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596화 (595/653)

제596화

세계수의 광활한 가지 아래.

엘프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잡담을 나누거나, 달달한 향을 풍기는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음….”

라온은 엘프들의 작은 연회를 보며 뒷목을 매만졌다.

‘분위기가 밝네.’

죽은 엘프들을 위로하기 위한 연회를 연다고 들어서 참여했는데, 엘프들은 과일주를 마시며 은은한 웃음을 그리고 있었다.

장례식을 생각하고 왔기에 이 가벼운 공기가 조금 당황스러웠다.

-쓸데없는 곳에 신경 쓰지 마라!

라스가 어깨에 내려앉으며 빠르게 눈동자를 굴렸다.

-음식이 식기 전에 해치우는 게 우선이니라!

녀석은 빨리 밥을 먹자며 음식들이 놓여있는 테이블을 가리켰다.

‘좀 기다려.’

-대체 네놈은 왜 이리 식욕이 없는 것이냐! 많이 먹어야 키가 쑥쑥 크지!

‘네가 우리 엄마냐….’

라온이 라스의 투정을 들으며 고개를 저었다.

-본왕이 엄마 대신 널 챙겨주고 있지 않느냐!

‘그래. 그래.’

이번 일에 라스도 도움을 주었기에 잘 구워진 파이 하나를 입 안에 넣었다.

조금 딱딱하지만 고소한 빵과 과육이 가득 찬 산딸기가 조화롭게 어울리며 입안을 가득 채웠다.

재료가 워낙에 좋아서인지 고급스러우면서도 정겨운 맛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크으으으! 달달하느니라!

라스가 주먹을 꼭 말아쥔 채 탄성을 흘렸다.

-이거지! 이 맛에 사는 것이니라!

녀석은 정말 오랜만에 행복에 겨운 표정으로 어깨로 춤을 췄다.

-이번에는 저거! 과일에 꿀을 바른 듯한 저 음식이 땡기느니라!

‘하여튼.’

라온은 피식 웃으며 라스가 원하던 음식을 먹어주었다. 녀석이 먹고 싶어 하는 게 하도 많다 보니, 하나 씩만 집어먹었는데도 어느 정도 배가 찼다.

‘과일주는 어디에 있는 거지?’

마실 것을 찾으며 고개를 돌리는데, 우측 구석에 있는 나무 밑에서 리메르와 어린 엘프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애들 데리고 뭘 하시는 거지?’

라온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리메르가 있는 나무 아래로 다가갔다.

“이렇게 모양이 같은 5장의 카드를 플러쉬라고 해. 거기서 숫자까지 이어지면 스트레이스 플러쉬라고 부르지.”

리메르는 아이들에게 포커의 족보를 보여주며 히죽 웃었다.

“플러시의 확률은 0.2퍼센트가 안 되고, 스트레이트 플러쉬의 확률은 0.01 퍼센트야. 하지만 막상 판때기에 앉으면 생각보다 잘 떠. 그게 포커의 묘미지.”

“…….”

라온은 아이들에게 포커를 가르치는 리메르를 보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진짜 이 귀때기는….’

너무 한심해서 라스처럼 귀때기라는 단어가 저절로 튀어나왔다.

‘그래도 놀이로만 알려주는 것 같네.’

도박으로 가르쳤다면 당장 걷어 차버렸겠지만, 리메르는 아이들에게 놀이로만 포커를 가르치는 것 같았다.

“그럼 다들 꺼내 볼까?”

리메르는 몇 가지 족보를 더 알려준 후 손가락을 튕겼다.

“네에.”

아이들이 고개를 꾸벅이고서 품에서 작은 금붙이나, 보석 같은 것을 꺼냈다.

“그래! 이 놀이에는 이런 반짝이는 것들이 필요하단다. 일단 형이랑 먼저 좀 해보고….”

“에라 이 인간아!”

라온이 참지 못하고 리메르의 등을 걷어찼다.

“꾸엑….”

그는 갑작스러운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얼굴을 땅에 가져다 박았다.

“누구야!”

리메르가 얼굴에 흙을 잔뜩 묻힌 채 벌떡 일으켰다.

“누가 감히 정령왕 소환사의 스승을 친 거야!”

“그 정령왕 소환자다.”

라온이 검을 뽑아 들 것처럼 서늘한 눈빛을 드러냈다.

“아하하하하.”

리메르는 어색하게 웃으며 다가와서 어깨를 잡았다.

“와, 왔어?”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라온이 리메르의 창백해진 얼굴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 어른들만 있으면 애들이 지루해하잖아. 좀 놀아주려고….”

리메르는 별거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럼 이 금붙이들은 뭔데요?”

라온은 아이들의 손에 들린 금과 보석을 가리키며 미간을 찌푸렸다.

“너도 알다시피 엘프들은 보석이나 금을 귀하게 여기지 않아. 어차피 안 쓰는 물건이니까. 그 가치를 아는 내가 쓰는 게….”

-어휴! 질리는 귀때기이니라!

라스조차 어처구니가 없다는 한숨을 내쉬었다. 질리는 녀석이 질리는 놈에게 하는 말이라, 더 와닿았다.

“저 아저씨 못된 사람이니까. 절대 믿으면 안 돼.”

라온이 아이들과 눈을 마주치며 손을 저었다.

“금이랑 보석은 원래 있던 곳에 돌려놓으렴.”

“네!”

“알겠어요!”

엘프 아이들은 나를 정령왕의 소환자라고 알고 있기 때문인지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끄으응….”

부모에게 돌아가는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을 때 리메르가 앓는 듯한 신음을 흘렸다.

“코앞이었는데.”

“제가 막은 걸 다행으로 아세요. 수호자님이 보셨으면 화살에 찔렸을 겁니다.”

“음, 그건 그럴지도….”

리메르는 어깨를 부르르 떨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장례식 분위기가 생각보다 밝네요.”

라온이 다시 장례식을 보며 짧게 입맛을 다셨다.

“아, 그건….”

“엘프들은 죽음으로 자연과 하나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에 대한 대답은 리메르가 아니라, 좌측에서 다가온 레이란의 입술에서 흘러나왔다. 그녀는 동그란 술잔을 두 개 든 채 리메르의 옆에 섰다.

“죽음으로 자연과 하나가 된다?”

“엘프들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입니다. 자연에 녹아내려 새로운 삶으로 회귀하게 되지요.”

레이란은 이 연회는 죽음을 위로하는 장례식이 아니라, 소중한 사람을 떠나보내는 송별식이라고 말해주었다.

“저 말이 맞아.”

리메르가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엘프들은 동족의 죽음을 그저 슬픔으로만 받아들이지 않거든.”

그는 죽음을 슬픔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말과 달리 씁쓸한 눈빛을 드러냈다.

“그렇군요.”

라온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과 엘프라는 종족의 차이 때문에 장례식에서 이런 가벼운 분위기가 만들어지는 것 같았다.

“너도 음식을 먹으면서 즐겨. 여기선 그게 죽은 이들을 위로해주는 거니까.”

리메르가 그 말을 하며 레이란에게 손을 뻗었다.

“그거 나 주려고 가져온 거지? 고맙….”

“아닙니다.”

레이란은 리메르를 스쳐 지나가서 라온에게 잔을 내밀었다.

“코튼 부족에서 만든 과실주입니다. 맛도 맛이지만, 육체와 피로회복에 도움이 될 겁니다.”

라온은 잔 속에서 찰랑이는 투명한 술을 보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레이란의 향인지 술의 향인지 청초한 향이 코끝을 매만졌다.

“감사합니다.”

라온이 고개를 숙이며 술잔을 받았다.

“저 귀한 게 술알못에게 가다니!”

리메르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귀한 술이요?”

“그래. 코튼 부족의 과실주는 세이피아의 엘프들도 없어서 못 먹는 보물이라고.”

그는 감동 받을 거라며 빨리 먹어보라 손짓했다.

“음….”

라온이 물처럼 투명한 과실주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리메르의 말을 들으니, 침이 저절로 돌았다.

와인을 마실 때처럼 천천히 과실주를 들이켰다.

-크으! 향이 미쳤느니라!

‘오….’

달콤하고 시원한 과일의 맛과 향이 혀와 코를 파고든다. 여러 음식을 먹어서 느끼하던 입안 전체를 깔끔하게 씻어주는 기분이었다.

그 뒤를 잇는 건 톡 쏘는 듯한 과실주 특유의 자극적인 맛이었다.

혀가 조금 얼얼할 정도였는데, 이게 기가 막혔다. 달달한 과일의 맛보다 자극적인 끝맛이 더 만족스러웠다.

-끄어어어억!

하지만 라스는 끝맛이 별로인지 목을 잡은 채 비틀거렸다.

-수, 술! 술은 싫으니라!

달달하고 맛있다고 헤죽이던 녀석이 손바닥으로 혀를 닦기 시작했다.

도괴 때도 느꼈는데, 라스는 술이 안 받는 것 같다. 애들 입맛 그 자체였다.

“라온 님.”

라온이 라스를 보며 한숨을 내쉴 때 레이란이 앞으로 다가와서 두 손을 모았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그녀는 엘프가 아니라, 인간이라도 된 것처럼 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네?”

라온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하여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게 무슨….”

“에덴이 습격한 당일 라온 님이 느낌이 좋지 않다고 정찰을 나가자고 하셨을 때 제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하면서 거절했던 일을 사과드리고 싶습니다.”

레이란은 죄송하다고 말하며 머리를 조아렸다.

“죄송해할 필요 없습니다.”

라온이 연한 웃음을 지으며 레이란을 일으켜 세웠다.

“누구라도 그랬을 테니까요.”

이틀 동안 잠도 못 자고 경계를 서다가 처음으로 식사를 하려던 가디언들에게 그저 느낌이 좋지 않다고 정찰을 나가자고 했으니, 좋은 반응이 돌아올 수가 없었다.

믿어준 에리안이 신기한 거지, 레이란이 이렇게 잘못을 빌 필요는 전혀 없었다. 이런 일로 뭐라고 하는 것 자체가 한심한 일이다.

“…….”

레이란은 본인의 팔을 잡고 일으켜 세워주는 라온을 보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지금까지 내가 본 인간들과 전혀 달라.’

인간들은 사소한 일 하나하나 따지면서 어떻게든 이득을 챙기려고 하는데, 라온은 그런 점이 전혀 없었다.

그는 세계수와 세이피아를 구하는 위업을 세우고도 본인을 띄우거나, 자랑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알던 인간과는 다른 존재 같아서 당황스러웠다.

“술맛 좋네요. 잘 마셨습니다.”

라온은 레이란에게 미소를 지어주고서 빈 술잔을 돌려주었다.

“아, 어, 얼마든지 있으니까. 와서 드세요.”

레이란은 술은 얼마든지 줄 수 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라온은 레이란에게 고개를 숙이고서 리메르의 허리를 팔꿈치로 찔렀다.

“대주님. 저랑 잠시 같이 가시죠.”

“어딜?”

“따라오시면 압니다.”

그를 끌고서 세계수를 지키듯이 밑동 아래에 앉아있는 스테린에게 다가갔다.

“왔나?”

스테린이 작은 술잔을 든 채 턱을 까딱였다.

“연회는 어떤가? 인간들의 행사와 달리 지루할 터인데.”

“평소에도 연회를 즐기는 편이 아니라, 괜찮습니다.”

“그렇군.”

그는 마음에 든다는 듯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그 떨거지는 왜 데리고 왔나?”

스테린은 멍하니 서 있는 리메르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손자한테 떨거지라니! 말이 너무 심하네!”

“떨거지 맞지 않느냐. 네놈만 망가지면 됐지. 아이들에도 망치려고 하지 마라!”

그는 다 보고 있었다는 듯 손등으로 리메르의 이마를 후려쳤다.

“켁!”

리메르는 술잔을 든 채로 바닥에 자빠졌다.

“하….”

라온이 한숨을 내쉬고서 스테린에게 한발 다가갔다.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말해보게.”

“혹시 세계수의 가지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라온이 별을 가지에 걸어둔 듯한 형상의 세계수를 올려다보며 입맛을 다셨다.

“세계수의 가지를?”

“예.”

고개를 끄덕이고서 리메르를 바라보았다.

“대주님의 의수를 만들 때 뼈대를 지탱해줄 재료가 마나에 친숙할수록 좋다고 하더군요. 혹시라도 세계수의 가지나 뿌리를 가져올 수 있다면 꼭 챙겨오라고 부탁을 해서.”

“음….”

스테린이 리메르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너 그냥 외팔이로 사는 게 낫지 않느냐? 그래야 사고를 덜 칠 것 같은데?”

“그게 할아버지가 할 소리예요?”

리메르가 빽 소리를 질렀다.

“커흠.”

스테린이 헛기침을 하고서 라온에게 시선을 돌렸다.

“본래 세계수의 가지는 물론이고, 이파리 하나도 인간에게는 넘겨주지 않는 게 세이피아의 규율이지. 허나….”

그는 리메르를 볼 때와 달리 부드러운 미소를 그렸다.

“이미 열매를 받은 자네에게 가지 하나를 내어주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네.”

스테린이 그 말을 하자마자, 밤을 비추는 듯 투명하게 반짝이던 세계수의 가지 하나가 자연스럽게 떨어져 라온의 손아귀에 잡혔다.

“이건….”

라온이 손에 쥐어진 세계수의 가지를 보며 눈을 부릅떴다.

“내가 답할 필요도 없었나 보군.”

스테린은 세계수가 이렇게 챙겨주는 건 하이엘프 중에서도 없었다며 웃었다.

“고맙다. 좋은 곳에 쓸게.”

-좋은 곳?

라스가 그게 맞냐며 눈매를 찡그렸다.

‘나쁘지는 않은 곳에….’

라온은 말을 조금 바꾸며 세계수를 쓰다듬어 주었다.

후우우우우웅!

세계수가 기쁘다는 듯 나뭇가지를 펼쳤다. 달빛이 맺힌 이파리들이 찰랑이며 은하수가 펼쳐진 듯한 장관이 드러났다.

“인성도, 성격도, 실력도 망가져서 돌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스테린은 그 모습을 보며 리메르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 모든 손해를 메울 정도의 제자를 데리고 왔구나.”

“저쪽에 과하게 운을 빼앗겨서 도박장만 가면 돈을 잃어요.”

리메르가 손에 묻은 흙을 털며 짧게 혀를 찼다.

“그 검을 돌려주려고 왔다고 했었지?”

스테린이 아직 리메르의 허리춤에 걸린 검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그렇죠.”

리메르가 고개를 끄덕이고서 허리춤의 검을 풀려고 할 때 스테린이 손을 저었다.

“줄 필요 없다.”

“네?”

“너도 라온과 함께 홍염귀와 싸웠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랬죠….”

“아직 검을 쥐려는 마음이 꺾이지 않았는데, 검을 놓을 필요는 없지. 그 검도 아직 네 손을 떠나기 싫어하는 것 같구나.”

스테린은 가늘게 떨리는 검신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왼손으로 검을 잡든, 의수로 복귀를 하든 혹은 검을 내려놓든.”

스테린이 리메르의 오른쪽 어깨를 잡으며 연한 미소를 그렸다.

“네 스스로를 제대로 관조한 후에 결정하도록 해라.”

그는 그때까지 검을 맡겨두겠다며 등을 돌렸다.

“후….”

리메르가 깊은 한숨을 내쉬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그리고….”

스테린이 다시 리메르의 허리춤으로 돌아간 검을 보며 눈빛을 가라앉혔다.

“너희가 지그하르트로 돌아갈 때 데리고 갈 사람이 있다.”

“데리고 간다는 건….”

“장로들도 허락하였으니, 지그하르트와 조금 교류를 나누고자 한다.”

“잘 생각하셨어요!”

리메르가 활짝 웃으며 무릎을 쳤다.

“지금 지그하르트는 거의 전성기 시절로 돌아가는 중이니까. 절대 손해는 없을 겁니다!”

그는 좋은 선택이라며 손을 들어 올렸다.

“사절도 중요한데, 누구를 보내실 거예요?”

“그건 이미 정해져 있지.”

스테린이 다시 라온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     *      *

다음 날 저녁.

라온은 스테린의 호출을 받고, 다시 세계수 앞으로 향했다.

그 홀로 있을 거라 생각했던 예상과 달리 세계수 아래에는 대장로, 리메르, 시얀이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제시간에 왔군.”

스테린이 잘 왔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와는 다르겠지요.”

대장로가 리메르를 보며 눈을 흘겼다.

“아, 좀 늦은 걸로 되게 땍땍거리네.”

리메르는 뒤통수를 긁으며 시선을 돌렸다.

“라, 라온 님. 안녕하세요….”

시얀이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푹 가린 채로 고개를 숙였다.

“왜 다들 여기에….”

라온이 네 사람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제 세계수의 열매를 먹어야 하지 않나. 열매를 가장 효율 좋게 흡수할 수 있는 공간이 바로 세계수 밑이라네.”

“아….”

“우리 넷이서 호위를 설 테니, 걱정하지 말고 연공에만 집중하게나.”

“네 분이 모두 호법을?”

“혹시 모르니 말이야.”

스테린이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과한 게 아닐지….”

“과하지 않네. 자네가 우리에게 해준 게 그 이상이니까.”

대장로는 괜한 소리 말고 빨리 본론으로 들어가라며 손을 저었다.

“그래. 바로 시작하자.”

리메르가 라온의 어깨를 두드렸다.

“제, 제가 목숨을 걸어서라도 지킬게요!”

시얀의 금발 사이로 푸른 눈동자가 번쩍였다. 정말 목숨을 다 바칠 기세였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라온이 옅게 웃으며 세계수의 밑동 아래에 앉았다. 평소라면 겸손을 떨었겠지만, 라스의 말이 있기에 모두의 호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드, 드디어!

라스가 환희가 차오른 눈빛으로 세계수의 열매를 바라보았다.

-드디어 저 달달한 과즙을 맛볼 수 있게 되었느니라!

녀석은 구박받아도 붙어있길 잘했다며 코를 훌쩍였다.

라온이 세계수의 열매를 꺼내 들자, 리메르가 입꼬리를 길게 말아 올렸다.

“너한텐 맛있을 거야.”

“네?”

“아니야.”

그는 빨리 먹으라는 듯 씩 웃었다.

‘뭔가 불안한데.’

리메르가 저렇게 말하니, 조금 이상하게 느껴졌다.

-불안할 게 뭐가 있느냐!

라스가 고개를 저었다.

-열매에서 풍기는 저 달달한 향이 느껴지지 않느냐고! 분명 맛있을 것이니라!

녀석은 어서 먹자며 오동통한 손을 휘저었다.

‘알겠어.’

라온이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힌 후 세계수의 열매를 베어 물었다. 사과처럼 아싹한 식감을 채 느끼기도 전에 혀끝으로 열매의 맛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달달… 어?

가장 먼저 맛을 느낀 라스가 눈을 부릅떴다.

-꾸에에엑! 뭐, 뭐냐! 왜 세계수의 열매에서 나딘빵 맛이 나는 건데!

‘정말이네….’

라온이 세계수의 열매를 다시 베어 물며 눈을 끔벅였다. 달달한 향기와 달리 세계수의 열매는 고무 맛이 가득 찬 나딘빵과 똑같았다.

‘아니, 그 이상이야.’

나딘빵보다도 훨씬 진한 고무의 맛이 느껴졌다. 입안 전체에 고무를 넣은 듯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눈을 동그랗게 뜨자, 리메르가 픽 웃으며 시얀을 가리켰다.

“나딘빵의 맛은 세계수 열매의 맛을 참고한 거거든. 사실 세계수의 종은 고무나무야.”

“괘, 괜찮으신가요?”

시얀이 괜찮냐며 눈을 끔벅였다.

“…괜찮습니다.”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딘빵 맛이 꽤 익숙해져서 별문제는 없었다.

다만 그게 아닌 마왕이 하나 있었다.

-주, 죽여….

라스가 비틀거리며 바닥에 엎어졌다.

-차라리 죽여! 이건 너무 억까잖느냐! 왜 세계수 열매가 고무 맛인데! 빨리 뱉….

라온에게 빨리 뱉으라고 하려 했지만, 그는 이미 세계수의 열매를 모두 씹어 삼키고 무아지경에 빠져있었다. 고무 맛을 느끼는 사람은 이제 자신밖에 없었다.

-끄으으으으!

라스가 세계수를 향해 손을 뻗으며 입술을 부르르 떨었다.

-본왕이! 본왕이 꼭 불태울 것이니라! 전부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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