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590화 (589/653)

제590화

라온은 시뻘건 안광을 번뜩이는 홍염귀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세계수의 기운을 얼마나 빨아먹은 거지?’

눈앞에 있는 홍염귀는 대수림에서 싸웠던 홍염귀와 차원이 다른 존재가 되어 있었다.

검계를 열지 않고 마주 섰다면 저 강대한 열기에 질려 피부가 녹아내렸을 것이다.

‘저건 못 이겨….’

대수림에서 만났던 홍염귀라면 검계현신과 분노 개방을 이용하여 싸워볼 만했겠지만, 세계수의 기운을 먹어 치운 저놈은 절대 이길 수 없었다.

그렇기 도움이 필요했다.

-좋다! 본왕이 도와주겠느니라!

라스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본왕이 먹어 치워야 할 세계수를 저 불쟁이 놈이 태우고 있으니, 당장 본왕을 강림시켜라! 저놈을 얼음 조각으로 만들어 주겠느니라!

녀석은 빨리 몸을 내놓으라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너 말고.’

라온이 라스를 무시하고 뒤를 돌았다. 리메르의 창백한 안색을 보며 다시 한번 물어보았다.

“하실 수 있겠죠?”

“하….”

리메르는 라온의 담담한 눈동자를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도와준다가 아니라, 도와달라고?’

라온이 도와달라고 말한 이유는 간단했다. 이 전투를 본인의 것이라 여긴다는 뜻. 미안해할 필요도 없고, 물러서지도 않겠다는 의지였다.

‘거기다….’

저 말은 협박이기도 하지.

인간이 싸우는데, 정작 이 땅의 주인인 엘프가 놀아서 되겠냐는 협박이나 다름없었다.

‘이 녀석은 진짜….’

라온은 보면 볼수록 감탄을 불러일으키는 아이였다. 이제는 수하나, 제자가 아니라 나보다 더 격 높은 존재를 마주하는 느낌이었다.

“당연하지!”

리메르는 아려오는 복부의 통증을 내리누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빨리 끝내지 않으면 너나 나나 죽을 거다. 그건 알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라온이 뿌리가 타기 시작한 세계수를 보며 입술을 씹었다.

“공격은 제가 할 테니, 놈의 불길만 막아주십시오.”

“맡겨둬.”

리메르는 어떻게든 해보겠다며 나뭇잎 모양의 검을 다잡았다.

“벌레 둘을 합쳐봐야 벌레일 뿐이지.”

홍염귀가 라온과 리메르를 굽어보며 비웃음을 흘렸다.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벌레지만 맹독을 지녔으니까.”

“버러지가!”

놈이 미간을 찌푸리며 화염의 줄기를 뿌렸다. 불길이 채찍처럼 휘어져서 떨어지는 순간 태화보를 운용하며 땅을 박찼다.

“나도 불에는 자신 있거든.”

불의 고리를 극성으로 공명시켰다. 몰아치는 화염 채찍을 보법만으로 회피하며 홍염귀의 공간으로 들어섰다.

“누가 더 잘 태우는지 해보자고.”

왼손에 쥔 푸른 마검을 내질렀다. 은빛으로 명멸하는 서리의 칼날이 화염의 벽을 뚫어내고 홍염귀의 어깨를 향해 뻗어나갔다.

“불이라고 하더니.”

홍염귀가 코웃음을 치면서 손을 들어 올리자, 마검에 갈라졌던 불길이 다시 합쳐지며 강대한 파도를 일으켰다.

6성에 이른 화속성 저항력과 흑룡포의 보호를 뚫고 들어올 정도의 열기가 전신으로 번져왔다.

화상을 입는 듯한 통증에 미간을 찌푸릴 때 뒤편에서 진녹빛 바람이 불어왔다.

화아아아아아!

리메르다. 그가 일으킨 바람이 홍염귀의 열기를 밀어내고, 검이 파고들 공간을 만들어주었다.

‘역시 믿음직하다니까.’

도박판은 몰라도 전투에 있어서 만큼은 누구보다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라온의 오른손 신검에서 청아한 검명이 울린다. 태양이 깃든 듯 호쾌하게 뻗어나가는 금빛 불꽃이 홍염을 거칠게 밀어냈다.

홍염귀의 눈동자가 잘게 떨리는 순간 라온이 왼손 마검을 내리쳤다. 달빛처럼 유려하게 떨어지는 서리의 칼날이 놈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피이이익!

진짜 정령이 아니라, 정령의 힘을 입은 인간이었기에 놈의 어깨가 길게 갈라지고 붉은 핏물이 쏟아져 나왔다.

“말했지?”

라온이 홍염귀를 향해 손가락을 까딱였다.

“맹독이 있으니까 조심하라고.”

“고작 이따위 상처로 건방을 떨다니!”

홍염귀가 입매를 비틀며 어깨의 상처를 쓸어내렸다. 짙은 화염이 번쩍이더니, 검흔이 천천히 아물기 시작했다.

“네놈들의 검은 내게 닿을 수 없다!”

“벌써 닿았잖아.”

리메르가 아직 남아 있는 상처를 가리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생각보다 멍청하구나. 이럴 때는 죽이지 못한다고 하는 거야.”

“그러게요. 허세가 심하네.”

라온이 리메르의 말을 받으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옷 벗은 거부터 미친놈 같잖냐.”

“그런데 왜 바지는 입고 있을까요?”

“자신 없나 보지.”

리메르가 검을 뒤로 돌린 채 낄낄 웃었다.

“이놈들이!”

홍염귀는 잠시 본인의 바지를 내려다보다가 짐승 같은 포효를 내질렀다.

놈의 상체를 타고 솟구치는 열기에 흑룡포가 녹아내릴 것처럼 말려 올라갔다.

“딱 좋게 흥분했네!”

리메르는 열기를 두려워하지 말고 나아가라는 듯 강대한 바람을 일으켜주었다.

터어엉!

라온은 열기를 짓누르고, 등을 밀어주는 리메르의 바람을 타고 홍염귀에게 쇄도했다.

“꺼져라!”

홍염귀가 두터운 손을 뻗자, 놈이 두르고 있던 불길이 거대한 용오름이 되어 솟구쳤다.

라온은 뒤에 있는 리메르를 믿으며 불꽃의 용오름 속으로 들어섰다.

쩌어어어엉!

불꽃과 서리를 담은 칼날이 홍염귀의 화염과 맞부딪치며 무시무시한 충격파를 일으켰다. 대지 깊숙이 뿌리를 막아 넣은 세계수가 흔들릴 정도의 진동이었다.

‘이래도 안 되는 건가….’

신검과 마검이 홍염귀의 불길에 밀려 나간다. 흑룡포의 끝단이 재가 되어 타오를 때 청아한 바람이 불어왔다.

폭풍을 잘게 쪼갠 듯한 바람은 살아 있는 듯 요동치며 신검의 불꽃과 마검의 서리는 살리고, 홍염귀의 불길을 짓눌렀다.

“방해하지 마라!”

홍염귀가 짜증이 돋은 듯 리메르를 향해 불꽃으로 이루어진 창을 쏘아냈다.

‘지금이다.’

저 괴물은 이 순간에도 세계수의 기운을 먹어 치우며 강해지고 있다. 리메르에게 정신이 팔린 지금 확실하게 끝을 내야 했다.

라온이 마검의 검극에 서리를 응집시킨 채 내질렀다.

분노의 군주 결전기.

설화마검.

쩌저저저저적!

설화마장을 검으로 운용한 검격이 홍염귀를 보호하는 불꽃의 방패를 통째로 얼려버렸다.

은색의 섬광이 시야를 가득 채우며 불길을 녹여버릴 때 오른손 신검을 튕겼다.

만화공 천화.

무금향.

신검의 칼날이 대나무 줄기처럼 갈라지며 금빛 불길로 이루어진 감옥을 만들었다.

콰아아아아아!

홍염귀는 불길의 창살이 모여드는 모습을 보고서도 여유를 잃지 않았다.

“이까짓 불꽃은 내게 통하지 않는다!”

놈이 비웃음을 흘리며 무금향의 불길을 손아귀로 뜯어냈다.

라온은 그 모습을 보면서도 당황하지 않고, 입가에 웃음을 띄웠다. 처음부터 이 순간을 노리고 있었으니까.

쿠우우웅!

분노를 개방했다. 불의 고리를 극성으로 휘돌리며 지금 사용할 수 있는 최강의 검세를 일으켰다.

라온 지그하르트류 검식.

제6형 신마조화결 연계기 청홍무적검.

신검의 불꽃과 마검의 서리가 장대한 서광과 함께 타오른다.

신념을 담아낸 두 자루의 칼날이 홍염귀가 만들어낸 불꽃을 가르고, 놈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크아아아아!”

하지만 홍염귀는 쉽사리 숨통을 내어주지 않았다. 갈라진 놈의 육체에서 불길이 타오르며 신검과 마검의 칼날을 밀어냈다.

“먹히고 있어! 계속 나아가!”

리메르는 홍염귀의 창에 허리가 베였음에도 계속 공격하라며 신검과 마검을 살리는 바람을 보내주었다.

다만 라온은 리메르의 기운을 받고 있음에도 점점 표정이 굳어졌다.

‘이 자식….’

변하고 있어.

홍염귀의 육체에 칼날이 박혀 있음에도 사람을 베는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카산드라가 소환했던 어둠의 정령을 벨 때의 느낌. 아무래도 홍염귀가 정령에 가까워지고 있는 것 같았다.

‘더 변하기 전에 지금 끝을 내야 해.’

라온이 부러지도록 이를 갈며 더 깊은 분노를 일으켰다. 무리하더라도 지금 확실하게 꺾어야 했다.

“크아아아아아!”

꺾여나갈 것 같은 손목에 힘을 주며 신검과 마검을 끝까지 내리그었다.

쩌저저저저적!

불꽃과 서리가 벼락처럼 치고 나가며 홍염귀의 불길을 가르고, 놈의 육체를 찢어발겼다.

“됐어!”

뒤에서 리메르의 흥분한 외침이 들려왔지만, 라온은 웃지 못했다.

“제기랄….”

베었지만, 베지 못했다.

홍염귀는 세계수의 뿌리에서 나온 기운을 흡수하여 정령화를 완성했다.

놈의 육체에서는 피가 아니라, 불꽃만이 번지고 있었다. 큰 충격을 입은 건 분명했지만, 실체 육체와 달랐기에 죽을 상처는 절대 아니었다.

“이런….”

리메르도 이제 홍염귀의 상태를 알아차린 듯 마른 입술을 떨었다.

라온은 불꽃으로 육체를 재생시키는 홍염귀를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문제는 저놈이 아니라, 이쪽이야.’

조금 전 청홍무적검과 분노 개방을 사용하며 상당한 양의 의념과 오러를 소모했다.

이제 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거기다….’

뒤에 있는 리메르도 한계에 도달했다. 솔직히 말해서 결과가 보이는 싸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끝났다.”

홍염귀가 거만한 눈빛을 드러내며 턱을 모로 틀었다.

“네놈들은 힘이 다했고, 나는 지금도 강해지고 있지.”

그가 검흔이 완벽하게 지워진 가슴을 쓸어내리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이제 남은 건 절망뿐이다.”

“착각이 심하네.”

라온이 핏기 없는 미소를 그리며 신검과 마검을 세웠다.

“나는 지금부터 시작이거든.”

“허세는….”

“허세인지 아닌지는 나중에 알게 될 거야.”

*     *      *

시얀은 거대한 불길에 맞서는 라온과 리메르의 등을 보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 이기는 건가?’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라온이 홍염귀를 압박하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이대로 가면 승리할 것만 같았다.

뒤편으로 시선을 돌렸다.

가디언과 엘프들은 세계수를 공격해오는 에덴의 귀신들과 잿빛 피부의 엘프들과 싸우느라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적들의 공세가 너무 거세서 쓰러지는 엘프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조금만 버텨줘.’

라온과 리메르라면 금방 저 괴물을 죽이고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온다면 이 전투는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아아아아아!”

청아한 음률을 들은 시얀이 우측으로 시선을 돌렸다. 양갈래 머리를 한 아이가 유려한 노랫말을 읊조리며 전장을 질주하고 있었다.

그녀의 노래는 아군들에게 활력을 주었고, 적들에게는 감각의 혼란을 불러왔다.

무력으로 따지자면 그리 대단하지 않았지만, 영향력만큼은 발군이었다.

아이를 지키며 싸우는 녹색 머리의 인간도 특이했다. 배에 있는 주머니에서 치료약과 화살을 꺼내주면서 신묘한 검술로 적을 베어나갔다.

다만 뛰어난 무력과 달리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보면 겁이 많아 보이는데, 그의 검과 다리는 절대 멈추지 않았다.

‘저 두 사람은….’

도리안과 유아. 둘 모두 라온을 따라온 인간들이다.

라온 지그하르트 전기에서 활약은커녕 간신히 이름이나 나오는 사람들인데, 지금 이곳에서는 누구보다 용맹하게 전장을 누비고 있었다.

‘나, 나도….’

오러도 다루지 못하고, 정령도 소환하지 못하지만, 활만큼은 자신 있었다.

시얀이 바닥에 떨어진 나무 활을 주워 들었다. 작게나마 도움을 보태려고 하는데, 옆에 있던 대장로가 그녀의 손을 막았다.

“대, 대장로님.”

“시얀님은….”

대장로의 눈동자가 사납게 번들거렸다. 혼난다는 생각이 눈을 질끈 감았지만, 그의 목소리는 너무도 낮고 힘없게 가라앉아 있었다.

“도, 도망치십시오.”

“네?”

갑자기 도망치라고 하니, 머리가 돌아가지 않아서 눈을 끔벅였다.

“그, 그게 무슨….”

“지금 당장 여기서 도망치라는 말입니다.”

대장로는 내상 때문인지 입에서 피를 토하면서 손을 저었다.

“지, 지금 다 싸우고 있는데 제가 왜 도망을 쳐요! 곧 라온 님이 오실….”

“못 이깁니다.”

그가 덜덜 떠는 손가락을 들어서 라온과 리메르, 홍염귀가 싸우는 전장을 가리켰다.

“저 괴물은 이미 세계수의 기운을 받아들일 만큼 받았습니다. 초월의 벽을 넘는 것도 시간문제일 겁니다….”

“하, 하지만 라온 님이라면….”

“끝내야 할 때 끝내지 못했습니다. 라온이라는 인간은 확실히 대단하지만, 저쪽은 이미 격을 벗어난 존재가 되었습니다….”

대장로는 승산이 없다며 말하며 깊은숨을 내뱉었다.

“이미 세계수의 밑동에도 불이 붙었습니다. 이제 시간이 없습니다. 조금 더 시간이 끌리면 아예 빠져나갈 길이 막힐 겁니다….”

“그, 그럼 제가 아니라. 대장로님이 나가셔야죠!”

시얀은 이불을 풀며 고개를 흔들었다.

“저는 이미 늦었습니다, 그리고….”

대장로가 잔잔한 시선으로 시얀을 바라보았다.

“미래를 기약할 수 있는 건 하이엘프인 시얀 님밖에 없습니다.”

“저, 저는 무능하잖아요! 무엇 하나 할 수 있는 게 없는 하이엘프….”

“할 줄 아는 게 없는 하이엘프가 아니라, 누구보다 많은 노력을 해온 하이엘프이기에 시얀 님이 가야 합니다.”

“대, 대장로님?”

시얀은 처음으로 듣는 대장로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찌푸렸던 미간을 풀었다.

“노력이라니, 대, 대장로님이 그걸 어떻게.”

“봐왔으니까요.”

“저, 저를 싫어하신 게 아니었어요?”

“제가 왜 시얀 님을 싫어하겠습니까.”

“그런데 왜 저를….”

“무시했냐는 겁니까?”

대장로가 시얀을 보며 옅게 웃었다. 더 짙어지는 화마 때문에 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보였다.

“다가가서 힘내라는 말이라도 해주기를 원했던 겁니까? 시얀 님은 인간의 책을 너무 많이 읽었군요. 저희는 인간이 아닙니다.”

그는 담담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저는 힘내라는 말이 무책임하다고 생각합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며, 아무런 사정을 몰라도 할 수 있는 말. 특별한 의미도, 가치도 없죠. 우리 엘프가 동족에게 할 수 있는 건 그저 지켜보는 것뿐입니다.”

“아….”

시얀이 대장로를 보며 입술을 떨었다.

‘그러고 보니….’

대장로는 항상 엄했다. 이불을 뒤집어썼다고 화를 내기도 했고, 말투가 이상하다면 화를 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언제나 나를 보고 있었고, 이상한 트집을 잡지 않았다. 다른 이들과 달리 무능하다는 말은 절대 하지 않았었다.

“시, 시얀 님. 빨리 나가십시오.”

“당신은 여기서 죽어서는 안 됩니다.”

“다시 세계수를 살릴 수 있는 건 시얀 님뿐이에요.”

다른 장로들도 비틀거리며 일어나 진심을 담은 말을 내뱉었다.

그들은 목숨을 걸고 길을 열겠다는 듯 피를 흘리면서도 전장으로 달려갔다.

“길을 열어라!”

“끝까지 버텨!”

그들만이 아니다. 부상을 입었던 엘프들과 가디언들도 장로들의 뒤를 따랐다. 그들은 본인들의 몸을 태우면서도 적을 죽이고 길을 열었다.

“아아….”

시얀이 두 팔로 어깨를 잡은 채 전신을 떨었다.

‘난 지금까지 뭘 했던 거지?’

할아버지를 제외한 모든 엘프들이 나를 싫어하고 무시한다고 여겼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엘프들을 무시하고 방에 처박힌 건 나 자신이었다.

분명 나를 진심으로 싫어한 이들도 있었겠지만, 이리 많은 동족들은 조용히 내가 일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레이란!”

“예. 대장로님.”

어깨 전체에 화상을 입은 레이란이 대장로 앞으로 달려왔다.

“시얀 님과 인간들을 데리고 서쪽으로 빠져나가라.”

“…알겠습니다.”

레이란은 대장로의 눈동자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얀 님. 아니, 시얀. 살아남거라.”

대장로는 시얀의 머리를 가볍게 쓸어주고서 서쪽으로 움직였다. 그가 격하게 피를 토하면서 일으킨 물결이 대지를 녹이는 불길을 재우고, 적귀와 잿빛 엘프들을 몰아냈다.

“시간이 없으니, 양해를.”

레이란은 혼이 빠져나간 듯한 시얀을 어깨에 걸친 채로 서쪽으로 달렸다.

시얀은 세계수와 공명 중인 스테린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맞았어요.

그는 너무 세상을 두려워할 필요 없다고 말하며 항상 선한 웃음만을 보여주었다.

그를. 그리고 지금까지 날 믿어준 모든 엘프들을 지키고 싶었다. 더이상 누구도 죽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았다.

“두 분도 이쪽으로 오십시오!”

레이란은 도리안과 유아에게 손짓하여 뒤를 따라오라 외쳤다.

시얀은 흐려지는 눈망울로 멀어지는 엘프들을 담으서 눈을 내리감았다.

‘이대로 나만 살 수는 없어.’

그녀는 두 손을 모은 채로 입술을 깨물었다.

‘제발! 제발!’

내가 정말 하이엘프라면 작은 기적이라도 달라고!

시얀의 진실된 외침과 절규가 세계와 이어지며 그녀의 가슴 부근에서 푸른 빛을 띤 파편이 응집되기 시작했다.

*     *      *

“후욱.”

라온이 짓쳐든 불길을 쳐내며 긴 숨을 뱉어냈다.

‘최악이군.’

세계수에 불길이 번질수록 홍염귀의 기운이 강해지고, 열기도 견디기 힘들 정도로 독해졌다.

초월에 닿지는 못했고, 무학의 수준 역시 급격하게 높아지지는 않았지만, 화력 자체가 너무 강하여 검격이 먹히질 않았다.

‘검계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청홍무적검을 운용할 때 너무도 많은 기운을 소모하여 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이 그리 많이 남지 않았다. 검계가 끝난다면 이렇게 정면에서 싸울 수도 없을 것이다.

‘거기다….’

리메르의 검격에서도 더이상 바람의 향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도 간신히 검계만 유지하고 있을 뿐 제대로 된 전투를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버둥거리는 꼴이 볼만하구나.”

홍염귀가 비웃음을 흘리며 손아귀를 뻗었다. 강환급 위력을 지닌 화염의 구체가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렸다.

“크으….”

라온이 신검과 마검을 좌우로 펼치며 화령을 운용했다. 은빛으로 명멸하는 나무가 청초한 꽃을 피워내 홍염귀의 화염 비를 막아섰다.

콰과과과과과광!

수천 개의 서리와 화염구가 맞부딪치며 천지에 거대한 진동을 일으켰다. 자욱한 수증기가 피어나 안개의 벽을 세웠다.

“고작 이것으로 끝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겠지?”

홍염귀가 여유롭게 손가락을 튕기자, 여덟 줄기의 화염 폭풍이 치솟아 사위를 휘감았다. 세계수 때문인지 놈의 공격에는 지체되는 시간이 없었다.

쩌저저저적!

라온이 피가 나도록 입술을 씹으며 두 검으로 검막을 쳐올렸다. 불꽃의 폭풍을 막아선 채로 시선을 뒤로 돌렸다.

“대주님. 먼저 빠져나가세요!”

“그게….”

리메르는 대답하다 말고 힘없이 무릎을 꿇었다. 그가 유지하던 검계가 씻은 듯 지워지고, 사방에서 뻗어 나오는 열기가 급격하게 강해졌다.

‘이런….’

내가 오기 전까지 홀로 홍염귀를 막아냈기에 한계를 맞이한 것 같았다. 솔직히 지금까지 버틴 게 용한 일이었다.

-흐음!

라스가 코끝을 매만지며 다가와 비릿한 미소를 그렸다.

-이제 네게 선택권은 없어졌느니라!

녀석이 도톰한 손가락을 까딱였다.

-본왕을 강림시켜라. 저따위 불쟁이는 한순간에 꺼주도록 하마.

라스는 어차피 할 일이지 않냐며 빨리 배때기에 칼을 꽂으라 외쳤다.

“후욱….”

밀려오는 화염 폭풍에 밀려나며 발에 땅에 박히기 시작했다. 이 상황을 헤쳐나갈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어쩔 수 없나….’

세이피아를 떠나서 나와 리메르, 도리안, 유아를 살리려면 이놈을 무조건 죽여야 했다.

‘결국 강림인가.’

라스에게 듣기로 마신강림이 될 가능성도 낮지만 된다고 해도 부작용이 점점 커질 거라고 했었다.

이전보다 더 심한 부작용이라면 다시 마스터급으로 내려가게 될지도 모른다. 아니면 영구적인 손상을 입던가.

‘그렇다고 해도 할 수밖에 없어.’

라온이 마검의 칼날을 뒤집었다. 그 검으로 스스로의 육체를 결계로 사용하려 할 때였다.

쿠와아아아아앙!

세계수의 중심에서 어마어마한 마나의 폭풍이 솟구쳤다.

푸른빛. 너무도 찬란한 섬광이 하늘로 솟구친다. 순수한 물이 생명을 얻은 듯 요동치며 거대한 여성의 모습으로 화한다.

기나긴 머리칼은 바다처럼 찰랑였고, 물방울처럼 투명한 피부가 달빛을 받아 우아한 빛으로 반짝였다.

아름다움이라는 단어를 형상화한 듯한 푸른 여신이 손을 뻗자 연기만이 가득했던 메마른 하늘에서 푸른 빗물이 쏟아졌다.

콰아아아아아아!

감미로운 빗방울은 생명의 샘물처럼 죽어가던 엘프들을 살리고, 대지를 녹이던 불길을 가라앉혔다.

“저, 저년이 왜!”

홍염귀가 허공에 떠오른 물의 여인을 보며 턱을 바들바들 떨었다.

-아아악!

라스 역시 물로 이루어진 여성을 보며 비명을 질렀다.

-저 물쟁이가 왜 지금 나와!

‘물쟁이라면….’

라온은 자애로운 미소를 그린 물의 여신을 보며 입술을 떨었다.

‘설마 물의 정령왕?’

라온이 마른침을 삼키고 다시 정령왕을 보는데, 그녀의 손아귀에 누군가가 들려 있었다.

아련한 빛을 띤 금발의 엘프. 얼굴은 처음 보지만, 기질로 알 수 있었다. 시얀이었다.

‘시얀 님이 정령왕을 소환한 건가?’

다만 그 생각을 잇기도 전에 그녀의 가슴 부근에서 홍색의 불길이 뿜어져 나왔다.

콰아아아아아!

호쾌하면서도 사나운 불길은 물의 정령왕처럼 하늘이 아니라, 라온을 향해 쏟아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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