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03화
“크하하하하!”
로만이 이마를 부여잡은 채 광소를 터트렸다. 그의 감정에 오러가 스며들며 강물 위로 거대한 파도가 출렁였다.
“뭐가 웃기지?”
라온은 쩌렁쩌렁 울리는 로만의 웃음소리에 눈매를 찌푸렸다.
‘저놈, 설마 더 강해진 건가?’
2년 전 레이블 강에서 만났던 로만보다 지금 로만의 기세가 더 무겁게 다가왔다.
착각이 아니라면 놈은 그때보다 더 높은 곳에 올라선 것 같았다.
“멈춰 있던 심장이 뛰기 시작했는데, 어찌 웃지 않겠느냐.”
로만이 강물에 담그고 있던 도끼를 들어 어깨에 걸쳤다.
“내 흥을 동하게 만드는 건 역시 네놈들 뿐이다.”
그는 라온과 리메르를 차례로 훑으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준비해라.”
로만이 삼합대결을 시작하자는 듯 도끼 자루를 매만졌다.
“딱 삼 합으로 네 실력을 보겠다.”
“삼 합은 무슨.”
라온은 광기를 두른 듯한 로만의 눈동자를 보며 입술을 씹었다.
‘삼 합이 끝나자마자, 달려들 게 뻔해.’
로만은 부왕이라는 이명을 버릴 정도로 쉽게 약속을 어기는 인간이다.
삼합대결이 끝나자마자, 흥이 올랐다며 전력을 다해서 덤벼들 가능성이 높았다.
‘검계현신은 아껴두는 게 좋겠군.’
삼합대결은 지금 상태로 버티고, 그 이후에 벌어질 진짜 싸움에서 검계를 사용하여 단숨에 끝을 보는 게 살아남을 가능성이 가장 높아 보였다.
꾸우욱.
라온이 심장을 휘도는 불의 고리를 공명시켰다. 초집중의 세계에 들어서며 만화공과 글래시아의 기운을 극성으로 끌어 올렸다.
쿠구구구구구!
로만의 기세를 따라 밀려오던 파도가 굳어버린 듯 멈췄다가 바스러진다. 지금 자신의 기파가 저 거짓말쟁이의 패기에 밀리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삼합대결.”
라온은 격동하는 심장을 가라앉히며 로만의 앞에 섰다.
“시작하지.”
* * *
리메르는 로만과 마주 선 라온을 보며 입술을 짓씹었다.
‘이전보다 더 최악이로군.’
로만이 지금까지 해온 언행을 생각해보면 그는 삼합대결을 끝낸 후에도 물러나지 않고 공격을 해올 게 뻔했다.
‘그래도 길이 없는 건 아니야.’
다행히 로만은 많은 수하를 이끌고 오지 않았다. 놈만 죽일 수만 있다면 큰 문제 없이 이곳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쯧.
리메르는 짧게 혀를 차고서 시얀의 옆으로 다가갔다.
“오, 오빠….”
시얀은 라온이 걱정되는 듯 가슴 앞에 모은 두 손을 떨었다. 라온을 무조건 신뢰하는 이 아이도 로만의 패악적인 기세에 질린 것 같았다.
“싸울 준비를 해둬.”
“그럼 라온 님이 진다는….”
“그게 아니야.”
리메르가 고개를 저으며 로만을 노려보았다.
“저놈 거짓말을 밥 처먹듯이 하거든. 라온이 삼합대결을 이겨내도 덤벼들 거야. 그때 너와 내가 나서야 해.”
“아….”
시얀은 이제 알겠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최상급 정령은 소환할 수 있지?”
“응. 바로 부를게.”
그녀가 손가락을 튕기자, 배를 지키듯이 떠 있던 물의 거인이 가라앉고, 물방울로 조형된 듯한 앙증맞은 뱁새 한 마리가 작은 날개를 펼쳤다.
시얀의 어깨 위에 내려온 뱁새는 귀여운 외형과 달리 어마어마한 마나를 품은 채 조롱거렸다.
리메르는 뱁새에게서 전해지는 거대한 기운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할만해.’
계약한 지 얼마 지나지는 않았어도 저 뱁새는 최상급 정령이다. 로만과의 전투에서 큰 도움이 되어 줄 것이다.
“후….”
리메르가 검병에 손을 얹으며 깊은숨을 내뱉었다.
‘지켜볼 수밖에 없다는 게 서글프군.’
로만은 이전보다 더 강해진 듯했고, 그 앞에 선 사람은 제자이자, 수하인 라온이다.
스스로의 무능이 너무도 아프게 다가왔다. 단전을 다쳐서 제대로 싸우지 못할 때보다 더 마음이 쓰렸다.
‘만약 여기서 살아간다면….’
의수를 달아야겠어.
스테린의 말을 들었을 때도 고민을 했었지만, 이젠 확실히 마음을 정했다.
살아서 지그하르트로 돌아간다면 엔시아에게 빌어서라도 의수를 달 것이다.
‘그러니 부탁한다.’
리메르는 라온의 널찍한 등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버텨다오.’
* * *
“검계를 쓸 수 있다고 들었는데….”
로만이 도끼를 한 손으로 쥔 채 턱을 까딱였다.
“사용하지 않는 건가?”
“필요하다면 알아서 쓸 테니, 걱정하지 마라.”
라온은 로만의 번뜩이는 눈동자를 마주하며 고개를 저었다.
“건방지군.”
로만은 건방지다는 말과 달리 오히려 더 마음에 든다는 듯 입꼬리를 길게 말아 올렸다.
쿠구구구구!
그가 도끼를 하늘로 들어 올린다. 검붉은 도끼날 사이로 강대한 오러가 스며든다. 그저 기운이 응집되고 있을 뿐인데, 하늘이 울부짖는 듯한 굉음이 울렸다.
“일격이다!”
천둥 같은 외침과 함께 로만의 도끼가 떨어져 내린다. 도끼날 위에서 타오르는 기운이 오싹한 핏빛으로 번뜩였다.
쿠구구구구!
라온이 벼락처럼 가라앉는 로만의 도끼를 보며 이를 악물었다.
‘이 무슨!’
도끼가 다 내려오지 않았음에도 전신을 짓누르는 압력이 무시무시했다. 양쪽 어깨가 뜯겨 나가는 기분이었다.
‘힘에서 밀리면 안 돼.’
부왕 로만은 힘과 패기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초고수다.
일격부터 수세에 몰린다면 삼합대결을 이어가지도 못한다. 가진 힘을 모두 부어서라도 막아내야 했다.
쿠웅!
왼발 진각을 밟으며 아래로 기울였던 제천검을 세웠다. 냉혹한 은빛 칼날 위에 심상 속에 쌓아둔 만검의 묘리를 담았다.
절대 꺾이지 않겠다는 의념을 두른 채 시뻘겋게 달아오른 도끼를 후려쳤다.
쿠와아아아아앙!
검과 도끼가 부딪쳤을 뿐인데, 산이 무너지는 듯한 굉음이 터져 나왔다. 강물이 겁에 질린 듯 역행하고, 강가의 자갈밭에 시꺼먼 균열이 돋아났다.
쩌저저저저적!
라온은 점점 더 강한 압박을 해오는 로만의 도끼를 보며 입술을 씹었다.
‘이렇게 무거웠나?’
로만의 도끼는 예전에 보았을 때보다 훨씬 더 무겁게 다가왔다. 숨을 제대로 쉬기도 어려웠다.
‘최대한 빨리 밀어내야 해.’
꺾일 것처럼 휘청이는 제천검의 칼날 위에 절검의 묘리를 더했다. 도끼 사이에 스며든 기운을 가닥가닥 잘라내며 글래시아의 냉기를 극성으로 일으켰다.
콰아아아아앙!
도끼날과 검신 사이에서 꺼뭇한 회색빛이 폭발하며 라온이 다섯 걸음을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로만은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은 채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제법이로구나.”
로만은 만족스럽다는 듯 큼지막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도끼를 아래로 젖혀두었다. 강에서부터 쳐올려 하늘을 부순다는 악굉잔부였다.
라온이 점점 더 짙은 빛을 띠는 로만의 도끼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저건 이 상태로 견디지 못해.’
검계현신을 아껴두고자 했지만, 지금의 경지로 로만의 이격을 견디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라온은 제천검과 진혼검을 역수로 잡고, 심상의 세계를 개방했다.
검계현신 신마조화결.
검계가 열리자, 폭풍을 맞은 듯 요동치던 강물이 잔잔히 가라앉고, 어둑해진 하늘 위로 금빛 태양과 은색의 달이 떠오른다.
라온은 오직 그 홀로 존재하는 듯한 고요한 세계 속에서 오연히 빛나는 신검과 마검을 들어 올렸다.
“검계인가. 판단이 빨라서 좋군.”
로만이 피식 웃으며 도끼를 들어 올렸다.
“이번에도 건방을 떨었다가는 그 머리가 쪼개졌을 것이야.”
그는 일격을 봐주었다는 듯 말하며 콧잔등을 찌푸렸다.
“그럼 이격 악굉잔부다.”
아래로 내려둔 도끼날 위로 검붉은 구체가 응집된다.
첫 일격에서 보였던 강환보다 크기는 작았지만, 더 거대한 힘이 압축되어 목줄을 조이는 듯한 섬뜩한 기세를 일으켰다.
쿠우우웅!
로만이 진심을 다하겠다는 듯 통나무 같은 다리를 찍으며, 도끼를 쳐올린다. 검붉게 타오르는 도끼날 위에서 하늘을 깨부수겠다는 살벌한 의념이 느껴졌다.
‘이건 의념의 싸움이야.’
라온이 전신의 마나회로에 퍼져 있던 기운을 끌어당겨 두 손아귀에 담았다.
육체의 모든 기운이 하나가 된 듯 검 위로 타올라 불꽃과 서리의 칼날을 세웠다. 꺾이지 않는 두 검 위로 나의 하늘을 지키는 의념을 휘감았다.
창천검 이초식.
창천불선.
하늘을 쪼갤 듯이 치솟는 도끼날을 향해 광휘를 머금은 두 자루의 검을 내리꽂았다.
쿠와아아아앙!
강환과 강환이 정면에서 맞부딪치며 무시무시한 오러의 폭풍이 연달아 솟구쳤다. 강의 신이 노한 듯 강물이 사정없이 터져나가며. 강바닥이 모습을 드러낼 정도였다.
찌지지지직!
강환의 부딪침 다음은 의념의 격돌이다.
모든 것을 깨부수려는 로만의 의념과 절대 꺾이지 않는 라온의 의념이 서로를 물고 뜯으며 격한 전쟁을 일으켰다.
콰아아아아아!
깎이고, 깎이던 오러가 맞물리며 폭발을 일으켰다. 눈을 뜰 수조차 없는 강렬한 빛이 뿜어지고, 강물 전체가 범람하며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쿠우웅!
이번에는 로만이 한 발, 그리고 라온이 네 발을 물러섰다.
라온은 손아귀가 아려오는 통증을 참으며 로만을 바라보았다.
‘확실해….’
저놈 2년 전보다 더 강해졌어.
2년 전 로만이 리메르와 삼합대결을 벌일 때 전력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건 알고 있지만, 지금 놈의 무력은 그것과 차원이 다르다.
부왕 로만은 2년 전보다 더 높은 경지에 올라 있었다.
“느낀 모양이로군.”
로만이 도끼를 내리며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생각대로다. 나는 그날 이후로 더 위로 올라섰다.”
“기연이라도 만난 건가?”
“그래. 기연을 만났지. 너희라는 기연을.”
그가 도끼를 들어 라온과 리메르를 차례로 가리켰다.
“뭐?”
“그랜드 마스터에 오르게 되면 육체적인 수련보다는 정신적인 자극이 경지를 올리는 게 크게 기여하게 된다. 강에서 만났던 너희를 만난 자극 덕분에 나는 더 높은 곳에 오를 수 있었다.”
로만이 도끼 자루를 꽉 말아쥐며 턱을 치켜들었다.
“지금의 내가 있게 된 건 너희 덕분이라는 거지.”
“음….”
예상을 벗어난 최악의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미 검을 뽑았고, 물러설 길은 없었다. 지금 할 수 있는 건 최선을 다해서 싸우는 것뿐이다.
“대결 중에 말이 길었군.”
로만이 양손으로 도끼를 잡은 후 어깨 뒤로 젖혔다. 검붉은 도끼날 위로 솟구친 거대한 강환이 용오름 같은 회전을 일으킨다. 시뻘겋게 명멸하는 빛이 죽음을 담아낸 듯 섬뜩했다.
“마지막은 악부공환격이다. 버틴다면 네 승리라고 해주지.”
“되도 않는 소리 말고 와라.”
라온이 숨을 꾹 멈춘 채 손가락을 까딱였다.
“역시 마음에 드는구나!”
로만이 도끼를 반쯤 휘두르다가 멈춰 섰다. 놈은 그 상태로 폭발적인 보법을 밟아 눈앞으로 다가와서 남은 도끼의 투로를 그어 내렸다.
강환을 이용한 오러 공격과 육체의 최대한 사용한 타격을 모두 담아낸 절묘한 한 수였다.
‘알고 있었어.’
처음 보았다면 당황했겠지만, 이전에 리메르의 등 뒤에서 보았던 무학이었다.
‘다만….’
알고 있다고 해도, 평범한 검으로는 막을 수 없어.
밑천을 다 드러내더라도 일단 사는 게 우선이다. 모든 것을 보여주기로 결정하고, 단전의 오러를 모조리 뽑아 올렸다.
라온이 강물 위로 진각을 밟았다. 어깨 뒤로 젖힌 마검과 허리 옆으로 세운 신검 위로 전신에서 질주하는 만화공과 글래시아의 기운을 휘감았다.
시야 전체를 가린 채 짓쳐 드는 로만의 공세를 향해 신검과 마검을 그어 내렸다.
손아귀에서 타오른 어마어마한 열기와 냉기가 폭풍처럼 뻗어나가 두 자루의 칼날에 힘을 더했다.
라온의 눈동자 위로 황금빛 광망이 스친다. 청홍무적. 말 그대로 무적이라 불려도 이상하지 않을 초상승의 검격이 부왕의 강환을 밀어내며 상서로운 빛을 터트렸다.
찌지지지직!
검은 불꽃과 찬란한 금빛이 각자의 의념을 두른 채 끝없은 경합을 벌인다.
쿠구구구구!
응집되던 기운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리며 파괴적인 빛을 뿜어낸다.
기괴한 보라빛 섬광에 닿는 모든 것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지워진다.
그 뒤로 거대한 폭발이 터지며 페렌 강이 갈라지고, 뒤로 밀려났던 강물들이 사방으로 흩날린다. 강 자체가 무너져 내렸다.
“허억….”
라온은 강바닥에 선 채 탁한 숨을 내뱉었다. 신검과 마검을 쥐고 있는 손아귀가 다 타들어 간 듯한 통증에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였다.
‘그래도 견뎠어.’
성장한 부왕의 공세는 예상보다 훨씬 더 무거웠다.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강력했고, 파괴적이었기에 버틴 자신을 칭찬하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쉬고 있을 틈은 없었다. 허옇게 피어난 수증기와 연기 속에 있는 로만의 기척이 느껴지고 있었으니까.
‘지금부터가 진짜 시작이야.’
로만의 성격이라면 흥이 올랐다면서 덤벼올 게 분명하다. 여기서부터가 시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호흡을 조절하면서 전투를 준비할 때 바람이 불어오며 수증기와 연기를 모두 꺼뜨렸다.
로만은 처음 있던 곳에서 두 걸음 정도 물러선 채 이쪽을 향해 미소를 그리고 있었다.
우우우웅!
예상대로 그가 도끼를 들어 올렸다. 호흡을 멈추고 대비를 하려 했는데, 그 도끼는 나를 향하지 않고, 아래로 내려갔다.
‘어?’
이상하다고 생각할 때 뒤편에서 거대한 기운이 치솟았다. 리메르와 시얀이었다.
대련 중에 기운을 모으고 있던 두 사람이 로만을 향해 강렬한 검격과 정령 마법을 쏟아냈다.
“쯧.”
로만은 미간을 찌푸린 채 내려놓았던 도끼를 들어 리메르의 검겨과 시얀의 마법을 거칠게 쳐냈다.
“이게 무슨 짓이냐.”
“어차피 약속을 어기고 달려들 게 뻔해서 먼저 쳤을 뿐이야.”
“으….”
리메르가 어깨를 으쓱였다. 시얀은 그 옆에서 입술을 꼭 깨물었다.
“헛소리.”
로만이 콧방귀를 뀌며 도끼를 어깨에 걸쳤다.
“삼합대결은 끝났다.”
그는 더 싸울 생각이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만족스러운 결투였다. 지금 당장 생사결을 벌여도 꽤 재미를 줄 수 있을 정도야. 하지만….”
로만은 라온의 손아귀에서 타오르는 신검과 마검을 보며 히죽였다.
“넌 아직 내가 바라는 수준에 오르지 못했다. 지금 그 상태로 내년에 나와 맞붙는다면 죽게 될 것이다.”
그는 그리 말하며 운용하던 오러를 꺼뜨렸다. 정말 더는 싸울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라온은 로만의 가라앉은 눈동자를 보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뭐지?’
본인의 이명까지 팔아가며 삼합을 외치길래 당연히 끝까지 승부를 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로만은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쉽게 도끼를 내려놓았다.
‘대체 무슨 생각을… 어?’
로만이 했던 말을 떠올리니, 하나의 생각이 떠올랐다.
‘설마 내게 경고를 해준 건가?’
이대로 내년 1월 1일에 만난다면 내가 죽을 거라는 걸?
로만은 이곳에 나타난 후 내 실력을 확인만 했을 뿐 정말 죽이려는 듯한 공격은 하지 않았다.
마지막에 죽는다고 말한 것을 보면 정말 경고를 위해 삼합대결을 벌인 것 같았다.
“네놈 설마 내게 경고를 한 건가?”
“어부들에겐 방생이라는 게 있다.”
“…….”
“아직 다 자라지 않은 새끼 고기가 더 커서 오도록 잡았는데도 놔주는 거지. 다만 그것도 두 번이 끝이다.”
그가 씩 웃으며 도끼를 매만졌다.
“할 말은 끝났으니, 이만 가보도록 하지.”
“잠깐.”
라온이 등을 돌린 로만을 부르며 한 발 앞으로 나왔다.
“궁금한 게 하나 있다.”
“뭐지?”
“렉터.”
라온이 해상 시장이 세워져 있던 곳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왜 망가진 거지?”
“…그렇군. 죽은 건가.”
로만이 라온의 시선을 따라간 채 고개를 저었다. 그의 눈빛이 처음으로 씁쓸함을 담았다.
“재능에 먹혔다.”
“뭐?”
“렉터는 너 정도는 아니었어도 천재라 불려도 이상하지 않을 재능을 지녔다. 하지만 산채전을 치를 때 그보다 지독한 재능에 패배하여 먹여버렸지.”
“베오른이라는 자에게 진 건가.”
“그 이름도 아는 건가.”
그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베오른은 렉터의 수하였다. 많은 것을 감추고 있던 놈이었지. 주의하는 게 좋을 거다. 뭐, 그것도 네가 내년에 살아 있을 때의 일이지만.”
로만은 그 말을 남기고 아예 다시 등을 돌렸다.
“어이.”
라온이 미간을 찌푸리고 있을 때 리메르가 옆으로 다가와서 로만을 불렀다.
“상황이 어찌 되었든, 너 이명을 포기한 거 맞지?”
“그렇다.”
로만은 후회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가 네 새로운 이명을 지어주지.”
리메르가 턱을 치켜든 채 입매를 비틀었다.
“도끼를 쓰는 지랄맞은 거짓말쟁이라는 뜻으로 앞으로 네 이명은 부랄이다.”
그 한 마디에 진지하던 분위기가 단숨에 훅 꺼졌다.
“…….”
후회를 하지 않겠다던 로만 미간에도 깊은 우물이 돋아났다.
-어휴….
라스가 리메르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거 아무리 봐도 그냥 미친놈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