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04화
라온이 건들거리는 리메르를 보며 입술을 꾹 씹었다.
‘미치겠네….’
나 혼자 있었다면 목숨을 걸고 로만과 부딪쳐도 상관없지만, 지금은 지켜야 할 사람이 많았다.
로만이 알아서 돌아가 준다는데, 왜 갑자기 시비를 거는 건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그것도….
라스가 뻘게진 얼굴을 부여잡은 채 히죽였다.
-부랄이 되었지 않느냐. 부왕에서 부랄이 된 거면 승급했다고 봐야 하나?
‘승급은 개뿔!’
최악의 이명이라고!
이명을 부랄로 정하는 것 자체가 너무 충격적이었기에 분명 로만의 명성에 영향을 줄 것이다. 그냥 물러나지는 않을 것 같았다.
“…….”
로만은 당장 리메르의 목을 분지를 것처럼 섬뜩한 눈빛을 드러냈다.
“네놈은 언젠가 그 주둥아리 때문에 죽게 될 것이다.”
“어. 그래. 난 죽고, 넌 부랄… 흡!”
라온이 태화보까지 밟으며 다가가서 리메르의 입을 막았다.
“입 좀 다무세요. 제발.”
리메르가 버둥거릴 수도 없게 무릎으로 그의 허리를 찍었다.
“크힙!”
리메르는 허리에 가해진 충격 때문에 비틀거리며 주저앉았다.
“그 멍청이 때문에 흐름이 깨졌으니, 다시 말하마.”
로만이 잠시 리메르를 바라보다가 다시 라온에게 시선을 돌렸다.
“2년 전 생사결을 논할 때 네가 이 정도까지 성장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어이가 없을 정도의 발전이지. 허나….”
그가 도끼를 손끝으로 돌리며 시선을 굽혔다.
“2년은 나에게도 기회를 주었다. 아직은 모자라. 살아남고 싶다면 더 위로 올라와라.”
“내가 살아남는다면 당신이 죽을 텐데?”
“생사결이 무엇이냐.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사는 싸움이지. 무인이 더 강자의 손에 죽는다는 건 축복이다.”
로만은 무인이 전력을 다한 싸움에서 죽을 수 있다면 행운이라며 시원한 미소를 그렸다.
라온은 로만의 입가에서 피어난 웃음을 보며 눈매를 찡그렸다.
‘이게 부왕 로만의 진짜 성격인가.’
만날 때마다 약속을 어겨서 정신 나간 놈이라고 여겼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는 이전에도, 지금도 누구 하나 죽이지 않았다.
약자는 건드리지 않은 채 오히려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목표만 세워주었다.
더 강해진 나와 싸우고 싶다는 속셈이 있다고 해도 그게 배려로 다가오는 건 분명했다.
좋은 인물은 아니지만, 단순한 악이라고 단정 지을 수도 없었다.
‘사람이란 참 여러 가지 얼굴을 가지고 있군.’
라온은 무학과는 다른 삶의 깨달음을 얻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년 1월 1일에 뵙겠소. 부왕 로만.”
로만의 의도를 알고 있지만, 그 나름의 배려를 받았기에 적당한 예를 갖췄다.
“네 밑에서 저런 괴물이 나온 게 신기하군.”
로만은 리메르를 보며 한숨을 내쉬다가 등을 돌렸다.
“도망치지 말거라.”
그는 이제 미련이 없다는 듯 악운에 올라탄 후 뱃머리를 돌려서 그대로 떠나버렸다.
‘쉽지 않겠군.’
로만은 지금도 강하지만, 내년에 더 높은 위치에 서 있을지도 모른다. 그를 정면에서 꺾기 위해서는 노력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했다.
‘할 수 있을까?’
아니, 어떻게 할지를 생각하는 게 맞겠지.
이미 생사결은 물릴 수 없는 단계까지 왔다. 지금 생각해야 건 부왕 로만을 꺾을 방법뿐이다.
라온은 멀어지는 악운을 바라보다가 리메르를 잡은 손에 힘을 풀었다.
“야이! 부랄쟁이야! 너는 죽을 거야! 라온한테!”
그는 입이 풀리자마자, 로만에게 부랄쟁이라고 외쳐댔다.
-저거 두개골 좀 열어 보거라. 본왕의 생각에는 뇌 대신에 두꺼운 파스타가 들었을 것 같으니라.
‘정말 그럴지도.’
라온이 한숨을 내쉬며 리메르의 앞에 섰다.
“대체 무슨 생각이에요. 알아서 갈 놈을 왜 자극한 건데요!”
“약속 어기는 거 열 받잖아.”
리메르는 로만이 떠난 방향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거기다 지가 스스로 이명을 포기했으니까. 내가 만들어 준 거지. 오히려 고맙다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고!”
그는 본인은 잘못 없다며 어깨를 으쓱였다.
‘피곤하네.’
한숨을 내쉬고서 고개를 돌렸다. 말 안 통하는 리메르와 논쟁을 하느니, 기운이 있을 때 엘프들의 목에 걸린 쇠사슬 목걸이를 빼주는 게 맞는 것 같았다.
라온은 나룻배로 건너가서 목에 쇠사슬 목걸이를 차고 있는 어린 엘프를 보았다. 레이란이 헤이린이라고 불렀던 아이였다.
“으….”
목에 손을 가져다 대자, 아이가 어깨를 부들부들 떨었다. 인간에게 두려움을 느끼는 것 같았다.
“걱정 마.”
레이란이 헤이린의 어깨를 잡으며 부드러움 미소를 그렸다.
“너를 구해주신 분이야. 언니를 믿고, 참으렴.”
그녀가 지금까지 보여준 얼굴 중 가장 따스하게 보였다.
라온은 레이란에게 눈인사를 하고서 헤이린의 목걸이를 잡았다.
렉터가 말해주었던 방식대로 내부에서부터 오러를 밀어 넣어 빼니, 목걸이가 뚝 부러져서 떨어졌다.
“아!”
헤이린이 자유를 되찾은 목을 만지며 입술을 떨었다. 그녀는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숙여왔다.
“가, 감사합니다.”
“아니야.”
라온은 헤이린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서 목걸이를 차고 있는 다음 엘프에게 다가갔다.
-조금 전에 저 어려 보이는 엘프가 네놈보다 나이는 더 많을걸?
‘그런 것 좀 말하지 마….’
* * *
시얀은 엘프들의 목걸이를 해제해주는 라온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야.’
저 목걸이 때문에 동족들을 구하고도 걱정이 많았는데, 라온은 그런 걱정을 할 필요 없다는 듯 가볍게 쇠사슬 목걸이를 풀어주었다.
‘오늘 라온 님이 없었다면 난 아무것도 못 했겠지.’
라온 덕분에 이런 경매가 이뤄진다는 걸 알았고, 그가 시선을 끌어 준 덕분에 모두를 무사히 빼낼 수 있었다.
밖으로 나온 이후에도 홀로 강자들의 앞을 막아서서 모두를 지켜냈다. 그가 아니었다면 전멸을 당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시얀은 마지막 동족의 목걸이를 풀어버린 라온을 보다가 눈을 끔벅였다.
‘아! 그러고 보니….’
여러 일이 한 번에 일어나서 정신을 좀 놓고 있었는데, 생각해보니 정리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좋은 대사가 연속해서 나왔지.’
오늘 라온은 입을 열 때마다 가보로 남겨도 이상하지 않을 명언들을 날렸었다. 머리에 남아 있는 그의 외침들을 꺼내 보았다.
‘일단 내가 있는 곳이 곧 지그하르트다. 이게 최고겠지.’
라온이 그 말을 했을 때는 동족들에 대한 걱정으로 머리가 꽉 차 있을 때인데도, 온몸에 소름이 돋아올랐다.
지그하르트에 대한 그의 신념이 느껴져서 나까지 떨릴 지경이었다.
‘그 외에도 많았어.’
시얀은 라온의 명언을 절대 잊지 않기 위해서 바로 수첩을 꺼내서 오늘 그가 보여준 행적과 명언을 모두 적기 시작했다.
‘다음 전기는 내가 써야 하니까.’
라온 지그하르트 전기 세이피아 편은 누구에게도 넘겨줄 수 없다. 세세한 부분까지 모두 적어두었다.
“내가 있는 곳이 곧 지그하르트, 도끼가 무겁지 않다면 목을 베어버리는… 헤헤헤.”
시얀은 헤죽거리는 웃음을 드러내며 라온에 대한 기록을 적어나갔다.
“시얀 님?”
라온은 조금 기괴하게 울리는 시안의 웃음소리를 듣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어디 안 좋으신 건가?’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게 걱정되어서 봤는데, 그녀는 수첩에 지금까지 내가 했던 말과 행동을 적으며 히죽이고 있었다.
“야이 부랄쟁이야!”
그녀의 반대편에서는 리메르가 여전히 로만을 부랄이라 외치고 있었다.
라온은 시얀과 리메르를 차례로 보고서 관자놀이를 주물렀다.
‘저 집안이 이상한 건가?’
* * *
쿠구구구구.
지그하르트 가주전 깊은 곳에서부터 묵직한 진동이 번진다.
“또 시작이네.”
“한동안 조용하더니 더 심해졌어.”
“북망산에 대형 몬스터가 나타나서 그렇다던데.”
“난 영물이 태어났다고 들었어.”
“그냥 지진이야.”
이제 지진에 익숙해진 검사들은 흔들리는 천장을 올려보며 잡담을 나눴다.
“뭐, 이러다가 금방 그치겠지.”
“그렇다고 하기엔 아침부터 계속되는데….”
“걱정 마. 별일 없을 테니…어?”
“뭐, 뭐야!”
지진을 가볍게 여기는 검사들을 비웃듯 갑자기 진동이 심해진다. 천장 위에서 회색 먼지들이 흩날리고, 장식품들이 길을 잃은 듯 떨어졌다.
“너, 너무 쎄잖아!”
“이러다가 진짜 무너지는 거 아니야?”
“서, 서 있기 힘들 정도인데?”
검사들은 무섭게 흔들리는 진동에 겁을 먹은 듯 주저앉은 채 마른침을 삼켰다.
“안 무너집니다.”
검사들의 얼굴이 퍼렇게 질릴 때 차분한 걸음으로 다가온 채드가 고개를 저었다.
“지그하르트의 검사라는 분들이 이런 지진 정도에 겁을 먹어서는 안 되지요.”
“아….”
“죄, 죄송합니다!”
검사들은 거세게 흔들리는 진동 속에서도 담담한 눈빛을 드러낸 채드를 보며 고개를 숙였다.
“조금만 참으시면 진정될 겁니다.”
채드는 검사들에게 인사를 하고서 알현실의 문을 열었다.
내부로 들어가자마자 눈에 들어오는 건 요동치는 글렌의 다리였다. 그는 단상이 짓뭉개질 정도로 심하게 다리를 떨고 있었다.
‘또 시작이시군.’
냉정하다 못해 냉혹하다는 소리를 듣는 북방의 패왕이 저렇게 다리를 떠는 이유는 하나뿐이다. 라온 지그하르트. 그가 정해진 시기에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허허허.”
로엔이 잔잔한 웃음을 흘리며 글렌을 바라보았다.
“가주님. 진정하시지요.”
“진정…?”
글렌이 로엔을 보며 미간을 구겼다.
“진즉에 도착해야 할 녀석이 아직도 오질 않았는데, 어떻게 진정하라는 말이냐.”
그는 진정할 수가 없다며 더 강하게 다리를 떨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구!
로엔이 매일 같이 청소하여 깔끔하기 그지없는 알현실 천장과 창틀에서도 작은 먼지가 흩날렸다.
“한참 전에 도착했어야 하는데, 아무런 연락도 없다니, 무슨 일이 벌어진 게 분명해!”
글렌이 큼지막한 손아귀로 오른쪽 팔걸이를 움켜쥐었다. 스무 번도 넘게 고친 팔걸이가 또다시 고철이 되었다.
“그 게으름뱅이 놈과 함께 보내는 게 아니었는데!”
그는 리메르와 함께 보낸 게 후회가 된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저, 저기 가주님….”
채드가 글렌의 앞으로 다가가며 고개를 숙였다.
“지금 오고 있다고 합니다.”
“뭐?”
“광풍대주와 부대주가 지금 복귀하고 있다고 합니다. 아마 한 시간 내로 도착할 것 같습니다.”
“그걸 왜 지금 이야기하는 것이냐!”
글렌이 채드를 보며 호통을 쳤다. 매서운 폭풍이 부는 듯 알현실 내부의 마나가 요동쳤다.
“비연회의 주인이라는 자가 그런 정보를 이제서야 가져오다니! 지금까지 무얼 한 것이야!
“에, 엘프들과 함께 오고 있어서 조심한 건지 정말 갑자기 나타났습니다.”
채드는 불량배에게 걸린 아이처럼 어깨를 쭈그린 채 고개를 떨었다.
“쯧.”
글렌이 떨던 다리를 멈추고, 몸을 일으켰다. 하루 종일 가주전을 휘감고 있던 진동이 드디어 멈췄다.
“로엔. 준비했던 것들을 가져오록.”
“예.”
로엔이 부드러운 미소를 유지한 채 우측의 방으로 들어갔다.
“비연회주.”
“아, 예!”
“간부들을 소집하라.”
글렌이 지금 가문에 있는 모든 간부를 불러오라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알겠습니다!”
“잠깐.”
채드가 급히 달려나가려고 할 때 글렌이 고개를 저었다.
“아리스는 부르지 말도록. 그냥 놔둬.”
“그….”
채드가 마른침을 삼키며 등을 돌렸다.
“아리스 님은 이미 나, 나가셨습니다.”
“나가다니?”
“라, 라온 님을 마중하러 가신다고 달려 나가셨….”
쿠우웅!
글렌이 왼주먹으로 아직 살아 있는 왼쪽 옥좌의 팔걸이를 깨부쉈다. 저쪽은 이미 서른 번 이상 고친 곳이었다.
“왜 그 녀석이 먼저 알게 된 것이냐!”
“비, 비연회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광풍부대주 소식이 들려오자마자 튀어 나가셔서 막을 수가….”
“크으.”
글렌이 짜증난다는 듯 입술을 씹었다.
“됐다. 빨리 간부들이나 불러오도록.”
“예에….”
채드가 고개를 꾸벅이고서 알현실을 나갔다.
“하아아….”
자연스럽게 폐 깊은 곳에서 한숨이 튀어나왔다.
‘진짜 못 해먹겠네.’
아리스와 글렌 사이에 껴서 얻어맞다 보니 매일매일 속이 타들어 가는 듯했다.
양쪽 모두 라온의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발작을 일으키듯이 움직이니 감당이 안 됐다.
‘때려칠까?’
전대 비연회주에게도 이런 고통이 있다는 건 들어보지 못했기에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지친다….’
힘없이 가주전의 복도를 걸어가는데, 아까 이곳에 올 때 만났던 검사들이 다가와서 눈을 반짝였다.
“비, 비연회주님!”
“어떻게 지진이 멈출 거라는 걸 아셨습니까?”
“혹시 천기라도 읽으시는 건지….”
“비연회주시잖아! 북방에서는 회주님의 눈을 피해갈 수 있는 게 없다고!”
“대단하십니다!”
검사들은 알현실에 들어가기 전에 했던 말을 그대로 믿고, 내가 마법이라도 부린 것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음….”
채드는 말없이 은은한 미소만을 지었다. 가볍게 고개를 까딱이고 복도를 지나갔다.
“저런 겸손한 모습이라니….”
“역시 비연회의 주인이야.”
검사들은 그 모습마저 대단하다며 감탄을 흘렸다.
채드는 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며 전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조금만 참을까?’
* * *
라온은 지그하르트의 고고한 성벽을 보며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좀 쉴 수 있겠네.’
그동안 혹시 모를 습격에 대비하여 일부러 험한 길로 다니며 모습을 감췄다.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밥도 제대로 못 먹었는데, 저 거대한 성벽을 보니 이제야 긴장이 풀렸다.
“가시죠. 이제 푹 쉴 수 있을 겁니다.”
엘프들에게 연한 웃음을 보여주고서 성문으로 다가가는데, 성벽 위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터어엉!
산양이 절벽을 타는 것처럼 허공을 노니며 다가온 여성이 공중에서 몸을 휘돌린 채 땅을 내려섰다.
여성이 고개를 홱 쳐든다. 노을빛 머리카락에 시원한 이목구비. 아리스 지그하르트가 눈앞에 와 있었다.
“아, 아리스 님?”
“조카!”
아리스가 라온을 품에 안으며 입가에 진한 미소를 그렸다.
“왜 이렇게 늦었어! 매일 너만 기다렸다고!”
그녀는 그리웠다고 말하며 손아귀에 힘을 꽉 말아쥐었다. 흩날리는 노을빛 머리카락에서 따스한 바다의 향이 피어났다.
“죄송합니다. 중간에 일이 조금 있었어요.”
라온이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야.”
아리스는 라온을 끌어안은 채로 리메르를 노려보았다.
“에…?”
멍하니 서 있던 리메르가 아리스의 서늘한 기세에 당황하여 눈을 끔벅였다.
“너는 뭐하는 놈이야! 할 줄 아는 게 없으면 보고라도 따박따박 해야지!”
“아, 그게….”
“진짜 무능하네. 보고서도 매번 라온이 보내고 넌 뭘 하는 거냐고.”
“그니까 그게….”
“됐고. 앞으로 잘해. 또 이런 식이면 죽는다.”
“아니….”
그녀는 리메르의 말문을 아예 막아버리고서 엘프들에게 다가갔다. 폭풍 그 자체였다.
“아, 세이피아의 사절분들이시구나. 반가워요.”
아리스는 언제 인상을 썼냐는 듯 방긋 웃었다. 기본적으로 미모가 뛰어나다 보니, 순식간에 분위기가 변했다.
“아, 안녕하세요.”
시얀이 아리스를 향해 고개를 꾸벅였다. 말은 조금 더듬었지만, 처음 만났을 때에 비하면 천지 차이였다.
“와, 얼굴 미쳤네.”
아리스도 시얀의 외모는 놀라운 지 입을 떡 벌렸다.
“네?”
“아니에요. 이곳까지 오느라 피곤하실 테니, 바로 들어가시죠.”
그녀는 바로 들어가자며 일행들을 데리고 바로 성문으로 향했다.
“멈춰주십시오.”
성문 앞에 서 있던 외총관 일리운이 문 앞을 막아섰다.
“엘프분들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다만 첫 방문이니 신분에 대한 확인을….”
“야.”
아리스가 일리운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예?”
일리운이 움찔하며 뒤로 물러섰다.
“너 라온이 데리고 온 손님들을 의심하는 거야?”
“그, 그게 아니라, 저는 확인을….”
“저 멍청이가 데리고 온 손님이라면 세세하게. 하나하나 다 조사를 하는 게 맞지.”
아리스가 리메르를 가리키며 입술을 씹었다.
“난 또 왜….”
연속으로 무시당한 리메르가 어깨를 축 내렸다.
“하지만 저들은 라온의 도움에 고맙다는 인사를 하기 위해서 가문을 찾아온 거라고! 근데 검사를 하겠다? 뒈지고 싶어?”
“아, 알고는 있는데 저는 제 일을….”
“그래서 라온을 못 믿겠다?”
“그게 아니라. 후….”
일리운은 아리스에게는 말이 안 통한다는 것을 깨닫고 고개를 저었다.
“알겠습니다. 들어가십시오.”
“수고.”
아리스는 빨리 가자며 손을 흔들었다.
“…가시죠.”
라온이 한숨을 내쉬고서 엘프들을 보았다. 가자고 말을 하는데, 시얀이 또 수첩을 꺼내든 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라온 님의 신뢰도는 지그하르트에서도 독보적. 오빠 따위와 비교할 수 없는….”
라온은 시얀의 중얼거림을 들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또 헛소문이 박차를 가하겠네.’
그 가뜩이나 말도 안 되는 전기가 지독할 정도로 개연성 없는 판타지로 바뀔 것 같았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서 아리스를 따라 지그하르트의 가주전으로 향했다.
“라온.”
아리스가 옆으로 다가와서 어깨를 툭 쳤다.
“그런데 왜 이렇게 늦은 거야?”
“사정이 있었습니다.”
“사정?”
“예. 가주전에 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전에 조금만 알려줘.”
그녀는 미리 듣고 싶다며 손가락을 조금 벌렸다.
“음, 알겠습니다.”
라온이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가볍게 설명해주었다. 짧지 않은 일이다 보니, 말을 끝내자 어느새 알현실의 문 앞에 서게 되었다.
“들어가자.”
아리스가 이상할 정도로 환한 웃음을 짓고서 알현실의 문을 열었다.
이미 온다는 이야기가 돌았는지, 알현실 내부 기둥 앞에는 가문의 간부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여러 감정이 어린 시선을 받으며 단상의 앞에 서려는데, 아리스가 앞으로 튀어나오며 외쳤다.
“가주님. 라온이 또 대단한 업적을 세우고 왔으니까. 혼내지 마세요!”
아리스는 라온이 납치된 엘프들을 구해서 왔다며 시원하게 웃었다.
“후….”
왠지 저럴 거라 생각했기에 한숨을 내쉬었다.
“가주님을 뵙습….”
라온이 인사를 하기 위해서 시선을 올리려다가 멈춰 섰다. 글렌의 붉은 눈동자가 냉혹한 빛을 머금고 있었다.
‘이번에는 또 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