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584화 (583/653)
  • 제584화

    라온이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들어 올렸다. 세계수는 반갑다는 듯 가지를 흔들며 청아한 자연의 기운을 흩뿌렸다.

    ‘기억해줘서 고맙다.’

    선조의 기억을 보았을 때부터 확신했다. 세계수는 영물이기 때문에 선조가 목숨을 구해준 일을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을 것이라고.

    처음에는 헷갈리는 듯 반응이 없었지만, 만화공의 기운이 외피를 뚫고 내부에 들어가자마자 세계수는 선조를 기억해내며 반가움과 고마움을 거대한 마나의 흐름으로 표현해주었다.

    세계수에게서 퍼져나가는 감정의 파도에 내 가슴이 아려올 정도였다.

    “이, 이게 어찌 된….”

    대장로는 창백해진 안색으로 턱을 부르르 떨었다.

    “마, 말도 안 돼!”

    “어찌 인간에게 저런 반응을….”

    “세계수가 저렇게 활기를 띠는 건 처음 봐….”

    “지, 지금 내가 지금 꿈을 꾸는 건가?”

    장로들과 다른 엘프들도 이런 상황은 상상도 못 한 듯 멍하니 눈만 끔벅였다.

    “어우, 이건 어떻게 한 거야?”

    리메르도 당황했는지 흔들리는 세계수의 가지를 보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내가 말했잖아! 저 인간 정령왕의 계약자가 맞다니까!”

    에리안은 믿고 있었다면서 두 손을 들어 올렸다. 리메르 이상으로 미친 엘프였다.

    “라온 지그하르트.”

    스테린이 옆으로 다가와 톤이 튀어 오른 목소리를 흘렸다.

    “대체 무엇을 한 것이냐.”

    “예?

    “다른 이들은 모르겠지만, 지금 세계수는 네게 감사의 인사를 하고 있다.”

    그는 경련이 일어난 것처럼 떨리는 눈동자로 세계수를 올려다보았다.

    “어째서 세계수가 처음 보는 네게 고마움을 말하는 거지?”

    스테린의 시선이 다시 내려온다.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매를 좁혔다.

    “네가 자신 있게 내기에 나설 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이전에 세계수를 만난 적이 있는 것이냐?”

    “아뇨 처음입니다.”

    라온이 세계수의 외피를 매만지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어떻게….”

    “지금 세계수는 제가 아니라, 지그하르트의 검사에게 감사를 전한 겁니다.”

    “지그하르트의… 검사?”

    “예. 제가 익혔던 지그하르트의 무학서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인데….”

    조금 전에 보았던 선조의 기억을 책에서 보았다고 말하며 모두에게 말해주었다.

    “미, 믿을 수 없다!”

    대장로가 거짓이라고 외치며 고개를 흔들었다.

    “세계수는 인간이 아니라, 엘프들의 정성으로….”

    “이걸 보면 아실 겁니다.”

    라온이 만화공의 열기가 타오르는 손으로 선조가 구멍을 메운 부분을 쓸어내렸다.

    불길에 타고 있음에도 세계수는 반갑다는 더욱 격한 감정이 실려 있는 마나를 쏟아냈다. 아련하면서도, 감미로운 마나의 향기에 자연스레 미소가 지어졌다.

    “아아….”

    “나도 느껴져. 지금 세계수는 고맙다고 외치고 있어….”

    “저, 정말 지그하르트가 도와준 거였다고?”

    엘프들은 격해진 세계수의 감정을 느끼고 입술을 떨었다.

    “하….”

    스테린이 헛웃음을 흘리며 본인의 이마를 부여잡았다.

    “그랬군. 그랬어….”

    “예?”

    “당시의 기록을 볼 때 이상한 점이 너무 많아서 엘프가 아닌, 누군가의 도움이 있었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제야 의문이 풀리는군.”

    그가 다가와 두 손을 꽉 잡아주었다. 마음을 담은 듯한 따스한 온기가 손아귀를 파고들었다.

    “네 선조가 엘프와 세계수를 구해준 것였군.”

    스테린은 이제야 모든 상황이 이해되었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라온은 부들부들 떠는 대장로와 장로들을 보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먹혔군.’

    처음에 이 사실을 말했다면 미친놈 소리를 들으며 바로 쫓겨났을 것이다.

    하지만 대장로가 판을 벌여줬고, 세계수가 격한 반응을 해준 덕분에 이곳에 있는 엘프들은 나를 의심할 수 없게 되었다.

    ‘제대로 뜯어먹을 수 있겠어.’

    아무리 내기를 했다고 해도 이곳이 세이피아다 보니, 대장로에게 원하는 전부를 얻기는 힘들 테지만, 선조의 이야기 덕분에 약속된 내용 이상의 보상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 정령왕의 계약자 소리도 안 하겠지.’

    라온이 미소를 유지한 채 에리안을 보았다. 그는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더 진한 웃음으로 반겨주었다.

    “괜히 정령왕의 계약자가 된 게 아니었군! 역시 세계는 공평한 법이야!”

    에리안은 여전히 나를 정령왕의 계약자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정말 답도 없는 외골수였다.

    “이리 기뻐하는 세계수를 보고도 의심할 사람은 없을 거다.”

    스테린은 한참 동안 세계수를 올려보다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합장 한 두 손을 가슴에 얹은 채로 허리를 굽혔다.

    “세이피아의 수호자가 은인의 후예를 뵙소.”

    “은인의 후예를 뵙습니다.”

    스테린만이 아니라, 세계수를 둘러싸고 있던 엘프들도 약속한 것처럼 그와 똑같은 자세로 고개를 숙여왔다.

    “이러지 마세요.”

    라온이 손을 저었다. 이런 인사를 받기 위해서 선조의 이야기를 한 게 아니었기에 바로 스테린을 일으켜 세웠다.

    “제가 한 게 아니라, 선조께서 하신 겁니다.”

    “그 선조가 지금 없지 않은가. 자네라도 인사를 받아주어야지.”

    스테린은 엘프들도 은혜가 무엇인지는 안다며 고개를 저었다.

    “정말 괜찮습니다. 저는 감사 인사는 필요 없고….”

    라온이 입맛을 다시며 유일하게 머리를 숙이지 않은 대장로를 바라보았다.

    “저자의 사과를 받고 싶을 뿐이니까요.”

    “크윽!”

    그의 말에 대장로가 어깨가 뜯겨나갈 것처럼 격하게 떨렸다.

    “은인의 후예를 무시하는 것으로 모자라서 쫓아내려고 했으니….”

    리메르가 대장로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성격 좀 죽이지 그랬어.”

    그는 엘프 망신은 혼자 다 시킨다며 혀를 찼다.

    라온이 대장로에게 다가가서 턱을 모로 틀었다.

    “귀가 먹혔나. 꿇으라고 말했는데, 왜 아직도 서 있는 거지?”

    “나, 난 믿을 수 없다!”

    대장로가 입술을 깨문 채 고개를 저었다.

    “세계수를 구한 게 인간이라니 믿을 수 없….”

    “어. 믿지 마.”

    라온이 대장로의 말을 끊으며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

    대장로는 이렇게 쉽게 받아들일 줄 몰랐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믿고 자시고 상관없이. 꿇으라고.”

    라온이 손가락으로 바닥을 가리키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댁이 꿇는 건 내가 은인의 후예인 거랑 상관없잖아. 잘난 엘프들의 대장로가 이제와서 약속을 어기는 건 아니겠지?”

    “그, 그런데 왜 갑자기 말을 놓는 것이냐.”

    “네가 먼저 반말했으니까.”

    엘프가 반말을 신경 쓴다는 게 우스웠지만 친절하게 답을 해주었다.

    -이놈 존댓말 성애자이니라!

    라스가 질린다며 고개를 저었다.

    “끄윽….”

    대장로는 숨이 넘어갈 것처럼 빨개진 얼굴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다만 장로들과 엘프들은 더 이상 그의 뒤에 서 있지 않았다.

    “아, 원하는 거 다 해주겠다는 사람 어디 갔나?”

    라온이 말끝을 올리며 조롱을 내뱉었다.

    “한다. 한다고!”

    대장로는 엘프는 인간과 달리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중얼거리고서 떨리는 무릎을 꿇었다.

    “이제 된 것이냐….”

    “아니지.”

    라온이 고개를 젓고서 스테린과 시얀을 옆으로 불렀다.

    “내기 조건은 당신이 무릎을 꿇고, 우리 세 사람에게 무례를 사과하는 거였어. 한 명씩 진심을 담아서 용서를 구하도록.”

    팔짱을 꼰 채로 대장로를 굽어보았다.

    “크으으….”

    대장로는 한참 동안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우측에 선 스테린이 있는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수, 수호자님. 무례를 범해서 죄송합니다.”

    그는 덜덜 떨리는 음성으로 흘리며 머리를 내렸다.

    “자네는 조금 성격을 죽일 필요가 있어.”

    “예에….”

    “사과는 받아들이겠네.”

    스테린은 눈매를 찌푸리면서도 대장로의 사과를 받았다. 고고한 성격다운 반응이었다.

    “후우….”

    대장로가 깊은 한숨을 내쉬고서 좌측에 선 시얀을 바라보았다.

    “시, 시얀 님. 못 볼 꼴이라고 해서 죄송합니다.”

    그는 시얀에게도 고개를 숙이고 용서를 구했다.

    “괘, 괜찮아요.”

    시얀은 이불을 뒤집어쓴 채로 고개를 꾸벅였다. 그녀의 성격상 이 자리가 불편할 거라 생각했는데, 묘하게도 목소리에 활기가 스며들어 있었다.

    “그럼 이제 내 차례네.”

    라온은 해보라고 말하며 턱을 까딱였다.

    “끄윽….”

    대장로는 숨이 넘어가는 듯한 신음을 흘리고서 중앙에 선 라온을 올려보았다.

    “내, 내가 자네에게 무례를 범했네. 미안하네.”

    그는 스테린, 시얀에게 용서를 구할 때와 달리 고개를 숙이는 게 아니라 조금만 까딱였고, 말도 잘 들리지 않게 뭉갰다.

    “후우….”

    “사과도 제대로 안 하고, 어딜 일어나.”

    대장로가 한숨을 내쉬며 일어나려고 할 때 라온이 그의 어깨를 짓눌렀다.

    “무슨 헛소리냐! 제대로 사과했지 않느냐!”

    그는 받아들일 수 없다는 듯 사나운 기세를 일으켰다.

    “수호자님에게 할 때와 다르게 고개도 제대로 안 숙였고, 목소리도 낮췄잖아.”

    “그, 그건….”

    “진심을 담아서 용서를 구하라고 했지? 난 댁의 진심을 못 느꼈어.

    라온은 대장로의 강대한 기파를 가볍게 흘려내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해달라는 거 다 해준다며 사과도 제대로 못 하네.”

    “이건 라온의 말이 맞다.”

    스테린이 대장로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는 분명 해줄 수 있는 건 다해준다는 말을 입에 담았지. 절대 해서는 안 될 맹세를 했으니, 지킬 수 밖에 없네.”

    그가 손을 들어 지금 이곳을 지켜보고 있는 엘프들을 가리켰다. 가족들 앞에서 채신을 지키라는 뜻이었다.

    “하아아….”

    대장로는 다른 엘프들의 가라앉은 눈동자를 마주하다가 다시 무릎을 꿇었다.

    “미, 미안하네. 자네에게 무례를 범했어.”

    그는 스테린에게 하듯 진중하게 고개를 숙였고, 이전처럼 말을 뭉개지도 않았다.

    “흠….”

    “괜찮군.”

    스테린과 리메르도 받아들였는지 잔잔하게 턱을 주억였다.

    “그럼….”

    대장로가 일어서려 할 때 라온이 다시 그의 어깨를 잡았다.

    “마음에 안 들어. 다시 해.”

    라온은 그걸로는 안 된다고 말하며 턱짓을 했다.

    “이익! 네 말대로 목소리도 낮추지 않았고, 고개도 제대로 숙였지 않느냐!”

    “네가 무슨 무례를 범했는지 밝히지 않았잖아. 반성문 안 써봤어?”

    그는 그저 무례를 범했다고만 하고 어떤 짓을 했는지 말하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게 결여되어 있으니, 용서를 받아 줄 이유가 없었다.

    “반성문….”

    대장로는 마약을 한 것처럼 손을 부들부들 떨다가 다시 무릎을 꿇었다.

    “인, 인간이라고 무시하고, 죄인처럼 여기는 무례를 범했네. 미안하네.”

    그는 결국 세 번이나 용서를 빌었다.

    “이만하면 됐겠지?”

    “이번에는 고개를 숙일 때 각도가 좀 틀어졌어.”

    라온은 아직 멀었다며 손을 저었다.

    “아아….”

    “어우….”

    “미쳤어.”

    대장로의 눈동자에 절망이 차오르고, 다른 엘프들의 안색이 퍼렇게 질렸다. 모두가 정신 나간 인간에게 걸렸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라온은 결국 대장로에게 여섯 번의 사과를 받고 나서야 그를 일으켜 세워 주었다.

    “이, 이제 되었느냐?”

    대장로는 100년은 더 늙은 듯한 얼굴로 숨을 헐떡였다.

    “아직 산래의 열매를 안 줬잖아.”

    고개를 젓고서 손을 뻗었다.

    “걱정 마라. 네 숙소로 보내놓을 테니까.”

    대장로는 그건 속이지 않는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럼 100개 잘 부탁해.”

    라온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배, 백 개라니! 그게 무슨 소리냐!”

    등을 돌리던 대장로가 빽 소리를 질렀다.

    “뭐가?”

    “왜 갑자기 열매가 100개가 되었냐는 말이다!”

    “난 처음부터 100개라고 생각했는데?”

    “그걸 말하지 않아놓고 이제와서….”

    “당신이 원하는 건 다 들어준다고 해서 그냥 말 안 했지.”

    손가락으로 대장로를 가리키며 어깨를 으쓱였다.

    “끄으윽….”

    대장로는 반박하지 못하고 입술만 질겅 씹었다. 본인이 한 말에 완벽하게 발목이 잡힌 것이다.

    “100개야. 하나라도 빼먹으면 안 돼.”

    라온은 시뻘겋게 달아오른 대장로에게 경쾌하게 손을 흔들었다. 정말 100개를 받기는 힘들겠지만, 최소한 광풍대 녀석들에게 2개씩은 주고도 남을 정도는 받아내기로 다짐했다.

    “내가 말했지? 진짜 망나니가 뭔지 보여주겠다고.”

    리메르가 앞으로 튀어나와 라온을 가리켰다.

    “얘가 진짜 망나니야. 인간계 최고의 망나니!”

    그는 엘프들에게 조심하라고 외치며 키득거렸다.

    -인간계가 아니라, 전 차원이니라.

    라스가 그 모습을 보며 이를 바득 갈았다.

    -마계에도 저런 망나니는 없느니라!

    *     *      *

    대장로는 시체처럼 창백해진 얼굴로 쓰러져서 결국 다른 엘프들의 부축을 받고 실려 나갔다.

    라온은 멀어지는 대장로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남은 부탁 하나는 뭐에 쓰지?’

    -껍질을 뜯어내고, 살을 바른 것으로 모자라서, 뼈까지 우려내는구나.

    라스는 지독하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게 생선을 맛있게 먹는 방법이지.’

    라온은 다 알지 않냐며 팔꿈치로 라스를 툭 쳤다.

    -그런데 너희 선조가 세계수를 살렸다는 건 어떻게 안 것이냐?

    ‘아까 말했잖아. 선조 보고 왔다고.’

    -어…?

    라스가 눈을 꿈벅이다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 그거 진짜였던 것이냐?

    ‘글쎄….’

    라온은 어깨를 으쓱이고서 세계수를 살폈다.

    ‘여기로군.’

    지그하르트의 선조가 구멍을 메운 곳 바로 위쪽에 그의 검이 박혔던 자리가 있었다.

    ‘어검이었지.’

    그의 어검은 성검련주와도 스테린의 무학과도 달랐다.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특별한 힘이 실려 있는 것 같았다.

    ‘그것도 만화공의 검술이라면 언젠가는 나도 쓸 수 있겠지.’

    라온은 훗날을 기약하며 구멍을 메운 곳에 손을 얹었다.

    우우우우웅!

    세계수는 기쁘다는 듯 검명 같은 울림을 흘렸다.

    “오오!”

    “저 인간의 손만 닿으면 세계수가 기뻐하고 있어!”

    “정말 은인의 후예가 맞나보군.”

    “세계수를 울리는 인간이라. 난리가 나겠어.”

    이젠 이곳에 있는 대부분의 엘프들이 나를 은인으로 여기고 있었다. 이런 반응을 원한 게 아니었기에 조금 민망했다.

    ‘대장로를 짓밟고, 정령왕의 계약자 소리를 빼려고 한 건데, 이상한 소문만 추가됐네.’

    그래도 편하게 세계수를 만질 수 있게 되어서 다행이야.

    은인의 후예라는 이름이 덕분에 세계수를 마음대로 만져도 누구 하나 방해하지 않았다.

    라온은 그 틈을 이용하여 손을 덴 세계수 속으로 만화공의 기운을 밀어 넣었다.

    ‘이 안에 있을 거야.’

    선조가 구슬을 넣은 곳은 이 부근이 분명하다. 잘만 뒤지면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만화공의 열기와 글래시아의 냉기로 한참을 뒤져도 세계수 안쪽에서 특별한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자그마한 불과 물의 잔재는 감지되지만, 기억에서 느꼈던 그 거대한 기운은 씻은 듯 사라져 있었다.

    라온이 눈매를 찡그린 채 세계수를 올려보았다.

    ‘전부 다 세계수의 거름이 된 건가?’

    수백 년 어쩌면 천 년이 지났을지도 모르니, 선조가 남긴 구슬의 기운이 모두 흡수되었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조금 아쉽네.’

    라온이 짧게 혀를 차고 세계수에서 손을 뗐다.

    “음?”

    뒤를 도는데, 언제 왔는지 시얀이 세계수의 밑동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 여기….”

    시얀이 한쪽 눈동자를 반쯤 내놓은 채 조금 전 잡고 있던 세계수의 껍질을 가리켰다.

    “아, 비켜드릴까요?”

    “그게 아니라. 여기….”

    라온이 몸을 빼려 할 때 시얀이 고개를 저었다.”

    “엄마랑 자주 왔던 곳이에요.”

    그녀의 낮은 음성에서 씁쓸함이 흘러내렸다.

    ‘엄마라….’

    리메르는 스테린과 시얀 외에 다른 가족을 찾지 않았다. 느낌이 좋지 않아 묻지 않았는데, 예상대로 그들의 부모님을 포함한 다른 가족들은 이 세상에 없는 것 같았다.

    “엄마가 저를 가지셨을 때도 이곳에 자주 와서 세계수가 전해주는 바람을 즐겼다고 하셨죠.”

    시얀은 이불을 만 채로 선조가 구멍을 메웠던 부분에 등을 기댔다.

    “여기만 오면 마음이 편해져요.”

    그녀는 눈치가 보여서 자주 올 수는 없다고 중얼거렸다.

    “그렇군요.”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멈춰 섰다.

    ‘잠깐만….’

    그녀의 말을 들으니, 떠오르는 게 하나 있었다.

    ‘라스.’

    -왜 부르는 것이냐.

    하품하던 라스가 꾸물거리며 솟아올랐다.

    ‘너 시얀 님이 태어날 때부터 깊고, 짙은 무언가에 의해서 막혀 있다고 했었지?’

    -그랬었지.

    녀석은 왜 또 묻냐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럼 가능성은 있어.’

    라온이 시얀에게 다가가서 손을 뻗었다.

    “죄송하지만, 제가 한번 시얀 님을 살펴봐도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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