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606화 (605/653)

제606화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리메르가 기둥에 등을 기댄 채 왼손을 들어 올렸다.

“예전에 라온을 왕의 그릇이라고 말할 때는 제 바람이 조금 섞였지만, 지금의 라온은 지그하르트의 후계자 후보가 될 자격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평소와 달리 진중한 눈빛으로 글렌을 바라보았다.

“허허허.”

로엔이 가는 웃음을 흘렸다.

“확실히 등과 어깨가 넓어지셨더군요. 가문을 짊어지기에도 부족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도 아리스의 말에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들의 말이 맞다.”

글렌은 그저 사실을 말한다는 듯 담담한 눈빛을 드러냈다.

“21살에 그랜드 마스터에 오른 무력, 많은 임무를 훌륭히 완수한 실적, 대륙 전체에 퍼뜨린 협의와 명성까지. 자질로는 충분하고도 남는다.”

그는 본인이 라온의 칭찬을 하면서도 입꼬리를 바르르 떨었다.

“거기다 오늘 사절단의 대표가 증언한 대로라면 정신적인 면에도 모자람이 없지.”

글렌은 시얀이 해주었던 말들을 떠올리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런 말을 했을 줄이야.’

라온은 광풍대와 별관에 정을 두고 있을 뿐 지그하르트 자체에는 특별한 애착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아이는 내가 사상도 하지 못했던 말을 해주었다.

‘내가 있는 곳이 곧 지그하르트라….’

저 말은 지그하르트에 애정을 지니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말이다.

지그하르트에 대한 라온의 생각이 변했다는 게 느껴져서 가슴 한쪽이 따스해졌다.

‘다만 조금 아쉽군.’

저 말을 하는 걸 직접 보지 못한 게 너무도 아쉬워.

라온이 내가 있는 곳이 곧 지그하르트라는 말을 하고, 남북맹의 찌꺼기들이 놀라는 모습을 보았어야 했는데, 그 자리에 없었다는 게 한이 맺히도록 안타까웠다.

‘…방법이 없나?’

드래곤 하나 잡아볼까.

마법에 능한 고룡이라면 시간 역행 마법을 쓸 수 있을지도 모르기에 잡아서 협박. 아니, 부탁해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가능성이 현저히 낮기는 하지만 혹시 모르니….’

“아버지?”

어떤 드래곤을 잡아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아리스가 손을 흔들었다.

“아버지가 말씀 중에 다른 생각을 하시다니, 별일이 다 있네요.”

“크흠.”

글렌이 헛기침을 흘리고서 옥좌에 등을 깊게 묻었다.

“어쨌든 지금 말씀대로라면 라온이 후계자 후보가 되어도 상관없다는 말씀이시죠?”

“아니.”

글렌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자질은 충분하다. 허나 자격은 없다.”

“또 직계 이야기를 하시는 거예요? 후계자도 아니고, 후계자 후보가 꼭 직계여야 한다는 법은 없잖아요.”

“그런 문제가 아니다.”

“예?”

“라온에게는 아직 부왕과의 생사결이 남아 있다. 그 일이 해결하기 전에는 무엇도 진행될 수 없다.”

“음….”

아리스도 그 부분에서는 할 말이 없는 듯 신음만 흘렸다.

“리메르.”

“예.”

글렌의 부름에 리메르가 앞으로 나왔다.

“부왕이 성장했다는 건 확실한 건가?”

“본인이 인정했으니, 확실합니다.”

리메르가 짧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신적인 깨달음을 얻고 성장한 것 같은데, 발화점 역할을 해준 게 라온이랍니다.”

“라온과의 생사결이 불씨가 되어준 모양이군.”

글렌은 어떤 의미인지 알아차린 듯 입맛을 다셨다.

“그럼 지금의 라온이 이기기는 힘들겠어.”

“그럼 제가 가서 목 따고 올까요?”

아리스는 닭 목을 분지르는 것처럼 가볍게 손목을 돌렸다.

“허허허, 그거라면 제가 더 낫지 않겠습니까.”

로엔이 허허롭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강해졌다고 해도 암살이라면 충분히 가능합니다.”

그는 시간만 달라며 손가락을 비볐다.

“나쁜 생각은 아니다만….”

글렌이 두 사람의 진지한 눈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부왕이 성장했듯 이 생사결은 라온에게도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이 되어줄 것이다. 기다려보도록 하지.”

그는 이전과 다르게 라온을 완전히 믿는 듯한 웃음을 보였다.

“아, 재미없어.”

아리스가 미간을 찌푸린 채 고개를 저었다.

“라온도 돌아왔으니, 좀 놀다가 떠나든가 해야….”

그녀가 한숨을 내쉬며 알현실을 나가려고 할 때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 음? 라온?”

아리스가 문을 열자, 라온이 빼꼼히 얼굴을 들이밀었다.

“무슨 일이야?”

“드리지 않은 게 생각나서 다시 왔습니다.”

“그래? 들어와!”

아리스는 본인의 방인 것처럼 라온을 안으로 들였다.

“감사합니다.”

라온이 고개를 숙이고서 알현실의 중앙으로 걸어갔다.

“무엇을 주지 않았다는 거지?”

“술입니다.”

“술?”

“예. 엘프의 과실주인데, 이전에 가주님이 술 이야기를 하신 게 생각나서 가져왔습니다.”

그는 그 말을 하며 아공간 주머니에서 나무로 만든 듯한 갈색 술병 하나를 꺼냈다.

“수, 술 이야기…?”

글렌이 입꼬리를 바들바들 떨면서 물었다.

“예. 전에 위스키와 와인을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그걸 기억했다고?”

그저 지나가듯이 말했지만. 아니, 원하기는 했지만 한참 전의 일이다.

그걸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다가 귀하디귀한 엘프의 과실주를 가져왔다는 것에 심장이 멈출 뻔 했다.

“예? 예. 원하시던 술은 아니지만, 쉽게 구할 수 없는 것이니, 가주님의 생각이 났습니다.”

라온이 고개를 숙이며 조심스럽게 술병을 내밀었다.

“커허험!”

글렌이 손으로 입을 가린 채 턱을 떨었다.

“이런 것을 바라지는 않았는데….”

심장이 너무 빠르게 뛰어서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그럼 내가 대신 받을까요?”

아리스가 입맛을 쩝 다시며 앞으로 나왔다.

“죽여….”

글렌의 눈동자에서 시뻘건 불길이 일어섰다. 딸을 향해 진심 어린 살기를 뿌리다가 간신히 멈췄다.

“아, 알겠어요. 농담이에요. 농담!”

아리스도 그 눈빛에 질린 듯 손을 떨며 물러섰다.

“음?”

라온은 글렌과 아리스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크흠. 잘 마시마.”

글렌이 아직 떨림이 가시지 않은 손을 앞으로 내밀어서 술병을 잡았다.

“너 그거 도괴 영감이 아니라. 가주님 드리려고 챙겨온 거였어?”

리메르가 술병을 보며 헛바람을 흘렸다.

“도괴님께도 드릴 생각이지만, 먼저 가주님께 드렸습니다.”

“크허험!”

글렌은 웃음인지 헛기침인지 모를 소리를 흘리고서 술병을 꽉 잡았다.

‘내가 이겼군.’

이전에는 매번 도괴의 술만 챙겼는데, 이번에는 자신이 먼저라는 게 기뻤다. 당장 튀어 나가서 도괴에게 자랑을 하고 싶었다.

“조카. 내 건 없어?”

아리스가 라온에게 어깨동무를 한 채 머리를 기댔다.

“당연히 있습니다.”

라온이 옅게 웃으며 아리스에게도 술병 하나를 내어주었다.

“역시 우리 조카라니까!”

아리스가 라온을 폭 끌어안으며 글렌에게 술병을 들어 올렸다.

“어때요? 나도 있다구요!”

“흥.”

글렌은 여유롭다 못해 조롱하는 표정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그, 그 표정은 뭐에요? 뭔가 기분 나쁜데?”

아리스는 본인을 무시하는 듯한 글렌의 눈빛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라온!”

리메르가 라온에게 다가가서 손을 쭉 뻗었다.

“내 것도 있지?”

“음….”

라온이 리메르에게 과실주를 꺼내주다가 멈춰 섰다.

“아! 가주님.”

그는 무언가가 떠오른 듯 바로 글렌을 불렀다.

“아까 드리지 못한 말씀이 하나 더 있습니다.”

“뭐지?”

“제가 삼합대결을 끝냈을 때 대주님이 부왕에게 부랄이라는 이명을….”

라온은 리메르가 부왕의 이명을 부랄로 지은 것을 말해주었다.

“아하하하하하하!”

아리스는 참지 못하고 배를 깔고 누운 채 폭소를 터트렸다.

“부랄이래! 저거 진짜 미친놈이라니까!”

“…….”

즐거워하는 아리스와 달리 글렌의 눈빛은 리메르를 죽일 듯이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잘 알았다. 내가 처리할 테니, 그만 가서 쉬도록.”

“예.”

라온은 방긋 웃으면서 리메르에게도 술병을 들려주고, 미련 없이 알현실을 떠났다.

“저, 저도 바쁜 일이 생각나서 이만 가볼게요.”

리메르가 헤헤 웃으며 알현실을 나가려고 하는데, 로엔이 앞을 막아섰다.

“저기 좀 비켜주시면….”

“허허허.”

“나 나가야 해요.”

“허허허.”

“진짜 죽는다고!”

“허허허!”

로엔은 살벌한 웃음을 흘리면서 절대 길을 비켜주지 않았다.

“어욱….”

리메르는 허공에 떠오르는 붉은 벼락 줄기를 보며 턱을 떨었다.

쿠르르르릉!

글렌이 붉게 젖은 뇌전을 떨어뜨리며 뇌까렸다.

“그 술은 네 무덤에 뿌려주마.”

*     *      *

라온은 가주전 복도를 걸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레이란 님께 고맙다고 해야겠네.’

레이란에게 과실주를 조금 얻을 수 있냐고 말할 때는 2병만 원했는데, 그녀는 그 다섯 배인 열 병을 챙겨주었다.

도괴에게 주고도 꽤 많이 남으니 별관에서 파티를 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술은 생각도 말고! 빨리 집으로 가자!

라스가 팔찌에서 튀어나와 얼굴을 들이밀었다.

-냄새가 나고 있느니라! 엄마가 맛난 음식을 준비했을 게 분명하느니라!

녀석은 육포와 빵 말고 제대로 된 식사가 그리웠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이게 울 일인가 싶었지만, 별의별 모습을 많이 봤기에 그러려니 하고 가주전을 나왔다.

“별관에 가시면 제가 맛있는 거 해드릴게요!”

유아가 엘프들 사이에서 방긋 웃고 있었다. 상대가 누구든 항상 밝은 모습을 보일 수 있다는 건 음악 이상의 재능 같았다.

“이, 일은 다 보셨나요?”

시얀이 눈을 끔벅이며 다가왔다. 알현실에서는 조금도 더듬지 않고 할 말 다 하더니, 다시 말을 얼버무리기 시작한다. 참 신기한 사람이었다.

“네. 끝났습니다. 이제 가시죠.”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고서 엘프들을 별관 쪽으로 안내했다.

유아와 헤이린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걷다 보니, 어느새 별관의 정원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저곳이 지그하르트의 별관입니다.”

찬 겨울이 지나고 봄이 머무른 별관의 정원은 어느새 푸른 옷을 입고 있었다.

“저곳이 라온 님의 생가!”

시얀은 품에서 수첩을 꺼낸 후 뭔지 모를 글과 그림을 미친 듯이 적기 시작했다.

이제는 꽤 익숙한 모습이라 그러려니 하고, 고개를 젓고서 별관으로 걸어갔다.

별관의 문을 열고 들어가려는데, 뒤편 호수가 있는 곳에서 실비아와 시녀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쪽으로 돌아가니, 별관의 모두가 호수 주변을 정리하고 있었다.

“어? 도련님!”

헬렌이 이쪽을 보며 눈을 끔벅였다.

“라온?”

온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는지 실비아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달려왔다.

“언제 온 거야!”

“지금 막 도착했어요.”

“미리 말을… 음?”

실비아는 환하게 웃다가 뒤에 있는 엘프들을 보고 입을 떡 벌렸다.

“이, 이분들은….”

“저와 함께 세이피아에서 오신 사절분들이에요.”

라온이 옆으로 한발 물러서며 시얀과 엘프들을 소개했다.

“라온 님의 어머니시군요!”

시얀이 냉큼 다가와 실비아의 손을 잡았다. 부끄러움이 사라지고, 또 이상한 당당함이 그녀의 정신을 채운 것 같았다.

“네? 아, 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해요!”

“뭐, 뭐가 감사하다는 거죠?”

실비아도 당황했는지 눈썹을 떨었다.

“그야 당연히 라온 님을 태어나게 해주셔서죠! 세상의 빛이세요!”

시얀은 진심을 말하는 듯 푸른 눈동자를 반짝였다.

“아하하….”

실비아는 이쪽을 보면서 너 대체 무슨 짓을 했냐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라온은 나도 모르겠다고 중얼거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정말 감사드려요!”

시얀이 실비아에게 직각으로 허리를 굽혔다. 글렌에게도 보여주지 않은 인사였다.

터억.

그녀가 고개를 들 때 품에서 책 하나가 떨어졌다. 라온 전기였다.

“아, 죄송합니다.”

“라온 님!”

시얀이 책을 잡고 일어나는데, 뒷문이 거칠게 열리고 얼굴에 검칠이 묻은 엔시아가 튀어나왔다.

“존잘 라온 님 오셨… 어?”

엔시아가 환히 웃으며 달려오다가 시얀의 손에 들린 라온 전기를 보고 눈을 부릅떴다.

“엘프님이 왜 여길. 아니, 엘프가 왜 그 책을….”

“이 책을 아세요?”

시얀이 반가운 웃음을 흘리며 엔시아를 바라보았다.

“당연하죠. 제가 썼으니까.”

엔시아는 본인이 그 책의 저자라며 가슴을 두드렸다.

“저, 저 이 책의 팬이에요!”

시얀이 라온 전기를 품에 끌어안으며 비명을 질렀다. 그녀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그렇다면….”

엔시아가 시얀의 앞으로 다가가서 입술을 달싹였다.

“존잘?”

시험을 하는 듯한 그 단어에 시얀이 활짝 웃으며 답했다.

“라온!”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의 손바닥을 마주쳤다.

짜아악!

라온은 그 소리를 듣자마자 눈을 질끈 내리감았다.

‘만나서는 안 될 두 사람이 만났어….’

한숨을 내쉬는데, 라스가 머리채를 잡고 흔들었다.

-밥이 안 되어 있느니라! 빨리 밥부터 하라고 전하거라!

머리가 아프다. 그냥 자고 싶었다.

*     *      *

“…그렇게 돼서 저희 모두가 살았죠! 라온 님이 아니었다면 저는 지금 이곳에 없었을 거예요!”

시얀은 정원에 설치한 대형 식탁의 중심에 서서 실비아와 시녀들에게 지금까지 일었던 일들을 말해주고 있었다.

알현실에 이어서 두 번째인데도, 지치지도 않고 오히려 점점 힘이 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럼 다음은 라온 님이 납치된 동족들을 어떻게 구해주셨는지를 말씀드릴게요!”

“우와아아아아아아!”

엔시아가 식탁에 발을 걸친 채 환호를 내질렀다. 실비아와 다른 시녀들도 기대된다는 듯 머리 위로 손을 올리고 박수를 보냈다.

-저, 저거 하나 더….

라스가 오동통한 손가락을 들어서 얼마 남지 않은 고기파이를 가리켰다.

‘이제 그만….’

진짜 배 터지겠다고.

라스의 요청을 들어주느라, 거의 다섯 끼 이상의 음식을 배에 채워 넣었다. 이 이상 들어가면 움직일 수도 없을 것이다.

-끄으응….

라스가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저었다.

-어쩔 수 없지. 그럼 아이스크림으로 참아주겠노라.

‘없거든.’

-왜 없어! 따박따박 준비를 해… 케헥!

라온은 주절거리는 라스를 걷어 차버리고 조용히 식탁을 빠져나왔다.

당사자가 빠졌음에도 시얀과 별관의 식구들은 각자의 이야기를 이어가느라 바빴다.

라온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서 방으로 들어갔다.

‘피곤하네.’

시얀과 시녀들의 반응을 맞춰주고, 라스의 요구대로 음식을 먹어주느라, 전투를 치른 것보다 더 머리가 아팠다. 바로 침대에 등을 묻었다.

‘생사결….’

지루할 정도로 조용해지니, 다시 부왕과의 생사결이 떠올랐다.

현시점에서의 부왕은 분명 나보다 강하다. 검계를 열고, 분노를 개방해도 이길 가능성이 그리 크지 않았다.

이대로 있다가는 내년 1월 1일이 내 삶의 마지막 날짜가 될 것이다.

‘방법은 역시 수련뿐인가.’

임무가 있다면 임무를, 임무가 없다면 없는 대로 수련을 하며 강해지는 것 말곤 답이 없었다.

아직 완성에 이르지 못한 무학들도 있으니, 그것들을 최대한 갈고 닦아야 했다.

-본왕이 도와주리?

라스가 하품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본왕이 손가락 하나만 까딱하면 그런 부랄 하나쯤은 터트릴 수 있느니라.

녀석은 기분이 좋으니, 몸만 넘기면 잡아주겠다며 헤죽거렸다.

‘내가 할 거야. 아니, 내 손으로 꺾어야 해.’

두 번이나 기회를 준 부왕을 위해서라도 내 힘으로 그를 꺾고 싶었다.

‘최선을 다한다면 어떻게든 되겠지.’

생각을 정리하고 눈을 내리감았는데, 문에서 세 번의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라온이 몸을 일으키며 문 쪽을 바라보았다.

주디엘이 작은 쟁반에 따스한 향을 풍기는 차를 가지고 들어왔다.

“오늘 과식하신 것 같아서 소화에 도움이 되는 차를 가져왔습니다.”

“고마워.”

라온이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라스 때문에 식탁에 있던 음식들을 모조리 먹었는데, 그걸 눈여겨보고 있었던 것 같다.

“카룬이 안 보이던데, 어디 간 거야?”

“임무에 나갔습니다. 남쪽이다 보니, 돌아올 때까지 조금 시간이 걸릴 듯합니다.”

“그렇군.”

고개를 끄덕이면서 차를 마셨다. 잔잔한 향 덕분일까. 거북했던 속이 조금이나마 가라앉는 것 같았다.

“부왕과 부딪쳤다고 하던데 괜찮으신 겁니까?”

“괜찮아. 배려를 받았거든.”

“배려라고 한다면….”

“봐줬어.”

라온이 한숨을 내쉬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가 마음먹었다면 죽었을 거야.”

“음….”

“걱정할 필요 없어. 아직 반년 넘게 남았으니까. 그동안 죽을 만큼 수련만 하면 어떻게든 되겠지.”

라온은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는 주디엘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이쪽에는 별일 없었어?”

“…예.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주디엘이 연한 웃음을 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항상 고생해줘서 고마워.”

“아닙니다. 피곤하실 테니,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서 방문을 닫고 떠났다.

“음….”

라온은 주디엘이 나간 방문을 보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왜 그러는 것이냐?

‘뭔가 웃음이 조금 이상했는데.’

-이상해?

‘그래. 꼭 옛날….’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입맛을 다실 때 창가에서 자그마한 기척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니, 어느새 글렌이 다가와 있었다.

“가주님!”

라온이 벌떡 일어나서 창문을 열었다.

“나오거라.”

글렌이 잔잔한 눈빛으로 턱짓을 했다.

“네게 주어야 할 게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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