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98화
라온이 나뭇잎을 잡듯이 손아귀에 가볍게 힘을 주었다.
“으아아아악!”
귀티나는 젊은 놈은 나름 무학을 익히고 있었지만, 어마어마한 근력 차이에 버둥거리지도 못하고 비명만 질렀다.
“이, 이런 미친놈이!”
“당장 놔드려!”
“죽고 싶어서 환장한 거냐!”
이 젊은 놈과 같은 자리에 앉아 있던 무인들이 달려와서 검을 뽑아 들었다.
사람을 한두 명 죽여본 게 아닌지, 살기 자체가 핏물처럼 끈적거렸다.
“다른 손님들이 식사 중이잖아.”
라온이 피식 웃으며 손에 들고 있던 젊은 놈을 어깨 뒤로 젖혔다.
“대화는 조용한 곳에서 해야지.”
손에 쥐고 있던 놈을 아무도 없는 우측 벽으로 내던졌다.
콰아아아앙!
건방을 떨던 놈은 등으로 벽을 박살 내며 땅바닥으로 꼬꾸라졌다.
“끄아아아아!”
기절하지는 않았지만, 고통이 심한지 바닥에서 등을 문대며 괴성을 질렀다.
“어어….”
“저, 저 미친….”
무인들은 이런 상황이 벌어질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한 듯 턱을 부르르 떨었다.
라온은 당황한 무인들을 놔두고 박살 난 벽을 넘어 다시 건방을 떨던 놈의 머리통을 움켜쥐었다.
“감히! 이분이 어떤 분이신 줄 알고!”
무인들 중 대장 격으로 보이는 중년인이 입술을 떨면서 다가왔다.
“누군데?”
라온이 정보가 빠져나가지 않도록 기막을 친 채 물었다.
“코마른 검가의 차남이신 마크렌 님이시다!”
중년인은 죽고 싶지 않다면 당장 손을 풀라며 검을 들이밀었다.
“코, 코마른 검가의 차남 마크렌?”
라온이 그 말을 들으며 입을 동그랗게 벌렸다.
“네놈도 무인이라면 코마른이 어떤 가문인지 알고 있겠지? 가족까지 죽고 싶지 않다면 당장 그분을 내려놔라!”
“크흐흐….”
타칭 코마른 가문의 차남 마크렌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이미 늦었어. 네놈만이 아니라, 이곳에 있는 년놈들. 그리고 네놈의 가족까지 모두 죽여버릴 것이다!”
그는 다 끝났다며 살기가 깃든 비릿한 미소를 그렸다.
“무섭네. 그런데 코마른은 어디에 붙어 있는 거지?”
라온이 바람 빠진 웃음을 흘리며 도리안을 바라보았다.
“뭐, 뭐?”
“이런 또라이 새끼가!”
비웃음을 그리던 마크렌과 중년인이 눈을 부릅떴다.
“대륙 중남부에 위치한 신흥 검술 명가에요.”
식당 주인에게 벽이 무너진 값을 치러주던 도리안이 고개를 까딱였다. 꽤 돈을 많이 챙겨주었는지 주인은 오히려 웃고 있었다.
“강해?”
“부대주님 혼자서 쓸어버릴 수 있을 걸요.”
“무, 무슨 개소리냐!”
마크렌이 말도 안 된다는 듯 악을 질렀다.
“이 건방진 것들을 당장 죽여!”
중년인의 외침에 검을 든 무인들이 라온에게 달려들었다.
치이이이잉!
라온은 의미 없다는 듯 등을 돌렸고, 도리안과 리메르, 레이란이 움직였다.
“귀찮으니까. 검 내려.”
“남의 식당에서 사람을 죽이고 싶지는 않거든요. 협조해주시죠.”
“죽여버릴 거야.”
세 사람은 검과 활로 무인들의 목을 겨눈 채 섬뜩한 살기를 드러냈다.
“뭐, 뭐야!”
“보이지도 않았어….”
단번에 실력 차이를 느낀 코마른 가문의 무인들은 손을 떨며 쥐고 있던 검을 내려놓았다.
“너, 너는 누구냐.”
마크렌 코마른이 입술을 덜덜 떨며 물었다.
“질문은 내가 한다.”
라온이 연한 웃음을 그리며 손아귀에 살짝 힘을 더했다.
“으아아아아아아악!”
그것만으로도 마크렌은 참지 못하겠다는 듯 팔을 쭉 내린 채 찢어지는 비명만 질렀다.
“경매보다 더 쳐준다는 게 어떤 의미지?”
“이, 일단 손부터….”
그는 제발 손에 힘을 풀어달라며 입술을 떨었다. 살짝 힘을 풀어서 말을 할 수 있게 해주었다.
“똑바로 말 안 하면 머리통 깨진다.”
“마, 말 그대로입니다. 엘프를 사겠다는 뜻이었습니다.”
“로브를 쓰고 있는데 어떻게 알아차렸지?”
“요즘 엘프들이 시장에 나오고 있어서 티, 티가 좀 났습니다.”
“시장에 나온다고?”
“아, 아시지 않습니까. 대수림이 불타고, 세이피아의 결계가 무너지면서 부상을 입은 엘프들을 경매 매물로… 아아아아악!”
경매 매물이라는 소리에 나도 모르게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마크렌이 죽겠다고 외치며 팔다리를 버둥거렸다.
“그러니까 부상을 입은 엘프들을 납치해서 경매에 올리고 있다는 거지?”
라온은 마크렌이 말했던 부분을 정리해서 되물었다.
“그, 그렇습니다. 엘프 노예는 굉장히 드문데, 그 일 이후로 경매에 나오고 있어서….”
마크렌은 지금 노예를 사러 가는 길이어서 시얀과 다른 엘프들도 노예인 줄 알았다고 말해주었다.
라온이 덜덜 떠는 마크렌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좋지 않네.’
예상이 어긋나기를 바랐지만, 최악의 방향으로 들어맞은 것 같았다.
“해상 시장의 위치는?”
“페, 페렌 강에 있습니다.”
“바다가 아니라 강?”
“레이블 강과 연결되어 있는 강인데, 폭이 굉장히 넓어서 바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는 공포에 질린 듯 묻지 않은 것까지 술술 대답해주었다.
‘레이블 강이라….’
레이블 강을 지배하는 세력은 남북맹이다. 아무래도 이들이 말하는 해상 시장은 남북맹과 관련이 있는 곳 같았다.
“지금 가면 그 경매에 참여할 수 있나?”
“그, 그렇습니다.”
“초대장은?”
“예?”
“초대장이 있을 거 아니야.”
이런 노예 경매는 어중이떠중이를 받지 않는다. 분명 특별한 이들만 입장할 수 있는 초대장이 있을 것이다.
“여, 여기….”
마크렌이 품에서 빛을 먹어치우는 듯한 검은 봉투를 꺼내주었다.
열어보니, 마크렌의 이름과 해상 시장에 초대한다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악마 같은 인간들!”
레이란이 참지 못하겠다는 듯 말아쥔 주먹으로 땅을 후려쳤다.
“라온 님.”
시얀이 다가와서 고개를 숙였다. 평소처럼 부끄러워하는 눈빛이 아니었다.
“지그하르트로 가는 길을 조금만 늦춰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녀의 연한 음성에서도 분노가 타오르고 있었다.
“당연히 가야지.”
리메르도 평소의 장난기를 지운 채 차디찬 살의를 드러냈다.
“도리안.”
라온이 세 사람을 보며 도리안에게 손짓했다.
“변장 도구 있지?”
“필수품이니까 있죠.”
도리안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배 주머니에서 큼지막한 상자 하나를 꺼내들었다.
“이들의 모습으로 변장해서 들어가면 의심받지 않을 겁니다.”
라온은 손에 들고 있는 초대장으로 마크렌과 코마른 가문의 무인들을 가리켰다.
“동족분들은 제가 구해올 테니, 시얀 님과 레이란 님은 밖에서 기다리시는 게….”
“아, 안 돼요!”
레이란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제발 함께 가게 해주세요!”
그녀는 부탁한다며 무릎을 꿇었다.
“저도 부탁드려요.”
시얀도 레이란의 옆에서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였다.
“변장을 해도 엘프들은 귀 때문에 금방 들키게 될 겁니다.”
“아, 그거라면 괜찮아요.”
도리안이 고개를 저으며 변장 도구 속에서 귀의 형태를 바꾸는 엘프용 변장 도구를 꺼내 들었다.
“이게 왜 있냐?”
“필수품이잖아요.”
도리안은 히죽 웃으며 손을 저었다.
-대체 저놈한테 필수품이 아닌 건 뭐냐?
‘나도 몰라….’
* * *
라온은 변장을 모두 마친 후 리메르, 도리안, 레이란, 시얀과 함께 페렌 강으로 향했다.
마크렌의 말대로 바다를 보는 듯 넓게 뻗은 강이 보였는데, 그 중심에 중형 선박 한 척이 떠올라 있었다.
‘저게 그 해상 시장인가.’
마크렌은 저 배 안에 해상 시장이 있다고 말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배였지만, 기감을 풀어서 자세히 관찰해 보니 마나 흐름이 조금 뒤틀려 있었다.
“가지.”
마크렌 코마른으로 변장한 상태였기에 거만하게 턱짓하고서 자갈밭 위에 나룻배를 기대놓은 뱃사공에게 다가갔다.
“세월을 건너고 싶네.”
뱃사공에게 초대장을 내밀며 암구호를 말하자, 그의 노회한 눈빛 속에서 푸른 한광이 흘러나왔다.
‘고수.’
마스터 하급 수준의 무력이 느껴진다. 이 뱃사공이 일차적으로 검문하는 역할을 맡은 것 같았다.
뱃사공이 눈가에 주름을 만들며 고개를 숙였다.
“멀리멀리 안내해드립죠.”
그가 배에 타라는 듯 손을 들어 올렸다.
라온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낡은 나룻배에 올라탔다. 가라앉을 듯한 외관과 다르게 배는 부드럽게 나아가 강물의 중심에 떠 있는 선박에 닿았다.
선박에서 올라오라는 듯 나룻배로 밧줄 사다리를 내려주었다.
“제가 먼저 올라가겠습니다.”
도리안이 사다리를 잡으려고 할 때 그의 손을 치며 고개를 저었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마.”
제멋대로인 마크렌을 연기하기 위해서 도리안을 밀어내고 가장 먼저 선박으로 올라갔다.
선박 위는 평범했다. 몇몇 선원들이 갑판을 청소하고 있었는데, 그중에서 웃통을 벗은 곰 같은 체구의 중년인이 턱짓으로 선원들이 머무는 선실을 가리켰다.
“흥.”
라온이 콧방귀를 뀌고서 중년인이 가리킨 선실의 문을 열었다.
내부에는 좌우로 여러 개의 문이 있었는데, 전부 불이 꺼져 있었고, 중앙의 복도에만 촛불처럼 은은한 불빛 비쳤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서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좌측 방문에서 정장을 입은 남성이 걸어 나와 고개를 숙여왔다.
“마크렌 코마른 님. 해상 시장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서 안으로 들어오라는 듯 손을 들어 올렸다. 방은 평범한 선실처럼 보였지만, 중앙에 지하로 향하는 계단이 있었다.
“너는 누구지?”
“오늘 마크렌 님을 안내할 해리라고 합니다.”
정장의 남성은 본인을 해리라고 소개하며 다시 허리를 굽혔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해리가 따라오라는 듯 등을 돌리고서 계단을 내려갔다.
‘고수들이 숨어 있군.’
계단을 중심으로 상하좌우 모든 곳에 무인들이 숨어 있었다.
꽤나 실력이 있는 이들이라, 계단을 내려가며 위치를 파악했다. 건물 1층 정도의 계단을 내려온 후 푸른 커튼을 걷자 신세계가 열렸다.
금빛 샹들리에가 뿜어내는 휘황찬란한 조명 아래에서 고급스러운 정장과 드레스를 사람들이 도박을 즐기고 있었다.
포커, 룰렛처럼 자주 보는 도박도 있었고, 생전 처음 보는 기괴한 도박들도 자리를 잡고 있었다.
“손님들을 위한 작은 유흥입니다.”
해리가 한 게임 어떠냐는 듯 손을 들어 올렸다.
“관심 없다.”
라온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한 길만 바라보시는군요.”
해리가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손님께서 원하시는 건 이 아래에 있습니다.”
그는 다시 따라오라는 듯 차분한 걸음으로 도박장을 지나갔다.
혹시나 뒤를 돌아보았는데, 다행히 리메르는 도박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진지해야 할 때는 누구보다 진중한 사람다웠다.
해리는 까뭇한 빛을 띈 문을 넘어서 다시 계단을 내려갔다. 도박장에 갈 때보다 더 깊었다. 대략 4층 이상의 계단을 내려간 후에야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곳입니다.”
해리가 붉은 가죽으로 만들어진 듯한 고풍스러운 문을 열자, 바닥에 은은한 조명이 깔린 어둑한 방이 드러났다.
계단형 강단처럼 생긴 곳이었는데, 굉장히 넓고 깊었다. 마탑에서나 볼 수 있을 규모의 강의실 같았다.
‘추잡한 놈들이 많기도 하네.’
경매가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이미 대부분의 자리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이쪽입니다.”
해리는 253번 자리로 안내를 해주었다. 등받이가 검은 가죽으로 만들어진 고급 의자에 앉자, 시녀복 차림의 여성이 다가와서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경매는 30분 뒤에 시작하고, 손님이 원하시는 물품은 2시간 뒤부터 나올 겁니다.”
그는 이미 마크렌이 무엇을 원하는 지 아는 듯 짙은 미소를 그렸다.
“알겠다.”
“그럼 즐거운 시간 되시길.”
라온이 귀찮다는 듯 손을 휘젓자, 해리가 조용히 물러났다.
“조금만 기다리시면 될 겁니다.”
누구도 들을 수 없게 연한 기막을 친 후 레이란과 시얀을 바라보았다.
“후우….”
레이란이 손을 부들부들 떨며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죄송합니다. 저는 못 참을 거 같아요.”
“네?”
“저 안쪽에서 동족들의 기척이 느껴져요.”
그녀는 이미 엘프들의 존재를 느낀 듯 입술을 깨물었다.
“…….”
시얀도 그걸 느끼고 무릎 위에 올려둔 주먹을 바들바들 떨었다.
‘음….”
라온이 미간을 찌푸렸다.
‘일부러 말을 안 했는데….’
시얀과 레이란이 흥분하지 않도록 일부러 엘프의 기척에 대해선 말해주지 않았는데, 둘 다 스스로 알아차린 것 같았다.
“흥분하지 말고 일단 기다려봐.”
리메르는 뒷목을 매만지며 눈을 내리감았다. 평소처럼 여유를 드러내지만, 그는 이곳에 있는 누구보다도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라온이 숨을 고르며 경매의 시작을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단상에 불이 켜지고, 검은 턱시도를 차려입은 깔끔한 인상의 미남이 나왔다.
“해상 경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저는 오늘 사회를 맡은 에렌이라고 합니다.”
그가 가슴에 손을 얹은 채 정중하게 허리를 굽혔다. 경매에 참여한 이들은 아무 말도 없이 사회자를 지켜보기만 했다.
“오늘 손님들은 과묵하신 분들이 많군요.”
사회자가 시원한 미소를 짓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바로 시작하는 게 좋겠네요.”
그가 경쾌하게 손뼉을 치자, 우측 커튼 뒤에서 붉은 드레스를 입은 여성이 작은 항아리 하나를 가지고 나왔다.
“첫 시작부터 좋은 물건이 나왔네요.”
사회자가 항아리를 받아서 중앙의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이 항아리의 이름은 시오넨으로 고대의 아티팩트입니다. 항아리 안에 과일이나, 음식을 넣으면 극상의 단맛을 느끼게 해줍니다. 특별하지만, 그것뿐이라면 이 경매에 나올 리가 없지요.”
그가 항아리를 조심스럽게 내려놓고서 손가락을 세웠다.
“시오넨 항아리의 진짜 사용법은 영약의 강화입니다. 이 항아리로 영약을 만든다면 영약의 효과가 1할 이상 올라간다고 합니다. 요즘처럼 영약이 드문 시국에는 꼭 필요한 물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회자는 설명을 모두 마치고서 항아리 뒤로 물러섰다.
“그럼 금화 10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오! 바로 금화 100개! 222번 신사분이 금화 100개를 부르셨습니다!”
항아리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던 사람들은 영약을 강화시킨다는 말에 빠르게 손을 들어 올렸다.
-사거라!
라스가 벌떡 일어나서 다른 경매꾼들처럼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저걸 왜 사. 너 영약 먹을 것도 아닌….’
-단맛이 강해진다지 않느냐!
녀석이 무슨 멍청한 소리를 하냐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저 안에 구슬 아이스크림을 넣는다고 생각해 보거라! 그 얼마나 꿀맛일지 상상해 보라고!
‘…….’
잠시나마 큰 착각을 하고 있었다.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제발 좀 참아줘.’
* * *
라스와 가벼운 잡담을 나누며 경매를 지켜보고 있다 보니, 어느새 훌쩍 시간이 지났다.
타아악!
단상의 조명 중 절반이 훅 꺼진다. 남은 조명도 더 어둑해지며 기묘한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지금까지 남아계신 VIP분들 정말 감사합니다.”
사회자가 목소리 톤을 조금 높이며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부터 저희 경매장이 독자적으로 운영하는 특별 경매를 시작하겠습니다.”
특별 경매라는 말을 듣자마자, 기다리던 시간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오늘 오신 분들은 모두 행운을 잡으셨습니다. 정말 특별하니까요.”
사회자가 가볍게 두 번의 박수를 쳤다.
챠랑.
쇠사슬이 흔들리는 소리와 함께 우측 커튼 뒤에서 노란 드레스를 입은 여성이 걸어나왔다. 목에는 옷과 어울리지 않는 쇠사슬이 매달려 있었다.
두꺼운 면사포를 쓰고 있어서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실루엣만으로 굉장한 미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곳에 계신 분들이라면 모두 알고 계실 겁니다. 최근 세이피아에 큰불이 난 것을. 저희는 ‘우연히’ 그곳에서 부상을 입은 이들을 구해낼 수 있었습니다.”
그 말과 함께 사회자가 면사포를 쓴 여성의 어깨를 만졌다. 여성은 겁에 질린 듯 어깨를 부들부들 떨었다.
“저희는 다친 이들을 치료해주고, 이렇게 좋은 주인을 만날 수 있는 기회까지 주었죠. 이게 바로 베푸는 사회가 아닐까 합니다.”
사회자가 개소리를 주절거리며 손가락을 흔들었다.
“자, 소개하겠습니다. 우렌 가지 부족의 카시아입니다!”
그 말과 함께 사회자가 여성의 면사포를 벗겼다. 쫑긋 솟은 귀와 투명한 피부 그리고 살랑거리는 머리카락까지. 사람을 홀릴 듯한 엘프의 얼굴이 조명 아래에 드러났다.
“오오오!”
“진짜 엘프라니!”
“절색이로다….”
“기다린 보람이 있어!”
흥분한 사람들의 열기가 경매장 전체를 뒤덮었다.
“그녀는….”
“됐고! 빨리 시작하게!”
“아하하! 급하시네요. 좋습니다. 그러면 이번 경매는 금화 한 닢부터 시작하죠.”
“1,000개!”
손을 드는 게 아니라, 아예 금화 자체를 외치는 사람조차 나타났다.
“으음….”
“빌어먹을….”
시얀과 레이란은 카시아라는 엘프를 알고 있는 듯 경련하듯 어깨를 떨었다.
두 사람의 입술 사이로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정말 사력을 다해서 참고 있는 것 같았다.
“다른 이들이 얼마나 있는지 모르니까.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라온이 기막을 친 채로 두 사람에게 손을 저었다. 둘은 알겠다는 듯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통이 큰 신사분이시네요! 카시아는 210번 손님께 낙찰되었습니다.”
그 사이에 이미 카시아의 경매가 끝났다. 그녀는 천문학적인 금액으로 배가 두툼히 솟구친 노인에게 가게 되었다.
“실망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아니, 다 알고 계시겠죠. 아직 시작도 안 했으니까.”
사회자가 피식 웃으며 다시 박수를 쳤다. 두 번의 손뼉이 울리기도 전에 카시아보다 조금 체구가 작은 여성이 똑같이 면사포로 얼굴을 가린 채 나왔다.
“슬프게도 이번 화마에 부모를 잃은 아이랍니다. 다정하게 대해줄 새로운 부모를 찾고 있다고 하네요.”
그가 씩 웃으며 아이에게 다가가 얼굴을 가리고 있던 면사포를 벗겼다. 금색 단발 머리카락과 조금 올라간 눈매의 여성 엘프가 두려운 듯 입술을 떨었다.
“코튼 가지 부족의 헤이린이 주인을 찾….”
“헤이린!”
레이란이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그녀와 같은 코튼 부족이라고 할 때부터 이런 결과를 예상했다.
“어, 언니….”
헤이린이 레이란을 보며 퍼렇게 질린 입술을 떨었다.
“이 개자식들!”
레이란은 활을 뽑아든 채 지독할 정도의 살기를 뿜어냈다.
“이거 귀한 손님들이 오셨네요.”
사회자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은 채 방긋 웃었다.
“알아서 경매품이 걸어오다니, 이 얼마나 아름답고 다정한 세상인지.”
그가 손가락을 튕기자, 경매장 이곳저곳에 숨어 있던 무인들이 튀어나와 이쪽을 둘러쌌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만약 별관의 시녀들이 저런 꼴이 되었다면 나도 참기 힘들 었을 것이다.
“엘프분들? 여기는 세이피아가 아니랍니다. 당신들을 구해줄 수호자는 어디에도 없어요.”
사회자는 씩 웃으며 고개를 틀었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닌 것 같았다.
“모든 강은 남북맹의 것. 강에 들어온 이상 마음대로 나갈 수 없습니다.”
“후….”
라온이 짧게 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이 강의 주인이 남북맹이라고? 조금만 위로 올라가면 지그하르트의 영역인데?”
“아무래도 당신은 엘프가 아니라, 지그하르트 소속인가 보군요.”
사회자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의 말이 맞습니다. 조금만 위로 가면 지그하르트의 영역이지요. 하지만 그곳은 땅이고, 여기는 강입니다. 이 강에 꽂힌 깃발은 오직 남북맹의….”
“아니. 지금부터 이 강은 지그하르트의 것이다.”
라온이 얼굴을 가리고 있던 후드를 벗었다. 하늘거리며 떨어지는 금발과 어둠을 지우는 붉은 눈동자가 서슬 퍼런빛으로 번뜩였다.
“내가 있는 곳이 곧 지그하르트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