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600화 (599/653)

제600화

“하….”

렉터는 잘려 나간 어깨를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느끼지도 못했어.’

라온의 검격이 다가오는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무력 차이가 어마어마하다는 뜻이었다.

‘장부가 아니었다면 방금 검격으로 죽었겠군.’

라온은 조금 전 오른팔이 아니라, 목이나 심장을 노릴 수도 있었다.

지금 자신이 살아 있는 건 그의 배려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소문이 진짜였다니….’

라온 지그하르트가 그랜드 마스터에 올랐다는 이야기를 듣고 코웃음을 쳤는데, 그 소문은 사실이었다.

아니, 오히려 축소됐다. 라온은 벌써 그랜드 마스터 하급에 도달한 것 같았으니까.

“흐으으.”

렉터가 라온의 가라앉은 눈동자를 마주하며 입술을 꾹 씹었다.

‘시간을 끈다고?’

개소리를 했군.

라온 같은 규격 외의 괴물이 아닌 이상 마스터는 그랜드 마스터를 이길 수 없다.

아직 마스터의 땅을 벗어나지 못한 자신이 라온에게 시간을 끄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정말 괴물이 다 됐구나.”

렉터가 어깨의 상처를 지혈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라온은 언제라도 죽일 수 있다는 듯 아무런 제지도 하지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의 어린 모습이 아직 남아 있는데, 검은 두려울 정도로 예리해졌어.”

라온의 얼굴은 처음 보았을 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그의 검술은 천지가 바뀔 정도의 차이를 이뤄냈다.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였다.

“날 살려둔 건 장부 때문인가?”

렉터가 왼팔로 오른쪽 어깨에서 흐르는 핏물을 닦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런데 장부를 가져가서 뭘 어쩌려는 거지? 설마 그들 모두를 찾아가서 팔린 엘프들을 되찾기라도 하겠다는 거냐?”

“그렇다면?”

“하!”

렉터가 비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쳐들었다.

“그들은 뒤늦게 찾아온 떨거지들과 달리 대륙에 이름을 떨친 이들이다. 육황오마 소속의 무인도 있지. 그런데 그들을 모두 찾아가겠다고?”

“그래.”

라온은 그게 무슨 문제냐는 듯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육황오마가 아니라, 지그하르트에 속해 있는 자라고 해도 되찾아올 것이다.”

그의 눈빛은 진심을 말하는 듯 흔들리지 않았다. 저 미친놈은 정말 장부에 적힌 모두를 찾아가서 엘프들을 되찾을 생각이었다.

“무력은 강해졌지만, 정신은 여전히 미숙하군. 꿈을 꾸는 애송이에 불과해.”

“그럴 수도 있겠지. 다만….”

라온이 렉터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겁에 질려서 꼬리를 만 개보다는 나아.”

“무슨 개소리냐!”

*     *      *

“말 그대로다.”

라온은 눈에 핏줄을 띄운 렉터를 보며 짧게 입맛을 다셨다.

“이전에 보았던 너는 이렇지 않았으니까.”

렉터를 본 건 딱 두 번이지만 그때마다 느낀 게 있다. 당당하고 자신감이 넘치는 무인. 그는 항상 여유가 있었고, 멀리 볼 줄 아는 자였다.

적이라는 건 분명했지만, 배울 점이 있는 남자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부왕과 함께 만났을 때도 그의 도움이 있어서 생사결을 3년 후로 미룰 수 있게 되었다.

나름 빚을 졌다고 생각까지 하고 있었는데, 지금 본 렉터는 그때와 완전 다른 사람이었다.

태도는 위축되었고, 욕망에 눈이 멀었으며, 자신감과 여유는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네놈이 나에 대해서 뭘 안 다고!”

렉터가 이를 드러낸 채 기괴한 웃음을 흘렸다.

“장부? 절대 안 준다! 죽어도 꺼내줄 수 없어!”

그는 마음대로 하라는 듯 하나 남은 팔을 벌린 채 히죽였다. 용의 역린을 건드린 듯한 악의였다.

“내가 널 살려둔 이유는 장부가 아니라, 네게 빚을 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라온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뭐?”

렉터가 무슨 말을 하냐는 듯 눈을 부릅떴다.

“그때 네가 독하게 마음먹었다면 난 죽었을 테니까.”

거짓말이 아니다. 부왕 때도 그렇지만, 렉터와 처음 만났을 때도 그가 리메르를 무시하고 달려들었다면 나는 죽거나, 심각한 부상을 입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여유를 부리며 더 강해져서 오라는 듯 축복 아닌 축복까지 해주었었다.

전부 미쳐 있는 오마중에서 나름 괜찮은 무인이라고 여겼는데, 이런 모습으로 만나게 되니 속에서 분노가 들끓었다.

“그때 네가 내게 해준 말을 기억하나?”

“…….”

“’훗날 네 이름이 테루칸 산과 레이블 강에 들려오길 기다리마.’라고 했었다.”

인상적인 말이었기에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기억하고 있었다.

“아….”

렉터는 그제야 그 말이 떠오른 듯 입술을 떨었다.

“어떤가. 지금 내 이름은 테루칸 산과 레이블 강에서 들려오고 있나?”

“…….”

그는 대답 없이 아래로 늘어트린 손으로 주먹을 말아쥐었다.

“나는 약속을 지켰는데, 그 약속을 한 너는 더 이상 없는 모양이군.”

라온이 무겁게 말아쥔 제천검을 들어 올렸다.

“…….”

렉터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말없이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여기서 끝을 내….”

“우측 책장 두 번째 칸이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려 우측에 놓여 있는 책장을 가리켰다.

“뭐?”

“네가 찾는 장부. 우측 책장에 있다는 말이다.”

렉터는 물어봐 놓고 왜 딴소리냐며 고개를 저었다. 욕망이 차올라 있던 그의 눈동자가 조금이지만 밝아진 것처럼 보였다.

“그걸 말해줘도 널 살려둘 생각은 없어.”

데루스 로베르트에게 목줄이 잡힌 채 살았던 전생 때문에 남을 노예로 여기는 것만큼은 참을 수 없다.

이 일의 책임자는 누구라고 해도 죽일 생각이었다.

“살기 위해서 한 말이 아니다.”

렉터가 픽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가 지닌 특유의 여유가 되살아난 것 같았다.

“조금 옛 생각이 났을 뿐이다.”

라온은 렉터가 가르쳐준 책장으로 가서 붉은색을 띤 책자를 뽑아 들었다. 펼쳐보니, 지금까지 경매했던 내역이 모두 적혀 있었다. 최근 날짜에는 엘프와 엘프를 사간 인물들이 적혀 있었다.

“네 말대로다.”

렉터가 책상에 놓인 금화를 매만지며 한숨을 내쉬었다.

“난 꼬리를 만 개가 되어서 여기서 뼈다귀나 핥고 있었지.”

그가 천장에 뚫려 있는 시꺼먼 구멍을 보며 눈을 내리감았다. 정확한 사실은 모르겠지만, 남북맹에서 문제가 있었던 것 같았다.

“너는 네 길을 끝까지 고수하도록 해라.”

“네가 말하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다.”

“그래. 그래야 라온 지그하르트지.”

렉터가 빙긋 웃으며 어깨의 상처를 만졌다.

“너를 조금이지만 일찍 만났으면 좋았을 텐데….”

그가 가라앉은 음성을 흘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오러로 막고 있던 어깨의 상처가 갑작스럽게 터지며 처음보다 더 많은 양의 핏물이 흘러나왔다.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것이다.

“빠, 빨리 올라가라. 너를 노리는 괴물이 오고 있으니까.”

“괴물?”

“네놈이 죽였던 틸러를 기억하나?”

“당연히.”

노예처럼 잡혀 있던 청루족을 구하기 위해서 남북맹주의 제자인 틸러를 죽였던 일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틸러의 조부가 원로원 부원주. 아니, 이제는 남북맹의 원로원주가 된 시란이라는 늙은이거든.”

“그럼….”

“그래. 그가 이곳으로 오고 있다.”

렉터는 빨리 올라가는 게 좋을 거라며 힘 빠진 웃음을 그렸다.

“에, 엘프의 목에 걸린 쇠사슬 목걸이는 안쪽에서부터 오러를 넣어서 부숴야 한다. 그게 아니면 바로 터져서 목이 날아갈 테니까.”

그는 마지막이라고 생각한 듯 생각지도 않았던 정보까지 주었다.

“…그리고 베오른을 조심해라.”

“베오른?”

그에 대한 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렉터는 씁쓸해 보이는 미소를 그린 채 눈을 내리감았다.

“…….”

라온은 숨이 끊어진 렉터를 보며 눈매를 찌푸렸다.

‘베오른?’

어딘지 섬뜩한 그 이름을 되뇌일 때 위쪽에서 거대한 충격이 느껴졌다.

‘벌써 온 건가.’

*     *      *

리메르는 해상 시장으로 들어갔던 계단을 타고 다시 선실로 올라갔다.

이미 소식이 전해졌는지 갑판으로 나오자마자 남북맹의 무인들이 살기가 가득 실린 검과 창을 찔러왔다.

아이를 안은 채로 보법을 밟았다. 바람을 타고 좌측으로 이동한 후 왼발을 들어 쇄도해오던 놈들의 머리를 모조리 후려쳤다.

퍼버버버벅!

남북맹 무인들은 거칠게 튕겨 나가 갑판에 처박혔지만, 맷집이 좋은 뱃사람답게 바로 일어나서 자세를 잡았다.

“귀찮게 하네.”

리메르가 안고 있던 아이를 뒤편에 내려놓고, 검을 뽑았다.

“조금만 기다리렴. 금방 끝….”

남북맹의 무인들을 단번에 베어버리기 위해서 검을 들어 올릴 때 갑판이 터져나가고 물의 거인이 일어섰다.

쿠와아아아아앙!

물의 거인은 손짓 한 번으로 갑판에 있던 남북맹의 무인들을 모조리 날려버렸다.

“괜찮아?”

거인의 어깨에 타고 있던 시얀이 리메르를 보며 눈을 깜빡였다.

“덕분에.”

리메르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 왔어. 조금만 참으면 돼.”

시얀은 거인의 손을 이용하여 아래에 숨어있던 엘프들을 갑판 위로 올려주었다.

“라온 님을 기다리실 겁니까?”

마지막에 올라온 레이란이 경매장이 있는 쪽을 내려다보며 입맛을 다셨다.

“강에 있는 건 위험해. 그 사회자 놈이 말했던 대로 강에서 가장 큰 힘을 발휘하는 건 남북맹의 수적 놈들이니까.”

리메르가 도도하게 흐르는 강물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우리가 먼저 이곳을 벗어나는 게 라온도 편할 거야.”

“마, 맞아요.”

시얀이 만들어 놓은 구멍에서 도리안이 두더지처럼 고개를 내밀었다.

“빨리 왔네?”

“대주님이랑 시얀 님이 앞에서 적들을 다 처리해주셔서 전 달리기만 했거든요.”

도리안이 고맙다고 고개를 끄덕이고서 갑판에 올라섰다.

“라온 님이 이 배를 다 부수겠다고 하셨잖아요. 기다릴 필요 없어요.”

그가 빨리 나가자며 강가 쪽을 가리켰다.

“엘프분들은 물 위를 걸을 수도 있으니까. 바로….”

“그건 안 돼.”

리메르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네?”

“저 쇠사슬이 아이들의 힘을 아예 막고 있으니까.”

그는 엘프들의 목에 걸린 쇠사슬 목걸이를 가리키며 눈매를 찡그렸다.

“남북맹 놈들은 다 모른다고 하고, 열쇠 구멍이 없어서 푸는 방법도 모르겠어.”

“아, 그러면….”

“괜찮아요.”

시얀이 손가락을 튕기자, 그녀의 뒤에 있던 물의 거인이 페렌 강으로 몸을 던졌다.

쿠구구구구구!

주변의 강물을 흡수하여 몸집을 키운 거인이 양손을 펼치자, 스무 명이 충분히 올라갈 수 있는 너비가 되었다.

“다들 타요.”

시얀이 먼저 거인의 손바닥에 내려간 후 손짓하자, 엘프들이 머뭇거리다가 그 위에 올라탔다.

리메르가 그 모습을 보며 길쭉한 미소를 그렸다.

‘정말 많이 변했네.’

타인의 시선이 두려워서 이불 밖으로 손가락 하나 내밀지 않던 시얀은 이제 당당히 자신을 드러내고, 사람들을 이끌고 있었다. 그녀의 모습이 신기하면서도 대견했다.

“자자, 빨리 올라가.”

리메르가 옆에 있던 아이를 시얀에게 건네주고서 그도 거인의 손으로 내려가려 할 때였다.

쿠구구구구구!

레이블 강이 있는 상류 쪽에서 회색 전선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쇄도해오고 있었다.

바람을 타는 수준이 아니다. 마나를 연료 삼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

“벌써 지원이 온 건가!”

리메르가 입매를 비틀며 다시 검을 뽑았다. 강을 휘도는 바람을 검날에 실어 강기의 벽을 세웠다.

쿠오아아아아아앙!

푸른 빛을 띤 바람의 장벽이 전선의 앞을 막아섰다.

배의 속도가 조금씩 느려지고 있을 때 돛 위에 서 있던 노인이 등에 지고 있던 낚싯대를 길게 펼쳤다.

낚싯줄이 끝도 없이 뻗어나가며 바람의 장벽을 거침없이 갈라버렸다.

장벽을 뚫어낸 전선은 물의 거인을 그대로 부숴버리겠다는 듯 멈추지 않고 돌진해왔다.

퍼어어어어엉!

리메르와 시얀이 동시에 움직였다. 두 사람은 합격술을 익힌 것처럼 바람과 물을 이용하여 새로운 벽을 세웠다.

하지만 더 빠르게 짓쳐 든 전선이 완성되지 않은 벽을 짓뭉개며 나아가 물의 거인과 정면에서 부딪쳤다.

콰아아아아앙!

물의 거인의 상반신이 무너지고, 그 손에 타고 있던 엘프들이 추풍낙엽처럼 떨어져 나갔다.

“아악!”

“꺄아아아악!”

“으으윽!”

쇠사슬 목걸이 때문에 제힘을 쓸 수 없는 엘프들은 발버둥만 치다가 강물 속으로 추락했다.

“이런!”

아직 갑판에 남아 있던 도리안이 급하게 강물로 뛰어들었다. 그는 배 주머니에서 나룻배 하나를 꺼내서 바로 강에 띄웠다.

“이쪽으로 타세요!”

꽤나 큰 배였기에 물에 빠진 엘프들을 모두 태우고도 자리가 남을 것 같았다.

“저, 저게 왜 있어. 아니,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지.”

리메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쉰 후 전선에서 뛰어내린 노인을 바라보았다.

특이한 붉은 피부를 지녔는데도, 눈동자에 맺힌 악의의 폭풍이 너무 격렬해서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저 영감은….’

피부가 붉고, 낚싯대를 무기로 쓰는 노인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있다. 남북맹의 부원주 시란이 분명했다.

“남북맹의 부원주가 친히 오실 줄은 몰랐네.”

리메르가 시란을 보며 입매를 비틀었다.

“지그하르트의 광검이로군.”

시란이 리메르를 보며 턱을 끄덕였다.

“라온 지그하르트는 아직 안에 있는 건가? 차라리 잘 되었어.”

그가 리메르를 노려보며 낚싯대를 가볍게 흔들었다.

“놈이 나오기 전에 너희 모두를 죽인다면 나와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할 수 있을 테니까.”

“그게 무슨 소리지?”

“라온 지그하르트가 내 손자를 죽였으니까.”

“뭐?”

“틸러. 영웅이 되어야 할 아이를 그 악귀가 죽였단 말이다!”

시란이 섬뜩한 눈빛을 들이밀며 낚싯대를 세웠다. 물 위에 띄운 듯이 찰랑이는 찌가 맹렬하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강환….’

시란은 원로원 부원주답게 그랜드 마스터에 올라 있었다. 나이가 있어서 체력은 달릴지언정 무력 자체는 강렬하기 그지없었다.

리메르가 뒤에 있는 시얀을 보며 눈매를 찌푸렸다.

‘시얀도 정령왕을 소환할 수 없을 텐데.’

망가지기 직전이었던 정령계를 복구하느라 지금 네 정령왕은 정령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나도 정상이 아니고.’

자신도 홍염귀와 전투에서 입었던 부상을 완벽하게 지우지 못했다. 마스터라면 잡을 수 있지만, 저 급의 무인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버티는 수밖에 없나.’

리메르가 마음의 결정을 내리고 뒤에 있는 시얀과 레이란에게 눈동자를 돌렸다.

“모두 물러나. 여기는 내가 막을 테니까. 빨리 강가로….”

“어딜.”

시란이 발을 찍자, 그가 타고 왔던 회색 전선에서 남북맹의 무인들이 튀어나와 주변을 에워쌌다.

원로원 소속의 무인들인지 해상 시장에 있던 이들보다 무력 자체가 강맹했다.

“한 마리도 살려두지 마. 모조리 죽여라.”

그의 섬뜩한 외침에 남북맹의 무인들이 끈적한 살기를 드러내며 강물로 뛰어내렸다.

리메르가 나룻배를 향해 움직이는 남북맹 무인들을 보며 입술을 씹었다.

‘빌어먹을!’

평소라면 도리안과 시얀, 레이란 셋이서 충분히 막을 수 있지만, 지금 저들은 물에 빠진 엘프들을 보호하면서 싸워야 한다. 쉽게 이길 수 있는 싸움이 아니었다.

“시작은 너다.”

시란은 더는 말이 필요 없다는 듯 들어 올린 낚싯대를 내리쳐왔다.

그의 손목이 꺾임과 동시에 낚싯대가 급격하게 휘어지며 강대한 오러의 파동을 일으켰다.

‘우측!’

간신히 방향을 읽고, 우측을 향해 검막을 세웠다.

쩌어어어엉!

무시무시한 충격이 어깨를 파고든다. 분노한 시란은 힘을 아끼지 않고, 처음부터 전력을 모두 드러냈다.

찌지지직!

검막 덕분에 낚싯대 자체는 막았지만, 낚싯줄이 살아 있는 듯 움직이며 검을 쥐고 있는 왼팔을 노려왔다. 강환이 휘몰아치며 검막을 깎고 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귀찮은 영감이네!”

리메르가 어금니를 지그시 씹으며 발로 낚싯줄을 쳐내려고 했다.

하지만 낚싯줄에도 예리한 오러가 스며들어 있어서 오히려 발에 상처를 입을 뻔했다.

‘까다로워.’

낚싯대와 낚싯줄 그리고 낚싯바늘까지 따로 움직이고 있어서 세 사람을 상대하는 기분이었다.

“크아아아아!”

시란의 괴성과 함께 그의 낚싯대가 무시무시한 힘으로 짓쳐 들어 온다. 간신히 회복한 내상이 다시 도지며 지독한 통증이 찾아왔다.

“좀 살살 하지 그래?”

리메르는 내상을 입었다는 것을 드러내지 않고 여유로운 척 미소를 지었다.

“네놈은 제물이다. 라온 지그하르트에게 지옥을 맛보여줄 제물!”

시란은 거칠게 솟구치는 낚싯대의 표면에 지독한 분노를 담아냈다. 찌에 휘감긴 강환이 사위로 뻗어나가며 리메르만이 아니라, 뒤에 있는 엘프들까지 노렸다.

“흐읍!”

리메르가 허공에서 몸을 휘돌리며 아래로 기울인 검을 쳐올렸다. 거대한 바람의 기운이 원형으로 응집되며 시란의 강환을 막아섰다.

쩌어어어어어엉!

일단은 막아냈지만, 시란의 기운이 워낙에 강해서 오래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더 심한 내상을 입더라도 검계를 열어야 할 것 같았다.

“검계….”

리메르가 검계를 사용하기 위해서 상단전을 개방할 때였다.

물의 거인이 부수고 나왔던 선박의 구멍이 장대한 붉은빛을 토해냈다.

쿠와아아아아앙!

어마어마한 불길의 폭풍이 치솟으며 강 깊숙이 박혀 있던 선박이 반으로 쪼개진 채 터져나갔다.

선박을 모조리 태워버린 시뻘건 열기 속에서 불꽃보다 더 짙게 타오르는 눈동자가 번쩍였다.

“라온 지그하르트!”

시란이 리메르를 걷어차 버리고, 라온에게 달려들었다.

쩌어어어엉!

라온은 가볍게 제천검을 뻗어 시란이 내리친 낚싯대를 막아섰다.

“네놈의 얼굴을 수천. 아니, 수만 번 그렸다. 이 악귀 같은 놈!”

“틸러의 조부인가.”

라온은 시란을 보며 담담한 눈빛을 드러냈다.

“그는 죽어 마땅한 인간이었다.”

광기로 가득 찬 노인의 눈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틸러는 스스로를 드높이기 위해 청루족을 노예로 부리고, 그들의 삶을 지배했다. 영웅이 아니라 쓰레기일 뿐이었어.”

“닥쳐! 죽어야 할 놈은 네놈이다!”

시란은 분노를 그대로 드러내며 낚싯대를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강물이 폭격을 맞은 듯 사정없이 터져나갔다.

캬아아아앙!

그의 분노를 받아주던 라온이 강환을 일으켜 낚싯대를 쳐냈다.

“하긴 개새끼 밑에서는 개새끼만 나오는 법이지.”

“뭐?”

“그렇게 손주가 보고 싶다면 그 쓰레기가 있는 곳으로 보내주지.”

라온이 제천검을 들어 올린 채 고개를 까딱였다. 그의 붉은 눈동자가 노을이 비친 강물보다 진득한 빛을 띠었다.

“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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