풀이 하늘에 닿을 듯 솟구친 숲의 중심에 몬스터의 뼈로 세워진 벽이 세워져 있었다.
지쳤는지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힌 갈색 머리카락의 청년은 뼈의 벽 앞에 서서 고개를 숙였다. 허름한 옷차림과 달리 푸른 눈동자는 선명하게 반짝였다.
“저 필립입니다! 문 좀 열어주십시오!”
스스로를 필립이라고 말한 청년의 외침에 뼈의 벽 위에서 사람의 얼굴이 튀어나왔다.
피부는 검게 그을렸지만, 인상이 깔끔한 중년인이 쩝 입맛을 다셨다.
“왜 이렇게 빨리 온 거냐.”
“부족장님과의 약속 시간은 칼처럼 지켜야죠.”
필립이 선한 웃음을 그리며 머리를 긁적였다.
“미워할 수가 없다니까.”
부족장이라 불린 중년인이 손가락을 흔들자, 벽이 갈라지며 두 사람 정도가 드나들 수 있는 문이 열렸다.
“감사합니다.”
필립이 다시 고개를 숙이고 문을 넘어 안으로 들어갔다.
버섯의 형태로 지은 듯한 작은 오두막이 중구난방으로 세워져 있었고, 마을의 중심에는 하늘에 닿을 듯한 뼈의 탑이 솟구쳐있었다.
검은빛으로 물든 탑은 기괴하다기보다 웅장하다는 느낌을 주었다.
“매일 같이 오면서 뭐가 그리 신기하다고 보고 있느냐. 이쪽으로 와라.”
부족장의 손짓에 필립이 헉 소리를 내고서 그에게 다가갔다.
“저 탑은 볼 때마다 절 빨아들이는 것 같아요. 눈을 떼기 힘들더라구요.”
“눈썰미가 있군. 선조께서 좋아하실 게다.”
“저게 마을을 침범한 몬스터들을 무찌르고 세운 탑 맞죠?”
“그래. 수천 마리가 넘게 달려들었다고 하더군. 당시에 사왕이라 불리던 선조가 아니었다면 우리 부족은 전멸했을 것이야.”
부족장은 탑을 한 번 올려다보고서 옅은 미소를 그렸다.
“대단한 분이시네요.”
“아부는 그만하면 됐으니, 물건이나 꺼내 보거라.”
“아부 아닌데….”
필립은 입술을 비틀고서 허리에 차고 있던 가방을 열었다.
그 안에는 가지각색의 약초와 독초 그리고 꽃들이 담겨 있었는데, 금방 땄는지 하나 같이 활기를 띠고 있었다.
“짜증날 정도로 좋군.”
부족장은 필립이 가져온 약초와 독초를 살피며 헛웃음을 흘렸다.
“넌 어떻게 된 녀석이 우리 애들보다 더 좋은 재료들을 찾아오는 거냐? 대체 어디서 따오는 거야.”
“사업상 비밀입니다.”
필립이 손가락으로 입술을 가리며 웃었다.
“하여튼.”
부족장은 그런 필립이 대견한 듯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좋다. 전부 다 최상급으로 쳐주마.”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서 필립에게 주머니를 내밀었다. 안에서 금화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가, 감사합니다!”
필립은 주머니를 받으며 땅에 닿도록 머리를 숙였다.
“오늘은 여기서 묵고 가는 게 어떠냐. 좋은 고기가 들어왔으니, 후회하지 않을 게다.”
“음, 오늘은 제가 집에 돈을 보내는 날이라서 죄송합니다.”
“아, 그렇군. 벌써 그리되었어.”
부족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필립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어머니는 좀 괜찮으시냐?”
“…….”
필립은 대답 없이 웃었다.
“그래. 가보거라. 다음에 올 때는 거절할 수 없는 음식을 준비해놓고 있으마.”
“감사합니다. 다음에 뵙겠습니다!”
필립이 고개를 숙이고서 마을을 떠났다.
“허….”
눈이 동그랗게 말린 스란 부족의 청년이 부족장에게 다가오며 헛바람을 흘렸다.
“부족장님 초대를 거절하다니, 신기한 녀석이라니까요.”
“그럴 만도 하잖느냐.”
“하긴 어머니 생각에 머리가 다 쏠려 있겠죠. 돈을 많이 벌고 있는데도 저렇게 넝마만 입고 다닐 정도니까.”
“어머니가 불치병에 걸렸다고 하니, 몸은 이곳에 있어도 정신은 그쪽에 가 있을 수 밖에.”
부족장은 안타깝다는 듯 짧게 혀를 찼다.
“너도 저 아이가 찾아오면 잘 대해주거라.”
“물론이죠. 전에 저희 집에서 밥도 멕여서 보냈어요.”
청년은 잘 지내고 있다며 고개를 저었다.
“후우.”
부족장은 멀어지는 필립의 등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 * *
필립은 스란 부족을 떠난 후 그가 1년 넘게 머물고 있는 라벤 마을로 돌아왔다.
“벌써 일 끝내고 오는 게냐?”
“부지런하기도 하네.”
“우리 아들이 너 같았으면 좋겠어.”
마을 사람들은 필립의 칭찬을 하며 웃음을 보였다. 마을 자체에 녹아든 듯한 모습이었다.
“아니에요. 아직 멀었어요.”
필립은 사람 좋은 웃음을 보이고서 마을 외곽에 위치한 본인의 집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그의 표정이 싸늘할 정도로 굳어졌다.
“낮에는 찾아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요.”
그는 우측 의자에 앉아 있는 백발의 중년인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상사한테 못 하는 소리가 없구나. 백구십육 호.”
중년인은 필립에게 백구십육 호라 부르며 눈매를 가라앉혔다.
“무슨 일이십니까.”
“스란 부족과는 어때?”
“행사에 초대되거나, 집에 초대받을 정도는 되었습니다.”
“하긴 1년쯤 되었으면 그 정도 친분은 쌓아야지. 뭐, 다른 놈들은 못 하고 있지만 말이야.”
그는 수고했다고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위치 파악은?”
“모두 끝냈습니다.”
필립은 그리 말하며 품에 가지고 있던 종이를 내밀었다.
그 종이에는 조금 전 그가 다녀온 스란 부족의 위치가 그려져 있었고, 함정과 주술이 설치된 곳이 모두 적혀 있었다.
“그럼 이제 작업을 시작해야지?”
“벌써 말입니까?”
필립은 예상하지 못한 듯 눈을 부릅떴다.
“왜? 거북해?”
중년인의 눈동자에 서늘한 빛이 맴돌았다.
“넌 암살자다. 정 따위도, 인연 따위도 아무런 의미도 없어. 이곳에 있는 필립은 가짜니까.”
“…….”
필립은 대답을 하지 않고, 입술을 꾹 씹었다.
“누나를 만나고 싶지 않은 건가? 쥬벨.”
“윽….”
쥬벨이라는 본명과 누나라는 단어가 나오자, 그의 미간이 깊게 구겨졌다.
“이번 임무가 10번째잖아. 이것만 제대로 완수하면 네 누나를 만날 수 있다고.”
“다섯 번째에도 그리 말했지만 얼굴조차 보여주지 않았잖습니까!”
“아아, 이번에는 진짜야.”
“하지만!”
“그럼 시체로 보고 싶나? 아니면 네 시체를 네 누나에게 보내주는 방법도 있고. 선택해.”
“크윽….”
쥬벨은 대답하지 못하고 턱을 떨었다.
“누나는 잘 지내고 있는 겁니까?”
“당연하지. 부잣집에서 잘 먹고 잘 자고 있으니, 걱정할 필요 없어.”
중년인은 당연한 걸 묻지 말라며 고개를 저었다.
“요즘 알 수 없는 시선도 보이니 빠르게 끝내는 게 좋겠어. 목표는 기억하고 있겠지?”
“…예.”
필립이 입술을 씹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의 눈빛은 마을에 들어설 때와 달리 검게 죽어 있었다.
“좋아. 작전은 달이 없는 내일 시작한다.”
중년인은 손을 젓고서 필립의 방을 나섰다.
필립은 석상이 된 듯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 * *
라벤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
주디엘은 엔시아의 망원경으로 마을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는 쥬벨을 보며 입술을 씹었다.
‘확실해….’
쥬벨이야.
못 본 사이에 피부가 많이 상했고, 성숙해졌지만 보는 순간 확신했다. 저 아이는 내 하나뿐인 동생 쥬벨이 분명했다.
다른 무엇보다도 이마에 새겨진 상처가 그대로였다.
‘저 상처는 나 때문에 생겼으니까.’
저건 쥬벨과 함게 도망칠 때 넘어지면서 돌부리에 스친 상처다. 내 실수 때문에 새겨진 상처라 절대 잊을 수가 없었다.
‘잘 지내고 있었구나.’
먼 거리에서 보고 있기에 정확한 사정이나 말은 듣지 못하지만, 마을 사람들과 잘 어울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주디엘이 쥬벨을 내려다보며 입술을 씹었다.
‘왜 이곳에 있는 거지?’
몇 가지 가정이 떠올랐다.
카룬이 쥬벨을 팔았다던가, 쥬벨이 도망쳤다던가 혹은 지금 저곳에 있는 게 카룬의 의도일 수도 있었다.
뭐가 어떻게 되었든 살아 있는 동생을 보는 것만으로 행복했다.
죽었다고 생각했던 아이가 저리 활기찬 웃음을 보이는 것만으로 가슴에 열기가 차올랐다.
하지만 삼 일째 저 아이를 지켜보고 있자니, 자그마한 욕심이 피어났다.
‘만약 나처럼 내 목숨으로 인질이 잡힌 거라면…?’
내가 동생 때문에 별관에 세작으로 들어갔듯, 쥬벨 또한 내 목숨 때문에 저곳에서 좋지 않은 일을 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절대 참을 수 없었다.
주디엘은 품에서 작은 종이를 꺼내 그 안에 본인의 이름과 쥬엘의 이름, 그리고 서로 헤어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했던 말들을 적은 후 밤이 되었을 때 산을 내려왔다.
조심스럽게 마을로 들어갔다. 로브를 쓰고 기척을 죽이기도 했지만, 원래부터 외지인이 자주 들락거리는 마을이라 그런지 딱히 이상하게 보는 하는 사람은 없었다.
첩자 교육을 받을 때부터 익힌 은신술을 유지하며 가지고 온 종이를 쥬벨의 집 창문 쪽으로 밀어 넣으려고 할 때였다.
조심스럽게 창문이 열리고, 그 안에서 야행복을 입고, 검은 복면을 쓴 남자가 튀어나왔다.
푸른 눈동자와 마주한 순간 이 남자가 누구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쥬….”
동생의 이름을 부르려는 순간 복면인의 손에서 튀어나온 단검이 쥬디엘의 이마를 향해 떨어졌다.
피이이이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