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589화 (588/653)
  • 제589화

    “내 차례라고?”

    카산드라가 시꺼먼 기파를 일으켰다. 분노와 짜증이 깃든 눈동자가 라온에게 굽어졌다.

    “잡종 하나 죽었다고 기고만장해졌구나.”

    “아니.”

    라온은 으르렁거리는 카산드라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난 처음부터 기고만장했어. 너희가 홍염귀를 먼저 보낸 순간 이 싸움의 행방은 결정되어 있었으니까.”

    “그 거만함이 네놈의 목줄을 조일 것이다!”

    카산드라가 활을 쥐고 있지 않은 왼손을 들어 올렸다. 허공을 움켜쥐는 것처럼 굽어졌던 손가락 사이로 검은 연기가 요동쳤다.

    우우우우우웅!

    암울한 빛과 함께 솟구친 흑색의 기운은 점토가 된 것처럼 출렁이다가 집채만 한 늑대의 형상을 이뤘다.

    늑대의 갈기에서 타오르는 검은 불길을 보자, 머리털이 쭈뼛 섰다.

    ‘늑대…?’

    아니야.

    검은 늑대는 살아있는 존재가 가져야 할 생기를 지니지 않았다.

    꼭 정령과도 같은 존재감. 다만 자연의 기운이 아니라, 지독한 마기가 느껴졌다.

    “어, 어둠의 정령?”

    늑대의 정체에 관한 답은 뒤에 있던 에리안에게서 들려왔다.

    “어둠의 정령? 사대 속성 말고 다른 정령이 있었어?”

    “드물지만 사대 속성 외의 정령도 있다….”

    그도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라며 입술을 떨었다.

    “그런데 어둠의 정령은 계약자의 수명을 먹는다고 들었는데….”

    “맞다.”

    카산드라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 수명을 바쳐서 이 아이와 계약을 맺었지.”

    그녀는 북풍처럼 냉랭한 눈빛을 번뜩이며 세계수를 노려보았다.

    “왜 그렇게까지….”

    “너희를 죽이고, 우리가 진짜 엘프가 되기 위해서라면 수명 따위는 얼마든지 바칠 수 있어.”

    카산드라의 분노에 호응하듯 어둠의 정령이 주둥이를 벌렸다. 나선으로 굽어진 목구멍에서 시꺼먼 빛을 띤 마기가 분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피이이이잉!

    마기의 물결을 피해서 물러서는 순간 카산드라의 화살이 날아들었다. 어둠의 정령 때문인지 화살촉에서 검은 마기가 타오르고 있었다.

    터어엉!

    라온이 제천검으로 카산드라의 화살을 쳐내며 눈매를 찌푸렸다.

    ‘손아귀가 쓰리군.’

    순수한 힘을 지닌 정령답게 마기의 농도가 지독하리만큼 깊었다.

    ‘둘 다 그랜드 마스터인가….’

    카산드라와 어둠의 정령 모두 그랜드 마스터 급 기운을 지니고 있었기에 섣부르게 덤벼들었다간 내 목이 먼저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집중하자.’

    홍염귀와 함께 움직인 적귀사와 잿빛 엘프들이 세이피아를 공격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지만,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둘 다 무시할 상대가 아니야.’

    세이피아를 위해서라도 지금은 내 싸움에 전력을 쏟아부어야 할 때였다.

    “영광인 줄 알아라. 널 위해서 준비한 힘이 아니니까!”

    카산드라가 악에 받친 듯한 괴성을 지르며 다섯 발의 화살을 동시에 쏘아냈다.

    회피할 공간을 예측한 채 짓쳐드는 화살을 보고 있을 때 어둠의 정령이 마기의 소용돌이를 뿜어냈다.

    화아아아아아아!

    라온은 염주벽으로 세워 카산드라의 화살과 어둠의 정령이 뱉어낸 마기를 막아냈다.

    불꽃과 마기가 경합하는 틈을 이용하여 카산드라의 공간을 파고들었다.

    “크윽!”

    카산드라는 이렇게 빨리 접근할 줄은 몰랐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지금이라면 벨 수 있어.’

    그대로 제천검을 꺾어내리려고 할 때 어둠의 정령이 공간을 초월한 듯 나타나 발톱을 휘둘렀다.

    늑대의 외형답게 궤적이 난해했고, 강환을 두른 것처럼 막대한 힘이 실려 있었다.

    이럴 때는 일단 피한 후 적의 투로를 살피는 게 정석이지만, 내게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앞으로 나아갔다.

    만화공을 일으킨 왼발로 검게 물든 대지를 내디뎠다. 황금빛 불꽃으로 마기를 짓누른 채 어둠의 정령의 발톱을 향해 광아검을 찔러넣었다.

    촤아아아아아악!

    마기를 집어삼키며 타오르는 만화공의 불꽃이 어둠의 정령의 발톱을 뚫고, 놈의 가슴을 거칠게 갈랐다.

    캬아아악!

    어둠의 정령은 심한 고통을 느낀 듯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아직이다.’

    라온은 훌쩍 뒤로 물러선 카산드라가 아니라, 어둠의 정령에게 따라붙으며 제천검을 내리찍었다.

    노을을 담은 듯한 금빛 칼날이 정령의 허리를 반으로 쪼개버렸다.

    끼이이이!

    정령답게 바로 죽지는 않았지만, 충격이 컸는지 놈의 기운이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확실하게 끝을 내기 위해서 적섬을 그으려는 순간 카산드라의 화살이 날아들었다.

    지금까지와는 격이 다른 파동. 검게 타오르는 화살촉에서 나를 죽이겠다는 강렬한 의념이 느껴졌다.

    라온은 화살에 실린 힘을 느끼고서 왼손으로 쥐고 있던 진혼검으로 설풍검결을 일으켰다.

    캬아아앙!

    요기의 칼날이 불러온 서리 폭풍이 카산드라의 화살을 막아섰다.

    쩌어어어어엉!

    화살이 아니라, 검격을 막은 듯한 묵직한 충격에 손아귀가 찢어질 것 같았다.

    ‘이 정도 통증은 익숙해.’

    라온은 물러서지 않고 진혼검을 끝까지 휘둘러서 카산드라의 화살을 모조리 얼려버렸다.

    쿠구구궁!

    마기 째로 얼어붙은 화살이 바닥에 떨어지며 묵직한 소리를 울렸다.

    “며, 멸중시를 막아?”

    카산드라는 설마 본인의 화살이 막힐 줄은 몰랐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끼이이이이!

    처음보다 한참 작아진 어둠의 정령은 그녀의 곁으로 돌아가 고통이 어린 신음을 흘렸다.

    영체의 손상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충격도 큰 것 같았다.

    “어설픈 합공은 안 하느니만 못하지.”

    라온이 제천검과 진혼검을 늘어뜨린 채 카산드라에게 다가갔다. 걸음걸이는 여유로웠지만, 심장은 북해처럼 차갑게 가라앉혔다.

    “여기서 끝을 내겠다.”

    “끝? 너 따위가 날 끝내겠다고?”

    카산드라가 폭발적인 살의를 일으키며 오른손을 뻗었다. 어둠의 정령이 그녀의 손아귀로 돌아가 새로운 형상으로 다져지기 시작했다.

    우우우우우!

    동물 같은 게 아니다. 어둠의 정령은 화살촉부터 깃까지 모든 것이 검은빛을 띤 화살의 형태로 변했다.

    “늙은이들의 대가리에 꽂아주려 했지만, 네놈부터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카산드라가 지닌 기운을 모조리 개방하며 어둠의 정령이 변한 화살을 시위에 걸었다.

    찌지지직!

    그녀가 활시위를 당겨질수록 무시무시한 마기가 퍼져나가 얼마 남지 않은 수풀과 나무들을 지워버렸다.

    라온은 팽팽하게 당겨진 시위를 보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저건 뭐지?’

    손가락으로 건드리기만 해도 부러질 것 같은 얇디얇은 화살에서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불길함이 느껴졌다.

    긴장감으로 마른 입술을 축일 때 카산드라가 끝까지 당긴 시위를 비틀었다.

    “죽어라.”

    사신의 명령 같은 외침과 함께 카산드라가 어둠의 정령이 변한 화살을 쏘아냈다.

    소리보다 빠르게 짓쳐 든 화살이 격한 회전을 일으키며 명치를 향해 쇄도해왔다.

    급소를 노리는 게 아니다. 상체를 통째로 부숴버릴 기세였다.

    쿠구구구구구!

    라온이 제천검과 진혼검을 교차시켰다. 극성으로 끌어 올린 만화공과 글래시아가 검날을 파고들며 장대한 빛을 일으켰다.

    ‘이걸로도 안 돼.’

    만화공과 글래시아를 전력으로 운용하고 있음에도 화살을 완전히 막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본능처럼 반보 물러났다. 짧게나마 벌어들인 시간을 이용하여 새롭게 다듬은 쌍검술의 묘리로 코앞까지 다가온 화살을 찍어눌렀다.

    쩌어어어어엉!

    충격에 대비했음에도 어깨가 빠져버릴 듯한 통증이 나도 모르게 신음이 나올 뻔했다.

    아무리 수명을 걸고 싸우고 있다지만 믿을 수 없는 위력. 카산드라가 자신했던 대로 일격필살의 의념을 담은 화살이었다.

    찌지지지직!

    라온이 선 채로 밀려나며 입술을 깨물었다.

    ‘손아귀가 찢어질 것 같아.’

    화살에 실려 있는 힘이 너무 강대하여 꺾을 수가 없었다. 검도 아니고, 멀리서 날린 화살에 힘이 밀린다는 게 당혹스러웠다.

    ‘어둠의 정령을 화살로 썼다고 이렇게까지 강해질 수가 있는 건가?’

    라온이 흔들리는 제천검과 진혼검을 보며 미간을 구겼다.

    ‘어쩔 수 없나….’

    홍염귀를 상대하기 위해서 분노 개방을 아껴두고 싶었지만, 이대로라면 그 전에 죽게 될 것 같았다.

    라온이 분노를 개방하기 위해서 시선을 들어 올리다가 멈춰섰다.

    ‘잠깐.’

    이 화살….

    진혼검과 비슷하지 않나?

    스테린과 대련할 때 내가 진혼검과 신검합일을 이뤘듯이 카산드라는 어둠의 정령과 의념을 일치시켜 이 말도 안 되는 위력의 화살을 쏘아낸 것 같았다.

    ‘내 예상이 맞다면….’

    나도 가능할 수도 있어.

    무기의 힘을 빌리는 일시적인 신검합일. 그 흐름을 잡기 위해서 오른손의 제천검을 앞으로 내밀었다.

    쿠구구구구구!

    두 검으로도 막지 못했던 화살을 제천검만으로 막으려니, 팔이 떨어져 나갈 것 같았지만, 이를 악물고 버텨냈다.

    ‘진혼검. 부탁한다.’

    진혼검의 요기 사이로 내 의념을 흘려 넣었다. 지고 싶지 않다는 의지 그리고 꺾이고 싶지 않다는 의지를 담자, 진혼검이 그 뜻을 알아차린 듯이 청아한 울림을 터트렸다.

    우우우우웅!

    검과 인간의 의념이 이어진 선이 붉은 칼날로 스며들며 창대한 서기를 일으켰다.

    라온이 제천검을 뒤로 젖혔다. 기다렸다는 듯 뻗어오는 화살을 향해 의념을 일치시킨 진혼검을 광아검의 투로에 따라 그어 내렸다.

    쩌어어어어어억!

    절대 꺾이지 않을 것 같았던 카산드라의 화살은 진혼검의 예기를 이기지 못하고, 반 토막이 난 채 허물어졌다.

    “허어억!”

    카산드라는 믿을 수 없다는 듯 활을 떨어뜨린 채 눈을 부릅떴다.

    “어, 어떻게….”

    그녀는 당황을 넘어 경악한 듯 본인이 활을 떨어뜨렸다는 것 모르고 있었다.

    “말인 안 되잖아!”

    라온은 답을 하지 않았다. 하체의 마나회로에 차오른 오러를 폭발시키며 앞으로 나아갔다.

    “크으윽!”

    카산드라는 마지막 발악을 하듯 다시 활을 주우려고 했지만, 제천검의 검날은 이미 그녀의 목에 닿아있었다.

    쩌어어억!

    카산드라의 목이 하늘을 날았고, 잿빛 육체는 땅으로 기울어졌다.

    “괴, 괴물 놈이 왜 하필 지금….”

    카산드라는 분한지 세계수를 올려다보다가 숨이 끊어졌다.

    주인을 잃은 어둠의 정령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허….”

    에리안이 라온을 올려보며 헛바람을 흘렸다.

    “시, 실력을 어디까지 숨기고 있었던 거지?”

    그는 라온의 무력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는 듯 눈을 끔벅였다.

    “나를 상대할 때는 아예 제 실력을 내지 않았던 건가?”

    “스승의 고향에 와서 깽판을 부릴 필요는 수는 없으니까.”

    “그 나이에 그 무력. 역시 정령왕의 계약자라 가능한 일인가?”

    이럴 때까지 정령왕 이야기라니 정말 지독한 외골수였다.

    “쓸데없는 소리말고.”

    라온이 고개를 젓고서 에리안에게 치료 약을 던졌다.

    “그걸 바르고 따라와. 난 먼저 가겠다.”

    “고, 고맙다. 지금은 그 말밖에 할 말이 없군.”

    고개를 끄덕이는 에리안을 보다가 세이피아로 달려갔다.

    언제라도 싸울 수 있도록 호흡을 안정시킬 때 우측 수풀에서 아기 여유가 나타났다.

    “멀린!”

    “라온….”

    멀린이 앞으로 달려와서 고개를 떨었다. 목소리나 상태가 좋지 않은 것을 보니, 많은 힘을 사용한 것 같았다.

    “가면 안 돼.”

    “홍염귀 때문이지? 혼자서는 힘들어도 힘을 합치면 이길 수도 있어.”

    홍염귀가 나보다 강한 건 분명하지만, 세이피아 내부에는 리메르와 장로들이 있다. 모두 힘을 합친다면 큰 희생 없이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아니, 못 이겨.”

    멀린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홍염귀는 세계수의 기운을 흡수해서 성장하고 있으니까.”

    그녀는 입술을 꼭 깨문 채 세계수를 돌아보았다.

    “홍염귀가 노리는 건 세이피아가 아니라, 세계수 그 자체야!”

    *     *      *

    리메르는 엘프들이 결계 내부로 들어올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준 채 대수림을 바라보았다.

    ‘불길이 번지는 속도가 빨라.’

    적들은 세이피아의 입구만이 아니라, 대수림 전체를 불태우고 있었다.

    이대로 싸우다간 전투에서 이겨도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을 것 같았다.

    ‘아니야.’

    지금은 숲보다 동족들을 생각해야 해.

    엘프에게 숲이 소중한 건 맞지만, 동족의 생명만큼은 아니다. 대수림이 잿더미가 되더라도 결계 내부에서 싸우는 게 최선의 방법이었다.

    ‘장로들이 있으니 어떻게든 버틸 수 있겠지.’

    지금 대장로와 10명의 장로들은 세계수의 결계를 강화하는 의식을 진행하고 있다.

    결계만 강화된다면 아무리 강한 불길도 세계수에 닿지 못할 것이다.

    계획을 재점검하면서 눈동자를 굴리다가 이불로 몸을 감싸고 있는 시얀과 눈을 마주쳤다.

    그녀는 이런 상황에서도 동족들의 시선이 무서운 것 같았다.

    ‘이 일이 끝나면 오빠 노릇 단단히 해주마.’

    작은 죄책감을 느끼며 고개를 저을 때 정찰을 나갔던 도리안이 달려왔다.

    “대, 대주님….”

    도리안이 헥헥 거리면서 눈동자를 부르르 떨었다.

    “부, 불이 오고 있어요!”

    “불? 무슨 소리야. 자세히 말해.”

    “진짜 불이에요. 점점 커지고, 뜨거워지는데, 감당이 안 돼요!”

    그는 불만이 아니라, 에덴의 귀신들과 잿빛 엘프들도 달려오고 있다며 마른침을 삼켰다.

    리메르가 도리안이 왔던 방향을 살피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프리트의 투구를 썼다는 놈인가?”

    “맞아요.”

    레이란이 옆으로 다가와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동자에 두려움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놈의 무력 수위는?”

    “오빠가 그랜드 마스터 하급 정도라고 했어요.”

    “그 정도라면….”

    상성만 따지면 놈이 압도적으로 유리하지만, 이쪽에는 장로들이 강화한 세계수의 결계가 있다. 내부로 끌어들여서 싸운다면 충분히 이길 수 있을 것이다.

    “전원 전투 준비!”

    리메르의 수신호에 레이란이 가디언들에게 전투 준비 명령을 내렸다.

    세이피아의 모든 엘프들이 세계수를 둘러싸고 있을 때 밤하늘의 어둠을 지워버리는 장대한 불길이 일어섰다.

    아니, 불꽃이 아니다. 화염을 몸에 두른 거구의 인간이었다.

    ‘저게….’

    리메르는 이프리트의 투구를 눌러 쓴 홍염귀를 보며 입술을 떨었다.

    ‘저게 그랜드 마스터 하급이라고?’

    저건 절대 하급일 수가 없었다. 중급조차 한참 넘어서 있었다.

    ‘에리안이 이제 상대도 제대로 못 보는 거... 어?’

    속으로 에리안을 욕하고 있는데, 이프리트 투구에게서 피어나는 열기와 무력이 급격히 상승하고 있었다.

    콰아아아아아아아!

    흙조차 녹여버리는 열기에 세계수를 지키는 결계가 쪼그라들었고, 이프리트 투구의 무력은 점점 더 강해졌다.

    ‘설마….’

    리메르가 이프리트 투구를 보며 턱을 부르르 떨었다.

    ‘저놈 세계수의 기운을 흡수하고 있는 건가?’

    그렇다면 놈이 세이피아에 온 것도 할배 때문이 아니라, 세계수의 기운을 얻기 위해서?

    짜악!

    리메르가 스스로의 뺨을 후려쳤다.

    ‘잘못 생각했어!’

    뒤를 돌며 다급하게 소리를 질렀다.

    “결계 강화를 멈춰!”

    장로들의 결계 강화는 저 거대한 화력 앞에서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놈이 더 빠르게 강해지도록 도와줄 뿐이었다.

    찌지지지지직!

    하지만 너무 늦었다.

    세계수의 결계가 종잇장처럼 찢어지고, 결계 강화 의식을 치르던 대장로와 장로들이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끄으윽….”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대, 대체….”

    대장로와 장로들은 지금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눈동자를 떨었다.

    모두 심한 내상을 입어서 제 실력을 낼 수 없을 것 같았다.

    콰아아아아아아아!

    그와 반대로 이프리트 투구의 무력은 끝도 없이 강해졌다. 결계에 스며든 세계수의 기운을 흡수했기 때문인지 어느새 그랜드 마스터 중급을 넘어 상급에 도달해 있었다.

    ‘빌어먹을….’

    지금 저 괴물을 잠시라도 상대할 수 있는 건 나밖에 없었다.

    리메르가 왼손으로 검을 뽑아 들고, 앞으로 나섰다.

    후우우우우욱!

    바람을 기운을 두르고 있음에도 놈이 숨결에서 뻗어 나오는 열기에 살이 익어버릴 것 같았다.

    “버러지가.”

    이프리트 투구가 리메르를 향해 손을 뻗었다. 굳건한 손아귀에서 뿜어진 홍염의 열기에 공간이 일그러졌다.

    검계현신

    폭풍의 눈.

    리메르는 바로 검계현신을 꺼내들었다. 무풍지대를 일으켜 불꽃을 가라앉히려고 했지만, 압도적인 화력 차이에 검계 자체가 밀려 나갔다.

    쿠와아아아아아아!

    이프리트 투구가 가볍게 쏘아낸 불길에 조금이나마 형태를 유지하던 세계수의 결계가 완벽하게 녹아내렸다.

    ‘멍청한 짓을 했어.’

    리메르가 어금니를 지그시 씹었다.

    ‘스스로 퇴로를 막다니….’

    다만 지금은 후회할 때가 아니다. 어떻게 해서든 기회를 만들어야 했다.

    치이이이잉!

    리메르가 이프리트 투구의 좌측으로 달라붙어 검을 찔러넣었다. 바람이 진동하는 칼날이 화염의 막을 뚫고 나아갔다.

    “흥!”

    이프리트의 투구는 같잖다는 듯 손등만으로 바람의 칼날을 쳐냈다.

    쩌어어어엉!

    전력을 다한 검격이 파도에 젖은 나비처럼 휘청이며 밀려나갔다.

    ‘역시 안 되나.’

    나름 왼손으로 수련도 했는데….

    왼손으로 검술을 펼치니 검이 생각대로 뻗어나가질 않았다. 오른팔의 부재가 너무도 아쉬웠다.

    “사라져라.”

    이프리트 투구가 입매를 비틀며 하늘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의 손아귀에서 뿜어져 나온 홍색 불길이 우박처럼 쏟아져 내렸다.

    우우우우웅!

    리메르는 본인만이 아니라, 세계수마저 지워버리려는 홍염을 보며 남아 있는 모든 기운을 개방했다.

    꺼질 듯 가라앉던 바람 위로 붉은 뇌전이 치솟으며 불꽃의 비를 막아서는 방패를 세웠다.

    쿠와아아아아아!

    하지만 홍염은 뇌기와 바람까지 집어삼키면서 점점 더 강한 열기를 뿜어냈다.

    “레이란!”

    리메르가 불길에 집중한 채로 뒤에 있는 레이란을 불렀다.

    “후퇴다! 모두 도망쳐!”

    “그, 그게….”

    장로들을 살피던 레이란이 턱을 바들바들 떨었다.

    “너밖에 없어! 모두를 데리고 도망쳐! 한 명이라도 살려!”

    수호자인 할배를 지키고, 세계수를 지키는 건 저 화력 앞에서 아무 의미도 없다. 동족을 하나라도 살리는 게 우선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이프리트 놈이 내게 집중하고 있다는 점이다. 빠르게 움직인다면 조금은 살 수 있을 것이다.

    “의미 없는 일이다.”

    간신히 희망의 끈을 잡을 때 이프리트의 투구 속에서 비웃음이 흘러나왔다.

    “그게 무슨….”

    리메르가 대꾸를 하려다가 멈춰 섰다. 깨진 결계 주변으로 에덴의 귀신들과 잿빛 피부의 배신자들이 나타나 길을 막아섰다.

    “누구도 이곳을 나갈 수 없다.”

    이프리트의 투구가 선언하듯 읊조렸다.

    “이놈….”

    한 명이라도 살리고 싶었지만, 그것조차 힘들 것 같았다. 잘못 꿴 첫 단추 때문에 모든 계획이 망가졌다.

    ‘그래도….’

    끝까지 버틴다.

    리메르가 검을 다잡으며 오러에 집중했다. 단전이 찢어질 듯한 통증을 느끼면서도 끝까지 홍염에 맞섰다.

    치이이이익!

    하지만 이프리트의 홍염은 검날을 넘어 검병까지 열기를 퍼뜨렸다. 손아귀가 타버리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방법. 방법을 찾아야….’

    어떻게 해서든 기회를 잡기 위해서 눈동자를 굴릴 때였다.

    검은 하늘 위로 은빛 달과 황금빛 태양이 동시에 떠올랐다.

    태양과 달 사이로 스며든 그림자가 붉고 푸른 빛무리를 쏟아냈다.

    쿠와아아아앙!

    날개처럼 펼쳐져 있던 홍염귀의 불꽃이 끊어질 것처럼 출렁였다.

    금빛 불꽃과 은색의 서리를 휘감은 라온의 검이 이프리트의 불꽃과 마주 섰다. 하지만 그도 힘에 겨운 듯 이마에서 더운 땀을 흘렸다.

    “라온! 물러나!”

    리메르가 갈라진 목소리로 라온을 불렀다.

    “네가 상대할 수 있는 놈이 아니야!”

    라온은 지그하르트의 왕이 되어야 할 아이다. 여기서 개죽음을 당하게 놔둘 수는 없었다.

    “여긴 네가 목숨을 바칠 곳이 아니다! 도리안과 유아를 데리고 떠나!”

    “맞습니다. 제가 혼자 상대할 수 있는 놈이 아니에요.”

    그는 평소와 달리 역량의 차이를 인정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걸 알면 빨리….”

    “그러니 도와주십시오.”

    라온의 손아귀에서 은빛 휘광이 쏟아진다. 가라앉는 불길과 달리 거세게 타오르는 금색의 불길이 그의 눈동자를 적셨다.

    “제가 저놈을 꺾을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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