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86화
라온이 아기 여우를 내려다보며 눈을 끔벅였다.
“여기서 나가라고?”
“그래! 당장!”
아기 여우가 앞발로 땅을 긁으며 외쳤다.
‘멀린이 맞지…?’
평소의 멀린이라면 눈을 마주치자마자, 보고 싶었다는 이야기가 나와야 했지만 그녀는 당장 세이피아에서 나가라는 이상한 소리를 꺼내놓았다. 알 수 없는 긴장감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무슨 뜻인지 자세히 말을….”
멀린에게 되물으려고 할 때 뒤에서 엘프들의 기척이 느껴졌다. 목소리가 점점 크게 들리는 것을 보니, 이쪽으로 오는 것 같았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자… 어?”
라온이 숙소로 들어가기 위해서 아기 여우를 안으려다가 멈춰 섰다. 멀린이 빙의한 아기 여우가 허깨비처럼 손에 잡히질 않았다.
‘그러고 보니….’
멀린이 여기까지 들어왔다는 놀라움 때문에 제대로 살피지 못했지만, 지금 이 아기 여우에게서는 산 자가 가져야 할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꼭 정령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런 시간이… 어쨌든 나가! 지그하르트로 돌….”
멀린은 하고 싶었던 말을 다 잇지 못한 채 연한 안개가 되어 흩어졌다.
“뭐지?”
라온은 흩어진 멀린을 보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결계를 뚫기 위해서 저런 모습을 한 건가?’
라스에게 물어보기 위해서 고개를 돌렸다.
-끄르르르륵….
녀석은 멀린의 등장에 놀랐는지 입에 거품을 물고 있었다. 정말이지 도움이 안 된다.
‘결계 때문인 게 맞을 거야.’
리메르나, 에리안이나 세이피아에 들어올 수 있는 존재는 엘프의 초대를 받은 사람뿐이라고 했었다.
결계를 아예 부수기라도 한다면 모를까. 조용히 뚫는 건 아무리 멀린이라고 해도 단기간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수풀이 저절로 움직인 것을 보면 아마 동물에 정령화를 하는 방식을 사용한 것 같았다.
‘갑자기 사라진 건 힘이 빠져서 그런 걸 테고.’
굉장하네.
하루 만에 새로운 방법을 만들어서 세이피아의 결계를 우회한 멀린 마법 실력과 집착이 두려우면서도 대단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왜 나가라고 한 거지?
‘오마가 쳐들어오는 건가?’
그것 외에 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마 중에서도 에덴일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아무리 에덴이라고 해도 세이피아를 치는 건… 아!’
라온이 입술을 꾹 씹으며 주먹을 말아쥐었다.
‘설마 정화 의식을 치르는 시기에 맞춘 건가?’
아니야. 노린 게 맞아.
스테린이 정화 의식에 들어간 지 하루 만에 쳐들어온다는 건 때를 알고 있었다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를 배제하고 싸우면 이길 자신이 있다는 뜻이었다.
라온은 빠르게 생각을 정리하고, 레이란이 있는 가디언들의 숙소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막 식사를 하려던 가디언들이 멍하니 이쪽을 바라보았다.
식사를 방해받았기 때문인지, 아니면 경계에 전심전력을 쏟았기 때문인지 가디언들의 시선이 날카로웠다.
-크킁!
기절해 있던 라스가 코를 킁킁대며 고개를 빼꼼히 들어 올렸다.
-밥이냐?
녀석과 엘프들의 시선을 무시하고 레이란과 에리안의 식탁으로 다가갔다.
“라온. 너도 먹을 테냐? 정령왕의 계약자인 너라면 내가 차려줄 수도 있다.”
에리안은 이제 이름까지 부르며 자리를 내어 주었다.
“그게 아니라, 혹시 세이피아 외부에 이상한 일 없었어?”
“외부? 대수림을 말하는 건가?”
“그래.”
“조금 전에 정찰을 다녀왔지만, 딱히 특별한 일은 없었다.”
그는 식사를 하기 전에 다녀왔다며 고개를 저었다.
“혹시 한 번 더 볼 수는 없어?”
“라온 님.”
레이란이 고개를 저으며 일어섰다. 이쪽을 바라보는 눈빛이 매서웠다.
“에리안 님과 저희는 수호자님이 의식에 안착할 때까지 경계를 후 대수림 정찰까지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이틀 만에 첫 식사를 하면서 숨을 돌리려는데, 방해를….”
“라온. 그건 정령왕 계약자로서의 감인가?”
에리안이 들고 있던 포크를 내려놓으며 레이란의 말을 끊었다.
“에리안 님!”
“시끄럽다. 밥을 안 먹고 잠도 못 잔 건 저 녀석도 마찬가지야.”
레이란이 대체 왜 그러냐는 듯 눈을 흘겼지만, 에리안은 라온도 똑같다고 중얼거렸다.
“정령왕….”
라온이 에리안의 가라앉은 눈동자를 보며 입술을 가늘게 씹었다.
‘지독한 놈.’
에리안은 질릴 정도로 지독한 외골수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거라도 이용해야 했다.
“그래. 내 감각이다.”
“좋다.”
에리안이 고개를 끄덕이고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네가 그리 말한다면 가봐야겠지.”
“에리안 님!”
“모두 따라오도록.”
그는 레이란과 다른 수하들에게 식사는 돌아와서 하자고 말하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엘프들은 잠시 에리안을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불만조차 비치지 않는 표정을 보니, 에리안이 평소에 수하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알 수 있었다.
라온은 앞서서 숙소를 나서는 에리안을 보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생각보다 괜찮은 놈인가?’
처음에 보자마자 공격할 때는 미친놈이라 여겼는데, 지금 보니 나름대로 장점이 있는 사람 같았다.
-저거!
라스가 에리안이 먹다 내려놓은 과일 파이를 보며 도톰한 손을 내뻗었다.
-안 먹을 거면 본왕이라도 다오! 이틀째 굶어서 뱃가죽이 등에 붙고 있느니라!
‘…절대 안 되지.’
엘프들의 식사를 멈춰놓고, 내가 음식을 집어 먹는다면 미친놈 소리 듣는 걸로 안 끝난다. 배가 고파서 죽기 직전이어도 손을 댈 수 없다.
-본왕이 책임지겠느니라! 일단 맛만….
‘따라와.’
라온은 버둥거리는 라스의 머리통을 잡고 에리안의 뒤를 따라갔다.
* * *
“시얀!”
리메르가 시얀의 집을 두드리며 문을 열라고 소리쳤다.
“나, 나 잘 거야! 오빠는 가!”
시얀은 문에 등을 기대서 리메르가 들어올 수 없게 막은 후 소리쳤다.
“라, 라온 님. 배고프실 거 아니야! 빨리 가서 식사 챙겨드려.”
“걔가 어린애도 아니고, 배고프면 알아서 먹겠지. 일단 문 좀 열어봐!”
리메르는 안 열면 힘으로 들어가겠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나, 나 씻으려고 옷 벗는 중이야!”
시얀은 절대 들어오지 말라며 고개를 저었다.
“윽….”
리메르가 손을 멈춘 채로 문에서 물러섰다. 어릴 때라면 모를까. 성인이 되고도 한참 지났기에 그런 거라면 함부로 문을 열 수가 없었다.
“시얀.”
“왜….”
“걔네들 신경 쓰지 마.”
리메르는 동생이 등을 기대고 있지만, 너무도 가벼워 보이는 문을 마주하며 말을 이었다.
“생각 없이 입에서 나오는 대로 주절거리는 게 특기인 놈들이잖아. 인간을 싫어하면서 왜 그런 점은 닮는지 모르겠다니까.”
그는 라온이 무아에 빠져 있을 때라서 싸움을 못 건 게 한이라며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알고 있어.”
시얀은 문에서 등을 떼며 입술을 꾹 씹었다.
“하지만 틀린 말이 아니잖아.”
뒷말은 리메르가 들을 수 없게 작게 중얼거렸다.
엘프만도 못한 하이엘프, 태어났을 때부터 하자가 있는 무능아.
너무도 화가 나는 말이지만, 반박을 할 수 없는 점이 더욱더 답답했다.
‘나라고 이렇게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게 아닌데.’
차라리 내가 게을렀고, 노력을 하지 않아서 세계수의 선택을 받지 못했다면 이해가 가지만, 난 태어났을 때부터 재능이 없었다. 내 잘못도, 타인의 잘못도 아닌 타고난 재능 때문에 이런 취급을 받는다는 게 우스우면서도 절망스러웠다.
“시얀….”
“오빠. 가.”
“하지만….”
“난 정말 괜찮아. 가서 라온 님 식사 챙겨드려.”
“너도 같이 먹자.”
“난 이게 있잖아.”
시얀은 문을 빼꼼히 열고서 나딘빵 한 덩이를 보여주었다.
“하.”
리메르가 나딘빵을 보며 한숨을 내뱉었다.
“그래. 너 밖에 안 나가려고 그거 만들었었지.”
그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 등을 돌렸다.
“내일 라온이랑 다시 오마.”
시얀은 리메르의 걸음 소리가 멀어지자, 휘감고 있던 이불을 벗었다. 얼굴이 닿아 있던 곳 부근이 살짝 젖어있었다.
“후….”
그녀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손등을 쓸어내리고서 고개를 저었다.
‘이번에도 안 됐지.’
라온이 깨달음은 얻는 모습을 보고, 동기부여가 되어 공명 수련을 해보았지만, 여전히 세계는 내게 길을 열어주지 않았다. 그렇지만 실망 따위는 하지 않았다.
‘현실은 영웅담과 다르니까.’
어릴 때부터 영웅담을 좋아했다.
영웅이 나오는 책을 읽거나, 모험담을 듣다 보면 주인공은 위기를 간단히 넘기고 항상 승리하여 많은 위업을 쌓는다. 그들은 언제나 포기하지 않고, 승리를 쟁취했다고 전해져온다.
‘하지만….’
그 고난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는 전해지지 않지.
세상은 노력을, 고난을 비추지 않고 오직 성공 이후만을 집중한다. 책으로 봐온 라온과 실제로 본 라온을 통해 그것을 알 수 있었다.
라온 전기에서는 모든 적을 가볍게 무찔렀다고 되어 있지만, 실제로 본 라온의 손등과 팔은 상처로 가득했다. 그가 어떤 고통과 싸우면서 지금의 위치에 올랐는지, 어떤 노력을 통해 그랜드 마스터가 되었는지 난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겠다는 오그라드는 말은 하고 싶지 않아. 하지만….’
할 수 있는 만큼은 해보고 싶어.
라온의 말대로 내게 비난을 한 놈들이 모두 무릎 꿇는 모습을 보기 위해서라도 손이 닿는 곳까지는 노력해보고 싶었다.
시얀이 바닥에 앉은 채로 눈을 감았다. 지하 깊숙이 퍼지는 바람처럼 흐르는 그녀의 숨결에 따스함과 서늘함이 동시에 흘러나왔다.
* * *
“그럼 난 서쪽을 돌아보고 올게.”
라온은 세이피아의 결계를 나오자마자 우측으로 등을 돌렸다.
“대수림의 길은 복잡하다.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어.”
에리안은 걱정이 되는 듯 눈매를 찡그렸다.
“괜찮아. 한 번 간 길은 기억하고 있으니까.”
“역시 정령왕의 계약자!”
“…….”
아무리 머리를 굴려보아도 그게 왜 정령왕과 관계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느낌이 좋지 않으니, 무슨 문제가 생기면 싸우지 말고 바로 신호를 보내는 것으로 하지.”
“알겠다. 난 동쪽을 보지. 레이란 너는 남쪽으로 가도록.”
“알겠습니다.”
레이란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서 바로 남쪽으로 향했다. 불만이 가득해 보였지만, 막상 나오니 일에 집중하려는 것 같았다.
“그럼 나도.”
라온은 에리안에게 눈인사를 하고서 우측으로 태화보를 밟았다. 에리안과 레이란의 기척을 완전히 사라진 후에 걸음을 멈췄다.
“멀린. 멀린.”
멀린이라면 분명 이 근처에 있을 테니, 작게 이름을 불러보았다. 하지만 바로 나타날 것 같았던 그녀는 한참 동안 나타나지 않았다.
‘뭐지?’
라온이 서쪽으로 걸어가며 눈매를 찡그렸다.
‘정말 무리를 한 건가.’
그녀의 평소 행동을 생각해보면 무리해서 지금 기절해 있을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그럼 결국 내가 찾아야 하는 건가.’
라온이 짧게 한숨을 내쉬고서 불의 고리와 글래시아를 동시에 운용했다.
고오오오오오!
그랜드 마스터에 오르며 한층 더 성장한 기감이 설화의 파도를 타고 사위로 퍼져나갔다.
동물, 곤충을 넘어 식물의 움직임이 느껴질 정도의 감각이 대수림을 휘감고 있었지만, 딱히 좋지 않은 기운이나 인간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라스.’
-없느니라!
라스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없는데 식사만 방해받았느니라!
녀석은 왜 맨날 밥때만 되면 일이 벌어지냐며 이를 바득 갈았다.
‘정말이야?’
-본왕이 거짓말하는 거 보았느냐! 아무것도 없으니 밥이나 먹으러 가거라!
자동 탐색기나 다름없는 라스가 이런 말을 할 정도라면 정말 위협이 될 존재가 없다는 뜻이었다.
“그래도 조금만 더….”
아무래도 멀린에 대한 신뢰가 많이 쌓인 것 같았다.
라스의 말을 믿지만, 공간이동을 통해 나타날 가능성이 있기에 북쪽까지 살핀 후 세이피아의 입구로 돌아왔다.
에리안과 레이란, 가디언들은 이미 돌아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빨리 왔군.”
“엘프는 숲과 연결되어 있기에 전부 다 살피지 않아도 숲이 문제를 말해줍니다.”
레이란은 인간이 숨을 쉬듯 간단한 일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라온이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처음 이곳에 왔을 때도 레이란과 가디언들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으니,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았다.
“어때? 뭐라도 찾았나?”
“아무것도 없었어.”
“표정이 좋지 않군.”
에리안이 라온을 보며 낮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그렇게 느낌이 좋지 않은 건가?”
“그래.”
“좋다.”
그는 레이란에게 시선을 돌리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외부 경계도 강화하도록.”
“예? 이미 충분히 강화한 상태입니다. 거기다 세계수 근처를 호위하느라 많은 인원이 빠지고 있는데….”
“어차피 여기가 뚫리면 그곳도 금방이야. 지시대로 움직이도록.”
“에리안 님. 아니, 오빠!”
레이란이 참지 못하고 에리안의 소매를 잡았다.
‘오빠?’
라온이 두 사람을 보며 눈을 끔벅였다.
‘그러고 보니….’
레이란, 에리안 둘이 이름이 비슷했고, 대화를 할 때도 묘한 부분이 있었는데 남매 관계였던 것 같다.
“임무 중에는 그리 부르지 말라고 했을 텐데.”
“이건 너무 하잖아. 왜 저 인간의 말을….”
“인간의 말인 것을 떠나서 경계를 강화한다고 우리한테 손해가 날 게 있나? 조금 힘들 뿐이잖아. 받아들여.”
그는 본인이 다 책임지고, 첫 번째로 경계에 서겠다며 손을 저었다.
“칫.”
레이란은 라온을 돌아보며 혀를 찼다. 그녀를 따라온 다른 가디언들의 표정도 좋지 않았다.
라온은 세이피아로 돌아가는 에리안의 등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첫인상은 최악이었는데, 속은 멀쩡하네.’
의외로 진국이야.
저런 모습을 보니, 더더욱 여길 떠날 수가 없었다. 정말 큰 문제가 있다면 꼭 도와주고 싶었다.
-본왕의 배는 멀쩡하지 않느니라! 당장에 가서 밥을 먹자고!
‘음….’
라온은 어두워지는 하늘을 올려보며 짧게 입맛을 다셨다.
‘아리스 님한테 연락이라도 보내야겠군.’
멀린의 말이 거짓이라고 해도 아리스라면 구경삼아 와줄 것이다. 돌아가자마자 도리안을 통해 연락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일단 본왕의 배부터 채우는 게 먼저이니라!
‘…….’
-그만 무시해!
* * *
황금빛 노을이 스며드는 현무전의 연무장.
데니어가 뒷짐을 진 채로 마르타, 버렌, 루난이 수련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마르타. 항상 선공에 나서는 네 용기는 대단하지만, 뒤를 생각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적은 허수아비가 아니야.”
“네!”
마르타는 데니어의 가르침을 단숨에 받아들이고서 적이 반격이 해 올 수 있는 방향에 검을 세웠다.
“버렌. 너는 공방의 균형이 좋다. 어느 쪽에도 치우쳐 있지 않을 만능형이지. 다만 그게 항상 장점으로 이어지지는 않아. 적의 숨통을 확실하게 끝낼 수 있는 무기를 만들어두는 게 좋을 거다.”
“알겠습니다.”
버렌은 데니어의 조언을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귀를 쫑긋했다.
“루난. 너는 마르타와 반대야. 방어에 너무 집중해서 공세가 약해. 누군가를 지키는 싸움만 있는 게 아니니, 조금 더 공격에 집중하는 검세를 취해보도록.”
“넹.”
루난은 가라앉은 어조로 밝은 말을 내뱉으며 내뻗는 검격에 날카로움을 더했다.
“마르타. 그 검술을 펼칠 때는 상체를 조금 더 낮추는 게 좋겠다. 적에게 반격을 당할….”
데니어가 다시 마르타에게 돌아가 자세 교정을 해줄 때였다.
콰아아앙!
연무장의 문이 부서질 듯 휘청이며 열리고, 아리스가 들어왔다.
“너희 수련한다며? 나도 껴주라.”
아리스는 도박판에 끼어들 듯이 냉큼 네 사람의 사이로 파고들었다.
“아리스 님! 환영이에요!”
마르타는 아리스에게 다가가서 흑진주 같은 눈동자를 반짝였다.
“저, 정말 아리스 님이 지도를 해주시는 겁니까?”
버렌도 놀랐는지 입을 떡 벌렸다.
“고모”
아리스가 두 사람을 보며 콧잔등을 찡그렸다.
“내가 고모라고 부르라….”
“고모.”
그녀의 지시를 가장 먼저 따른 건 마르타나 버렌이 아니라, 루난이었다. 그녀는 아리스의 품에 안기며 다시 한번 고모라 외쳤다.
“그, 그래….”
아리스가 루난을 보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너도 그냥 고모라고 하자.”
그녀는 어색하게 웃으며 루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쨌든 재밌어 보이니까. 나도 적당히 지도해줄게.”
아리스는 다른 사람이 뭐라 해도 상관없다는 듯 데니어의 옆에 붙어서 손가락을 까딱였다.
“음….”
버렌과 마르타, 루난은 지금까지 가르쳐주고 있던 데니어에게 고개를 돌렸다.
“해보도록.”
데니어는 괜찮다며 눈을 깜박였다.
버렌과 마르타, 루난은 각자 익히고 있는 검술을 펼쳤고, 아리스는 거칠게 등장했을 때와 달리 세 사람의 검술을 차분히 바라보았다.
“마르타. 넌 나랑 성격이 비슷하네. 못 참고 먼저 검을 뽑는 타입이지?”
“맞아요.”
마르타가 기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드센 성격은 가끔은 손해를 볼 때가 있지만, 극복하면 그만이니까 걱정 마.”
“어떻게 극복하나요?”
“나랑 대련.”
“어….”
그녀는 갑자기 아리스와 대련을 한다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던 듯 눈을 부릅떴다.
“다음.”
아리스는 마르타에게 조언을 해주고서 버렌을 바라보았다.
“넌 생각이 너무 많아서 탈이야. 그걸 바꾸기 위해서는 역시나 많은 경험이 필요해. 나랑 대련 확정!”
“아….”
버렌 역시 입을 떡 벌렸다.
“루난은 너무 착하네. 본인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검술이야. 좀 이기적으로 변할 필요가 있어. 따라서 나와 대련!”
아리스는 세 사람 모두에게 대련을 하자며 빙긋 웃었다.
“바로 대련할 거니까. 실전을 펼칠 때처럼 준비해서 와.”
“네!”
“알겠어요.”
“넹.”
그녀가 손가락을 까딱이자, 버렌, 마르타, 루난은 장비를 착용하기 위해서 탈의실로 달려갔다.
“누님.”
데니어가 아리스에게 다가가서 눈매를 좁혔다.
“무슨 생각이신 겁니까.”
“뭐가?”
“원래 아이들을 챙기는 성격이 아니시지 않습니까. 아들조차 방치하시는 분이….”
“아들이니까 방치하는 거야. 조카들은 귀엽잖아.”
“그런 말이 안 되는….”
“난 됐고, 너는 무슨 생각이냐?”
아리스의 웃는 눈매 속에서 섬뜩한 안광이 번쩍였다.
“너도 애들 챙기는 성격 아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