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05화
아리스가 단상 바로 앞에 서서 손을 들어 올렸다.
“다들 바쁠 테니까. 내가 빠르게 설명을….”
“아리스.”
글렌의 냉랭한 시선이 그대로 아리스에게 굽어졌다.
“지금 이곳에 있는 건 우리만이 아니다. 입 다물고 있거라.”
“음….”
아리스는 라온의 뒤에 서 있는 엘프들을 보고서 단상의 옆으로 물러섰다.
“세이피아에서 오신 사절들을 환영하오.”
글렌은 라온의 뒤편에 서 있는 엘프들을 보며 고개를 주억였다. 그는 예상외로 그간의 이야기를 논하기 전에 먼저 손님에 대한 예를 보여주었다.
“환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절의 대표인 시얀이 한 걸음 앞으로 나와 라온의 옆에 섰다. 그녀는 머리에 쓰고 있던 후드를 벗고 허리를 굽혔다.
“유화 가지 부족의 시얀이 북방의 왕을 뵙습니다.”
“어….”
“하….”
“음….”
글렌을 제외한 간부 모두가 시얀의 얼굴을 보고서 한순간 말을 잊었다.
넋이 나간 듯 눈을 떼지 못하는 이들도 많았다.
“하, 하이엘프가 아름답다는 말은 들었지만….”
“그래.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
“여신이라고 해도 믿겠군.”
“정신 차려. 가주님 앞이다.”
넋이 나간 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빠르게 정신을 차리고 시선을 돌렸다.
“흠.”
글렌은 시얀의 외모보다 그녀의 말을 신경 쓰는 듯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유화 가지 부족이라면….”
“맞습니다.”
시얀이 리메르를 돌아보며 옅은 미소를 그렸다.
“광풍대주가 제 친오빠입니다.”
“흐흥!”
리메르는 동생이 자랑스럽다는 듯 턱을 치켜든 채 콧노래를 불렀다.
“역시 그랬군.”
글렌은 어느 정도 예상을 하고 있었는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간부들 사이에서는 안 닮았다. 한쪽이 너무 못생겼다라는 말이 아주 작게 들려왔다.
“피곤하겠지만, 조금 기다려주었으면 좋겠소.”
글렌은 시얀을 보며 짧게 고개를 저었다.
“지금 이곳에 있는 이들은 세이피아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고 있으니, 일단 그 사정부터 들어야 할 테니까.”
“당연합니다.”
시얀은 얼마든지 기다리겠다며 뒤로 물러섰다.
“라온 지그하르트.”
글렌의 부름에 라온이 앞으로 나섰다.
“예.”
“세이피아에서 있었던 일들을 보고하라. 하나도 빼놓지 않고 전부.”
“알겠습니다. 저희가 세이피아에 간 이유는 대주님의 검을 반납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큰 문제 없이 내부로 들어갔고, 당대 수호자인 스테린 님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엘프들의 의식을 치를 때….”
라온은 세이피아에서 있었던 일들을 모두 설명한 후 숨을 내쉬었다.
“에덴! 그 미친놈들이 거기까지!”
“부, 불의 정령왕의 투구를 쓴 놈을 베었다고?”
“점점 강해지는 놈을 상대로 이겼다니 말이 돼?”
“난 세계수의 열매를 얻었다는 걸 믿을 수가 없군. 하이엘프들도 구할 수 없다고 들었는데.”
“무엇 하나 믿기 힘든 이야기야.”
간부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채 헛바람을 흘렸다.
직계 쪽 간부들은 어떻게든 트집을 잡으려고 했지만, 카룬이 없기 때문인지 목소리가 그리 크지 않았다.
“다른 건 몰라도 세계수의 열매를 먹은 건 진짜 같은데….”
“오러가 더 단단하게 굳어졌어. 이 짧은 기간에 저런 성장을 이룬다는 건 그 정도 영약이 아니고서야 있기 힘든 일이지.”
“그럼 점점 강해지는 괴물을 상대로 이겼다는 것도 진짜인가.”
라온에게서 자연스럽게 피어나는 위압적인 기파에 간부들이 입술을 떨었다.
“커흠!”
글렌은 간부들이 잡담하는 걸 보면서도 자제시키지 않고 작게 헛기침만 했다. 그의 입꼬리가 바람에 흩날리는 이파리처럼 가늘게 떨렸다.
“나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세계수의 열매는 맛있었어?”
아리스가 손을 번쩍 들었다.
“그게….”
“아리스.”
글렌이 아리스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아, 나한테만 뭐라고 해!”
아리스는 입을 삐죽 내밀고서 본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 이후는 어떻게 된 것이냐.”
글렌은 이제 왜 늦었는지에 대해 말해보라는 듯 손가락을 까딱였다.
“지그하르트로 복귀하는 길에 이상한 시비에 걸렸습니다.”
“이상한 시비?”
“예. 엘프들이 후드를 쓰고 있었는데, 정체를 알아보고 팔라는 듯한 말을 하더군요. 그게 이상하다고 생각하여….”
라온은 세이피아에서 벌어진 사건에 이어서 해상 시장에서 엘프들을 구해온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렇게 삼합대결이 끝났고, 혹시나 적이 추적해올 수도 있기에 모습을 감춘 채로 복귀했습니다.”
“허!”
발데르가 어이가 없다는 듯 헛바람을 흘렸다.
“네가 시란을 죽였다고? 남북맹의 원로원주를?”
“운이 좋았습니다.”
라온이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운이 좋았다는 말은 진심이다.
시란이 준비를 단단히 하고 왔다면 물속에 잠긴 건 내가 될 수도 있었다.
“미, 미쳤군….”
“그랜드 마스터에 오른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시란도 나이를 먹었으니, 경지가 예전 같지는 않겠지. 다만 그렇다고 쳐도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다.”
간부들도 놀랍다는 듯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난 그것보다 술집에서 얻은 작은 힌트로 해상 시장까지 찾아간 게 놀랍군. 심계가 보통이 아니야.”
“부왕과의 삼합대결은 또 어떻고. 해온 일 하나하나가 위업급이다.”
직계들은 입을 다물었고, 라온에게 호의를 가진 간부들은 연신 놀랍다는 말을 내뱉었다.
“흐흠!”
글렌은 왼손을 들어 경련하듯 떨리기 시작한 입꼬리를 감췄다. 입 대신 그의 손이 바르르 떨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게 전부인가?”
“그렇습니다.”
“가, 가주님.”
라온이 그렇다고 대답했을 때 뒤로 물러나 있던 시얀이 손끝을 떨면서 앞으로 나왔다.
“무슨 일이오?”
글렌은 말해보라는 듯 턱을 끄덕였다.
“세계수를. 아니, 세이피아를 지켜낸 위업과 해상 시장에서 동족들을 구원해주신 일을 통해 저희 세이피아는 라온 님을 종족의 은인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시얀이 열기가 피어나는 글렌의 눈동자를 마주하며 고개를 숙였다.
“라온 님이 속해 있는 지그하르트에도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그건 수호자의 뜻인 거요?”
“수호자님만이 아니라, 저희 일족의 뜻입니다.”
그녀는 모든 엘프의 뜻이라며 눈을 내리감았다.
“커허험! 잘 알겠소.”
글렌은 양 뺨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더운 것 같은데도 그는 입을 가린 손을 절대 내리지 않았다
“그, 그리고….”
시얀이 결심한 듯 양손을 가슴 앞에 모은 채 앞으로 나섰다.
“라온 님이 다 전하시지 못한 말이 있습니다.”
“음?”
라온이 시얀의 말을 들으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무슨 말이지?’
딱히 숨긴 일이 없는데, 무슨 말을 하지 않았다는 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게 무엇이오?”
“라온 님은 불의 정령왕의 형님이 되셨습니다!”
그 외침에 가주전 내부가 침묵으로 물들었다.
“어…?”
“부, 불의 정령왕의 계약자도 아니고 형님?”
“지금 내가 뭘 들은 거지? 불의 정령왕의 형님?”
“아무리 그래도 형님이라니….”
간부들만이 아니라, 불의 정령왕의 계약자라는 보고를 미리 들은 글렌과 로엔도 눈을 부릅떴다.
“저는 라온 님 덕분에 물의 정령왕과 계약하는 행운을 얻었습니다. 그 물의 정령왕이 말해주었습니다. 라온 님이 불의 정령왕의 형님이 되었다고.”
시얀의 목소리와 표정이 너무도 진중했기에 의심하던 간부들도 입을 다물었다
“으윽!”
라온이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들었다.
‘그걸 왜 이야기해요!’
타박하듯 시얀을 바라보았는데, 그녀는 나 잘했지 하는 표정으로 몸을 배배 꼬았다. 답답해서 가슴을 쳤다.
“광풍부대주.”
“예….”
글렌의 부름에 속으로 한숨을 삼키고 앞으로 나왔다.
“저 말이 정말이냐?”
“…되기는 했습니다.”
거짓은 아니었기에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저걸 믿으라고….”
“그럼 안 믿을 거야? 세이피아의 하이엘프가 말한 건데?”
“그것도 물의 정령왕의 계약자라잖아.”
“그건 아는데, 너무 말이 안 되잖아….”
간부들도 이번 일만큼은 믿기 힘든지 말다툼을 시작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시얀은 라온의 이름을 논하는 간부들의 반응이 즐거운 듯 다시 입술을 달싹였다.
“해상 시장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남북맹의 무인들이 페렌 강의 주인은 지그하르트도 세이피아도 아니라며 저희를 위협할 때 라온 님이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그녀는 꼭 전해야 할 말이라며 두 주먹을 움켜쥐었다.
“내가 있는 곳이 곧 지그하르트다!”
그 말에 알현신에 있는 모두가 입을 떡 벌렸다.
“크헉….”
글렌이 튕겨 나가듯이 옥좌의 등받이에 등을 걸치고, 목을 뒤로 젖혔다. 그의 목젖이 뽑혀 나올 것처럼 부르르 떨렸다.
‘뭐, 뭐지? 왜 저러시는 거지?’
라온이 글렌의 기괴한 모습을 보며 눈을 끔벅일 때 좌우에 있는 간부들이 차례로 입을 열었다.
“내가 있는 곳이 곧 지그하르트? 조금 오만하지 않나.”
“그러게. 본인이 가주님도 아니고….”
“맞아. 해서는 안 될 말이었….”
“해서는 안 될 말?”
아리스가 발을 들어서 알현실 바닥을 굵직하게 내리찍었다.
콰아아앙!
그녀는 바스러진 잔해를 밟고 나오며 미간을 구겼다.
“그게 맞는 말이다!”
아리스가 라온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거만한 게 아니라, 지그하르트의 검사로서 길을 나선다면 누구나 가져야 할 마음가짐이라고!”
그녀는 라온의 자신감이 당연한 것이라며 주먹을 말아쥐었다.
“이건 누님의 말이 맞다.”
카룬이 없기 때문인지 조용히 있던 발데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그하르트 검사로서 외부에 나선다면 대륙 전체가 우리의 땅이라는 자신감 정도는 있어야지. 잘했다!”
발데르가 라온을 바라보며 엄지손가락을 치켜 들었다.
라온은 발데르를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하여튼….’
나중에 또 욕을 하겠지만, 지금만큼은 진심으로 칭찬을 하는 것 같았다. 너무 단순해서 신기한 사람이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데니어가 라온을 보며 연한 웃음을 그렸다.
“거만한 게 아니라, 우리 지그하르트를 건드리면 어떻게 된다는 것을 잘 보여준 거죠. 칭찬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발데르에 이어서 박수까지 보냈다.
“…….”
아리스는 그런 데니어가 못마땅하다는 듯 눈매를 찌푸린 채 바라보았다.
“으흠!”
작은 헛기침 소리에 단상 위를 올려보았다.
글렌의 뺨과 이마가 불에 달군 것처럼 빨개져 있었다. 몸 상태가 좋지 않은 건지 점점 더 피부가 익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또 있어요. 남북맹의 원로원주라는 사람이 왔을 때….”
“시얀 님.”
라온이 시얀의 소매를 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제 그만….”
“잠깐.”
글렌의 상태가 좋지 않아 보여서 그만 하자고 말하려는데, 그 당사자가 손을 들어 올렸다.
“네가 무엇을 했는지 알아야 이후에 대한 대처를 할 수 있다.”
그는 계속하라는 듯 시얀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계속 하시오.”
“아, 네!”
시얀은 글렌 덕에 자신감을 찾은 듯 수첩까지 꺼내서 지금까지 적어두 었던 내용을 읊기 시작했다.
“라온 님은 원로원주를 만났을 때 네 손주 곁으로 보내준다는….”
라온은 시를 낭독하는 듯 목소리까지 높인 시얀을 보며 눈을 질끈 내리감았다.
‘언제 저렇게 당당해진 건데….’
제발 살려줘….
* * *
시얀은 결국 라온이 했던 일화를 모두 말해주고 나서야 뒤로 물러섰다. 그렇게 겁이 많고, 부끄러움을 타던 사람이 저렇게 변했다는 게 놀라웠다.
한참 동안 고개를 뒤로 젖히고 있던 글렌이 다시 시선을 내렸다.
눈빛은 평소와 같았지만, 여전히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있었고, 그 손이 지진이라도 난 듯 떨리고 있었다.
글렌은 시얀을 보며 잔잔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한 사실을 말해줘서 고맙소.”
“아, 아닙니다.”
시얀은 이제야 제정신이 든 듯 양 뺨을 빨갛게 물들인 채 고개를 떨었다.
“라, 라온 님께 많은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저희 세이피아는 지그하르트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자 합니다.”
그녀가 품에서 수호자 스테린의 편지를 꺼내들었다.
우우우웅!
글렌이 가볍게 턱짓을 하자, 시얀의 손에 들려 있던 편지가 저절로 떠올라 그의 손으로 빨려들어갔다.
“흠….”
글렌은 편지를 모두 읽고 고개를 끄덕였다.
“동맹이라….”
“바로 동맹을 맺자는 건 아닙니다. 일단 서로 간의 대화부터 시작하자는 뜻입니다.”
“그렇겠지. 일단 긍정적으로 생각해두겠소.”
그는 편지를 곱게 접어서 품에 넣었다.
“감사합니다.”
시얀이 고개를 숙이고 뒤로 물러섰다.
“그럼….”
글렌의 시선이 라온에게 향했다. 그의 눈동자는 어느새 평소와 달리 조금 느슨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광풍부대주.”
“예. 가주님.”
“고생했구나.”
“…아닙니다.”
라온이 옅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가장 존경하는 사람에게서 고생했다는 말을 들으니, 쌓였던 피로가 한순간에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네게 매번 말하는 듯하지만 과한 겸손은 좋지 않다.”
글렌이 고개를 저었다.
“위업에는 그에 합당한 가치를 받는 게 옳은 일이다.”
세이피아를 구하고, 납치된 엘프들을 구한 업적 때문인지 직계 중에서도 반박하는 사람은 없었다.
“광풍부대주는 단상 위로 올라오라.”
“예.”
라온이 숨을 고른 후 단상 위로 올라가 글렌의 앞에 섰다.
“세계수를 지키고, 엘프들을 구한 공을 높게 사. 광풍부대주에게 금패와 최상급 아티팩트, 그리고 영약을 하사한다.”
글렌은 로엔이 들고 있던 판에서 금패와 고급스러운 가죽 장갑, 그리고 영약이 들어 있는 목갑을 내어주었다.
“감사합니다.”
라온은 글렌이 내려준 상을 받고서 깊게 고개를 숙였다.
“다음으로 도리안 세피아.”
“네, 넵!”
도리안은 본인의 이름이 불릴 줄 몰랐다는 듯 혀를 깨문 채 단상 위로 올라갔다.
“너도 세이피아를 지키는 데 일조했다고 들었다.”
“저, 저는 정말 별거 안 했습니다.”
“네게 은패와 무학서, 영약을 내리겠다.”
“가, 감사합니다! 윽!”
도리안은 감사하다고 말하다가 목소리가 갈라져서 얼굴을 붉혔다.
그 후에는 유아가 불려 나갔다.
“미숙한 실력임에도 두려워하지 않고 싸웠으니, 공을 인정하기에 충분하다. 네게 명검과 영약을 내리겠다.”
“고맙습니다!”
유아는 도리안과 달리 낭랑한 목소리로 고맙다고 외쳤다.
글렌은 유아가 단상을 내려가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시얀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곳까지 오느라 피곤할 터이니, 지그하르트와 세이피아의 관계에 관한 건 이틀 후부터 이야기하는 게 좋겠소.”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시얀은 나름 절도있게 고개를 숙였다.
“모두 나가보도록.”
글렌은 오늘 회의는 이것으로 끝이라며 손을 저었다. 알현실의 문이 열리고, 간부들이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아니, 잠깐!”
리메르가 눈을 끔벅이며 앞으로 나왔다.
“나는! 나도 할 거 다 했는데 왜 나는 안 줘요!”
그는 본인도 보상을 달라며 소리를 쳤지만, 오늘 충격적인 일이 많았기 때문인지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내 말 좀 들어! 나도 활약했다고!”
* * *
글렌은 간부들이 나가자마자, 입을 가리고 있던 손을 내렸다. 양쪽 입꼬리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구쳐 있었다. 웃다가 경련이 일어날 정도의 각도였다.
“다들 들었나?”
“그럼요.”
로엔이 품에서 수첩을 꺼냈다. 그 역시 입가에 큼지막한 웃음을 띄우며 읽기 시작했다.
“내가 있는 곳이 곧 지그하르트다!”
“크흡!”
글렌이 참지 못하고 흥겨운 웃음을 터트렸다.
“저도 그 말을 들었을 때 놀라긴 했죠.”
리메르가 경매장에서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상황이 최악이었는데도, 라온의 말을 듣자마자 전신에서 힘이 나더군요.”
그는 그 말 자체가 감동이었다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무의 그릇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면도 성장하신 듯하군요.”
로엔은 라온이 대견하다는 듯 부드러운 미소를 그렸다.
“맞아요. 이제 그 녀석에게도 지그하르트가 크게 다가오고 있는 거겠죠.”
리메르가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난 그것보다도 부왕에게 맞선 게 더 놀라워.”
아리스가 기둥에서 등을 떼며 작은 미소를 그렸다.
“도끼가 무겁지 않다면 목을 베겠다니, 저 나이에 그런 패기를 지닌다는 게 가능한 일인가.”
그녀는 진심으로 라온이 대견한지 헛웃음을 흘렸다.
“아버지.”
아리스는 입맛을 다시고서 글렌에게 시선을 들었다.
“이제 무력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자격을 갖춘 것 같은데 어때요?”
“무얼 말이냐?”
“다 알면서 뭘 물어요.”
그녀가 눈을 찡긋하며 웃었다.
“후계자.”
아리스가 글렌을 바라보며 턱을 매만졌다.
“라온을 후계자 후보에 올릴 생각 없으세요?”
글렌은 아리스를 바라보며 차분히 눈을 내리감았다가 떴다. 그의 입술이 잔잔히 달싹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