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97화
라온은 과육 자체가 마나로 녹아내리는 듯한 열매의 기운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이게 세계수의 열매인가.’
강물. 아니, 대해의 파도처럼 거대하면서 도도한 흐름이야.
만화공이나, 글래시아로 마나회로의 길을 열어줄 필요도 없었다. 열매의 기운은 살아 숨 쉬는 것처럼 스스로 움직였다.
열매의 기운이 가장 먼저 스며든 곳은 홍염귀가 남겼던 화마의 상처였다. 놈의 불꽃에 당했던 외상과 내상이 물로 씻어내린 것처럼 깨끗하게 지워졌다.
‘이런 기운이라니….’
어처구니가 없어서 무아를 깨고 움직일 뻔했다. 이 짧은 순간에 내상과 외상을 모두 회복시킬 줄은 몰랐다.
영약이 아니라, 신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걱정할 필요가 없었군.’
세계수의 열매에서 진한 나딘빵 맛이 나서 상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리메르의 말대로 원래부터 고무 맛이었던 것 같았다.
고오오오오!
상처를 모두 치유한 세계수 열매의 기운은 지금부터가 진짜라는 듯 거대한 흐름을 일으키며 전신의 마나회로로 퍼져나갔다.
‘사대속성 중 그 무엇도 아니야.’
이건 순수한 마나 그 자체.
아니, 순수하다라는 단어로도 열매 내부에 깃들어 있던 기운을 설명할 수가 없었다. 자연 그 자체를 옮겨온 듯한 청량함. 자그마한 이물질도 없는 마나 그 자체였다.
열매의 기운은 하단전에 스며들어 만화공의 열기와 글래시아의 냉기로 화한 후 복부의 마나회로를 타고 올라 중단전의 규모를 확장시켰다.
무겁게 내려앉은 중단전이 육체와 정신의 균형을 지켜주는 게 느껴졌다.
다만 열매의 기운은 아직도 힘이 남은 듯 상단전까지 치솟아 심상의 세계에 청아한 활력을 전해주었다.
오러를 키우는 하단전, 정신을 지탱하는 상단전 그리고 그 중심을 유지하는 중단전 모두가 성장했다는 게 느껴졌다.
라온의 정신은 점차 가늘어지는 열매의 기운과 달리 더 깊은 무아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 * *
라온은 무아에서 깨어났음에도 눈을 뜨지 않았다. 낮은 호흡을 하며 자신의 변화를 느꼈다.
‘단전만 성장한 게 아니라, 마나회로도 커졌군.’
마나회로의 둘레가 늘어난 덕분에 앞으로는 더 많은 기운을 더 빠르게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건 큰 수확이야.’
초고수들의 싸움에서는 찰나의 순간에 승패가 결정되기에 조금이라도 빠르게 오러를 움직일 수 있다는 건 무력 자체가 성장했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거기다 주변의 기척이 자연스럽게 잡히고 있어.’
기감을 펼치지도 않았는데, 세계수 주변에 있는 엘프들의 기척이 느껴진다. 그저 근처에 있다는 것만 아는 게 아니라, 무얼 하고 있는지까지 감지될 정도였다.
본래 기척을 느끼기 위해서는 오러를 주변으로 퍼뜨려야 하는데, 그런 개념 자체가 필요 없어진 것 같았다. 마나를 운용한다면 이전보다 더 먼 거리까지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라온은 스스로가 성장했다는 만족감을 느끼며 천천히 눈을 떴다.
“후우….”
짧게 숨을 고르자, 안색이 조금 창백해진 리메르가 눈앞으로 다가왔다.
“무아지경을 밥 먹듯이 들어가는 놈이 시간을 왜 이렇게 많이 잡아먹는 거야!”
리메르가 귀찮다는 듯 귀를 후볐다.
“제가 얼마 만에 깨어난 거죠?”
라온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연공을 시작할 때와 마찬가지로 해가 중천에 떠 있어서 얼마나 걸렸는지 파악이 되질 않았다.
“사흘.”
리메르가 손가락 세 개를 들어 올렸다.
“잠 안 자고 버티느라 죽는 줄 알았다고!”
그는 적당히 좀 하라며 팔을 휘저었다.
“삼일….”
라온이 헛바람을 흘렸다.
‘그럼 저 수준으로 3일 동안이나 지켜주신 건가?’
리메르와 스테린, 시얀, 대장로의 경계는 철통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빽빽했다.
3일 동안 저 태세를 유지했다면 이렇게 힘들어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사과할 필요 없다.”
허리를 숙이려고 할 때 스테린이 고개를 저으며 다가왔다.
“우리가 먼저 제안했는데, 네가 왜 사과를 하는 것이냐.”
스테린은 미간을 찌푸린 채 리메르의 이마를 후려쳤다.
“케헥!”
리메르가 이마를 감싸 쥔 채 뒤로 물러섰다.
“왜 때려요!”
“주둥이 안 친 걸 다행으로 여겨.”
“어휴, 여기서도 맞고, 지그하르트에서도 맞고. 내 팔자야….”
그는 짜증 난다며 팔자걸음으로 물러섰다.
“제대로 흡수한 모양이군.”
스테린은 세계수 열매의 기운을 제대로 흡수한 게 대견하다는 듯 연한 웃음을 그렸다.
“확실히 달라졌다는 게 느껴지는군요.”
대장로가 라온을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뜩이나 순수했던 마나가 더 깨끗해졌군. 이젠 하이엘프들도 상대가 안 되겠어.”
그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헛바람을 흘렸다.
“라, 라온 님.”
시얀이 물방울로 만든 듯한 뱁새를 어깨에 태운 채 고개를 숙였다.
“괜찮으신가요?”
“저는 괜찮은데, 시얀 님이 힘들어 보이네요.”
그녀의 안색은 리메르 이상으로 창백했고, 이마 전체가 식은땀으로 젖어 있어서 꼭 병에 걸린 사람 같았다.
“아, 저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아무렇지도 않기는.”
리메르가 시얀을 보며 눈을 흘겼다.
“얘 최상급 정령을 3일 동안 소환해놨어. 할배도 못 하는 미친 짓을 했다고.”
그는 정신이 나갔다며 관자놀이에서 손가락을 빙글 돌렸다.
“저, 전 정말 괜찮아요.”
시얀은 말과 달리 한계인 듯 곧바로 최상급 정령을 돌려보냈다. 그제야 그녀의 안색이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했다.
“음….”
라온이 짧게 한숨을 내쉬고서 네 명의 엘프에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3일 동안 잠도 안 자고 경계를 서는 건 친인이라고 해도 해주기 어려운 일이다. 진심을 다 해서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그런 인사는 필요 없다고 하지 않았나.”
대장로가 고개를 저었다.
“그래. 너는 예의를 너무 차려.”
리메르가 라온을 보며 콧잔등을 찌푸렸다.
“내가 너였으면 세계수의 반을 베어갔을 텐데.”
“세, 세계수를 왜 베어가요.”
“네가 통째로 지켰잖아. 세계수 지분의 반 정도는 네 거라고 해도 되지 않나?”
“아….”
너무 어이가 없어서 입을 떡 벌렸다.
“그러니까 네놈이 그 꼴인 것이다.”
스테린이 리메르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라, 라온 님. 저도 비슷해요. 세계수는 라온 님 거나 다름없죠!”
시얀이 두 주먹을 움켜쥔 채 고개를 끄덕였다. 남매는 닮는다더니, 진짜였다.
‘그래도 나쁜 기분은 아니야.’
오히려 좋다고 해야 하나.
다른 종족임임도 진심으로 서로를 위할 정도의 연을 맺었다는 것에 무력이 성장한 것 이상의 만족감이 느껴졌다.
이제 나도 정말 인간이 되어가는 것 같았다.
-조, 좋다고?
뚝뚝 끊어질 듯한 음성과 함께 라스가 튀어나왔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볼이 홀쭉하고 창백했다.
-본왕을 고무에 파묻어 놓고 네놈은 좋다고?
‘고무에 파묻은 적은 없는데….’
-세계수의 열매! 그 지독한 맛이 지워지질 않느니라!
라스가 비명 같은 소리를 질렀다.
-본왕이 혼자서 고무 맛을 지우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느냐! 코로 숨을 쉬어도 고무 맛이 나고, 입으로 숨을 쉬어도 고무 맛이 나느니라! 고무가! 고무가 사라지질 않아! 꿈에서도 고무가 나왔느니라!
녀석은 고무에 묻혀서 죽을 뻔했다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다른 음식이라도 먹었으면 모르겠는데, 아직도 고무 맛이. 크흑….
‘어우….’
손등으로 눈가를 쓸어내리는 라스를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도, 돌아가자마자 밥 먹을 게. 만난 걸로.’
평소라면 무시했겠지만, 정말 힘들어 보여서 바로 밥을 먹자는 말이 나왔다.
-훌쩍.
라스는 밥을 먹자는 말에 경련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메뉴는 무엇이냐?
‘…….’
여기서 메뉴를 물어볼 줄은 몰랐다. 뭐라 말이 나오질 않았다.
“이제 다 끝났으니, 돌아가야겠네.”
리메르가 세계수를 가볍게 쓸어내리며 연한 미소를 그렸다.
“그래야죠.”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본래의 목적과는 멀어지기는 했지만, 할 일은 모두 끝냈으니 지그하르트로 돌아갈 때가 되었다.
“저 멍청이에게 들었겠지만, 너희가 지그하르트로 돌아갈 때 데리고 갈 사람이 있다.”
스테린이 우측으로 물러나며 손을 들어 올렸다.
“아, 사절 말씀이시군요.”
“그래. 이 녀석이다.”
그의 손이 졸린 듯 흐느적거리는 시얀의 등을 밀었다.
“꺅!”
시얀이 깜짝 놀라서 토끼처럼 펄쩍 뛰어올랐다.
“원래라면 리메르 녀석이 망가진 것을 따지기 위해 지그하르트로 가려 했지만, 네 덕분에 감사 인사를 하는 게 맞게 되었어. 본래라면 내가 가야 하지만, 아직 결계가 정리되지 않았으니, 시얀을 보내려고 한다.”
스테린은 그 말을 하며 시얀을 한 발 더 앞으로 밀었다.
“감사 인사 외에 외교적인 논의도 있을 테니, 잘 도와주었으면 하네.”
그는 잘만 되면 세이피아와 지그하르트가 임시적인 동맹을 이룰 수도 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스테린의 말을 듣고서 시얀을 바라보았다.
“으….”
그녀는 여전히 얇은 금발로 얼굴을 가린 채 어깨를 떨었다.
‘저렇게 보여도 막상 닥치면 잘하시겠지.’
시얀의 진짜 모습을 보았기에 딱히 걱정되진 않았다.
라온은 걱정이 어려 있는 스테린의 눈을 보며 옅게 웃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래. 부탁하겠네.”
스테린과 손을 맞잡자 세계수가 지그하르트와 세이피아의 미래를 축복하듯 가지를 펼쳤다.
라온은 세계수를 올려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저 가지를 보니, 세계수가 고무나무인 이유를 알겠네.’
세계수가 제멋대로 가지를 좁혔다가 펴는 게 신기했는데, 다 고무나무여서 그랬던 것 같았다.
-고, 고무! 고무가 어디에 있느냐!
라스는 고무 소리에 발작이 일어난 듯 전신을 떨었다.
“뒷일은 나중에 생각하고 일단 밥부터 먹자. 배고파서 죽겠어.”
리메르가 빨리 내려가자며 턱짓을 했다.
“3일 동안 굶었으니까. 속이 놀라지 않도록 나딘빵 먹을래?”
그는 다른 엘프들에게 준비를 부탁했다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나, 나딘… 켁….
라스는 나딘빵을 외치다가 거품을 문 채 기절해버렸다. 자칭 분노의 군주님께 트라우마가 생긴 것 같았다.
라온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평범하게 먹을게요….”
* * *
이틀 후.
라온은 세이피아를 떠날 준비를 마치고 숙소를 나섰다.
-크으….
라스가 푸른 하늘을 향해 두 주먹을 들어 올렸다.
-드디어 떠난다! 하루종일 고무 향만 나는 이 지옥을 벗어날 수 있게 되었느니라!
녀석은 앞으로 세이피아에는 발도 디디지 않겠다며 고개를 흔들었다.
‘며칠 전에는 태워버리겠다며.’
-태우거나 얼릴 가치도 없느니라!
라스는 지금까지 들른 곳 중 세이피아가 최악이었다며 이를 갈았다.
‘난 괜찮았는데.’
홍염귀와 싸우며 실전 경험도 쌓았고, 세계수의 열매를 먹어서 무력을 키웠으며, 세이피아의 엘프들과 좋은 관계까지 맺었다.
이득뿐인 시간이었기에 라스와 달리 이곳이 고향처럼 좋기만 했다.
‘음식도 괜찮았잖아.’
-이곳의 음식이 괜찮은 건 네놈의 혓바닥이 고장 났기 때문이니라! 온통 고무뿐이잖느냐!
라스는 아직도 혀에서 고무 맛이 난다며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뭐, 돌아가면 네가 먹고 싶다는 음식들 다 먹을 수 있을 거야.’
-그러니까 빨리 가자고!
‘그럼 돌아가는 시간을 아끼기 위해서 가는 길에 나딘빵 어때?’
-끄흡!
녀석은 나딘빵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석고상이라도 된 것처럼 하얗게 굳어버렸다.
-빠, 빨리 가려면 나딘빵을. 하지만 나딘빵은 고무 맛. 그래도 빨리 가서 혀에 남은 맛을 지우려면 나딘빵을… 흐어어!
라스는 눈동자가 반쯤 돌아간 채로 나딘빵을 계속 중얼거렸다. 녀석을 놀리면서 걷다 보니, 어느새 세이피아의 입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음?”
라온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이렇게 많아.’
적당히 아는 사람들만 배웅을 해주리라 생각했는데, 세이피아의 모둔 엘프들이 모여있는 듯 입구가 발 디딜 틈도 없이 꽉 들어차 있었다.
“이제야 왔군!”
에리안이 이쪽을 보며 시원하게 손을 흔들었다. 누가 본다면 죽마고우라고 생각될 정도였다.
다만 신의가 있는 사람이라 실제로 친구가 되어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주인공은 늦는다 이거냐?”
리메르가 라온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대주님도 지금 오셨잖아요.”
유아가 리메르를 보며 눈을 끔벅였다.
“유아야, 그런 이야기는 안 해도 되는 거야.”
리메르는 유아의 머리를 조금 강하게 쓰다듬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서오세요.”
도리안이 배 주머니에서 과자를 꺼내 씹으며 히죽 웃었다.
“준비는 다 끝났지?”
“저희는 끝났는데….”
그가 말끝을 흐리며 우측을 바라보았다.
“저희도 끝났습니다.”
레이란이 시얀과 그녀를 호위할 가디언 다섯을 가리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안녕하세요.”
시얀은 로브로 얼굴을 가린 채 고개를 숙였다. 로브 속에서 쫑긋 솟은 귀가 가늘게 떨리는 듯 보였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저도 꼭 성공시킬게요!”
“성공? 아, 분명하실 수 있을 겁니다.”
세이피아와 지그하르트의 외교 협상을 성공시키겠다는 뜻 같아서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네. 꼭.”
시얀은 무조건 해내겠다며 작은 주먹을 들어 올렸다.
“레이란 님.”
라온이 시얀의 옆에 바짝 붙어 있는 레이란을 불렀다.
“혹시 부탁드린 건?”
“준비했습니다.”
그녀는 걱정하지 말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라온이 레이란에게 인사를 할 때 엘프들 사이에서 스테린이 걸어 나왔다.
“다 모인 모양이군.”
스테린은 가장 먼저 리메르의 앞으로 나가가서 눈매를 찡그렸다.
“너는 정신을 좀 차리도록.”
“오늘은 낮술 한 잔밖에 안 했는데요?”
“그게 문제야!”
스테린은 리메르의 머리를 후려치고서 옆으로 걸어갔다.
“시얀.”
“네….”
“너는 세이피아의 대표하여 지그하르트로 가는 것이다. 네 말 하나하나에 어느 정도의 무게가 담겼는지 항상 생각하거라.”
“걱정하지 마세요!”
시얀은 라온에게 말을 할 때와 달리 자신에 찬 음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란. 부탁하마.”
“목숨을 걸고 시얀 님을 보필하겠습니다.”
레이란은 시얀과 반대로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스테린은 만족스럽다는 듯 턱짓을 하고서 유아의 앞에 섰다.
“노래를 배우는 건 즐거웠느냐.”
“즐거웠어요! 활로 음악을 연주하는 방법도 재밌었구요!”
“언제라도 또 와도 된다.”
“네!”
그는 활기차게 대답한 유아의 머리를 쓰다듬고서 도리안을 바라보았다.
“자네가 말했던 세피아 상회와의 거래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네. 그쪽에서 사람이 오면 그때 제대로 된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네.”
“가, 감사합니다!”
도리안이 스테린에게 고개를 숙였다. 말을 들어보니, 그는 상회의 후계자로서 이 짧은 시간 동안 세이피아와의 거래를 튼 것 같았다. 놀고먹는 줄만 알았는데, 영업은 제대로 뛰고 있는 모양이다.
“세이피아는 자네의 도움을 잊지 않을 걸세.”
스테린은 도리안을 지나쳐 마지막으로 라온과 마주섰다.
“혹여나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라도 말하게. 나를 포함한 모두가 달려 가주지.”
“감사합니다.”
“다만 우리가 나서는 이유는 지그하르트가 아니라, 라온이네.”
“예?”
“오직 자네만을 돕기 위해서 세이피아가 움직인다는 거야.”
그는 그 말이 진심이라는 듯 눈빛을 가라앉혔다. 뒤에 있던 대장로와 장로, 에리안을 비롯한 엘프들도 같은 눈빛이 되었다.
“엘프라는 종족은 은혜는 2배로 원수는 10배로 갚지. 꼭 연락하도록 하게나.”
스테린은 어깨를 부드럽게 두드려주고서 뒤로 물러섰다.
라온은 스테린의 진심을 느꼈기에 말 없이 허리를 굽혔다.
“그럼 가죠.”
세이피아를 떠나기 위해서 등을 돌리려고 할 때였다.
“은인들의 여정에 무운을!”
에리안의 낭랑한 목소리와 함께 이곳에 모여 있던 엘프들이 왼손으로 오른쪽 어깨를 잡으며 엘프들의 예를 취했다.
“꼭 다시 오겠습니다.”
라온은 엘프들의 인사에 검례로 화답을 하며 웃었다.
-본왕은 안 가!
하지만 라스는 싫단다.
* * *
라온은 5일 만에 사람의 마을에 들어섰다.
엘프들. 특히 시얀이 지닌 신비로운 분위기만으로 눈에 띄기 때문에 지그하르트에 도착할 때까지 노숙하려 했지만, 리메르가 하도 땡깡을 부려서 어쩔 수 없이 마을의 식당으로 들어갔다.
“거봐. 인간의 문명이 얼마나 좋냐.”
리메르는 식당의 의자에 앉으며 헤죽였다.
“이제 풀밭에서 풀을 익혀 먹는 건 싫다고! 고기와 침대가 좋아!”
저게 엘프의 입에서 나올 소리인가 싶었지만, 귀찮아서 따지지 않았다.
리메르의 말을 무시하며 주점을 살폈다.
로브를 입고 다니는 사람이 흔해서 대부분은 큰 관심을 주지 않았지만, 눈빛을 빛내는 사람들이 몇몇 있었다.
리메르까지 로브를 쓰고 있음에도 엘프라는 것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
‘뭐지?’
그들의 시선은 엘프 중에서도 시얀과 레이란에게 고정되어 있었는데, 혀를 날름거리는 모습이 결코 좋게 보이질 않았다.
모른 척 감정을 감추고 메뉴를 고를 때 얼굴과 옷에서 귀티가 좔좔 흐르는 젊은 남성이 다가왔다.
“당신이 주인인가?”
“뭐?”
“해상 시장으로 가는 거지?”
젊은 남성은 시얀을 가리키며 입맛을 다셨다.
“꽤 곱상해 보이는데, 시장 말고 내게 넘겨. 경매보다 더 쳐주지.”
그는 시얀을 노예라고 생각한 듯 손가락을 까딱였다.
“지금 뭐 하는….”
“잠깐.”
분노하여 일어서려 하는 레이란을 막으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시장? 주인?’
단순히 엘프를 희롱하려는 게 아니다. 저놈은 엘프를 노예로 보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러고 보니….’
스테린과 에리안은 이번 습격에서 시체를 찾지 못한 엘프들도 상당히 많다고 했었다. 아무래도 그 엘프들이 노예 시장에 넘어간 걸지도 모르겠다.
라온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빙긋 웃었다.
“얼마 줄 건데?”
“얼마를 원… 커헉!”
남자의 얼굴을 손아귀로 움켜쥔 채 허공으로 들어 올렸다.
“뭐, 뭐….”
“잠시 대화 좀 하자.”
-이게 인간들의 대화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