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93화
라온이 참지 못하고 라스의 머리통에 꿀밤을 내리찍었다.
뻐어어억!
돌멩이가 깨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라스의 얼굴이 바닥에 처박혔다.
-가, 감히! 본왕을….
“널 안 씹어 먹는 걸 다행으로 알아!”
부들부들 떠는 라스에게 사납게 이를 들이 밀었다.
-끄으윽!
라스가 깜짝 놀란 듯 얼굴을 매만지며 뒤로 훌쩍 물러섰다.
“후우….”
라온이 한숨을 내쉬며 라스가 뱉은 불의 정령왕을 보았다. 처음 보았을 때와 달리 불의 기운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태어나자마자 죽이다니, 너무 하잖아.”
-보, 본왕이 계속 경고했지 않느냐. 물러나라고. 본왕의 말을 들어 먹지 않은 저놈이 문제이니라!
라스는 본인은 잘못 없다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다고 해도 적당히 패고 돌려보내면 되지. 이렇게까지 해야 하냐고.”
-본왕도 처음에는 매운맛만 보여주려고 했느니라.
“그런데?”
-자, 작아진 불쟁이 놈의 색이 구슬 아이스크림처럼 연하게 빛났느니라. 너무 맛있어 보여서….
녀석은 참을 수가 없었다며 입맛을 다셨다.
-어, 어쨌든 본왕의 잘못은 없느니라! 저 꼬맹이가 감히 계란으로 바위 치기를 해서 교육한 것뿐….
“너 평생 나딘빵만 먹고 싶지 않으면 입 다물어라.”
-흐으읍!
라스는 두 손을 입을 꼭 다문 채 머리를 박았다. 정신력으로 압박하는 것보다 음식 협박이 더 잘 먹힌다니, 어떻게 저게 분노의 마왕인지 모르겠다.
‘이걸 어쩐다….’
만약 불의 정령왕을 먹어서 죽였다는 게 들킨다면 엘프들을 살렸던 공적은 사라지고, 원수가 되어 평생을 쫓겨야 할지도 모른다. 그것만큼은 무조건 막아야 했다.
‘살릴 가능성만 있다면 뭐든 하겠는데… 음?’
입술을 깨물며 불의 정령왕을 살피는데, 꺼져가던 불씨가 아주 작게 일어섰다.
‘아직 죽지 않은 건가?’
미약하지만 구슬 속에서 자그마한 불꽃이 다시 타오르기 시작했다.
라온이 불의 정령왕이었던 구슬에 손을 뻗었다. 조금이지만 따스한 기운이 느껴지고 있었다.
‘이러면 살릴 수 있어.’
불의 정령왕이 내게 찾아온 이유는 계약을 위해서가 아니라, 본능적으로 선조의 기운을 느꼈기 때문이다.
만화공과 불의 고리를 이용한다면 분명 살릴 수 있을 것이다.
우우우웅!
만화공의 화염을 불의 고리로 정화하여 무엇보다도 순수한 불꽃을 응집시켰다. 조심스럽게 불의 정령왕을 잡고, 손가락 사이로 만화공의 불길을 일으켰다.
화아아아아아!
불의 정령왕 주변으로 연한 금색의 불꽃이 스며든다. 정오의 햇살이 저녁의 노을과 마주치는 듯한 광채가 피어났다.
라온은 가늘게 호흡하는 불의 정령왕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살아나고 있어.’
사탕 크기만 했던 불의 정령왕은 만화공의 불꽃을 흡수하며 조금씩 크기를 키워가고 있었다.
라스에게 얻어터졌다고 해도 왕이라는 격은 어디로 가지 않았는지 불의 정령왕은 순식간에 어린아이의 크기만큼 성장했다.
‘모습이 다르군.’
불의 정령왕은 홍염귀가 쓰고 있던 도마뱀 투구와 달리 인간 남성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굉장한 미남이었는데, 눈썹이 날카롭게 내려가 있어 인상이 사나워 보였다.
“으음….”
불의 정령왕이 천천히 눈을 뜬다. 인간과 다르고, 파충류와도 다르다. 반으로 갈라진 듯한 매서운 눈동자가 이쪽을 향해 움직였다.
“하아….”
라온이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살았어.’
불의 정령왕의 기운도 본래대로 돌아왔다. 엘프와 정령들의 원수가 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었다.
“정신이 드십니까?”
“인…간?”
불의 정령왕은 아직 상황이 파악되지 않은 듯 멍하니 눈을 끔벅였다. 마왕에게 씹어 먹히다가 살아남았으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이상할 정도로 친숙한 기운….”
그가 라온과 눈을 마주치며 상체를 일으켰다.
“맞아. 난 그 기운을 쫓아서 너를 찾아갔었다.”
불의 정령왕은 본능적으로 라온에게 끌려갔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반말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정령왕이고 정신도 어지러울 테니, 그냥 놔두었다.
“하지만 네 안에는 괴물이 있었다. 왕으로 태어난 나도 감당할 수 없는 악독하고 거대한 힘. 그저 발버둥 치는 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지.”
그는 라온을 구하기 위해서 싸웠지만 패배했다며 고개를 떨궜다.
-본왕은 괴물이 아니니라!
찌그러졌던 라스가 벌떡 일어났다.
-마계의 군… 흐읍!
라온은 다급하게 달려가서 라스의 입을 틀어막았다.
“…….”
하지만 이미 불의 정령왕의 눈동자는 라스에게 향해 있었다.
“흐어어억!”
불의 정령왕은 맹수를 본 사슴처럼 전신을 떨며 허겁지겁 뒤로 물러났다.
“저놈! 저놈이다! 저 괴물이 왜 여기까지!”
그는 불의 정령왕답지 않게 얼굴이 시퍼렇게 질려갔다. 라스의 모습이 아니라, 기운만을 느끼는 것 같았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라온이 라스를 공처럼 튕기며 고개를 저었다.
“얘 지금은 아무것도 못 하니까.”
-못하다니! 본왕을 무시하지 말….
“나딘빵.”
-흐읍!
라스는 나딘빵이라는 이름이 나오자마자 다시 입을 꼭 다물었다.
“어…?”
불의 정령왕은 라온의 손아귀에서 꼼짝도 못하는 라스를 보며 눈을 부릅떴다.
‘뭐, 뭐야….’
저 괴물이 왜 가만히 있는 거지?
불의 왕으로 태어난 자신을 힘으로 압도했던 괴물이 인간에게 막혀 있다는 게 믿기질 않았다.
“이 녀석은 신경 쓰지 마세요.”
라온은 라스를 뒤로 밀어버리고서 고개를 저었다.
“몸은 괜찮으세요?”
“나, 나딘빵?”
불의 정령왕은 조금 전 라온이 말했던 나딘빵이라는 단어를 그대로 외쳤다.
-어어엉?
라스가 라온의 어깨 위로 얼굴을 들이 민 채 미간을 구겼다.
-야이! 불쟁이 새끼야! 진짜 뒈지고 싶은 것이냐? 이 얌생이 놈이 아니었으면 넌 본왕에게 씹혀서 죽었느니라!
“흐어어억!”
불의 정령왕은 라스에게 씹어 먹히던 기억이 떠올랐는지 팔다리를 웅크린 채 뒤로 자빠졌다.
-아예 뼈를 발라 먹을….
“나딘빵.”
라스는 불의 정령왕을 다시 먹어 치우려는 듯 빠르게 날아가다가 라온이 나딘빵이라고 외치자마자, 허공에서 움직임을 뚝 멈췄다.
관성조차 무시하는 나딘빵의 힘이었다.
-비, 빌어먹을….
“가만히 있으라고 했지.”
라온은 라스의 꼬리를 잡아서 뒤로 던지고, 불의 정령왕에게 다가갔다.
“말했듯이 쟤는 신경 쓰지 말고….”
“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불의 정령왕은 조금 전과 달리 말을 높이고 자세를 바로 했다.
“네?”
“인간이 분명한데, 어떻게 저 괴물을 조련하신 겁니까?”
-조, 조련? 저게 진짜 미쳤나! 본왕을 조련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쓰읍!”
-끄응….
라온이 입맛을 다시자, 라스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허….”
불의 정령왕이 입을 떡 벌린 채 고개를 떨었다. 경악을 넘어서 공포를 느끼는 듯했다.
“저는 라온 지그하르트. 평범한 인간입니다.”
“펴, 평범?”
“예.”
라온이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와 함께 태어난 물의 정령왕보다도 더 거대한 냉기를 지닌 괴물을 잡았는데 어떻게 평범하다는 겁니까!”
불의 정령왕은 아무리 본인이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고 해도 차원의 상식은 가지고 있다며 고개를 저었다.
라온은 턱을 떠는 불의 정령왕을 보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다행히 라스를 모르는군.’
상식은 가지고 태어나도 경험은 없기에 라스의 정체에 대해서까지는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말씀해주십시오. 저 괴물을 대체 어떻게 굴복시키신 겁니까.”
“정신력 싸움입니다.”
라온이 짧게 입맛을 다시며 라스의 머리를 두드렸다.
“냉기를 가지고 덤벼오는 이 녀석의 기운을 정신력으로 버텨내서 이겼죠.”
“그, 그걸 어떻게 버티는….”
불의 정령왕은 영혼이 바스러질 것 같은 고통을 어떻게 버틸 수 있었냐며 입을 떡 벌렸다.
“비법이 있다면 알려주십시오!”
“그냥 참는 거죠. 다른 방법이 있겠습니까?”
라온은 별거 아니라며 손을 저었다.
-흥! 저 인간은 독종 중에 독종이니라! 네놈 따위는 죽었다 깨어나도 안 돼!
라스는 쓸데없는 노력하지 말라며 콧방귀를 뀌었다.
“아….”
불의 정령왕은 한참 동안 라온을 바라보다가 떨리던 손으로 바닥을 짚고 머리를 박았다.
“따르겠습니다!”
-어어엉?
라스가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괴성을 질렀다.
“인간들은 존경할 만한 이를 형님이라 부른다는 기록이 있더군요. 앞으로 형님으로 모시겠습니다!”
불의 정령왕은 다시 머리를 박으며 받아달라 외쳤다.
“하….”
라온은 떨리는 불의 정령왕의 뒤통수를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아무래도 라스가 또 호구 짓을 해준 것 같았다.
* * *
라온은 불의 정령왕을 진정시킨 후에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저는 왕께서 따를 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불의 정령왕은 내가 라스에게 당하고 있는 줄 알고 끝까지 싸웠다고 말했다. 나름 선한 정령왕 같았기에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아닙니다! 저를 저 마귀의 주둥이에서 꺼내주신 것만으로도 따를 가치가 있습니다!”
아무래도 이 정령왕은 첫 단추를 단단히 잘못 꿴 것 같았다.
“제 이름은 이프리트! 라온 형님을 평생 따르겠습니다!”
“이프리트?”
라온이 불의 정령왕의 이름을 들으며 눈매를 찡그렸다.
“전대 불의 정령왕의 이름도 이프리트였을 텐데….”
“이프리트는 불의 정령왕 자체를 뜻하는 이름입니다. 그 이름을 받아야 불의 힘도 이어지지요.”
이프리트는 본래 정령왕은 그렇게 태어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흠….”
라온이 턱을 매만지던 손을 앞으로 내밀고 만화공의 불꽃을 일으켰다.
“혹시 이 불꽃을 보고 떠오르는 게 있습니까?”
“그립다는 느낌이 듭니다. 제가 형님을 쫓아간 것도 그 감정을 느꼈기 때문이었죠.”
이프리트는 신기한 기분이라며 옅게 웃었다. 그는 예상대로 내 불꽃을 선조의 것이라 느끼고 찾아온 거였다.
“아무래도 형님과 저는 전생에서부터 이어져 있는 듯합니다.”
갓 태어난 주제에 그립다는 말이나, 전생을 꺼내는 게 신기했다.
“일단 형님 소리 좀 하지 말고….”
“형님께 작은 선물을 드리지요.”
이프리트가 들어 올린 손가락에서 작은 불씨가 날아가 내 가슴에 닿았다.
화아아아아아!
따스한 불길은 막을 새도 없이 전신으로 번지다가 마나회로 내부로 스며들었다.
“이건….”
“계약자를 키울 때 사용하는 비은의 불입니다.”
“비은의 불?”
“그 불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면 라온 형님의 불꽃은 새로운 경지에 닿을 겁니다.”
“그게 무슨 말인지….”
“그 이상 말하면 효과가 반감됩니다. 스스로 깨달아야 본래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죠.”
이프리트는 모두 말해주면 효과가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형님과 함께 하고 싶지만, 지금도 계속 정령계에서 호출이 오고 있습니다. 저와 엘라임이 없던 시간 동안 많은 것이 무너졌던 것 같군요.”
“아….”
스테린이나, 에리안, 리메르도 정령왕 둘이 사라져서 정령계의 균형이 어그러졌다고 했었다. 아무래도 다른 정령왕들이 계속 이프리트를 부르고 있는 것 같았다.
“곧 다시 볼 수 있을 겁니다.”
이프리트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고서 작은 불씨가 되어 사라졌다.
“후….”
라온은 이프리트가 사라지자마자 한숨을 내쉬며 뒤로 자빠졌다.
‘정신이 없네.’
마왕은 불의 정령왕을 씹어먹었고, 간신히 살려놓은 정령왕은 날 형님으로 모시겠다고 했다. 이 상황이 꿈만 같았다.
-커흠….
라스가 눈을 찡그리며 다가와서 손을 툭툭 쳤다.
-다 본왕 덕분인 거 알지? 네놈 따위가 언제 저런 불쟁이의 형님이 되겠느냐.
녀석은 고마운 줄 알라며 콧대를 높였다.
“…….”
라온은 말없이 라스의 머리와 꼬리를 잡고 빨래를 짜듯이 쭉 늘렸다.
-끄에에에엑!
“대체 언제까지 사고를 칠거야!”
-보, 본왕은 그저 본왕의 집을 지켜내려고 했을 뿐이니라!
녀석은 불법침입을 한 불의 정령왕을 밀어냈을 뿐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음….”
라온이 라스를 놓아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틀린 말은 아니네.’
라스 입장에서는 갑자기 불의 정령왕이 끼어들었으니, 본인과 나를 구하기 위해 힘을 썼던 것 같았다. 물론 정령왕을 먹으려고 한 건 미친 짓이지만.
-그리고.
라스가 라온을 보며 눈동자를 부라렸다.
-이제 네놈도 본왕에게 까불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엉?’
-본왕은 이제 새로운 힘을 얻었느니라.
‘새로운 힘?’
-평소라면 거들떠보지도 않았겠지만, 네놈을 이기기 위해 저 불쟁이의 기운을 그대로 받아들였느니라!
그 말과 함께 라스의 오동통한 손아귀 위로 홍색의 불길이 타올랐다.
-본왕은 더 이상 냉기만이 아니라 불꽃도….
‘하아….’
라온은 자신감에 찬 라스의 얼굴을 보며 관자놀이를 매만졌다.
‘네 냉기보다 화력이 밀리는 불꽃을 써서 뭐하게.’
-어…?
‘거기다 난 화속성 저항력도 꽤 높아. 해볼래?’
덤비라고 말하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피이익….
라스의 손에서 타오르던 불꽃이 훅 꺼졌다. 녀석은 어깨를 부들부들 떨며 주저앉았다.
-빌어먹을….
라온이 어이가 없어서 웃고 있을 때였다. 바닥이 들썩이다가 푹 꺼지더니, 털에 흙이 덕지덕지 낀 아기 여우가 튀어나왔다.
-흐어억! 광녀!
라스가 깜짝 놀라더니, 뒤로 훌쩍 물러섰다.
“멀린!”
“무사했구나!”
멀린이 방긋 웃으며 앞발을 까딱거렸다. 힘을 회복했는지 이전에 보았을 때보다 목소리에 활력이 깃들어 있었다.
“걱정 많이 했어.”
그녀는 나서고 싶어도 나설 힘이 없었다며 미안하다고 중얼거렸다.
“아니, 내가 움직이지 말라고 했잖아.”
에덴과의 싸움이었고 다른 곳에서 누군가가 지켜볼 수도 있기에 멀린에게는 절대 나서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었다.
“넌 괜찮아?”
“응. 쉬니까 괜찮아졌어.”
멀린은 지금은 팔팔하다며 볼에 홍조를 띄웠다.
“에덴 쪽은 어때? 다 물러났어?”
“원래 홍염귀를 위한 작전이었는데, 그가 죽었으니, 다 끝난 거지.”
그녀는 이번 일은 홍염귀를 성장시키기 위한 일이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타천이 꽤나 열 받았겠군.”
“그런 거 같아. 지금 인상을 쓰고 있거든.”
“지, 지금 인상을 쓰고 있다고?”
“응.”
멀린이 방긋 웃으며 앞발로 바닥을 긁었다.
“지금 회의 중이야.”
* * *.
사시사철 붉은 태양이 떠 있던 푸른 해안의 하늘이 어둑하게 가라앉았다.
고풍스러운 목제 책상에 앉아 있던 타천이 우측으로 눈동자를 돌렸다.
“…그래서 다 죽었다는 겁니까? 그것도 라온 지그하르트에게?”
“그, 그렇습니다.”
녹색 눈동자가 그려진 가면을 쓴 녹안귀가 고개를 끄덕였다.
“…….”
타천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세상에 다시없을 미청년의 얼굴이 새겨진 가면이 묘한 빛으로 일렁였다.
“적귀사야 책임자로 갔으니, 무력 자체는 높지 않아서 죽은 게 이해됩니다. 하지만 카산드라는 그랜드 마스터고, 홍염귀는 말할 것도 없죠.”
그가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세계수의 결계를 흡수한 홍염귀는 그랜드 마스터 상급에 도달했을 터. 그걸 라온 지그하르트가 베었다는 게 믿기지 않는군요.”
“라, 라온 지그하르트만 싸운 건 아닙니다. 무능아라고 생각했던 하이엘프 시얀이 물의 정령왕을 소환했습니다.”
“갓 태어난 정령왕이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는 없었을 겁니다. 결국 라온 지그하르트가 모든 일을 망쳤다는 뜻이겠지요.”
타천이 연한 웃음 속에 살의를 둘렀다.
“음, 그러고 보니 조금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상한 점?”
“라온 지그하르트는 세이피아에 손님으로 갔을 텐데, 그 스스로 정찰을 하고, 다른 가디언보다 더 빠르게 전장에 나타났습니다.”
녹안귀는 그게 조금 이상했다며 고개를 숙였다.
“…….”
타천은 턱을 매만지다가 우측으로 시선을 돌렸다.
“멀린.”
그의 시선이 일광욕하듯 모래사장 위에 누워 있던 멀린에게 향했다.
“혹시 아는 거 없으십니까?”
요요로운 시선에 쓸린 멀린의 눈꺼풀이 자연스레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