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91화
시얀은 자신을 들고 있는 거대한 여자를 보며 눈을 부릅떴다. 자연에 가깝다는 정령보다 훨씬 더 순수한 물의 기운을 간직한 자. 처음 보지만 몰라볼 수가 없는 존재였다.
“무, 물의 정령왕!”
물의 정령왕은 맞다는 듯이 부드럽게 웃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애잔함과 씁쓸함이 느껴지는 미소였다.
“도, 도와주세요!”
시얀이 물의 정령왕의 손가락을 잡으며 무릎을 꿇었다.
“제발! 모두를 살려주세요!”
내가 원하는 건 적을 죽이는 것도, 내가 살아남는 것도 아니다.
지금까지 내가 무시했던 동족들을, 나를 믿고 기다려준 가족들을 살리고 싶었다.
“…….”
물의 정령왕은 시얀의 눈동자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손을 뻗자 오직 재만 가득했던 하늘이 푸른빛으로 명멸하며 투명한 빗방울을 뿌렸다.
얼굴이 비쳐 보일 정도로 깨끗한 빗물이 쏟아지자, 죽어가던 엘프들의 안색에 생기가 차오른다. 목숨을 버리며 길을 열던 대장로와 장로들의 깊은 화상도 천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이건 평범한 물이 아니다. 생명의 원천. 모든 것을 태운다는 이프리트의 홍염처럼 죽은 자도 살린다는 물의 정령왕의 월수였다.
치이이이익!
월수로 이루어진 빗물은 그저 엘프들을 살리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무슨 짓을 해도 꺼지지 않았던 홍염을 가라앉히고, 지독한 열기를 지워버렸다.
열기 때문에 검게 죽어가던 스테린의 안색도 조금이나마 편해진 듯 보였다.
“하아….”
시얀이 물의 정령왕의 손에 털썩 주저앉으며 지친 숨을 내뱉었다.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월수 때문에 죽음을 앞에 둔 이들이 살아나고 있었다. 정령왕을 소환했다는 기쁨보다 동족들을 살릴 수 있다는 게 기뻤다.
시얀이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은 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동족들은 하나 같이 찢어질 듯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모두가 본능적으로 정령왕의 존재를 깨달은 것이다.
나를 지켜보고 기다려주던 엘프들도, 나를 무시했던 엘프들도 모두 경악하여 전신을 떨고 있었다.
대장로와 장로들의 얼굴은 경악과 미소가 공존했다. 목숨을 걸고 살리려던 내가 갑자기 정령왕을 소환했으니, 당혹스러우면서도 기쁜 것 같았다.
‘꿈에서 그리던 표정들이네.’
평생을 무시당하고 살았다고 생각했기에 저렇게 동족들이 놀라는 표정을 매일 같이 꿈꿨었다.
언젠가 공명을 이룬 후 모두를 비웃어주겠다고 생각했는데, 대장로의 말을 듣고 난 후 그런 마음가짐은 완전히 지워졌다.
그저 모두를 살릴 수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떨리는 다리에 힘을 줘서 몸을 일으켰다. 홍염귀와 라온도 전투를 멈추고, 이쪽을 보며 입을 떡 벌리고 있었다.
시얀은 동그래진 라온의 눈동자를 보며 연한 웃음을 그렸다.
‘라온 님 덕분이에요.’
내가 용기를 낼 수 있게 된 건, 포기하지 않게 된 건 라온 때문이었다. 그를 만나지 못했다면 아직도 이불 속에서 떨고 있었을 것이다.
‘정말 고마….’
그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려 할 때였다. 물의 정령왕을 소환했을 때처럼 다시 가슴 부근이 아려 왔다.
다만 이전과는 다르게 폭급할 정도의 열기가 느껴졌다.
“아아아악!”
시얀이 끓어오르는 열기를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지른 순간 그녀의 가슴에서 홍염귀의 불꽃보다 더 진한 화염의 광휘가 라온을 향해 쏟아져 내렸다.
* * *
라온은 자신의 몸을 휘감는 홍염을 만지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뜨겁지 않아.’
홍염귀보다 더 순수한 불의 기운이 느껴지고 있지만, 조금의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뜨겁다기보다 따스한 느낌. 모닥불이 몸을 데워주는 기분이었다.
다만 홍색의 불길이 내게 전해주는 건 그저 온기만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오러가 빠진 육체 내부로 강대한 불의 기운을 밀어 넣고 있었다.
쿠구구구구구!
말라붙었던 마나 회로에 새로운 활력이 치솟고, 다 비어버린 단전에 거대한 불씨가 타올랐다.
물의 정령왕의 손 위에 서 있는 시얀을 바라보았다. 시얀의 몸에 세계수를 살린 선조의 구슬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맞는 것 같았다.
‘물론 그 구슬이 정령왕일 줄은 몰랐지만….’
라온이 점점 색이 짙어지는 불길을 보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지금 내 몸에 들어오는 게 당대의 불의 정령왕인가.’
전대의 불의 정령왕 이프리트는 에덴의 투구로 이어졌고, 지금 내 몸에 들어오는 이 거대한 존재가 새로운 불의 정령왕 같았다.
“크으으으!”
홍염귀도 이런 상황은 예측하지 못한 듯 당황하여 입술을 떨었다. 투구 속으로 보이는 놈의 눈동자에서 광기가 타올랐다.
콰아아아아아!
홍염귀는 나를 단숨에 태워버리겠다는 칼날처럼 예리하게 응집시킨 불길을 내질렀다.
라온이 쇄도해오는 불꽃의 검을 보며 눈매를 찡그렸다.
‘피해야… 음?’
지금의 몸 상태로는 버틸 수 없는 공세라서 회피하려고 할 때 새로운 불의 정령왕이 일으킨 화염이 벽처럼 솟구쳐서 앞을 막아주었다.
쿠와아아앙!
홍염의 칼날과 홍염의 벽이 맞부딪치며 시뻘건 불길이 사위를 휩쓸었다.
간신히 생기를 되찾은 대지에 불길이 타오르려 했지만, 물의 정령왕이 뿌려준 월수 덕분에 열기는 금세 가라앉았다.
“빌어먹을….”
홍염귀는 본인의 불길을 막는 두 정령왕을 보며 바드득 이를 갈았다,
“으하하하하하!”
뒤늦게 복귀한 에리안은 라온을 보며 광소를 터트렸다.
“내가 말했지! 저 녀석이 정령왕의 계약자라고! 내 말이 맞잖아!”
그는 멍하니 선 엘프들의 어깨를 두드리며 본인이 옳았다고 소리쳤다.
“저, 정말인가? 정말 불의 정령왕이 저 인간에게?”
“마, 말도 안 돼….”
“저 홍색의 불길을 봐. 홍염귀의 불꽃보다 더 진하다고! 정령왕이 맞아!”
“시얀 님은 그렇다 쳐도 인간에게 정령왕이라니….”
엘프들은 에리안과 달리 당황하여 눈동자를 떨었다.
라온은 엘프들이 뭐라고 하든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스스로의 상태를 확인하느라 바빴다.
‘지금 정령왕은 이성이 없어.’
시얀을 보호하는 물의 정령왕과 달리 내게 들어온 불의 정령왕은 제대로 된 사고를 하지 않고,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지금 막 태어났기 때문인 것 같았다.
‘지그하르트의 선조의 영향인가?’
정령왕은 선조가 남긴 불의 고리나 만화공의 기운을 따라서 내게 붙은 게 분명해 보였다.
‘이건 기회야.’
내 기운은 거의 바닥이지만, 정령왕이 전해주는 기운을 이용한다면 홍염귀와 싸울 수 있을 것 같았다.
‘해보자.’
입술을 꾹 씹으며 신검과 마검을 세웠다. 정령왕이 전해주는 불의 기운을 만화공처럼 이용하기 위해 불의 고리를 운용했다.
쿠구구구구구구!
불의 고리가 공명하며 정령왕의 기운을 자연스레 이끌어 갈 때였다. 좌측 어깨에서부터 오싹하리만큼 냉랭한 기운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감히!
라스였다. 녀석이 두툼한 주먹을 들어 올리며 괴성을 질렀다.
-이 얌생이의 육체는 본왕의 것이니라! 갓 태어난 불쟁이 주제에 새치기를 하려는 것이냐!
‘자, 잠깐만!’
-닥쳐! 굴러온 돌 따위는 깨부숴버려야 하느니라!
라스는 절대 용납할 수 없다며 어마어마한 양의 분노와 냉기를 일으켰다.
쿠구구구구!
불의 정령왕도 라스의 기운에 위협을 느낀 듯 처음보다 더 매서운 열기를 뿜어냈다.
‘크으윽….’
왼쪽에서 파고드는 라스의 냉기와 오른쪽에서 타오르는 불의 기운이 경합하자 단전을 칼로 저미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찌지지지지직!
외부에서는 홍염귀의 불길이, 내부에서는 라스와 정령왕의 기운이 맞부딪혀서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정말 죽을 맛이었다.
‘죽고 싶을 정도로 아프지만….’
라온이 피나도록 입술을 씹으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 힘은 이용할 수 있어.’
만화공 덕분에 불꽃과는 본래부터 친숙했고, 라스의 기운은 익숙하다 못해 편할 지경이었다.
두 기운 모두 내 것처럼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회전이 가라앉는 불의 고리를 다시 휘돌렸다. 영혼의 격을 한계까지 높이면서 단전과 마나회로에서 경합하는 기운을 다잡았다.
왼손에서 타오르는 서리의 마검에 라스의 냉기를 담고, 오른손에서 명멸하는 신검에 정령왕의 불꽃을 입혔다.
쿠와아아아아아!
신검과 마검이 처음 검계를 열었을 때보다 두 배는 격하고 찬란한 빛을 뿌렸다. 어둑한 밤이 가라앉고, 낮이 되살아난 듯했다.
라온이 신검과 마검으로 홍염귀를 겨눈 채 입술을 말아 올렸다. 마왕과 정령왕이 다투는 덕에 몸은 갈기갈기 찢어질 것 같았지만, 티를 내지 않고 미소를 그렸다.
“끝을 낼 시간이다.”
“닥쳐라!”
홍염귀가 바드득 이를 갈며 사나운 불길을 뿜어냈다.
“남의 힘으로 강해진 버러지 따위가!”
“그건 네놈도 마찬가지지.”
마검의 냉기로 쇄도해오는 홍염귀의 불꽃을 갈랐다.
콰아아아아아!
절대 꺼지지 않는다는 홍염이 라스의 냉기에 닿자마자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녹아내렸다.
“이, 이게….”
불꽃을 쫓고 있던 홍염귀의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렸다.
“이걸로 놀라면 곤란해.”
라온이 홍염귀의 간격으로 파고들었다. 놈의 빈틈 사이로 신검의 칼날을 들이밀었다.
피이이이익!
금빛과 홍색이 뒤섞인 불꽃이 홍염귀를 보호하는 화염의 방패를 뚫고 놈의 어깨에 처박혔다.
찌지지지직!
이전과 달랐다. 정령화를 이룬 놈의 어깨에서 불꽃과 핏물이 동시에 새어 나왔다.
“끄으으으윽! 이놈이!”
홍염귀는 피가 흘러내리는 어깨를 감싸 쥔 채 뒤로 물러섰다. 떨리는 눈동자와 달리 살기는 더욱 짙어졌다.
터어엉!
라온이 검게 타버린 대지를 내디디며 홍염귀에게 따라붙었다.
“이이익!”
홍염귀가 팔을 마구잡이로 휘두르며 불꽃의 창을 뿌려댔다. 난잡한 듯 보이지만 하나하나가 필살의 위력이 담긴 불꽃이었다.
신검에 광아검의 묘리를 담고, 마검으로 설풍검결의 무리를 펼쳤다. 두 검로가 한 호흡처럼 뻗어나가며 아롱져 떨어지는 달빛과 이어졌다.
쩌어어어어억!
홍염귀가 전력으로 펼쳐낸 불꽃의 창날들이 벚꽃처럼 추락하여 가라앉는다. 힘을 다한 듯 놈의 불꽃은 수풀조차 태우지 못했다.
“흐으으….”
홍염귀는 본인의 불길이 사그라드는 것을 보며 이빨을 딱딱 부딪쳤다.
라온은 홍염귀를 놀릴 새도 없이 태화보를 밟고 앞으로 나아갔다.
‘시간이 없어.’
지금의 이 초월적인 기운은 언제고 유지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정신력도 한계에 달했기에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다. 최대한 빠르게 끝을 봐야 했다.
쩌어어어어엉!
기습처럼 뻗어낸 마검이 홍염귀의 불꽃과 경합한다. 놈은 에덴의 귀신답게 세계수의 기운을 끝까지 빨아먹으며 남은 기운을 모조리 쏟아내고 있었다.
촤아아악!
마검을 뒤로 젖혀서 균형을 잡은 후 신검을 아래에서부터 쳐올렸다. 대지를 긁으면서 올라서는 불꽃이 홍염귀의 복부를 갈랐다.
“크아아아아아아!”
홍염귀는 배에서 피를 뿌리면서도 머리 위로 손을 들어 올렸다. 놈의 손아귀에서 치솟은 불꽃의 구체가 급격하게 번지며 태양처럼 거대한 화염구를 이뤘다.
찌지지지지직!
라온은 점점 더 거대해지는 불꽃의 구체를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어마어마한 열기 때문에 홍염귀에게 다가가기도 힘들 정도였다.
“모조리 죽여주마!”
홍염귀는 라온만이 아니라, 세계수 자체를 지워버리려는 듯 그 거대한 화염구를 단숨에 쏘아냈다. 구체에 닿는 대지가 지워지고, 맑아진 하늘이 깨질 것처럼 일그러졌다.
라온은 세계수만큼이나 거대해진 홍염귀의 화염구를 보며 두 검을 다잡았다.
‘버텨야 해….’
아직 내게는 호구들이 전해준 힘이 남아 있다. 아니 지금도 서로 싸우며 계속 차오르고 있었다.
쿠구구구구!
불의 정령왕이 일으킨 따스한 불길이 등을 밀어주었고.
-그만 꺼지거라! 본왕의 음식을 탐하지 말라!
호구의 왕 라스가 불의 정령왕보다 더 거센 냉기를 일으켰다.
라온은 그 두 기운을 신검과 마검에 응집시켰다. 두 힘을 직접 받는 게 아니라, 신검과 마검으로 보내고 있음에도 손아귀가 터져나가고 뼈가 부러질 것 같았다.
깨져나갈 것 같은 손목을 다잡고, 터질 듯한 마나회로를 억지로 안정시키며 신검과 마검을 그어 내렸다.
라온은 그 와중에도 힘에 모든 것을 맡기지 않았다. 내려치는 검날 속에 광아검과 설풍검결의 묘를 담아 홍염귀가 쏟아낸 화염구의 중심을 갈랐다.
쿠구구구구!
불길이 불길을 잡아먹고, 서리가 열기를 찢어발긴다.
분노의 군주와 당대 불의 정령왕의 화력은 초월을 향해 다가가는 홍염귀의 불길마저 잠재웠다.
쩌어어어어억!
가라앉는 화염구 사이로 보이는 홍염귀의 눈동자는 튀어나올 것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놈은 화염구에 너무 많은 힘을 담았는지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것 같았다.
‘끝이다.’
라온이 지친 육체를 이끌고 나아가 홍염귀의 목을 향해 마검을 내질렀다.
‘어…?’
하지만 생각도 하지 않았던 일이 벌어졌다.
한계에 달한 상단전이 닫히며 검계가 풀려버린 것이다. 마검의 길쭉한 칼날이 가라앉고, 얇고 짧은 진혼검의 칼날이 드러났다.
‘제기랄!’
팔을 끝까지 뻗고, 진혼검의 칼날에 오러를 밀어 넣었지만, 시간이 너무 짧았다. 짧은 단검의 칼날은 홍염귀의 목을 가늘게 스치고만 지나갔다.
“결국… 내 승리다!”
홍염귀는 긴장이 풀린 듯 포효를 내지르며 오른손을 뻗어왔다. 시야를 가리는 거대한 손아귀 속에서 시뻘건 불길이 일어섰다.
쿠와아아아아!
피부가 빨갛게 달아오르기도 전에 호흡이 가라앉는다. 정신력 역시 한계에 달해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질 않았다. 소용돌이치는 불꽃을 바라보고 있을 때 뒤편에서 날카로운 파공음이 들려왔다.
피이이이이이잉!
하늘에서 꺾여 날아온 푸른 화살이 다가오던 홍염귀의 팔을 그대로 날려버렸다.
“끄아아아아악!”
홍염귀는 갑작스러운 기습에 당황한 듯 어울리지 않는 비명을 터트리며 뒤로 물러섰다.
“지금이에요!”
목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다. 시얀. 자신감을 찾고 진정한 하이엘프가 된 그녀의 지원이었다.
라온이 혀를 씹었다. 쓰러질 듯 비틀거리는 정신을 다잡으며 왼발 진각을 밟았다.
아직도 육체 내부에서 경합하는 정령왕과 라스의 기운을 모두 오른손에 담았다.
쿠우우웅!
폭주하듯 솟구치는 기운을 하나로 응집시켰다. 뒤로 도망치는 홍염귀를 향해 부러질 정도로 진동하는 제천검을 내리쳤다.
쩌어어어어억!
홍염귀가 방어를 위해서 불길의 벽을 세웠지만, 불꽃과 서리로 달아오른 제천검의 칼날은 반항할 새도 없이 놈의 몸을 갈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