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607화 (606/653)

제607화

라온은 글렌을 따라 북망산 입구 근처의 공터에 들어섰다.

글렌은 공터 중앙에 서서 말없이 북망산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의 어깨가 달빛을 따라 잔잔히 흔들리는 듯 보였다.

“가주님.”

라온이 먼저 글렌을 부르며 앞으로 다가갔다.

“무엇을 주지 않았다는 말씀이십니까?”

글렌은 금패만이 아니라, 아티팩트와 영약까지 챙겨주었다. 받을 것을 모두 받고도 남았는데, 무엇이 부족하다는 건지 잘 모르겠다.

“크흠!”

글렌이 목을 가다듬고서 뒤를 돌았다. 붉은 눈동자에 밤바람 같은 냉랭함이 담겨 있었다.

“너는 엘프들을 구한 것에서 그치지 않고, 이미 경매를 치른 엘프들을 구하기 위해 장부까지 얻지 않았느냐. 이 일은 앞으로 세이피아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아티팩트와 영약으로 그치기에는 네가 한 일이 많다.”

“음….”

솔직히 말해서 엘프를 구한 것과 장부를 얻은 건 같은 영역의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추가로 상을 내리겠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이런 빌어먹을!

라스가 오동통한 배를 흔들며 앞으로 튀어나왔다.

-대체 왜 이렇게 챙겨주는 것이냐! 저 영감탱이 얼굴만 냉정하지 속은 솜털처럼 부드럽기 그지없느니라!

녀석은 얼굴만 사납다며 미간을 찌푸렸다.

‘밥 잘 먹었으면 가만히 있어.’

-가만히 있기 싫으니….

‘아이스크림 먹기 싫은가 보지?’

-흡!

라온은 입을 꽉 다문 라스의 배를 밀어버리고, 글렌을 바라보았다.

“창궁검은 어디까지 익혔지?”

“사초식까지 익혔습니다. 물론 완벽하지는 않습니다.”

홍염귀와 시란을 상대하면서 깨달은 무리 덕분에 창궁검 사초식을 시전할 수 있게 되었다.

다만 아직 완벽하게 검의를 펼치는 단계에는 도달하지는 못했다.

“역시 그렇군.”

글렌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부터 이 시간에 이곳으로 오도록.”

“예?”

“앞으로 2주간 네 수련을 도와주마.”

그는 해온 일에 대한 보상으로 2주 동안 가르침을 주겠다며 눈을 내리감았다.

라온이 그 말을 듣고서 눈을 부릅떴다.

‘이건 영약보다 더한 보상인데.’

마스터가 보는 눈과 그랜드 마스터가 보는 눈은 전혀 다르다. 그랜드 마스터에 오르며 깨달음의 범위가 넓어졌기에 글렌의 가르침을 더 세세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기연이나 다름없었다.

“감사합니다.”

라온인 진심을 담아서 글렌에게 고개를 숙였다.

“커험!”

글렌이 헛기침을 하고서 고개를 저었다.

“감사할 필요 없다. 네가 해온 일에 대한 보상을 줄 뿐이니까.”

“그렇다고 해도 가주님이 내리시는 가르침은 제가 이룬 성과 이상의 보상이라 생각합니다. 감사드립니다.”

“됐다.”

그는 그 이상의 말은 필요 없다는 듯 손을 저었다.

“시간이 아까우니 빨리 시작하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라온이 고개를 들어 올리고 공터의 중앙으로 향했다.

“그래도 자세는 되었구나. 매번 부를 때마다 검을 챙기니 말이다.”

“검사로서 당연한 일입니다.”

검사로서라는 말을 하자, 속에서 작은 울림이 일어났다.

‘검사라….’

이제는 생각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스스로를 검사라 칭할 수 있게 되었다. 암살자로 살았던 전생의 어둠이 조금 더 지워지는 느낌이었다.

“네가 익히고 있는 모든 검술을 펼쳐 보아라.”

“예.”

담담하게 대답하고서 제천검을 뽑았다. 검을 상단으로 세운 후 수직으로 내리찍었다. 칼날에 맺힌 바람이 선선한 밤공기를 가르며 공터 바닥에 머리카락보다도 얇은 선을 그었다.

기본 검술에 이어서 광아검, 설풍검결, 만화공의 검술과 스스로 만든 검술까지 펼쳐낸 후 제천검을 두 손으로 말아쥐었다.

‘이제 마지막 창궁검.’

하단전의 장대한 오러에 중단전의 굳건함을 담아 창공을 향해 뻗어냈다. 창궁검의 네 초식이 연달아 그어지며 어둑한 밤하늘에 붉고 푸른 섬광을 그려냈다. 혜성이 거꾸로 솟구치는 듯한 웅장한 광경이 뻗어나갔다.

“흠.”

글렌은 처음의 냉정한 표정에서 조금도 바뀌지 않은 안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이지만 발전했구나. 예전에 네가 말했던 절대 꺾이지 않겠다는 의념이 느껴져.”

마스터에서 그랜드 마스터가 되었는데도, 조금 발전했다니, 어이가 없는 말이다. 다만 그 말을 한 사람이 글렌이다 보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감사합니다.”

“다만.”

글렌이 눈빛이 더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네가 담고 있는 하늘에 한계가 보이는구나.”

“한계….”

“네 목표가 내 눈에도 보이고 있다. 무인이나, 무학을 목표로 잡지 말고, 네가 원하는 하늘을 그려라.”

그는 그리 말하면서 한 걸음 다가왔다.

“네가 창궁검을 그리며 떠올린 하늘은 무엇이지?”

“그….”

라온이 바로 답을 하지 못하고 입맛을 다셨다.

“머뭇거리지 말고 말해보아라.”

“…가주님입니다.”

“음?”

글렌은 본인의 이름이 나올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가주님이 창궁검을 펼치실 때. 아니, 제가 납치되었을 때 백혈교주와 타천을 상대로 보여주셨던 검술을 제 하늘로 삼았습니다.”

창궁검의 하늘로 글렌을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었다. 당사자 앞에서 말하자니, 조금 부끄러웠다.

“크허험!”

글렌이 급하게 등을 돌렸다. 그의 귓불이 홍시처럼 빨갛게 물들었다.

“그러면 어쩔 수 없지.”

“예?”

“목표를 바꾸지 말고 조금 더 가거라.”

“조금 전에는 바꾸라고 말씀….”

“어허! 아직 네가 무한을 따지기에는 이르다! 빨리 검이나 휘두르거라!”

“…알겠습니다.”

라온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제천검을 들어 올렸다.

‘가주님도 변덕이 잦으시네.’

-갱년기라서 그렇느니라.

라스는 이해가 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북망산 중턱 호랑이 바위 위.

양쪽 눈에 시퍼런 멍이 들어서 판다 그 자체가 된 리메르가 짧게 혀를 찼다.

“아주 입꼬리로 하늘을 찌르겠네.”

글렌은 미소가 아니라, 광소라고 할 정도로 입꼬리를 길게 말아 올리고 있었다. 농담이 아니라, 입이 정말 귀에 걸려 있는 것 같았다.

“하긴 저 마음이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지만.”

소중히 여기는 손주의 하늘이 본인이라는 말을 들었으니, 저렇게 기뻐하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그런데….”

리메르가 점점 더 올라가는 글렌의 입꼬리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왜 직접 가르치는 거야. 자아의 방이나 넣어주던가!”

자아의 방은 초대 가주가 남긴 유산으로 무인이 본인의 영혼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특별한 공간이다. 라온이라면 분명 깨달음을 얻어서 나올 수 있을 텐데, 왜 직접 가르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허허허.”

바위 위에 서 있던 로엔이 옅은 미소를 그렸다.

“직접 가르치고 싶으신 듯합니다.”

그는 뒤를 돈 채 목소리만으로 라온에게 조언을 하는 글렌을 보며 허허 웃었다.

“라온 도련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으신 거지요.”

“그럼 좀 티를 좀 내라고. 티를!”

리메르가 세차게 주먹을 흔들었다. 지금도 글렌은 등을 돌린 채 웃고 있었다. 저 미소를 라온에게 보여주기만 하면 다 해결될 텐데 왜 혼자 저러는 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거기다 자아의 방에 있을 수 있는 시간은 한 달뿐이죠. 아마 겨울이 올 때쯤 자아의 방을 개방하실 듯합니다.”

“시간을 최대로 이용하겠다는 거네요.”

리메르가 땀을 흘리면서도 검을 놓치지 않는 라온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게 낫겠군.’

더 성장해서 자아의 방에 들어갈 수록 이득일 테니까.

자아의 방에 들어간다고 무조건 무학의 성장을 이룰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대부분 작은 깨달음 하나는 얻어서 나오게 된다. 강해질수록 많은 것을 얻을 수 있기에 더 키워서 보내는 것도 좋은 방법이었다.

“그런데….”

로엔이 가느다란 미소를 지으며 리메르를 바라보았다.

“리메르 님도 이제 결정을 내리신 모양이군요.”

“역시 귀신이시네요.”

리메르가 비어버린 오른쪽 어깨를 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도박장 하나 차려서 놀고먹고 싶었는데, 라온 놈을 보니 심장이 식질 않네요.”

그가 허리의 검을 툭 치며 웃었다.

“어차피 망가진 이 목숨. 라온과 아이들에게 쓰려고 합니다.”

리메르는 라온의 머리 위에 뜬 달을 보며 입매를 꾹 다물었다.

“저도 그리 되었으면 좋겠군요.”

로엔은 허허 웃으며 리메르의 옆에 섰다.

두 사람은 말없이 라온과 글렌의 수련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     *      *

라온은 해가 뜨기 전 새벽에 방을 나섰다.

-흐아아아앙!

라스가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며 눈을 흘겼다.

-야이 미친놈아! 밤새 수련하고, 또 새벽에 나가는 또라이가 대체 어디에 있느냐!

녀석이 잠 좀 자자며 어깨를 두드렸다.

'시간이 얼마 없잖아.'

그랜드 마스터부터는 년 단위로 수련을 해도 지금의 위치에서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 기회가 있을 때 최선을 다해서 검을 휘둘러야 한다.

-네놈은 싸우다가 죽는 게 아니라, 수련하다가 뒈질 것이니라!

‘그건 좀 행복한데?’

-끄아아아악! 열받아! 정말 네놈만 보면… 음?

라스가 화를 내다 말고 코를 킁킁거렸다.

-저, 저기를 보거라!

녀석은 현관 앞 테이블 위에 놓인 쟁반을 가리키며 손을 떨었다.

-맛난 냄새가 나느니라! 쟁반 뚜껑을 열어보아라!

‘음….’

쟁반을 덮고 있는 은색 뚜껑을 열자, 햄과 계란, 치즈가 들어간 토스트 하나가 놓여 있었다.

-크으으! 역시 집이 최고이니라! 엄마!

라스는 아직 김이 식지 않은 토스트를 보며 실비아를 외쳤다.

‘이건 엄마가 해주신 게 아니야.’

-그럼?

‘주디엘이야.’

실비아의 토스트에는 계란과 아채가 들어가고, 주디엘의 토스트에는 계란과 햄, 치즈가 들어간다. 이 토스트는 주디엘의 솜씨였다.

‘이제 날 잘 아네.’

아무래도 바로 수련을 나갈 걸 예상하고 토스트를 해놓은 것 같았다.

-힘들게 커서 눈치가 빠르군. 마음에 드느니라!

라스는 괜찮은 아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냐.’

라온은 픽 웃으며 토스트를 들고 한 입 베어 물었다.

-안까지 잘 구웠구나! 그래! 빵은 이래야지! 나딘빵은 빵이 아니니라!

라스는 토스트의 맛에 감동한 듯 코를 훌쩍였다.

‘그러게. 괜찮네.’

간단한 음식이지만, 정성을 들인 티가 났다.

주디엘의 숙소가 있는 쪽을 보며 고맙다고 중얼거리고서 별관을 나섰다.

바로 5 연무장으로 가서 문을 열었는데, 예상과 달리 이미 선객이 와 있었다.

“빠졌네.”

마르타가 팔짱을 낀 채로 미간을 찌푸렸다.

“예전 같았으면 한 시간 전에 와서 이미 검을 휘두르고 있었을 텐데.”

그녀는 나태해졌냐며 콧방귀를 뀌었다.

“그러게. 우리한테 늦게 왔다고 뭐라고 할 시간인데 말이야.”

버렌이 연한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쿠우….”

루난은 주저앉은 채 고개를 까딱이고 있었다. 졸고 있는 것 같았다.

"또 사고 치고 왔던데."

마르타가 라온을 위아래로 쳐다보며 눈매를 좁혔다.

“어쩌다가 엘프들의 나라를 구한 거냐?”

“그게 다가 아니라, 무슨 정령왕의 형님 소리도 들리던데.”

버렌은 본인이 말하면서도 어이가 없다는 듯 헛바람을 흘렸다.

“쿠우우….”

루난은 여전히 졸고 있었다.

“여러모로 운이 좋았지.”

라온이 세 사람을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놈의 운은 무슨!”

마르타가 운 같은 소리 좀 하지 말라며 고개를 저었다.

“정말이야. 혼자서는 못 이겼어.”

시얀의 도움이 없었다면 홍염귀에게 죽었을 것이기에 거짓이 아니었다.

“또 그 가면 놈들인까.”

마르타가 에덴을 떠올리며 주먹을 말아쥐었다.

“그런데 너 또 강해진 거야?”

버렌이 라온의 위아래를 훑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분위기가 변했는데….”

“세계수의 열매를 먹었거든.”

“세, 세계수의 열매?”

“미쳤구만. 대륙의 영약이란 영약은 진짜 다 먹고 다니냐?”

마르타는 어처구니가 없다며 눈을 끔벅였다.

“나 그거 궁금했는데, 맛있어?”

버렌은 세계수 열매의 맛이 궁금한지 입맛을 다셨다.

“솔직히 말하면.”

라온은 세계수 열매의 맛을 떠올리며 눈을 내리감았다.

“나딘빵 맛이야.”

“개소리!”

마르타가 고개를 저었다.

“그게 말이 돼?”

“나도 안 믿기네. 세계수의 열매가 나딘빵 맛일 리가 없잖아.”

버렌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듯 눈매을 찌푸렸다.

“쿠우우우!”

루난은 졸면서도 그게 말이 안 된다며 고개를 저었다.

“진짠데….”

정말이지만, 표정을 보니 믿어주지 않을 것 같아서 설명을 포기했다.

-저 녀석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건 당연한 일이니라.

라스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 먹은 본왕도 아직 안 믿기는데 저것들이 믿겠냐고! 어떻게 세계수가 고무나무란 말이냐! 이건 억까이니라!

녀석은 오래만에 눈동자가 훼까닥 돌아버린 채 세계수를 불태우겠다고 외쳐댔다.

라온은 라스를 걷어차 버리고, 버렌과 마르타, 루난을 바라보았다.

“세계수는 됐고, 너희가 이 시간에 웬일이야?”

“웬일은 무슨. 매일 이 시간에 수련 중인데.”

마르타가 무슨 말을 하냐는 듯 고개를 저었다.

“맞아. 네가 떠난 후에 매일 이 시간에 수련을 하고 있어.”

버렌도 이 시간에 수련하는 건 일상이 되었다며 웃었다.

“크후….”

루난은 그 말을 받듯 고로롱 숨을 내뱉었다.

“음….”

라온이 버렌과 마르타, 루난을 차례로 보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확실히 다들 성장했어.’

세계수의 열매를 먹은 자신처럼 비약적인 성장은 아니지만, 이전보다 더 높은 격이 느껴졌다. 세이피아에 가 있는 동안 열심히 수련한 것 같았다.

“저녁에는 현무전주께서 수련을 도와주셨거든. 거기서도 많이 배웠지.”

“데니어 님이?”

“그래. 아버지도 매일 와주시고, 고모께서도 도와주시고 계셔.”

마르타는 아리스 님에게 배우는 시간이 너무 소중했다며 답지 않게 환한 미소를 보였다.

“기연이나 다름없지.”

“음….”

라온이 데니어를 떠올리며 턱을 매만졌다.

‘데니어라….’

아리스나 카룬, 발데르와 달리 데니어는 속을 알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데루스와 비슷한 냄새가 나지만, 아닐 수도 있으니.’

지금까지 의심스러운 행동을 하지도 않았고, 시비를 걸어온 적도 없었다. 아직 그에 대해 판단을 내리기에는 정보가 너무 부족했다.

‘혹시 모르니까. 조사를 좀 해볼까.’

조만간 데닝로즈에게 데니어에 관한 정보를 모아달라고 부탁을 해봐야 할 것 같았다.

‘다만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지.

라온은 선선한 웃음을 그리며 버렌과 마르타, 루난의 앞에 섰다.

팡.

코로 작은 풍선을 불던 루난이 잠에서 깨어난 채 눈을 끔벅였다.

“라온.”

정말 지금까지 졸았던 것 같다. 반가워하는 얼굴이 진심이었다.

“아이스크림 먹자.”

보자마자 하는 소리가 아이스크림이라니, 여전한 아이였다.

“그래.”

라온이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

-오오!

당연하게도 대답은 루난과 라스 두 사람에게서 들려왔다.

“물론 지금은 아니야. 일단 봐야지.”

“봐?”

“뭘 봐?”

루난만이 아니라, 버렌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뭘 물어. 당연히 실력을 본다는 거지.”

마르타가 뒤로 물러서며 검병에 손을 얹었다.

“저놈 눈깔 봐. 죽일 기세야! 빨리 준비하라고!”

그녀는 이미 라온과 싸우는 것을 확정지은 듯 입술을 떨었다.

“라온은 모르겠지만, 우리 열심히 수련했어.”

루난이 다가와서 굳이 대련할 필요까진 없다며 보랏빛 눈동자를 동그랗게 떴다.

“새벽 수련이랑 저녁 수련….”

“그거 우리가 이미 다 말했다.”

버렌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저놈 그걸 확인해보려고 저러는 거야!”

그도 라온의 말뜻을 알아듣고 검을 뽑았다.

“으….”

루난은 하기 싫은 표정으로 설화를 들었지만, 그녀의 검에서는 손만 닿아도 얼어버릴 듯한 냉기가 피어났다.

라온은 각각 사납고, 날카롭고, 서늘한 마르타와 버렌, 루난의 기세를 느끼며 옅은 미소를 그렸다. 저 셋의 검세를 보니, 집에 돌아온 느낌이 물씬 느껴졌다.

“너희가 얼마나 강해졌는지 확인해보도록 하지.”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나왔다.

“나한테 일검이라도 먹인다면 바로 휴식 시간을 줄게.”

라온은 버렌과 루난, 마르타에게 덤비라고 말하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만약에 못 먹이면?”

루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계속 싸우는 거지.”

라온이 떨리는 세 사람의 눈동자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그냥 처음부터 하루종일 대련하겠다고 하라고!”

버렌이 어이가 없다는 듯 소리를 질렀다.

“일검만 먹이면 휴식이라니까. 어려운 게 아니잖아.”

라온은 쉬운 일이라고 말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랜드 마스터가 되더니, 실력만이 아니라, 심술도 늘었어.”

버렌이 한숨을 내쉬었다.

“돌아왔네. 수련의 마왕이.”

마르타가 입술을 씹으며 검을 세웠다.

“좋아. 우리도 놀고 있었던 건 아니라는 걸 보여주지. 죽어!”

그녀가 전방으로 돌진해 검을 찔러넣었고, 버렌과 루난도 각자 좌측과 우측으로 짓쳐들며 검격을 쏟아냈다.

“놀아보자고.”

라온은 휘황찬란한 세 조장의 검격을 보며 입매를 말아 올렸다.

“하루종일.”

-허….

라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거 진짜 변태 아니냐고.

*     *      *

콰아아아아아!

검은 하늘 위로 푸른 광휘가 차오른다. 하늘의 중심에 거대한 구멍이 뚫린 듯한 장관이 그려졌다.

글렌은 하늘이 내려앉은 듯한 모양새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로 다섯 번째인가. 이 주일치고는 괜찮구나.”

“가주님 덕분입니다.”

라온이 글렌에게 고개를 숙였다.

“너도 알겠지만, 완벽과는 거리가 멀다. 말 그래도 틀을 잡았을 뿐이니, 스스로를 채찍질해서 완성을 이루도록 노력하거라.”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이만 가보도록 하지.”

글렌은 할 일을 모두 마쳤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서 등을 돌렸다.

“감사합니다.”

라온이 글렌의 등에 고개를 숙였다. 다시 고개를 들어 올리자, 그는 이미 사라져 있었다.

‘바람 같으시네.’

글렌은 정말 딱 정해진 시간에 와서 두 시간만 수련을 봐준 후 홀연히 떠나버렸다. 가끔은 귀신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도 보람된 시간이었어.’

새벽부터 저녁까지는 광풍대와 함께 수련을 하고, 밤부터는 글렌과 수련을 하니, 내 실력이 빠르게 성장하는 게 느껴졌다. 가치 있는 이주일이었다.

‘끝나고 보니 아쉽네.’

글렌에게 가르침을 받을 때는 부담스러웠지만, 막상 끝나니 조금이지만 섭섭했다.

‘또 공을 세우면 수련을 시켜주시려나.’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면서 별관으로 돌아가는데, 현관에서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여니, 실비아가 문 앞의 테이블에 토스트를 올려놓고 있었다.

“어머니?”

“딱 잘 왔네!”

실비아는 좋은 시간에 왔다며 테이블에 내려놓은 토스트를 내밀었다.

“이 시간까지 수련했으면 잘 챙겨 먹어야지!”

-역시 엄마뿐이니라!

라스가 양 팔을 벌린 채 실비아에게 달려들었다.

‘비켜.’

라온은 라스를 차버리고, 고개를 저었다.

“잘 먹고 있어요. 무리하지 않으셔도 돼요.”

“엄마가 아들 챙기는 게 왜 무리야.”

실비아는 괜찮다며 고개를 저었다.

“고마워요.”

라온은 옅게 웃으며 토스트를 받았다. 계란과 야채가 들어간 건강식 토스트였다.

“그러고 보니 요즘에 주디엘이 잘 안 보이네요.”

토스트를 한 입 베어 물면서 물었다. 주디엘은 첫날 토스트를 준 이후로 보이질 않았다. 새벽에 나갔다가 새벽에 들어왔다고는 해도 이상한 일이었다.

“주디엘은 휴가를 냈어.”

“휴가요?”

“그래. 네가 신경 쓸까 봐. 말하지 말아 달라고 했지. 다음 주면 돌아올 거야.”

실비아는 주디엘이 별관에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군요.”

라온은 별일이 아닌 것처럼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무리하지 말고, 건강 관리 잘하렴.”

실비아는 토스트를 다 먹으라고 말하고서 본인의 방으로 돌아갔다.

라온은 먹던 토스트를 내려놓고, 본인의 방이 아니라, 주디엘의 숙소로 향했다.

-음? 먹다 말고 어디에 가는 것이냐! 그 녀석은 휴가를 갔다지 않느냐!

‘주디엘은 내 권속이나 다름없어. 나한테 휴가를 이야기하지 않은 거면 보통 일이 아니라는 거야.’

잠겨 있는 문고리를 억지로 비틀고 들어갔다.

방 안은 단출하기 그지없었다. 아예 빈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다만 짐을 싸들고 떠났다기보다 본래부터 이런 방인 것 같았다.

텅 빈 듯한 방을 둘러보다가 낡은 책상 서랍에 삐져나온 갈색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종이를 펼친 라온의 눈동자가 매섭게 일그러졌다.

“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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