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87화
“그게 무슨 말입니까.”
데니어는 담담하다 못해 평온한 눈빛으로 되물었다.
“무슨 말이긴. 네게 하는 말이지.”
아리스가 픽 웃으며 벽에 등을 기댔다.
“카룬은 본인이 가질 수 없는 보물이라면 차라리 부숴 버릴 욕심쟁이야. 만약 가주가 되지 못한다면 지그하르트를 불태워버릴지도 모르지.”
“…….”
데니어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아리스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발데르는 단순하면서도 멍청한 의리꾼. 가문이 소중하기에 지그하르트가 지금보다 성장한다면 누가 가주가 되어도 받아들일 수 있을 거다.”
아리스가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칼을 뒤로 넘기며 말을 이었다.
“실비아는 용기 있는 겁쟁이야. 나조차 할 수 없는 선택을 했으니까. 지금도 대단하다고 생각해.”
그녀는 실비아의 이름까지 꺼낸 후 데니어를 바라보았다.
“마지막으로 너는 방관자. 어떤 일에도 끼지 않고, 어떤 상황에도 감정을 낭비하지 않지. 솔직히 말하면 아직도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방관자라….”
데니어가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를 그렸다.
“아니야?”
“아뇨. 적당한 호칭이라고 생각합니다. 생각보다 저희를 잘 보고 계셨군요.”
“그래도 동생들이니까.”
아리스는 어쩐지 먼 거리에서 들리는 듯한 음성을 흘렸다.
“그래서 방관자가 아이들을 챙기는 게 이상하다는 겁니까?”
“정확해.”
“사람은 변하는 법이죠. 그건 누님이 누구보다 잘 아실 텐데요.”
“맞아. 사람은 변하지. 네가 마르타를 양녀로 받았을 때 그렇게 생각했어.”
그녀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넌 마르타를 양녀로 받고도 거의 방관하듯이 놔뒀잖아. 뒤로 무언가를 도와주는 것 같기는 했는데, 딱히 티가 나지도 않았고.”
아리스가 데니어의 말끔한 손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너 마르타를 직접 가르친 적도 몇 번 없지?”
“시간이 없었다는 핑계는 통하지 않겠죠?”
“당연히.”
그녀는 헛소리 말라며 미간을 구겼다.
“놀랍네요. 해적 놀이에 집중하고 계신 줄 알았는데.”
“내 눈이 이것만 있는 건 아니니까.”
아리스가 손가락으로 본인의 눈을 가리켰다.
“하긴 예전부터 누님은 보기와는 달랐죠.”
“시끄럽고. 너 무슨 생각이야. 왜 갑자기 방관자의 위치를 버리고, 나대는 건데.”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저도 조금은 변하고 있다고. 저 아이들이 임무에서 돌아오자마자 수련을 한다고 하기에 기특해서 도움을 주고 싶었을 뿐입니다.”
데니어는 오해하지 말라며 두 손을 저었다.
“너 쓸데없는 짓 하다가 걸리면 죽는다.”
아리스가 오싹하리만큼 서늘한 음성으로 데니어의 목줄을 잡았다. 조금 전과는 아예 다른 사람이 된 듯한 기세가 공간을 짓눌렀다.
“동생에게 말이 심하시군요.”
“못할 거 같아?”
“아뇨. 누님이라면 하겠죠. 다만….”
데니어는 아리스의 묵직한 기세를 여유롭게 받아넘기며 얇은 웃음을 던졌다.
“조금은 저를 믿어주시죠. 이렇게 보여도 지그하르트에 해가 되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가문의 세작을 모두 찾아낸 것도 저였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주먹을 안 날리고 있는 거야.”
아리스가 짧게 혀를 차고서 오른손 주먹을 털었다.
“옛날 생각나는군요. 참 많이도 맞았는데.”
데니어는 아리스의 주먹을 보며 연한 미소를 그렸다.
“아리스 님!”
“준비 다 끝났습니다.”
장비를 다 갖춘 마르타와 버렌이 아리스를 불렀다.
“고모라고!”
“고모!”
이번에도 가장 먼저 고모 소리를 하는 건 루난이었다.
“저 아이는 밝은 건지, 미친 건지 모르겠다니까.”
아리스가 고개를 저으면서 벽에서 등을 뗐다.
“마지막 경고야. 애들 건드리지 말고, 쓸데없는 일도 벌이지 마.”
“말이 안 통하는군요.”
데니어는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으쓱였다.
“흥.”
“누님.”
아리스가 콧방귀를 뀌고서 버렌과 마르타, 루난에게 걸어갈 때 뒤에서 데니어가 작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아까 저희를 평가하지 않으셨습니까. 형은 폭군, 발데르는 의리꾼, 실비아는 겁쟁이.”
“그런데?”
“거기서 누님은 뭐죠?”
“나? 나는 미친년이지.”
아리스는 엄지손가락으로 본인을 가리키며 목소리를 높였다.
“아버지보다 내가 강했으면 가주 자리 빼앗았을 거야.”
“그럴 것 같습니다. 딱이네요.”
데니어는 시원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욕이냐? 칭찬이냐?”
“칭찬입니다.”
“넌 웃는 거부터 마음에 안 들어.”
“누님.”
“또 왜!”
“저만 살피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데니어는 공허한 울림이 흐르는 듯한 음성으로 고개를 저었다.
“무슨 뜻이지?”
“…….”
그는 대답없이 조용히 아리스를 바라보았다.
“쯧.”
아리스는 데니어를 노려보다가 혀를 차고서 등을 돌렸다. 광풍대 조장들에게 다가가는 그녀의 걸음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정말 마음에 안 든다니까.”
* * *
“이 아이는 음악을 시켜야 해요!”
세상이 무너져도 꿈쩍도 안할 듯한 무거운 눈빛의 엘프는 어디로 가고, 귀신에 홀린 듯이 눈동자를 떠는 엘프가 유아를 가리켰다.
“음감도, 목소리도, 기술도 타고났어요! 태어났을 때부터 음악을 해야 하는 아이라구요!”
그녀는 유아의 길이 무인이 아니라, 음악가라며 고개를 흔들었다.
“사이라 님이라고 하셨죠?”
라온이 진정하라고 손을 저으며 여성 엘프의 이름을 불렀다.
“네!”
사이라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목소리를 높였다.
“유아가 재능이 있다는 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에덴에서 세이렌의 그릇으로 노렸을 정도이니, 유아에게 특별한 재능이 있다는 건 당연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엘프 중에서도 뛰어난 음악가가 이리 극찬을 할 정도일 줄은 몰랐다.
“아뇨. 당신은 몰라요.”
사이라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인간은 물론이고 엘프 중에서도 따라올 사람이 없어요.”
“사이라 님도요?”
“저는 이 아이의 발톱 때만도 못해요!”
“아….”
그녀는 비교하는 게 실례라며 입술을 씹었다.
“엣헴!”
유아는 저런 칭찬도 기쁜 듯 콧대를 높인 채 헛기침했다. 조금 민망했는지 머리를 긁적이는 게 귀여웠다.
“그럼 뭘 어떻게 하라는 거죠?”
“여기서 가르쳐야 해요. 제 모든 것을 전수해주고 싶어요.”
사이라는 유아를 최고의 음악가로 만들고 싶다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흠….”
라온이 턱을 칠 것처럼 다가온 사이라의 주먹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유아의 재능을 칭찬해주는 건 기쁘지만….’
여기에 놔두는 건 갑작스럽지.
유아의 할아버지 대신 그녀의 보호자 역할을 하고 있기에 쉽게 결정할 일이 아니었다.
“유아야. 네 생각은 어때?”
“음, 저는 잘 모르겠어요. 검도 좋고, 노래랑 악기도 좋아서.”
유아는 모두 하고 싶다며 고개를 저었다.
“아직 여기에 머무는 시간이 있으니까. 그건 나중에 결정하기로 하죠.”
“으, 시간이 아까운데….”
사이라는 아예 밤을 새워서 가르치고 싶은 듯 어깨를 떨었다.
“그럼 이곳에 있는 동안은 제가 데리고 있어도 될까요?”
그녀는 제발 허락해달라며 고개를 숙였다. 첫인상과 너무 다른 모습이라 이쪽이 더 놀라웠다.
“네가 결정해.”
“그건 좋아요!”
유아는 풀피리를 부는 법을 더 배우고 싶다며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럼 당장 가자! 밥도 내가 차려 줄게!”
사이라는 말릴 새도 없이 유아를 데리고 본인의 집으로 달려갔다.
“나를 보는 것 같네.”
주방에서 쟁반을 들고 나온 리메르가 사이라와 유아의 등을 보며 옅은 미소를 흘렸다.
“네?”
“나도 너를 잡으려고 꽤 고생했잖아.”
리메르는 가져온 음식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렸다.
“그랬나요…?”
그가 노력을 한 모습이 전혀 떠오르지 않았지만, 귀찮아져서 그러려니 넘어갔다.
“저는요?”
도리안이 본인은 어땠냐며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너, 너도 무조건 잡으려고 했지. 보급관인 네가 없었으면 광풍대도 없었어!”
리메르는 누가 들어도 알 수 있는 거짓말과 함께 억지 미소를 그렸다.
“역시!”
다만 도리안은 리메르의 말에 기쁜 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얘가 세피아 상회의 후계자긴 하지만, 장사를 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흐엑!
라스가 테이블 위에 펼쳐진 음식들을 보며 혀를 쭉 내밀었다.
-바, 밥이다! 그것도 다 처음 보는 방식의 음식들이니라!
녀석은 엘프들의 요리가 마음에 드는 듯 꿀꺽 소리가 들릴 정도로 침을 삼켰다.
‘확실히 다 새롭긴 하네.’
과일을 넣은 파이인데, 색이나 향이 밀가루를 쓴 것 같지가 않았다.
빵이라기 보다는 과일이 부푼 듯한 느낌이었다.
-빨리 포크를 들어라! 일단 저 파이부터 한입 베어 물거라!
‘알겠다. 조금만 기다려.’
평소보다 더 재촉하는 라스를 진정시키며 포크를 들었다. 파이를 찍어서 입에 가져가려 할 때 오싹한 기운이 등골을 스치고 지나갔다.
“음?”
리메르도 느꼈는지 눈을 부릅뜬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 두 분 왜 그러세요?”
“잠깐만.”
라온은 도리안의 물음에 답을 해주지 못하고, 리메르와 함께 숙소 밖으로 튀어 나갔다.
찌지지지직!
밤하늘이 열린다. 세계수의 힘으로 보호되고 있는 세이피아의 결계가 종잇장처럼 갈라져서 흩날렸다.
다만 신기하게도 누군가가 억지로 결계를 깬 듯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많은 시간이 흘러서 자연스럽게 곌계가 사라진 듯한 모습이었다.
“도리안. 유아를 챙겨.”
라온은 벗어둔 흑룡포를 걸치며 도리안에게 손짓했다.
“대주님은 바로 세계수 쪽으로 가주세요. 수호자님을 지켜야죠.”
“너는 어쩌려고!”
“저는….”
라온은 처음부터 결계가 없었다는 듯 선명하게 드러나는 세이피아의 입구를 보며 입술을 씹었다.
“저곳으로 가봐야죠.”
멀린은 도망치라고 말했지만, 지금 대수림에는 내 부탁 때문에 경계를 서는 엘프들이 많다. 그들을 놔두고 그냥 도망칠 수는 없었다.
터어어엉!
라온은 조금씩 불꽃이 번지기 시작한 대수림을 바라보며 거칠게 땅을 박찼다.
-이런 빌어먹을! 왜 본왕이 밥을 먹으려고만 하면 일이 터지는 것이냐! 이 망할 놈의 하늘아! 억까 좀 그만하라고!
라스의 절규를 발판 삼아 더 빠르게 달리며 대수림으로 뛰어들었다.
* * *
“휴식도 없이 경계만 서려니 죽을 맛이로군.”
청발의 엘프가 어둑해지는 숲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에리안 님은 그 인간의 말을 왜 그렇게 믿는 거지?”
눈가에 작은 상처가 난 녹색 머리칼의 엘프가 미간을 구겼다.
“정령왕의 계약자라잖아.”
“그게 말이 되나. 정말 정령왕의 계약자라면 세계수를 보았을 때 정령왕을 소환했겠지.”
“나도 안 믿어. 하지만 가디언의 수장이 그리 말하는데 어떻게 하냐.”
청발의 엘프는 혀를 길게 차며 짜증을 드러냈다.
“하아, 그 인간 그냥 우리가 마음에 안 드는 거 아닐까?”
“뭐?”
“그냥 고생시키고 싶어서 이러는 게 아니냐고. 갑자기 적이 왜 쳐들어 와.”
“그러고 보니까. 시얀 님이랑 친해 보이던데….”
“그럼 맞네! 시얀 님을 좀 놀렸다고 우리한테 보복을 하는….”
“지금이 잡담하는 시간인가?”
정찰을 다녀온 레이란이 입구에 선 가디언들을 보며 눈매를 찌푸렸다.
“레, 레이란 님.”
“그게 아니라….”
“이 임무는 그 인간이 아니라, 에리안 님의 지시다. 따르고 싶지 않다면 가디언을 그만두도록.”
그녀의 냉정한 말에 엘프들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아, 아닙니다!”
“불만 없습니다!”
엘프들은 고개를 젓고서 허리를 세운 채 전방만을 바라보았다.
레이란은 엘프들을 보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저럴 만하지.’
본래라면 반나절이라도 휴식을 취해야 하건만, 라온의 부탁 때문에 바로 경계에 나서게 되었으니, 가디언들이 저리 반응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나부터도 화가 나니까.’
경계를 서는 건 받아들이겠지만, 그 일의 발단이 인간의 말이라는 게 화가 났다.
다만 다른 엘프들에게 말했듯 결정을 내린 게 에리안이었기에 따를 수 밖에 없었다.
‘음?’
레이란이 눈을 내리감은 채 고개를 저을 때 대수림에서 세이피아로 이어지는 길목에서 동족들의 기척이 느껴졌다.
‘누구의 기운이지?’
분명 동족들의 기운은 맞는데, 처음 느껴보는 듯한 음습한 마나였다.
더군다나 지금 기척이 느껴지는 곳은 내가 정찰을 다녀온 곳이다.
분명 아무도 없었는데,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모르겠다.
레이란이 조심스럽게 활을 들어 올릴 때였다. 바로 앞에 설치되어 있는 결계가 고무줄 끊어지듯이 가볍게 풀려버렸다.
파아아아앙!
전방만이 아니다. 세이피아를 감싸고 있는 1차 결계가 모조리 해제되며 대수림 속에 갖춰져 있던 엘프의 세계가 그대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뭐, 뭐야….”
“왜 갑자기 결계가!”
경계를 서던 엘프들이 당황한 듯 입술을 떨었다.
“여기서 대기해.”
“레이란. 너도 대기해라.”
레이란이 마른침을 삼키며 활시위에 화살을 걸 때 에리안이 앞으로 나왔다.
그는 검병에 손을 올린 채 전방의 수풀을 바라보았다.
스으으으으!
유령이 땅을 스치는 듯한 우울한 소리와 함께 수풀이 저절로 열리며 검은 로브를 뒤집어 쓴 이들이 나타났다.
“너희는 누구냐.”
에리안이 단숨에 검을 뽑아 든 채 검은 로브를 쓴 이들을 노려보았다.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잊은 건가.”
중앙에 가냘픈 체형의 인간이 로브를 벗어던졌다. 찬란한 금발과 달리 비에 젖은 하늘 같은 잿빛 피부의 여성 엘프가 샛노란 안광을 빛냈다.
다른 이들도 로브를 벗었는데, 모두 귀가 뾰족하고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엘프였지만, 피부색만큼은 기이할 정도로 짙은 회색이나, 검은색이었다.
“카, 카산드라….”
에리안은 못 볼 것을 보았다는 듯 잿빛 피부의 엘프를 보며 입술을 부르르 떨었다.
“누, 누굽니까?”
레이란의 질문에 에리안이 떨리는 시선을 돌렸다.
“이탈자. 세이피아를 떠난 이들이다. 그런데….”
그는 피부가 저렇게 변한 건 처음 본다며 마른침을 삼켰다.
“이, 이탈자….”
레이란이 카산드라를 보며 손끝을 떨었다.
‘그 이탈자인가….’
자신이 태어나기 전에 의견 충돌로 세이피아를 떠난 엘프들이 있다고 들었다.
수호자님이 곱게 보내주었다고 들었는데, 왜 갑자기 나타나서 결계를 해제한 건지 모르겠다.
“갑자기 나타나서 무슨 생각이냐.”
에리안이 카산드라를 보며 입술을 씹었다.
“수호자님 덕분에 살았다는 것을 알 텐데 왜 돌아와서 결계를 푼 거야!”
“그분께는 감사를 드리기 위해서 온 거야.”
카산드라가 가볍게 손을 휘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험난한 세상을 살기에 그분은 너무 선하거든. 빨리 보내드려야지.”
그녀는 노골적으로 수호자를 노리고 있다는 것을 드러냈다.
“그게 가능할 것 같나? 곧 수호자님이 오실 거다!”
“정화 의식을 하면서?”
카산드리가 입꼬리를 길게 말아 올렸다.
“다 알고 왔단다. 에리안. 내가 네 상사였던 걸 잊은 거야?”
“…….”
에리안은 대답 없이 입술을 씹었다. 처음에 예상했던 대로 저들은 수호자님이 의식을 치르는 틈을 노리고 온 게 분명했다.
“예전과는 달라. 너는 내가 막는다!”
“그것도 재밌겠지만, 시간이 없으니….”
카산드라가 손가락을 튕기자, 그녀의 뒤에 서 있던 잿빛 피부의 엘프들이 둥그런 구체를 깨뜨렸다.
캬아아아앙!
구체에서 솟구친 섬광이 하늘로 치솟은 순간 결계가 사라진 바닥에 거대한 마법진이 돋아났다.
쿠와아아아아아아!
마법진에서 타오른 홍염의 파도가 사위로 번지며 숲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나와라!”
에리안이 앞으로 손을 뻗으며 최상급 바람의 정령을 소환했다. 비상하듯 날개를 펼친 정령이 거센 바람을 이용하여 불길을 억누르려 했지만, 오히려 불길의 파동에 밀려 나가 땅에 처박혔다.
“어, 어떻게….”
바람과 불이 상성이 좋지 않다고 해도 대기를 제어하여 잠시나마 불길을 억누를 수는 있어야 하건만 홍색의 불꽃은 바람 자체를 무시하고 퍼져나갔다.
어찌나 화력이 강한지 어느새 세이피아 주변의 수풀과 나무가 모조리 타오르고 있었다.
“그따위 바람으로 홍염을 막을 수 있겠느냐.”
비웃음이 섞인 음성과 함께 치솟은 불길이 사람의 형상으로 다져지기 시작했다.
고오오오오오!
산만 한 덩치에 바위만 한 주먹을 쥔 굳건한 육체가 드러난다.
이마의 중심에 돋아난 나선의 뿔과 도마뱀을 조각한 듯한 투구 속에서 시뻘건 안광이 번뜩였다.
쿠구구구구!
도마뱀 투구의 괴인이 드러내는 무시무시한 격의 파동에 최상급 바람의 정령은 꼭 라온을 마주했던 것처럼 위축되어 날개를 떨었다.
“홍염…?”
에리안이 남성이 쓴 투구를 보며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도마뱀의 얼굴과 하나의 뿔 그리고 홍염….’
그 셋 중 하나라면 모를까 셋 모두가 섞인 건 딱 하나 밖에 없었다.
“…설마 이프리트?”
“정답.”
카산드라가 손가락을 튕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가 그리 원하던 불의 정령왕이 돌아왔단다.”
“어째서 이프리트가 에덴에!”
“이곳이 내가 있어야 할 곳이니까.”
이프리트의 투구를 쓴 괴인이 전방으로 손을 뻗었다. 손아귀를 뚫고 나오는 듯한 홍색의 불꽃이 에리안과 엘프들을 덮쳤다.
“크으윽!”
에리안은 쇄도해오는 불꽃의 소용돌이를 보며 입술을 씹었다.
‘피한다면 더 싸울 수 있어.’
이프리트의 투구를 썼다지만, 느껴지는 기세가 초월에 닿지는 않은 것 같았다. 저 공세를 피하고 싸운다면 버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피하는 순간 동생과 엘프들이 죽고, 세이피아의 입구가 막히며 불지옥이 될 것이다.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
피아아아아앙!
에리안은 떨리는 다리를 땅에 박아넣으며 전방으로 검을 찔러넣었다.
“일어나라!”
기세에 짓눌려 있는 바람의 최상급 정령에게 손을 뻗었다. 절실한 외침이 통했는지 기가 죽어있던 정령이 버둥거리며 일어나 강대한 바람을 일으켰다.
콰아아아아아아!
어마어마한 불길의 폭풍이 바람의 검 앞에서 멈춰 섰다. 최악의 상황을 견디는 의지의 힘이었다.
“끄아아아악!”
“으으윽….”
하지만 워낙에 불길이 강해 옆에 떨어져 있던 두 명의 엘프가 불길에 녹아내렸다.
“레이란….”
에리안이 피를 토하는 것처럼 레이란의 이름을 불렀다.
“자, 장로님과 라온을 불러오고, 모두를 대피시켜….”
“오, 오빠….”
“괜찮으니까 어서!”
그는 이미 죽음을 각오한 듯 굳건한 눈빛을 드러냈다.
“모, 모두 후퇴!”
레이란은 가디언들에게 후퇴 지시를 내리며 등을 돌렸다. 그녀는 비틀거리는 다리에 억지로 힘을 주며 세이피아로 달려갔다.
‘내가….’
내가 오빠를 죽인 거야.
라온의 조언을 제대로 들었다면, 끝까지 모든 상황을 살폈다면, 대수림 밖까지 정찰했다면 오빠가 저런 모습으로 길을 막을 필요는 없었다.
라온을 인간이라고 무시했던 몇 시간 전의 나를 죽이고 싶을 정도로 후회가 되었다.
화아아아아!
레이란이 흐려지는 시야 속에서 세이피아를 향해 달려갈 때 반대편에서 청아하면서도 따스한 바람이 불어왔다.
그녀를 스치고 지나간 바람은 사방을 태우는 열기 속에서도 그 향을 잃지 않고 뻗어나갔다.
레이란은 바람의 등을 보며 두 손을 모았다.
‘제발….’
* * *
에리안이 불길을 막아내고 있는 손을 부르르 떨었다.
‘지독하군….’
홍염을 막아내느라, 양팔에 이미 화상이 번질 만큼 번져서 살이 뭉개지기 시작했다.
지독한 통증에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머리가 어지러웠다.
하지만 이대로 쓰러질 수는 없었다. 다른 이들이 대비할 수 있도록 조금이라도 시간을 끌어야 했다.
“미안하다. 버텨 줘.”
끼이이이.
점점 쪼그라드는 정령과 눈을 마주치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정령은 괜찮다는 듯 낮은 울음을 흘렸다.
퍼어어억!
젖 먹던 힘까지 끌어내서 버티고 있을 때 좌측과 우측에서 날아온 화살이 양팔을 뚫고 지나갔다.
“크으으윽!”
에리안이 균형을 잃고 허리를 굽혔다. 마비 독이 들어 있는 건지 팔이 움직이질 않았다.
“시간을 너무 끌잖아.”
카산드라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바쁘거든.”
그녀는 끝을 내라는 듯 이프리트의 투구에게 턱짓을 했다.
“흥. 네 도움 따위는 필요 없었다.”
이프리트의 투구를 쓴 괴인이 손아귀를 튕기자, 에리안의 바람과 검격이 꺾이고 불길이 그를 휘감았다.
“하….”
에리안은 사방이 막힌 불길의 감옥을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이리 가는 건가….’
그래도 괜찮아.
세이피아는 그가 구해줄 테니까.
정령왕의 계약자인 라온이라면 분명 세이피아를 살려줄 수 있을 것이다.
‘부탁한다….’
에리안이 라온을 믿으며 유일하게 뚫려 있는 허공을 바라볼 때였다.
대수림을 휘감은 불길과는 너무도 다른 빛. 달이 녹아내린 듯한 은백색 광휘가 천공을 뒤덮었다.
콰아아아아아아!
검게 타버린 나무도, 밤하늘을 적시던 회색 연기도, 그리 자랑하던 홍색 불꽃마저 얼어붙은 세계 속에서 용이 새겨진 검은 장포가 고고하게 펄럭였다.
“잘 버텼어. 여기서부터는….”
에리안을 살피던 붉은 눈동자가 서슬 퍼런 빛을 두른 채 전방으로 향했다.
“내가 맡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