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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594화 (593/653)

제594화

“그게 무슨 말이지?”

멀린은 눈매를 가늘게 좁힌 채 고개를 까딱였다.

‘날 의심하는 건가.’

타천은 라온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회의에 얼굴만 비추고 있던 내게 말을 걸어왔다. 어느 정도 의심을 하고 있다는 뜻. 관계가 없다는 말을 하기 전에 어떤 의미인지를 묻는 게 먼저였다.

“당신은 여전히 라온 지그하르트에게 관심을 가지고 계시지 않습니까.”

타천은 큰 의미는 없다는 듯 잔잔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현재 그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는지 묻는 겁니다.”

“내가 라온 지그하르트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멀린이 가면의 끝을 살짝 들추며 입매를 비틀었다.

“아닌가요?”

“아니, 맞아.”

키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하게 인정하는 게 좋겠지.’

어설프게 아니라고 해봐야 통하지 않을 테니까.

라온을 돕기 위해서 오마의 행사에 끼어든 게 한두 번이 아니다. 타천이 그 일을 모를 리가 없었다.

“록타의 혼을 먹어 치운 라온 지그하르트의 목을 분지르겠다고 다짐했는데, 막상 놈을 보니, 록타의 향기가 나서 손이 나가질 않더라고.”

멀린은 미간을 구긴 채 사실과 거짓을 적절하게 섞었다.

“그래서 성검련과 흑탑, 백혈교의 행사를 방해하셨던 겁니까?”

예상대로 타천은 멀린이 세 세력과 모두 부딪쳤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속이지 않는 게 정답이었다.

“그래. 눈앞에서 죽게 놔둘 수가 없었어.”

“그게 전부입니까?”

“응.”

멀린은 단순히 그것뿐이라고 말하며 노파의 가면으로 붉은 입술을 덮었다.

“어느 정도 이해는 갑니다.”

타천은 납득했다는 듯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시 묻죠. 라온 지그하르트가 세이피아에서 왜 그렇게 빨리 움직였는지에 대해서 아는 게 없습니까?”

“몰라.”

멀린이 단호하게 손을 저으며 다시 모래에 등을 기댔다.

“내가 라온 지그하르트를 구했던 건 눈앞에 있었기 때문이지. 따라다닐 정도는 아니니까. 거기다….”

그녀는 들어 올린 손가락을 좌우로 까딱였다.

“난 이곳에 있는데 그놈의 움직임을 어떻게 알겠어.”

“당신이라면 그 정도 마법은 부릴 수 있을 텐데요.”

“말했잖아. 눈앞에서 죽지만 않으면 된다고. 그런 귀찮은 짓까지 할 정도는 아니야.”

멀린은 본인의 성격과는 다르다고 말하며 눈을 내리감았다.

“…….”

타천은 입을 떼지 않은 채 멀린의 가면을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확실히 그게 당신답긴 하군요.”

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서 다시 시선을 돌렸다.

“이번 일은 꽤 피해가 큽니다.”

피해가 크다는 말과 달리 타천의 음색은 조금도 어둡지 않았다.

“적귀사의 죽음은 이득이지만, 카산드라와 홍염귀. 아니, 다 떠나서 홍염귀가 제 힘을 얻지 못하고 죽은 게 가장 심각합니다.”

그가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책상을 가볍게 두드렸다.

“천마 쪽에서 압박해오겠군요.”

트롤 주술사의 가면을 쓴 남성이 짧게 혀를 찼다.

“망할 것들이. 찾아오면 모가지를 비틀어버리겠어!”

그리폰의 가면을 쓴 여성은 이미 짜증이 치민 듯 목에 핏줄이 돋아나 있었다.

“그건 별 게 아닙니다. 제가 무마시킬 수 있어요.”

타천이 고개를 저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문제는 천기를 바꾸는 자가 있다는 겁니다.”

“천기라면….”

“이번 일을 시작하기 전에 천기를 읽어보았습니다. 세계수는 불에 타고, 정령계는 무너지며, 홍염귀는 초월에 닿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평온했던 시선에 서늘한 한기가 차올랐다.

“결과는 정반대가 되었죠. 세계수는 살아남았고, 두 정령왕이 태어나 정령계가 안정을 되찾았으며, 홍염귀는 죽었습니다. 제가 보았던 천기가 완벽하게 뒤바뀐 거죠.”

타천이 깍지 낀 손으로 턱을 괴며 눈매를 가라앉혔다.

“일반적으로 천기를 바꿀 수 있는 인물은 많지 않아요. 초월. 그중에서도 십천에 다다른 이들이 많은 것을 희생해야만 가능하죠.”

“그, 그럼 라온 지그하르트가 초월에 닿았다는….”

“그건 아닙니다.”

그가 고개를 저었다.

“적귀사가. 아니, 청시사가 남긴 정보에 의하면 그는 아직 그랜드 마스터 초입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더 문제지요.”

타천의 볼 아래에 깊은 우물이 파였다.

“라온 지그하르트는 초월에 닿지 않아도 천기를 바꿀 수 있다는 뜻이니까요. 큰 관심을 두지 않으려고 했는데….”

섬뜩한 열기가 피어나는 그의 눈동자가 멀린에게 뚝 떨어졌다.

“조금은 생각을 바꿔야겠군요.”

*     *      *

“…그렇게 되었어!”

아기 여우가 나 잘했지라는 듯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

라온이 멀린이 깃든 아기 여우를 보며 눈을 끔벅였다.

“너 의심 받고 있잖아!”

타천의 말을 생각해보면 대놓고 말만 하지 않았을 뿐 앞으로 멀린을 지켜보겠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아니, 그 위험한 놈이라면 이미 멀린과 내 관계를 예측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응. 맞아.”

“그걸 알면서 왜 그렇게 태평한 건데!”

“전부터 말했잖아.”

멀린이 앞발을 살랑였다.

“난 에덴에 별 미련 없다니까. 예전에도 그랬지만, 지금은 정말 아무런 가치도 없어.”

그녀는 본인이 에덴에 있는 건 정보를 빼내기 위해서일 뿐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게 문제가 아니라, 위험하잖아.”

“네가 내 걱정을 해주는 건 언제 들어도 좋네. 녹음하고 싶어.”

멀린은 뺨에 홍조를 띤 채로 뒷발을 꼬았다.

-어후, 진짜 미친년이니라….

라스는 더는 못 보겠다며 얼음 꽃팔찌 속으로 도망쳤다.

“진지하게 생각해. 넌 이미 위험한 상태야.”

“알고 있어.”

멀린이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위험을 감수할 가치는 충분했어.”

“뭐?”

“의심은 받았지만, 대신 너를 구할 수 있었잖아. 그거면 만족해.”

그녀는 그거면 됐다는 듯 웃었다. 구김 없는 웃음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하아….”

라온이 머리를 부여잡은 채 한숨을 내쉬었다. 저렇게 나오니 뭐라 할 말이 없었지만, 그래도 꼭 해야 할 말이 있었다.

“네가 날 구해준 건 맞고,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어머! 고맙다니, 우리 사이에 무슨.”

“다만 이젠 너를 좀 생각해.”

멀린의 말을 무시하고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앞으로는 본체의 모습으로 다가오지 마. 내가 위험하다고 해도 절대.”

“음, 노력해볼게.”

“노력이 아니라, 꼭 지켜. 그리고….”

라온이 손가락을 들어 올려서 아기 여우의 코를 눌렀다.

“거기서 도망칠 준비도 해둬.”

타천의 반응을 보면 이미 뒷조사를 시작했을 수도 있다.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두는 게 가장 중요했다.

“대충 준비하기는 했는데, 네가 그렇게 말하니 확실하게 생각해둘게.”

멀린은 걱정하지 말라며 앞발로 라온의 손을 매만졌다.

“그럼 됐어.”

라온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후, 오늘 네 걱정을 너무 많이 받아서 배가 부를 정도야.”

멀린은 헤헤 웃으며 작게 트림했다. 아기 여우의 모습이다 보니 귀엽다는 게 짜증이 났다.

“네가 무사한 걸 봤으니, 이만 가볼게.”

그녀는 시간이 다 되었다며 햇살이 비치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으음….”

라온은 허리를 곧게 세우며 마른침을 삼켰다.

‘이번에는 뭐지?’

긴장한 채로 멀린의 말을 기다리고 있을 때 그녀가 허공에서 앞발을 쓸어내렸다.

“이 아이는 그루밍을 해달래.”

“그루밍?”

“그루밍은 동물이 혀를 이용해서 자신의 털을 다듬는 거야. 동족끼리 그루밍을 해주면서 유대관계를 쌓기도 하지.”

“혀, 혀라고?”

라온이 아기 여우를 보며 입을 떡 벌렸다.

“이 아이는 얼마 전에 부모를 잃어서 혼자가 되었거든. 인간한테라도 그루밍을 받고 싶다고 했어.”

멀린은 불쌍한 아이라며 스스로를 쓰다듬었다.

“아….”

아기 여우의 사연을 들으니, 거부할 수가 없었다. 혀가 아니라, 심장으로라도 그루밍을 해줘야 할 상황이었다.

-끄읍!

라스가 슬금슬금 기어 나와서 입을 틀어막았다.

-불쌍해라….

불쌍하다고 말하지만, 입을 가린 손을 열면 왠지 웃고 있을 것 같았다.

“그럼 부탁할게!”

멀린이 손을 흔들고 떠나갔다. 아기 여우의 까만 눈동자가 내 눈을 바라본다.

“아….”

라온이 아기 여우를 보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눈을 마주치니 더 거절할 수가 없었다.

“잠깐만 마음의 준비를 좀 하고.”

눈을 감춘 채 심호흡을 했다.

‘딱 열 번만 하자. 혀가 좀 쓸리겠지만….’

마음을 다지고 눈을 뜨자, 아기 여우가 인간처럼 웃고 있었다.

“흐흐.”

“멀린!”

멀린의 목소리였기에 바로 아기 여우를 밀어냈다.

“역시 넌 다른 사람들이랑 다르네.”

멀린은 그럴 줄 알았다며 헤죽 웃었다.

“그루밍을 꼭 혀로 할 필요는 없어. 손으로 쓰다듬어줘도 돼.”

그녀는 재밌는 것을 보았다며 씩 웃었다.

“그럼 정말 갈게.”

그 말을 끝으로 아기 여우의 눈동자가 연한 갈색으로 반짝였다. 이번에는 정말 떠난 것 같았다.

갸릉.

아기 여우는 무릎에 와서 얼굴을 비볐다.

“그래. 원하는 만큼 해주마.”

라온이 아기 여우를 다시 무릎에 앉힌 채 머리부터 꼬리까지 조심스럽게 쓸어내려 주었다.

-제대로 쓰다듬어라! 털 하나하나 전부!

‘알겠으니까. 조용히 좀 해.’

컁.

아기 여우는 기분이 좋다는 듯 눈웃음을 치며 꼬리를 살랑였다.

‘이 녀석만 좋은 게 아니네.’

신기하게도 아기 여우를 쓰다듬는데, 내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루밍은 내 마음에도 평화를 찾아주는 것 같았다.

한참 동안 여우를 쓰다듬고 있을 때 방문이 열리고, 리메르와 도리안, 유아가 들어왔다.

“라온 님! 일어나셨군요!”

도리안이 달려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아프신 곳은 없으세요?”

그는 걱정 많이 했다며 훌쩍였다.

“거봐. 걱정할 필요 없다고 했지? 얘 몸 하나는 강철이라니까.”

리메르가 씩 웃으며 라온의 어깨를 두드렸다.

“도련님!”

유아는 가지고 온 쟁반을 두 손에 든 채로 라온에게 달려들었다.

“조심해.”

라온은 아기 여우를 쓰다듬던 손으로 유아를 붙잡았다.

캬릉.

아기 여우가 무슨 일이냐며 가늘게 눈을 떴다.

“어? 그 여우는 뭐예요?”

“일어나니까 내 옆에 있었어.”

멀린이 빙의했다고 말할 수는 없기에 아기 여우가 튀어나왔던 구멍을 가리켰다.

“이쪽으로 들어온 모양이야.”

“와아….”

유아는 반짝이는 눈으로 여우를 바라보았다.

“쓰다듬어줄래?”

“네!”

라온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아기 여우를 들어서 유아에게 넘겨주었다.

“착하지.”

유아는 아기 여우를 소중하게 안은 채 쓰다듬어주었다.

라온은 유아와 여우를 바라보다가 리메르에게 시선을 돌렸다.

“다 끝난 겁니까?”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네가 다 처리해놓고.”

리메르는 홍염귀가 쓰러졌을 때 모든 게 끝났다고 말하며 웃었다.

“혹시나 했죠.”

“잘 끝났어. 할배도 살았고, 세계수도 살았지. 동족들이 죽기는 했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그는 쓸쓸함을 두른 목소리로 걱정하지 말라고 중얼거렸다.

“시장하실 텐데, 일단 밥부터 드세요.”

도리안이 유아가 가져온 쟁반에서 김이 올라오는 노란색 수프를 내밀었다.

작은 빵 조각들이 들어 있는 옥수수 수프 같았는데, 신기하게도 아무런 향도 나지 않았다.

-오오!

라스가 수프를 보며 입맛을 길게 다셨다.

-쫄쫄 굶었는데, 수프가 어디냐! 빨리 먹거라!

‘배가 고프기는 하니까.’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고서 수프를 한입 떠먹었다. 아무런 향도 없던 것과 달리 수프를 먹자마자 입안 가득 고무 향이 퍼져 나왔다.

-끄어어억….

“이건….”

“나딘빵으로 만든 수프야.”

리메르가 수프를 가리키며 웃었다.

“속이 안 좋아서 많이 못 먹을 테니까. 한 입만 먹어도 괜찮을 걸로 만들었지.”

“그렇군요….”

라온이 짧게 대답하고서 라스를 바라보았다. 녀석의 오동통한 몸체가 뻘겋게 빛나기 시작했다.

-에덴 놈들아! 걱정하지 말라!

라스가 두 주먹을 들어 올린 채 이를 바득 갈았다.

-본왕이 귀때기를 모조리 멸망시켜줄 테니까!

‘이거 괜찮은데?’

라온은 라스의 분노를 무시하고, 다시 나딘빵 수프를 떠먹었다.

-꾸에에엑….

고무 맛이 혀를 적시자마자, 라스의 분노는 자연스럽게 진화되었다.

-이 빌어먹을 땅! 다시는 안 와!

*     *      *

“하아….”

스테린이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의 가라앉은 눈동자 속에서 짙은 피로와 고통이 번져 나왔다.

“수호자님!”

“깨어나셨군요!”

세계수 주변을 경계하던 가디언들이 그에게 달려갔다.

“깨어나기는 했지만, 많이 늦은 것 같군.”

스테린은 검게 그을린 세계수의 뿌리와 밑동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계셨습니까?”

임시 결계를 운용하던 대장로가 스테린에게 다가가서 고개를 숙였다.

“공명을 이루었기에 정확히는 모르네, 그저 세계수가 큰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만 알 수 있었지.”

스테린은 세계수 속에서 불에 타오르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며 눈매를 찌푸렸다.

“그럼 제가 설명해드리지요.”

대장로가 짧게 한숨을 내쉬고서 스테린의 옆에 주저앉았다.

“시작은 라온 지그하르트였습니다. 그가 느낌이 좋지 않다며 대수림의 정찰을….”

그는 스테린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모두 설명해주었다.

“그래. 그랬군. 정령왕이라….”

스테린은 상황을 어느 정도 예측했는지 라온과 시얀이 정령왕을 다뤘다는 말에도 그리 놀라지 않았다.

“그 아이에게 큰 빚을 졌군.”

“그렇습니다. 시얀 님의 각성까지 생각해보면 갚기 힘든 빚이지요.”

대장로가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무언가 바뀐 것 같군.”

스테린이 대장로를 보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바뀔 수밖에 없는 것을 보았으니까요.”

“그런가.”

스테린이 옅은 미소를 그리며 몸을 일으켰다. 힘없이 주저앉을 뻔했는데, 대장로가 어깨를 잡아주었다.

“시얀은 무얼 하고 있지?”

“수호자님 대신 세이피아 주변을 돌며 세계수의 결계를 재생성하고 계십니다.”

“그건 내가 직접 알려주고 싶었는데.”

그는 진심으로 아쉽다는 듯 짧게 혀를 찼다.

“가보시겠습니까?”

“가고 싶긴 하지만,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지 않은가.”

“맞습니다.”

대장로는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다는 듯 잔잔한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보다도 그 일이 우선이지요.”

*     *      *

라온은 스테린이 깨어났다는 소리를 듣고 숙소를 나섰다.

“수호자님은 괜찮으신 겁니까?”

“너무 멀쩡해서 놀랄걸?”

리메르가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할배. 수호자 노릇을 언제까지 해먹을 지 모르겠다니까.”

그는 징하다고 말하며 혀를 찼다. 말은 저렇게 해도 걱정하느라 잠도 못 잤을 게 분명했다.

“음….”

라온은 세계수로 이어지는 길을 걸으며 눈매를 찌푸렸다.

‘많이도 탔군.’

세이피아에서 세계수로 향하는 길목이 검은 재로 가득했다.

아무리 엘프들이라고 해도 숲을 복구하려면 꽤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것 같았다.

“걱정하지 마.”

리메르가 이쪽의 생각을 알아차린 듯 손을 저었다.

“엘프들만 남아 있으면 숲도 살아나니까. 이 정도는 어렵지 않게 살릴 수 있어.”

그는 그것만큼은 자신할 수 있다며 웃었다.

“넌 네 걱정이나 해. 이기어검 다시 써봤어?”

“해봤는데, 안 됩니다. 역시 우연이었던 것 같아요.”

“다행이다. 그게 바로 됐으면 난 검을 포기하고, 도박장이나 차렸을 거야.”

“이미 차린 수준 아니에요? 일주일 내내 가시잖습니까.”

“그 정도는 아니야!”

리메르와 농담을 하면서 걷다 보니, 어느새 세계수 앞에 도착해 있었다.

그런데 그곳에는 스테린 만이 아니라, 세이피아에 머무는 엘프 대부분이 모여 있었다.

‘뭐지?’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걸음을 멈췄다.

“아직 아니야.”

리메르가 라온의 손목을 잡고 세계수의 중심까지 끌고 갔다.

“데리고. 아니, 모시고 왔습니다.”

그는 스테린 옆에 붙으며 씩 웃었다.

“일어나셨군요. 다행입니다.”

라온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스테린에게 고개를 숙였다.

“누구 덕분에 말이지.”

스테린이 옅게 웃으며 세계수를 올려보았다. 밑동의 반 이상이 불에 탔음에도 그 거목은 여전히 흔들리지 않았다.

“세계수와 하나가 되었을 때 불에 타는 고통이 느껴졌다. 외부의 공격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공명을 푸는 건 불가능했지.”

그가 타버린 부분을 매만지며 짧게 혀를 찼다.

“세계수가 공격을 받을 정도라면 다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공명을 이룬 나도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순수한 불과 물의 기운이 느껴지더군. 덕분에 자그마한 희망을 잡을 수 있었지.”

스테린의 시선이 다시 내게 향했다. 이전과는 다르다.

손주를 보는 듯 대견함을 담고 있던 눈빛이 동등한 위치에 선 사람을 보는 듯 경의를 담고 있었다.

그만이 아니다. 대장로와 에리안을 비롯한 모든 엘프의 눈동자가 그러했다.

“제가 먼저 시작하죠.”

리메르가 라온의 앞으로 걸어갔다. 그는 왼손으로 오른쪽 어깨를 잡은 채 한쪽 무릎을 꿇었다.

“유화 가지 부족이 은인을 뵙습니다.”

“대, 대주님?”

의문을 표할 새도 없이 좌측에 있던 에리안이 앞으로 나와 리메르와 같은 자체를 취했다.

“코른 가지 부족이 일족의 은인을 뵙습니다.”

“시화 가지 부족이 일족의 은인을 뵙습니다.”

“마란 꽃 부족이 일족의….”

“카란 줄기 부족이….”

부족장들은 그저 말로만 외치는 게 아니었다, 그들의 진심이 의념이 되어 가슴을 간지럽혔다.

“세이피아의 수호자가 일족의 은인을 뵙소.”

마지막으로 스테린이 앞으로 나왔다. 그 역시 무릎을 꿇고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다. 세계수를 대하는 듯한 장중함이 함께였다.

스테린 뒤에 서 있던 대장로와 장로들 그리고 이곳에 선 모든 엘프들이 오른손으로 왼손의 어깨를 잡은 채 무릎을 꿇었다.

엘프들이 진심을 꺼낼 때만 보이는 예법. 나무줄기처럼 올곧이 자신을 드러내는 자세로 진의를 전해왔다.

이 순간 모든 엘프의 정신이 공명한다. 세계수가 구부러졌던 가지를 날개처럼 펼치며 투명한 잎을 흩날렸다.

아롱지는 햇살 아래 수백의 엘프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일족의 은인을 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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