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95화
“어휴!”
시얀이 숲을 헤쳐가며 뒤에서 달리는 레이란을 노려보았다.
“왜 말을 안 해준 거야!”
“결계에 집중하고 계셔서 방해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레이란이 시얀의 눈을 마주하며 고개를 꾸벅였다.
“말을 못 하면 밉지나 않지.”
시얀이 붉은 입술을 삐죽였다.
“죄송합니다.”
“됐으니까. 빨리 달리기나 해.”
그녀는 빨리 갈 수만 있으면 된다며 세계수가 있는 방향으로 내달렸다.
레이란은 시얀의 발을 휘감고 있는 물의 구두를 보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정말 달라지셨군.’
본래 시얀은 세이피아에서 가장 재능이 떨어지는 엘프였다.
전투도 못 하고, 정령을 소환할 수도 없으며, 부끄러움이 많아 남 앞에 서지도 못했다.
하지만 물의 정령왕을 소환한 이후로 그녀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다.
물길을 막던 강둑이 무너진 듯 자연의 마나를 본인의 것처럼 다루게 되었고, 무학에도 천재적인 재능이 생겼으며, 정령술은 세이피아에 있는 그 누구도 따라가지 못했다.
에덴의 습격이 일어난 지 일주일이 채 지나지도 않았는데, 현재 세이피아에서 그녀를 이길 수 있는 엘프는 스테린과 대장로 뿐이었다.
‘존경스러운 분이야.’
시얀은 평생을 무시당하며 살다가 힘과 재능을 손에 쥐었음에도 본인을 모욕했던 동족들을 담담하게 용서해주었다. 마음가짐 자체가 범인과는 차원이 달랐다.
다만 현명하고 자애로운 시얀의 이성이 유일하게 망가질 때가 있었다.
‘라온 지그하르트.’
지금처럼 라온과 관련된 일만 있으면 시얀은 물불을 안 가리고 움직였다.
라온이 쓰러져 있을 때도 세이피아에서 귀한 약재는 모조리 모아다가 영약을 만들어서 먹였었다.
세이피아보다 그 인간이 더 윗선에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사실 그럴 만한 사람이기는 하지.’
라온이 아니었다면 세이피아 자체가 잿더미가 되었을 테니, 시얀이 라온을 저리 소중히 여기는 것도 이해는 갔다.
“시얀 님. 조금만 천천히 가시지요. 따라가기 벅찹니다.”
레이란은 바람을 타는 듯한 시얀을 보며 작게 웃었다.
“다 왔어! 조금만 힘내!”
시얀은 레이란을 격려하는 말과 달리 오히려 속도를 높였다. 바람의 정령까지 이용하여 나아간 그녀는 세계수의 결계 앞에서 우뚝 멈춰 섰다.
“아….”
수백의 엘프들이 라온 앞에 무릎을 꿇고, 은인이라 외친다.
그 장엄한 광경을 마주하자 라온 지그하르트 전기에 적혀있던 글귀들이 머리를 간지럽혔다. 직접 보지 않았음에도 그 광경들이 뇌리에 떠올랐다.
‘이건 내가 써야 해.’
내가 태어난 이유는 바로 이 장면을 보고, 글로 남기기 위해서가 분명했다.
라온 지그하르트 전기의 저자에게 돈을 바쳐서라도 이 부분만큼은 내가 써야 했다.
시얀은 새로운 목표를 다짐하며 주먹을 꼭 말아쥐었다.
* * *
라온은 정중한 예를 표한 엘프들을 보며 손끝을 떨었다.
세계수 아래에 있기 때문인지 엘프들의 진심이 가슴에 와닿아 오싹할 정도의 소름이 돋아 올랐다.
‘고맙기는 하지만 과해….’
에덴의 습격에서 내가 큰 역할을 맡기는 했지만, 이 정도 인사를 받을 정도는 절대 아니었다.
-멍청한 놈!
거절하기 위해서 손을 저으려고 할 때 라스가 튀어나왔다.
-또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겸손을 떨려는 것이냐?
‘뭐?’
-겸손을 떠는 게 언제나 좋은 일만은 아니니라.
라스가 도톰한 손가락을 들어서 엘프들을 가리켰다.
-저 귀때기들은 전부 진심이니라. 네놈이 좀 불편하다고 저들의 인사를 거절하는 건 무시하는 것이나 다름없느니라!
녀석은 호의를 무시하지 말라며 미간을 찌푸렸다.
“음….”
라스의 손가락을 따라 다시 엘프들을 보았다. 녀석의 말대로 저들은 그저 감사함을 표현하고 있었다.
불편하다고 받지 않는 건 실례를 넘어 무시나 다름없었다.
‘하, 너한테 배우는 날이 다 있네.’
-전부터 말했지 않느냐! 네놈보다 본왕이 인간적이라고!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어.’
라온이 옅게 웃으며 제천검을 뽑았다.
“지그하르트의 광풍부대주. 라온 지그하르트. 세이피아의 인사를 받아들이겠습니다.”
검을 역수로 잡았다. 칼끝으로 대지를 가리킨 채 검병을 가슴으로 끌어당겼다. 지그하르트의 검례. 다가온 진심에 진심으로 답을 해주었다.
라온의 정중하면서도, 당당한 예법에 스테린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인사를 받아주어 고맙소.”
스테린이 몸을 일으켰다. 그를 따라 다른 엘프들도 고개를 들어 올렸다.
“네가 웬일이냐?”
리메르가 옆으로 다가와서 어깨를 툭 쳤다.
“이런 때는 항상 한발 물러나서 분위기 어색하게 만드는 게 네 특기잖아.”
그는 기분이 좋은 듯 시원한 미소를 그렸다.
“항상 똑같을 수는 없으니까요.
-야이! 얌생이 놈아!
라스가 빽 소리를 질렀다.
-본왕이 도와줬잖아!
라온이 버둥거리는 라스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겸손 그만 떨라고 말한 녀석도 있어서.”
“누군지 모르겠지만, 말 한번 잘했네.”
리메르가 키득거리며 손을 까딱였다.
“성격이 시원시원하고 옳은 말만 하는 사람일 거 같아.”
-커험!
라스가 리메르를 보며 헛기침을 내뱉었다.
-귀때기 녀석이 옳은 말을 할 때가 다 있구나!
녀석은 마음에 든다는 듯 히죽거렸다. 뭔 놈의 마왕이 이렇게 칭찬에 약한 건지 모르겠다.
“라온 지그하르트.”
스테린이 앞으로 다가와 부드러운 미소를 그렸다.
“고맙다.”
그는 한 번 더 고맙다고 말하며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저도 감사합니다.”
“음?”
“수호자님이 감화시의 묘리를 알려주신 덕분에 이길 수 있었습니다.”
이건 진심이었다. 마지막 순간에 진혼검과 의념이 연결되지 않았다면 결국 승자는 홍염귀가 되었을 테니까.
“뭐…?”
스테린이 무슨 말을 하냐는 듯 눈을 부릅떴다.
“그, 그걸 이뤘다고?”
“운이 좋았습니다.”
라온은 홍염귀와의 전투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주었다.
“허….”
스테린은 사정을 듣고서 더 이해가 안 된다는 듯 턱을 떨었다.
“아무리 요검과 의념이 통했다고 해도 그랜드 마스터 하급이 어찌 이기어검을….”
“할배. 내가 말했잖아.”
리메르가 한껏 올라간 스테린의 눈썹을 보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내 제자 놈을 일반적인 상식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그는 라온의 머리를 매만지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엘프한테 하이엘프가 있듯이 얘는 하이인간이라고. 상식을 가져다 대지 마.”
“또 이상한 소리를….”
라온이 리메르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럴 수도….”
하지만 스테린은 그 말을 믿는 것처럼 눈을 끔벅였다. 그만큼 이기어검을 성공시킨 게 놀라운 것 같았다.
“그런 거 아니에요. 평범한 인간입니다.”
라온이 빠르게 손을 저었다.
“그랜드 마스터 하급이 이기어검을 썼다는 것보다, 저 녀석의 헛소리를 믿는 게 낫다 싶을 정도다.”
스테린이 리메르를 가리키며 헛바람을 뱉었다.
“거기다 불의 정령왕의 계약자이기도 하죠! 이런 인간은 대륙 역사상 최초일 겁니다!”
에리안이 옆으로 다가와서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젠 대륙 역사로 넘어갔다. 리메르만큼이나 질리는 엘프였다.
“아, 아니에요.”
가느다란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우측으로 향했다.
햇살을 녹인 듯한 금발이 물결처럼 찰랑이고, 새벽 달빛이 스친 듯한 푸른 눈동자가 아련한 색을 드러낸다.
눈동자를 마주하는 것만으로 말을 잊게 만드는 압도적인 미모. 모든 종족 중 가장 아름답다는 엘프 중에서도 발군이었다.
“시, 시얀 님?”
“아, 넷….”
시얀이 뺨을 빨갛게 물들인 채 고개를 푹 숙였다.
“라, 라온 님 안녕하세요오….”
그녀는 이불에 들어가지 않았음에도 전보다 더 목소리가 가라앉아 있었다.
“이제 이불은 벗으셨네요.”
“더, 덕분에요….”
시얀은 여전히 땅만 바라보며 턱을 끄덕였다.
“시얀. 아니라는 말이 무슨 뜻이냐?”
스테린이 하던 말을 계속해보라는 듯 손을 까딱였다.
“아, 라온 님은 불의 정령왕의 계약자가 아니에요.”
“시얀 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에리안이 말도 안 된다는 듯 거세게 발을 굴렀다.
“라온은 누가 뭐라고 해도 불의 정령왕의 계약자입니다! 정령왕과 함께 싸우는 모습을 보셨지 않습니까!”
“아니라구요.”
시얀은 라온을 대할 때와 달리 당차게 고개를 저었다.
“엘라임에게 들었어요.”
그녀가 떨리는 시선을 들어 올려 라온을 바라보았다.
“라온 님은 불의 정령왕의 형님이에요!”
시얀의 기괴한 외침에 세계수 아래에 있던 모두가 순간 숨을 멈췄다.
“어…?”
“그게 무슨….”
“혀, 형님? 계약자가 아니라, 형님?”
“윽….”
스테린과 리메르, 에리안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눈을 부릅떴고, 라온은 반대로 눈을 질끈 감았다.
‘제발….’
그 딸기맛 사탕 정령왕이 정령계로 가서 내 이야기를 했던 것 같았다.
“왜 라온이 정령왕의 형님이라는 거야?”
리메르는 상상이 안 간다며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그건 저도 모르겠어요. 이프리트가 정령계로 복귀하자마자 라온 님을 형님으로 모신다는 말을 했다고….”
시얀이 정령왕들도 이유는 모른다며 고개를 저었다.
“후….”
라온이 그 말을 들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마 다행이네.’
라스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했는데, 다행히 이프리트는 중요한 부분까지는 말하지 않은 것 같았다.
하긴 사정을 말하려면 본인이 라스에게 먹혔던 것도 밝혀야 하니,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계, 계약자가 아니라, 형님이라니!”
에리안이 라온을 보며 입술을 떨었다.
“역시 내 눈은 잘못되지 않았어! 처음 만났을 때부터 라온의 기백을 느꼈다고!”
그는 본인의 육감은 엘프 중 제일이라며 소리쳤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느냐!”
대장로가 에리안을 밀어내고 라온의 앞에 섰다.
“대체 어떻게 불의 정령왕의 형님이 된 것이오?”
“마, 맞아. 말 좀 해주세요!”
“무슨 일을 저지른 겁니까.”
장로와 엘프들도 그 일이 궁금한 듯 옆으로 쫙 달라붙었다.
“그게….”
라온이 콧잔등을 찌푸린 채 한숨을 내쉬었다.
‘이걸 어떻게 설명한다….’
사실을 말하는 건 절대 안 된다. 생각을 짜내려고 고민을 하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찬란한 빛이 번쩍였다.
화아아아아아!
세계수가 처음 만났을 때처럼 가지의 날개를 펼친다.
장대한 자연의 기운이 투명한 잎사귀 사이로 응집되며 찬란하고 미려한 빛을 뿌렸다.
고오오오오!
유성처럼 명멸하던 빛의 구체는 천천히 가라앉다가 라온의 앞에서 구름을 탄 듯 떠올랐다.
라온이 본능처럼 손을 뻗자, 선명하던 빛이 가라앉고 사과보다 조금 더 큰 열매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건….’
처음 보는 열매다. 껍질에 원을 겹친 듯한 문양이 그려져 있었는데, 예술가가 새긴 듯 아름다우면서도 현학적이었다.
색은 산딸기 같은 붉은 빛이었는데, 당장 입에 넣고 싶을 정도로 먹음직스러웠다.
가장 깊은 인상을 주는 건 향이다. 자르지도 않았음에도 군침이 돌 정도로 달콤하고 청초한 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여, 열매다….”
대장로가 붉은 열매를 보며 입을 떡 벌렸다.
“세계수의 열매야!”
“세, 세계수가 열매를 내어주다니….”
“이, 이게 세계수의 열매?”
대장로만이 아니라, 이곳에 있는 모든 엘프들은 열매를 보며 경악한 듯 입술을 떨었다.
세계수의 열매가 대단한 영약이라는 소리는 들었지만, 엘프들에게도 놀라울 일일 줄은 몰랐다.
“당연한 거다.”
스테린이 세계수의 열매를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100년에 한 번 열린다는 말과 달리 세계수의 열매는 세계수가 마음이 찼을 때만 내려주는 신물이나 다름없으니까. 저 아이들이 놀라는 건 이상한 게 아니야.”
그는 오히려 기절하지 않은 걸 칭찬해주어야 한다며 헛바람을 흘렸다.
“그런 귀한 걸 제가 받아도 되는….”
-받아아아아아아아아!
라스가 비명 같은 외침을 내질렀다.
-무조건 받아! 이 멍청한 얌생이 놈아! 본왕이 그렇게 말했는데, 또 겸손을 떨고 지랄인 것이냐!
녀석은 세계수의 호의를 무시하지 말라며 미간을 찌푸렸다.
‘입에서 침이나 닦고 얘기해.’
라스는 침을 홍수처럼 흘리면서 날 생각하는 척하고 있었다.
-끄흡!
녀석은 빠르게 침을 쓸어내리고서 입맛을 다셨다.
-어쨌든 무조건 받아라! 본왕의 힘은 개미핥기처럼 빨아먹으면서 왜 남들은 왜 그렇게 배려해주는 건데!
라스는 열매를 안 먹으면 평생 저주할 거라며 두 손을 들어 올렸다.
“하.”
스테린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세계수의 열매를 앞에 두고 그런 말을 하는 건 너밖에 없을 것이다.”
“얘가 이렇다니까요. 지그하르트 답지 않게 아주 답답해.”
리메르가 한숨을 내쉬며 라온의 손에 들린 세계수의 열매를 도로 밀었다.
“이건 네 거야. 세계수가 직접 내려준 이상 이 열매를 가질 사람은 너밖에 없어. 이곳에 있는 우리 모두가 증인이다.”
“맞는 말이야. 가져가게.”
“이렇게 눈앞에서 보면 인정할 수 밖에 없지.”
“마, 맞아요. 라온 님이 가져가셔야해요!”
대장로와 에리안 그리고 시얀도 고개를 끄덕였다.
라온이 엘프들을 보며 옅은 미소를 그렸다.
‘다 대주님 같은 느낌이네.’
만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았건만, 벌써 친해진 느낌이다. 아마도 세계수 덕분에 감정이 직접적으로 전해져서 그런 것 같았다.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라온은 세계수의 열매를 가슴으로 안으며 스테린을 비롯한 엘프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화아아아아아!
넓게 펼쳐졌던 세계수의 가지가 햇볕의 궤적을 따라 살랑인다. 기껍다며 웃는 것 같았다.
-쿠헤헤헤헤헤!
라스가 세계수의 열매를 보며 경박한 웃음을 터트렸다.
-세계수의 열매라니! 이 지루한 곳에 온 보람이 있느니라! 나딘빵 뒤에 행복이 찾아왔어!
녀석은 이미 세계수의 열매가 본인의 입에 들어온 듯한 환희를 드러냈다.
-멍청한 엘프 녀석들. 요 얌생이에게 열매를 빼앗겨서 배가 터질 것처럼 아플 것이니라!
‘그런 생각하는 사람 없어 보이는데?’
-겉으로만 그렇게 보이는 것이니라! 자기 것을 빼앗겼는데, 웃고 있는 놈은 아무도 없느니라!
라스는 그걸 모르냐며 혀를 찼다.
-뺏기거나 잃어버리기 전에 지금 여기서 바로 먹거라! 나딘빵을 만든 귀때기들을 조롱하는 것이다!
녀석은 나딘빵 때문에 엘프들을 증오하는 것 같았다.
‘후….’
참 귀찮은 마왕이라고 생각하며 한숨을 내쉴 때였다.
[엘프들의 은인이 되었습니다.]
[<불의 정령왕>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위대한 업적을 이뤄내셨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25포인트 상승합니다.]
이번 일에 대한 정산이 이제야 이뤄졌는지 메시지가 눈앞으로 떠올랐다.
-끄어어억….
휘황찬란하게 웃던 라스의 입꼬리가 기묘하게 꺾였다. 하지만 아직 메시지는 끝나지 않았다.
[<만화공>의 성취가 상승합니다.]
[<글래시아>의 성취가 상승합니다.]
[<화속성 친화력>의 등급이 상승합니다.]
[<화속성 저항력>의 등급이 상승합니다.]
두 번째는 만화공과 글래시아의 성취가 상승했다는 메시지였다. 홍염귀의 불꽃을 견뎠기 때문인지 화속성 친화력과 화속성 저항력은 아예 등급이 올라가 버렸다.
[칭호 <정령왕의 존경을 받는 자>가 생성됩니다.]
마지막으로 칭호까지 생긴 후에야 끝없이 올라가던 메시지가 멈췄다.
‘언제 들어도 좋은 울림이야.’
라온은 아직 회복되지 않은 육체에 활력을 돌아오는 것을 느끼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끄으으….
반대로 라스는 메시지를 보며 울먹이듯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배 아파?’
라온은 오동통한 배를 움켜쥔 채 어깨를 떠는 라스를 보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오냐! 배 아파서 뒤져버리겠느니라!
라스는 못 참겠다고 외치며 이를 드러낸 채 덤벼들었다.
-끼아아아악!
* * *
지그하르트 가주전.
비연회주 채드가 손에 쥔 보고서를 보며 턱을 부르르 떨었다.
“에, 에덴이 세이피아를 습격했다고 합니다. 전대 불의 정령왕의 투구를 쓴 홍염귀와 세이피아를 배신한 잿빛 엘프들까지. 찾아왔다고….”
그는 마른침을 삼키며 보고서에 적혀있는 글귀를 읽었다.
“이런!”
아리스가 주먹을 말아쥔 채 등을 돌렸다.
“제가 갈게요!”
그녀는 바로 세이피아로 가갔다며 튀어 나갈 자세를 취했다.
“아직 안 끝났다. 계속 읽도록.”
글렌은 아리스를 멈춰세우고서 채드에게 보고서를 읽으라고 턱짓했다.
“아, 예. 그곳에서 광풍부대주와….”
채드는 보고서를 마지막까지 살피며 라온이 세이피아를 구하고, 세계수의 열매까지 받은 내용을 읊어주었다.
“이런!”
아리스가 머리를 질끈 동여맨 채 다시 등을 돌렸다.
“당장 가야겠어요!”
“다 끝났는데, 어딜 가겠다는 거냐. 에덴 놈들을 찾아봐야….”
“다 끝났으니, 축제를 열 거 아니에요! 라온의 이모인 나라면 분명 국빈 대접을 받을 수 있을 거라구요!”
그녀는 보법까지 밟아가며 문으로 달려갔다.
“후우, 로엔.”
“허허허.”
로엔이 귀신처럼 나타나서 아리스의 앞을 가로막았다.
“참으시지요.”
“아으윽….”
아리스는 차마 로엔에게 손을 쓰지 못하고 인상만 찡그렸다.
“엘프들의 은인이라는 표현을 쓰다니, 들어본 적도 없습니다. 그야말로 위업이군요.”
셰릴이 비연회주의 손에 들린 보고서를 보며 헛바람을 흘렸다.
“허허, 정령왕의 계약자까지 되시다니, 그분은 정말 어디까지 가실지 모르겠네요.”
로엔도 놀랍다는 듯 평소와 달리 안색을 굳혔다.
“크흡….”
갑작스럽게 들려온 웃음을 참는 듯한 소리에 알현실에 있는 모두의 시선이 단상 위로 향했다.
“방금 이상한 소리 들리지 않았어요?”
아리스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 외에 다른 이들은 누가 웃었는지 알고 있었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저, 전 이 부분이 놀랍습니다.”
채드가 보고서를 가리키며 고개를 저었다.
“세계수가 직접 열매를 내려주었다니, 인간이 세계수를 본 것도 역사상으로 따져야 할 텐데, 세계수의 열매를 받은 건 아마 유일할 겁니다.”
“매번 상상을 뛰어넘으시는군요.”
로엔이 채드의 말을 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라면 엘프들과 외교를 나눌 수도 있겠군요.”
셰릴은 새로운 길이 열린 것 같다며 웃었다.
“내가 말했잖아. 라온 녀석은 타고났다니까. 걔가 가주가 되면 지그하르트는 지금이랑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번창할 거야.”
“크흐읍!”
아리스가 라온의 칭찬을 하자마자 다시 그 웃음을 참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누군데! 단상에 누구 또 있어?”
아리스가 단상으로 올라가서 이곳저곳을 뒤졌다. 그녀는 단상의 주인이 그 소리를 냈다고는 생각 못 하고 그저 눈만 끔벅였다.
“무얼 하는 것이냐. 내려가라.”
글렌이 입을 가리고 있던 손을 떼고서 아리스에게 인상을 찌푸렸다.
“아, 진짜 들렸는데….”
아리스가 이상하다고 말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크흠! 라온이 엘프들의 은인이 된 이상 평범하게 맞이하는 건 조금 그렇겠지?”
글렌은 짧게 헛기침을 하고서 라온을 환영하자는 듯 말문을 텄다.
“그, 그럼요! 성대하게 맞이해야죠!”
채드가 당연하다고 외치며 손뼉을 쳤다.
“맞습니다. 지그하르트의 외교에 큰 도움이 될 업적을 이뤘으니, 그에 대한 대우는 해줘야겠죠.”
셰릴이 시원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허허허허!”
로엔은 그저 즐겁다는 듯 허허로운 웃음을 흘렸다.
“그럼 제가 데리고 올게요!”
아리스가 고개를 끄덕이고서 냉큼 문으로 달려갔다.
“넌 좀 가만히 좀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