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85화
시얀이 이불에 뚫려있는 구멍으로 라온을 보다가 입을 쩍 벌렸다.
“네에에에?”
그녀는 당황하여 본인이 무슨 소리를 내는지도 모른 채 몸을 떨었다.
‘사, 살펴본다니, 뭘?’
시얀은 이불로 감추고 있는 본인의 팔다리를 살피며 입술을 떨었다.
‘냄새라도 나는 건가? 아니면 내가 못생겨서 같이 있기 싫으신 건가?’
갑자기 라온이 자신을 살펴본다고 하자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서 턱만 떨고 있을 때 라온의 말이 이어졌다.
“섣부르게 말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시얀 님의 상태를 조금은 좋게 할 수도 있을지 모릅니다.”
“제, 제 상태라면….”
“공명이 안 된다고 하셨죠?”
“네. 아직도….”
시얀이 라온을 힐끔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왜 안 되시는지 살펴보고 싶습니다.”
라온이 시얀을 보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가능성은 충분해.’
시얀의 어머니는 그녀를 가졌을 때 이곳에 왔다고 했었고, 라스는 시얀이 태어날 때부터 거대한 무언가에 의해 상단전으로 이어지는 통로가 막혀 있다고 했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지그하르트의 선조가 남긴 구슬의 기운이 그녀에게 스며들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이엘프니까.’
하이엘프는 세계수만큼이나 자연에 가까운 존재. 시얀이 그중에서도 특별하다면 세계수를 키워냈던 기운이 그녀에게 옮겨가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 그럼 어떻게 하죠? 옷부터 벗을까요?”
“…아뇨. 손만 주시면 됩니다.”
“흡! 아, 알겠어요.”
시얀은 이불 속에서 한참이나 꿈틀거리더니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내밀었다.
지금까지 꽤 많은 여성의 손을 봤지만, 이렇게 투명해 보일 정도로 하얀 팔은 처음이다. 태양을 단 한 번도 보지 않은 것 같았다.
“실례하겠습니다.”
시얀의 손을 잡고 만화공을 운용하려고 하는데, 오러를 넣기도 전에 그녀의 팔이 감전된 것처럼 부르르 떨렸다.
“시얀 님? 혹시 어디 아프십니까?”
“아, 아녜요!”
시얀이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떨린다고 어떻게 말해!’
태어나서 처음으로 가족을 제외한 타인의 손을 잡았고, 그 대상이 우상인 라온이다. 심장이 떨어져 나가서 춤을 출 것만 같았다.
라온은 시얀이 떨지 않도록 손을 꽉 잡아준 채 그녀의 마나 회로에 만화공과 글래시아의 기운을 동시에 밀어 넣었다.
이전에 리메르를 치료할 때 엘프의 마나 회로를 파악해둬서 빠르게 길을 찾을 수 있었다.
‘깨끗해.’
시얀의 단전은 갓 태어난 아이처럼 자그마한 노폐물도 존재하지 않았고, 마나 회로는 그랜드 마스터에 오른 나와 큰 차이가 없을 정도로 광활했다.
태어날 때부터 이런 육체를 지니다니, 축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런 육체를 가지고 있는데, 오러를 잘 못 쓴다는 게 신기하군.’
라온이 짧게 입맛을 다시고서 시얀의 중단전을 살펴보았다.
중단전 역시 하단전만큼이나 깨끗했지만, 경지가 낮아서 거의 발달 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중단전을 지나 상단전이 있는 방향으로 오러를 이동시킬 때 갑자기 거대한 바위가 서 있는 것처럼 마나 회로가 꽉 막혀 있는 부분이 나타났다.
‘단단하게 굳어져 있군.’
인간, 엘프 가릴 것 없이 태어날 때부터 막혀 있다가 그랜드 마스터가 되어서야 뚫리는 중요 마나 회로였고, 딱히 이상한 점도 느껴지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건드려서는 안 되는 부분이지만, 라스의 말을 믿고 만화공과 글래시아의 기운 두 줄을 그 안으로 밀어 넣었다.
우우우웅!
깨달음은 얻은 육체의 주인이 아니라면 통로를 뚫을 수 없어야 하는데, 신기하게도 만화공의 열기와 글래시아의 냉기는 꽉 막혀 있는 틈을 파고들고 안으로 스며들었다.
‘정말 자연적인 게 아니었나?’
가설이 맞다고 생각하며 조금 더 짙은 기운을 밀어 넣으려 할 때 리메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라온! 시얀! 이쪽으로 와. 이제 시작한다.”
“음….”
라온이 눈매를 찌푸린 채 오러를 회수하고 시얀의 팔을 놓아주었다.
“어, 어때요?”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정화 의식이 끝난 이후에 다시 해봐도 될까요?”
“아, 네….”
시얀이 진동하는 듯한 음성을 흘리며 이불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라온은 고개를 숙이고서 리메르와 스테린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시얀은 앞서가는 라온의 등을 보며 명치 윗부분을 매만졌다.
‘따스해….’
그리고 시원하기도 했어.
그녀는 정말 오랜만에 느낀 따스한 감각을 오래 간직하고 싶은 듯 손을 꼭 모은 채 라온의 뒤를 따라갔다.
* * *
세계수의 중심으로 가자, 엘프들이 전쟁이라도 치를 것처럼 날카로운 기세를 피워내고 있었다.
“이쪽으로 오거라.”
스테린이 가까이 오라는 듯 손짓했다.
“예.”
라온은 시얀과 함께 스테린에게 다가갔다.
“둘 다 잘 듣도록.”
스테린은 중요한 이야기라며 귀를 가리켰다. 그는 정말 세이피아의 은인 대우를 해주려는 것 같았다.
“공명이라 함은 내 정신을 이 세계와 합일시키는 것이다. 다만 정신을 세계와 동화시킨다면….”
그의 음성이 오싹하리만큼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십중팔구는 죽는다.”
“죽는다구요?”
“그래. 거대한 세계에 비해 내 정신이란 너무도 작은 것이기에 하나가 될 수 없다. 허나 합일하는 대상을 축소시키면 가능해지지.”
“대상의 축소….”
“너 같은 검사들이 이루는 경지가 있지 않더냐.”
“설마 신검합일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다.”
스테린이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같은 하이엘프는 태어날 때부터 세계수와 공명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태어나지.”
그는 세계수와 공명을 이루는 건 수련을 해서 된 게 아니라. 날 때부터 가진 능력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다만 공명을 정화 의식에만 사용하는 것은 아깝지않느냐. 그래서 태어난 게….”
“감화시군요.”
“이제 이해가 가는 모양이군.”
스테린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피어났다.
“네가 세계수와 하나가 될 수는 없지만, 공명의 흐름을 배우는 건 가능할 수도 있을 것이야.”
그가 이쪽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에게서 하나라도 배워가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그럼 시작하지.”
스테린이 세계수에 등을 기댄 채 눈을 감았다. 일정했던 호흡이 천천히 가라앉으며, 그의 존재감이 숲에 번진 불길처럼 거세게 타올랐다.
육체라는 한계를 벗어던진 듯 끝없이 솟아오르던 스테린의 격이 세계수를 덮을 정도로 거대해진 순간 그의 호흡이 뚝 끊어졌다.
‘죽었… 아니야.’
스테린이 죽었다고 생각한 순간 은은한 푸른빛을 휘감고 있던 세계수에 찬란한 녹광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스테린이 지니고 있던 고고하면서도 부드러웠던 영혼의 격이 세계수의 중심에서 파도치고 있었다.
라온이 시선을 내려서 세계수에 등을 기대고 있는 스테린을 보았다.
그의 육체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지만, 그 안을 채우고 있을 영혼의 존재가 느껴지질 않았다.
“정화 의식이 시작되었다! 전원 경계를 서라!”
조금이나마 안색을 회복한 대장로가 손짓하자, 엘프들이 냉랭한 기세를 일으키며 세계수 주변을 둘러쌌다.
대장로는 아집이 심한 꼰대였지만, 엘프의 세계를 중요시하는 건 진심인 것 같았다.
라온은 불의 고리를 운용하며 다시 세계수를 올려다보았다.
‘이게 공명인가.’
검사와 검이 하나가 되듯 스테린은 본인의 육체를 벗어나 세계수와 하나가 되어 있었다.
‘신검합일. 나와 검이 하나가 되는….’
심검합일을 떠올리니 이틀 전 스테린과 대련을 할 때가 생각났다.
당시에 진혼검을 날리면서 이대로 대련을 끝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 순간 진혼검이 내 의념을 붙잡고 내려가라는 명령을 따라주었다.
‘이제야 알겠어.’
지고 싶지 않았던 나와 지고 싶지 않았던 진혼검의 의지가 합일되었기에 미세하게나마 어검을 맛볼 수 있었던 것 같았다.
몽롱하게 풀려가는 라온의 시선이 스테린의 영혼이 스쳐 지나간 흔적을 고요하게 따라붙었다.
“라, 라온 님… 아?”
시얀이 라온에게 말을 걸려다가 리메르에 의해서 멈춰 섰다.
“오빠?”
“지금 이 녀석을 건드리면 안 돼.”
리메르는 꿈결처럼 흐릿해진 라온의 눈동자를 가리키며 입술에 손가락을 얹었다.
“무아지경에 빠졌거든.”
“무, 무아지경?”
“그래. 남들은 태어나서 한 번 겪을까 말까 한 기연을 이 망할 녀석은 똥 싸듯이 들어가거든.”
그는 라온을 건드리지 말라며 시얀을 옆으로 데리고 왔다.
화아아아아아!
세계수도 라온을 보호하려는 듯 가지를 펼쳐서 하늘에서 쏟아지는 햇살을 막아주었다.
“…….”
대장로와 장로들은 라온이 무아지경에 빠졌다는 것을 알면서도 건드리지 않고, 눈매를 찡그린 채 지켜만 보았다.
리메르는 그런 대장로와 장로를 보며 픽 웃었다.
‘아예 썩지는 않았군.’
혹시라도 라온을 방해하려 들면 한 방 먹일 생각이었는데, 다행히도 저들은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리메르가 다시 라온을 보며 담담히 미소 지을 때, 아무도 모르게 홀로 울부짖는 솜사탕이 하나 있었다.
-빌어먹을!
라스가 하늘을 올려보며 악을 질렀다.
-왜 이놈은 가는 곳마다 이쁨을 받는 것이냐! 본왕은 가는 곳마다 고생하고, 능력치를 뺏기는데 왜 이놈만 이렇게 행복하냐고!
이 세상이 너무도 지랄맞아서 손을 마구 흔들었다.
_본왕도 행복하고 싶느니라!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말을 외쳤다.
-이놈 또 밥 안 먹고 갔느니라!
* * *
시얀은 무아에 빠진 라온을 보며 입술을 꾹 씹었다.
‘라온 님은 역시 대단하시네.’
공명을 처음 보자마자 깨달음을 얻고 무아에 빠지다니, 재능 없는 자신으로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책에 나온 내용이 오히려 저분의 능력을 축소 시킨 거였어.’
라온 지그하르트 전기를 읽으며 조금 과장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실제 라온은 그 이상이었다.
세계수에게 인사를 받고, 대장로를 무릎 꿇린 것만 보아도 인간을 한참 벗어난 괴물이었다.
‘지켜드려야지.’
라온이 피해를 받지 않도록 조금 떨어져서 그를 지켜보고 있을 때 다른 엘프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인간은 의식을 보자마자 깨달음을 얻는데 왜 시얀 님은 계속 그대로인 거지?”
“그러게 말이야. 매번 정화 의식에 참여하는데도, 아직도 공명이 안 되다니….”
“이러다가 스테린 님이 돌아가시면 세계수도 위험해지는 거 아니야?”
“왜 저런 하이엘프가 나와서….”
장로와 엘프들은 들리든 말든 상관없다는 듯 시얀을 향해 맹목적인 비난을 풀어냈다.
“세계수의 미래가 암울하군. 차라리 저 인간에게 부탁해보는 게 나을 거….”
“거 입 좀 다물지?”
리메르가 엘프들을 노려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아직 의식이 완벽하게 진행된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아가리를 놀려. 입 닫고 경계나 제대로 서.”
“크흠….”
“음….”
엘프들은 리메르의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시선을 돌렸다. 다만 그들은 이 와중에도 틀린 말은 아니지 않냐며 중얼거렸다.
“저 새끼들이.”
리메르가 침을 퉤 뱉고서 엘프들에게 다가가려 할 때 시얀이 그의 소매를 잡았다.
“오빠. 난 괜찮아.”
“하지만….”
“정말이야.”
시얀은 하지 말라며 고개를 저었다.
“익숙해. 그리고 틀린 말도 아니니까.”
거칠긴 하지만, 그들의 말은 틀리지는 않았다. 스테린이 떠난다면 정화 의식을 펼칠 수 있는 엘프는 아무도 없으니까.
‘난 정말 도움이 안 되네.’
엘프들의 말대로 라온은 한 번 보고 깨달음을 끌어냈지만, 나는 계속 정화 의식에 참여했음에도 무엇 하나 얻지 못했다. 재능을 떠나 타고 날 때부터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게 분명했다.
‘그래도 이번에는 포기하지 않아.’
스스로 포기하지 않아서 지금의 위치에 섰다고 말해준 라온이 있기에 오늘만큼은 이대로 주저앉고 싶지 않았다.
시얀은 어머니와 함께 바람을 느꼈던 세계수의 밑동으로 가서 등을 기댔다.
눈을 내리감고 할아버지가 알려주었던 공명의 호흡을 내뱉었다.
‘음? 뭔가 조금 달라진 것 같아.’
신기하게도 평소보다 몸과 정신이 가벼운 듯한 느낌이 들었다.
‘기분 탓이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시얀은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눈을 내리감았다. 천천히 올라갔다가 내려서는 그녀의 명치 위로 붉고 푸른 아지랑이가 살랑였다.
* * *
라온이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은은한 미소를 그렸다.
‘조금은 알겠어.’
스테린의 공명을 직접 본 덕분에 검과 하나가 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조금이나마 감을 잡았다.
당장 신검합일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그 길로 걸어갈 수 있는 작은 발판 하나는 마련한 기분이었다.
시선을 들어 올리자, 무아에 빠지기 전처럼 세계수는 그 자리에 서서 가지를 흔들고 있었고, 스테린은 처음 모습 그대로 그 자리에 앉아있었다.
‘생각보다 길지 않았네.’
-길지 않았다고?
신기하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갸웃거릴 때 라스가 축 늘어진 얼굴을 들이밀었다.
-하루 동안 멍을 때려놓고 길지 않아? 네놈이 정말 미친 것이냐!
라스는 정신 좀 차리라며 멱살을 잡고 흔들어댔다.
-배고파 죽겠느니라!
‘하루?’
녀석의 말을 들어보니, 24시간이 지나서 시간이 거의 흐르지 않았다고 느낀 것 같았다.
‘그럼 생각보다 길었네.’
라온이 피식 웃을 때 리메르가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넌 진짜 시도 때도 없구나.”
그는 한숨을 내쉬는 것과 달리 입가에 미소를 그려내고 있었다.
“어떻게 밥 먹듯이 무아지경에 빠지는 거냐?”
“운이 좋았어요.”
“그놈의 운이 나는 언제 터지려나.”
리메르가 짜증 난다고 중얼거리며 손을 저었다.
“그래서 좀 얻은 건 있어?”
“합일이 무엇인지 대략적인 감만 잡았습니다.”
“그거면 충분하지.”
그는 훌륭한 성과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만 나가자.”
“나가다니요?”
“하루가 지나서 이제 할배도 정화 의식에 완전히 들어섰거든. 2주 동안은 저러고 있을 테니까. 기다릴 필요 없어.”
리메르는 장로들과 다른 엘프들이 지킬 거라며 나가자고 손짓했다.
“하지만….”
“넌 손님이자, 은인이야. 경계까지 설 필요는 없다고.”
그는 걱정하지 말라며 어깨를 잡고 끌고 갔다. 그의 옆에 있던 시얀도 꿈틀거리며 일어섰다.
“시얀 님은 괜찮으십니까?”
“아, 네.”
시얀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조금 힘이 빠진 듯한 음성이었다.
리메르는 잠시 시얀을 바라보다가 스테린이 이 공간을 열었을 때처럼 허공에 손을 얹었다.
우우우우웅!
녹색 빛이 공간을 가르고, 들어올 때 지나쳤던 스테린의 나무집이 나타났다.
“저, 저는 먼저 가볼게요….”
시얀은 세계수가 뻗어 있던 공간을 벗어나자마자 고개를 꾸벅이고서 본인의 집으로 달려갔다.
계속 느끼는 거지만 이불을 뒤집어쓴 채로 참 잘도 움직였다.
“왜 저러시죠?”
“그럴 일이 좀 있었거든.”
리메르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쟤는 내가 데려다줄 테니까. 너는 숙소로 돌아가 있어. 조금 있다가 밥 먹자고.”
그는 포크를 드는 제스처를 취한 후 시얀을 뒤따라갔다.
‘무슨 일 있었어?’
-네놈이 무아지경에 빠졌을 때 다른 귀때기 놈들이 저 엘프 계집에게 지랄을 했느니라.
라스가 눈매를 찌푸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지랄?’
-네놈은 단번에 무아지경에 빠졌는데, 엘프 계집은 정화 의식을 수없이 봐놓고 왜 공명을 못 하냐고 주절댔었지.
녀석은 귀때기들은 좋아할 수가 없다며 입매를 비틀었다.
‘그랬군….’
라온은 시얀의 뒷모습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제대로 확인해 보고 싶었는데.’
시얀의 상단전을 막고 있는 벽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경지의 벽인지 아니면 세계수에서 뻗어 나온 구술의 기운인지를 확인하고 싶었지만, 다음으로 미뤄야 할 것 같았다.
-다 됐고, 빨리 밥이나 먹으러 가라! 하루종일 굶지 않았느냐!
‘하루종일 굶었으니까. 나딘빵 어때?’
-지, 진짜 본왕을 죽일 셈이냐! 지금 그거 먹었다간 본왕의 장이 꼬일 것이니라!
라스는 제발 정신 좀 차리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알겠다. 알겠어.’
라온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네가 먹고 싶다는 엘프들의 음식을 먹을게.’
-오? 네놈이 웬일인 것이냐!
‘때가 됐으니까.’
라스는 나딘빵을 만든 시얀을 혐오했지만, 그녀가 재능이 없다는 이유로 엘프들의 구박을 받는 것을 알게 되며 오히려 옹호해주었다. 그런 인간적인 면모를 보자 조금이나마 챙겨주고 싶었다.
라스와 대화를 나누며 걷다 보니, 어느새 숙소 앞에 도착했다.
유아와 도리안은 아직 음악을 배우고 있는지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먼저 들어가 있으려고 숙소의 문고리를 잡을 때 우측 수풀이 흔들리며 작은 아기 여우 한 마리가 튀어나왔다.
“여우?”
여우가 여기에 있을 수가 있나?
리메르는 이곳에 엘프의 초대를 받은 생물만 들어 올 수 있다고 말했었다. 즉, 저 여우는 절대 야생동물일 수가 없었다.
‘설마….’
-히이이익!
곧 먹을 엘프들의 음식을 떠올리며 싱글벙글하던 라스가 기겁을 하면서 물러섰다.
-광녀다! 광녀가 분명하느니라!
라온이 라스와 같은 생각을 하며 마른침을 삼킨 순간 여우의 입에서 사람의 언어가 튀어나왔다.
“라온!”
예상대로 아기 여우는 멀린이었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리 다급하게 떨어져 내렸다.
“지금 당장 여기서 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