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02화
매섭게 날아들던 도끼가 바람을 탄 것처럼 휘어지더니, 시란의 이마에 얇은 상처만을 남긴 채 강물에 처박혔다.
“크으윽!”
시란은 도끼가 머리를 스치자마자, 다급하게 보법을 밟아서 라온과 거리를 벌렸다.
“음….”
라온은 강물 속으로 가라앉는 도끼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반응이 늦었어.’
만약 도끼가 나를 노렸다면 가볍게 쳐내고, 시란의 목을 베었겠지만, 도끼는 처음부터 시란의 머리를 쪼개버릴 듯 쇄도해왔다.
그 예상 밖의 상황에 반응이 느려져서 시란이 도망칠 틈이 만들어졌다. 도끼를 던진 놈의 의도대로 움직였다는 것에 짜증이 일었다.
라온은 이미 멀어진 시란을 쫓지 않고 도끼가 날아온 방향을 바라보았다. 넓고 깊은 페렌 강을 반으로 가르며 다가오는 거대한 흑선이 보인다.
한번 보면 절대 잊을 수 없는 남북맹의 전선 악운이었다.
쿠구구구구!
해상 시장의 잔해를 잘게 부수며 다가온 악운 위에서 강 전체를 아우르는 거대한 존재감이 들끓었다.
쿠우우웅!
갑판이 무너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붉은 도끼를 쥔 노인이 강물 위에 내려섰다.
호흡만으로 전해지는 압도적인 패기에 요동치던 파도가 겁에 질린 듯 내려앉고, 하늘에 닿을 듯 솟구친 용오름이 사그라들었다.
라온은 심장을 따끔하게 만들 정도로 사나운 기파를 느끼며 시선을 들었다.
거칠게 넘긴 백발과 상흔으로 가득한 흑색 장포 그리고 핏빛으로 번들거리는 용머리 형태의 도끼까지. 레이블 강의 신이나 다름없다는 부왕 로만이었다.
-좁밥 놈이 왜 주인공처럼 등장하는 것이냐!
라스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툴툴거렸다. 가끔은 저 강심장과 태연함이 부럽다.
“자, 잘 왔다! 로만!”
시란이 부왕에게 달려가며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놈은 위험해! 내년까지 기다릴 게 아니라, 지금 당장 죽여야 한다!”
그는 더 성장하기 전에 라온을 죽이라며 삿대질을 해댔다.
“…….”
부왕은 시란의 외침에 답을 하지 않고, 라온을 바라보았다.
“2년만인가.”
“그보다는 조금 더 됐지.”
라온이 로만의 눈동자를 마주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면전에서 한숨이라니, 여전히 버릇이 없군.”
로만은 말과 달리 시원한 웃음을 그렸다.
“저놈을 노리는 척해서 호흡을 잃게 만들다니.”
시란에게 눈동자를 돌리며 짧게 혀를 찼다.
“보기와 다르게 머리를 잘 썼어.”
“남에게 칭찬을 듣는 건 오랜만인데.”
로만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로만! 무얼 하는 것이냐!”
시란이 로만의 곁에 선 채로 눈매를 찌푸렸다.
“빨리 저놈을 죽이란 말이다! 이런 기회는 다시 오지 않는다!”
“원주.”
로만이 시란을 보며 답답한 듯 탁한 숨을 내뱉었다.
“추하구려.”
“뭐?”
“내가 저 애송이에게 3년 후의 생사결을 약속했을 때 렉터가 물어본 말이 있소.”
그가 라온의 담담한 눈동자를 보며 말을 이었다.
“만약 당신이 3년이 지나기 전에 저놈을 죽인다면 어찌할 거냐고 물었지. 그때 내 대답이 어땠을 것 같소?”
“으….”
시란은 이미 그 답을 알고 있다는 듯 입술을 떨었다.
“나는 신경 쓰지 않겠다고 했소. 늙어서 이빨과 발톱이 빠진 당신의 손에 죽는다면 거기까지인 놈이라 아쉬워할 필요도 없다고 했지.”
로만이 떨리는 시란의 눈동자를 보며 입매를 얇게 비틀었다.
“그러니 그 반대도 마찬가지요.”
“뭐…?”
“원주가 불리하다고 해서 도와줄 필요도 없지. 나 역시 부끄러움을 아는 무인. 일대일 대결에 끼어드는 추한 짓은 하지 않겠소.”
그가 서늘한 웃음을 그리며 손을 저었다.
“계속하시오. 내가 승패를 증언하는 공증인이 되어주도록 하지.”
“무, 무슨 개소리냐!”
시란이 파래진 입술을 부르르 떨었다.
“지금 여기서 저놈을 죽이면 되지 않느냐!”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로만이 강물처럼 널찍한 어깨를 으쓱였다.
“나와 저 애송이의 생사결은 내년 1월 1일이오. 아직 덜 익은 과일을 따 먹어봐야 떫을 뿐이오.”
그는 정말 전투에 참여할 생각이 없다는 듯 도끼를 팔짱에 품은 채 눈을 내리감았다.
“로만! 이 빌어먹을 놈이!”
시란의 부름에도 로만은 다시 눈을 뜨지 않았다.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다.”
라온이 부르고 나서야 로만이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뭐지?”
“싸움에 관여할 생각이 아닌데, 왜 저 자를 구한 거지?”
조금 전 로만은 답지않게 머리까지 쓰면서 시란을 구해냈다. 당연히 둘이서 덤빌 거라 생각했는데, 싸움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게 이상했다.
“간단한 것을 묻는군.”
로만이 턱을 치켜든 채 입술을 달싹였다.
“네놈이 얼마나 성장했는지 직접 보고 싶었으니까.”
그는 그뿐이라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이 미친놈! 맹주가 이 일을 아신다면….”
“칭찬을 해주시겠지.”
“무, 무슨!”
“라온 지그하르트를 건드리지 말라는 건 맹주의 명이었소. 맹주의 명을 먼저 어긴 게 당신이니, 구하지 않았다고 트집 잡힐 일은 없소.”
로만은 단순한 문제라며 고개를 저었다.
“으으….”
시란이 입매를 비틀며 뒤로 물러섰다. 지금 당장 전투에서 이길 자신이 없기에 전선을 타고 도망치려는 것 같았다.
“원주. 어딜 가시는 거요.”
로만이 시란의 앞을 막아 선 채 사나운 눈빛을 드러냈다.
“나는 이 생사결의 공증인이오. 둘 중 하나가 죽기 전까지는 이곳을 벗어날 수 없소.”
그는 진심으로 공증인의 역할을 하겠다는 듯 패악적인 기파를 일으켰다.
“이 정신 나간 놈! 장난은 그만해라!”
“나는 언제나 진심이오.”
로만은 빨리 돌아가라는 듯 턱짓을 했다.
“돌아간다면 네놈을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시란은 로만의 기세에 질린 듯 가쁜 숨을 내쉬며 본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얼마든지.”
로만은 상관없다는 듯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무얼 하는 것이냐.”
그가 시란의 앞에 선 라온에게 눈짓을 보냈다.
“판을 다 깔아주었으니, 끝을 보도록 해라.”
“내가 그걸 어떻게 믿지?”
라온이 로만을 보며 미간을 구겼다.
“나를 못 믿겠다는 건가?”
“당연히.”
그 대답은 라온 대신 앞으로 나온 리메르가 해주었다.
“네놈은 내가 삼 합을 받아내고 나서도 흥이 올랐다며 덤벼들었잖아. 내년에 이뤄질 생사결이 만들어진게 네 변덕 때문인데 지금 널 믿으라고?”
리메르는 로만을 보며 이를 바드득 갈았다.
“팔은 어디에 팔아먹었지?”
로만은 리메르의 오른쪽 어깨를 보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알 거 없고, 대답이나 해.”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다.”
그가 시란과 라온을 차례로 훑고서 입매를 비틀었다.
“손주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 노쇠한 몸을 이끌고 달려온 노인과 손주에 이어서 조부까지 죽이려는 천재의 대결. 이런 싸움은 두 번 다시 없어.”
로만이 거세게 발을 구르며 광소를 터트렸다.
“나는 이 전투에는 절대 끼어들지 않고, 승자에게는 손끝 하나 건드리지 않고 집까지 모셔다 주도록 하지. 부왕이라는 내 이명을 걸겠다.”
그는 본인의 이명을 걸고 약속하겠다며 가슴을 두드렸다.
“저놈이 무슨 생각이든. 일단 끝은 봐야죠.”
라온이 리메르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후우, 알겠다.”
리메르가 뒤로 한 발 물러서며 한숨을 내쉬었다.
“부왕이 끼어들면 내가 어떻게 해서든 막아줄 테니, 시란부터 끝을 내.”
“알겠습니다.”
리메르의 몸 상태가 좋지는 않지만, 그는 로만과 달리 뱉은 말을 지키는 남자다. 믿고 앞으로 나섰다.
뿌드드득!
시란이 라온을 노려보며 부러질 정도로 강하게 이를 갈았다.
“물고기 밥조차 될 수 없게 쪼개주마!”
그가 낚싯대를 들어 올린다. 파도가 다시 휘몰아치며 강대한 오러가 응집되기 시작했다.
라온은 뻘겋게 달아오른 시란의 눈을 보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의지 하나는 대단하군.’
지금 시란은 본인이 패배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마음이 크게 꺾였음에도 손자의 원수를 갚겠다는 복수심만으로 의념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흐아아아아!”
시란이 낚싯대를 길게 빼서 휘둘러왔다. 강환이 스며든 낚싯줄이 채찍처럼 휘어져 목을 노려왔다.
우우우웅!
단전에서 작렬하는 불꽃을 칼날에 덮었다. 시뻘겋게 타오르는 열선으로 꺾여서 내려오는 낚싯줄을 그었다.
촤아아아아악!
쇠심줄처럼 굳건했던 낚싯줄이 가볍게 뜯겨 휘날린다. 줄에 달려 있던 찌와 바늘까지 끊어져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라온은 휘청이는 시란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역시 약해졌군.’
시란이 지닌 오러는 여전히 강렬했지만, 나를 죽이겠다는 의념 자체가 가라앉았다. 패배를 겪었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래도….’
얕봐서는 안 되지.
저렇게 복수심에 휩싸인 인간은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이미 이겼다고 좋아할 게 아니라, 끝까지 집중력을 유지해야 한다.
강물의 흐름을 보법에 얹었다. 태화삼보의 유연한 걸음으로 다가가 시란의 목을 향해 제천검을 찔러넣었다.
캬아아앙!
시란은 이를 꽉 깨문 채 낚싯대를 세워서 방어 태세를 갖췄다. 그의 입에서 혈향이 피어난다. 심한 내상을 입은 것 같았다.
치이이잉!
라온은 시란이 호흡을 조절하는 틈을 놓치지 않고, 그의 공간을 파고들었다.
“크윽!”
시란이 다급한 표정으로 물러서며 낚싯대를 휘둘러왔다. 의념이 깊게 담기지는 않았지만, 오러의 양만큼은 압도적이었다.
‘쉽게 꺾을 수는 없군.’
라온이 제천검의 검병을 꽉 말아쥐며 오른발을 내리찍었다. 출렁이는 강물을 잠재우며 왼손 진혼검을 내뻗었다. 붉은 칼날에 하얀 그림자가 지며 다가오던 강환을 에워쌌다.
라온 지그하르트 류 검식.
제5형 백영섬.
진혼검으로 펼쳐낸 백영섬이 낚싯대에서 폭발한 강환을 씻은 듯 지워버렸다.
“허어?”
시란은 거대한 강환이 찰나의 순간에 지워진 것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치이이이잉!
라온이 당황한 시란에게 짓쳐 들어 적섬삼십육결을 찔러넣었다. 일검에 삼십육방을 베는 불길의 칼날이 시란의 급소를 갈랐다.
푸카아아악!
가장 중요한 심장과 목은 막았지만, 다른 상처들이 터져서 시란의 전신이 순식간에 피투성이가 되었다.
“끄으윽….”
시란이 힘없이 낚싯대를 내렸다. 고통과 절망에 빠진 표정이 그대로 드러났다.
끝을 내기 위해서 제천검을 내리칠 때 시란이 왼 손아귀로 제천검을 말아쥐고, 오른손으로는 내 팔목을 잡았다.
“걸렸구나!”
손아귀에서 살벌한 양의 핏물이 쏟아지고 있음에도 시란은 입꼬리를 길게 말아 올렸다.
검과 손목을 빼내려고 했지만, 오러만이 아니라, 생명력까지 운용하고 있는지 빠지질 않았다.
“내가 너를 죽일 수 없다면 함께 가자!”
동귀어진을 말하는 시란의 피부가 타는 것처럼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의 단전이 거세게 약동하며 어마어마한 기운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단전의 오러를 폭발시켜 자폭하려는 것 같았다.
“내 손주를 죽이고 네놈은 살 수 있다고 생각했느냐! 네놈만큼은 절대….”
“그럴 거라 생각했다.”
라온은 비웃음을 그리는 시란을 보며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
“연기가 너무 서툴렀어.”
시란은 복수심으로 가득 찬 눈을 한 채 물러서고 약해진 모습을 보였다. 꿍꿍이가 있다고 생각했기에 처음부터 속지 않았다.
터엉!
라온이 시란에게 잡혀 있는 제천검에서 손을 놓고, 손바닥을 펼쳤다.
“이, 이놈!”
시란이 다급하게 내지르는 왼손을 어깨를 쳐낸 후 길게 펼친 오른손을 내질렀다.
분노의 마왕 결전기.
은월마장.
-악! 내 기술!
라스의 비명과 함께 쏘아진 은빛의 섬광이 시란의 가슴에 닿는 순간 그의 전신이 퍼렇게 얼어붙었다.
쩌저저저저적!
놈은 자폭을 위해서 단전에 모든 오러를 응집시키기 있었기 때문에 은월마장의 냉기를 방어할 수도 없이 그대로 얼음덩이가 되었다.
“너….”
“말했지. 손주가 있는 곳으로 보내준다고.”
라온은 흔들리는 시란을 눈을 보며 손목을 잡고 있는 그의 오른팔을 내리쳤다.
“주, 죽….”
시란은 마지막 말을 내뱉지도 못한 채 완전히 얼어붙어 강물에 떨어졌다.
잠시 떠올랐던 그의 눈동자는 본인의 죽음을 믿지 못하는 듯 시뻘건 핏줄이 돋아나 있었다.
“손주와는 지옥에서 재회하도록.”
라온은 차갑게 식은 시란의 육체가 강물에 가라앉을 때까지 지켜보았다.
짝! 짝! 짝!
탁해진 숨을 내뱉을 때 징을 치는 듯 큼지막한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등을 돌리니, 부왕 로만이 시원한 미소를 지은 채 손뼉을 치고 있었다.
“훌륭하다. 멋진 심리전이었어.”
로만이 고개를 끄덕이고서 한 발 앞으로 다가왔다.
“정말 움직이지 않았군.”
“말했잖느냐. 나는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라고.”
로만은 당연한 일이라며 손을 저었다.
“후….”
라온이 짧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럼 이제 가도 되는 건가.”
“물론이다. 이곳에서 벌어진 너와 원로원주의 싸움은 정당한 대결이었으니까.”
로만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그가 팔짱을 풀고 오른손으로 붉은 도끼자루를 꾹 움켜쥐었다.
“새로운 싸움은 다르지.”
“뭐?”
“내가 보고 싶은 건 심리전 따위가 아니라, 힘과 힘의 대결이었다.”
로만이 히죽 웃으며 한 발 더 다가왔다. 워낙에 덩치가 크다 보니, 한 걸음마다 수 미터씩 가까워지는 듯 했다.
“네놈의 검이 제대로 된 생사결을 벌일 수 정도로 날카로운지 확인을 해봐야겠다.”
“그게 무슨 의미지?”
“삼 합.”
그가 왼 손가락을 세 개 들어 올렸다.
“내 삼 합을 받아낸다면 아무런 손도 대지 않은 채 보내주겠다고 약속하마.”
로만이 도끼를 내렸다. 강물에 살짝 닿은 도끼의 날 때문인지 물이 부글부글 끓어 올랐다.
“아, 저 구라쟁이 새끼.”
리메르가 로만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약속 한번 지키는 꼴을 못 보네! 이명을 건다며!”
그가 직접 나서겠다는 듯 입매를 비틀고 검을 쥐었다.
“그럼 앞으로 나를 부왕이라 부르지 말거라.”
부왕은 약속을 어겼으니, 이명을 포기하겠다며 웃었다.
“아 저 개….”
“여기는 제게 맡겨주세요.”
라온이 리메르를 뒤로 물리고 앞으로 나왔다.
“내 실력을 보겠다고 했나?”
“그렇다. 수많은 관객이 올 텐데, 쓰레기 같은 대결을 보여줄 수는 없지 않나.”
“좋다.”
고개를 끄덕이며 제천검과 진혼검을 고쳐 잡았다.
“그럼 나도 확인해보도록 하지.”
“뭐?”
로만이 무슨 뜻이냐는 듯 눈매를 찡그렸다.
“네 도끼가 내 기대만큼 무겁지 않다면….”
라온의 눈동자에 시뻘건 뇌광이 번쩍였다.
“지금 이곳에서 목을 베어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