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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583화 (582/653)

제583화

용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거대한 화염의 뱀이 세계수를 휘감고 있었다.

풍요로웠던 녹색 대지 위는 반쯤 타버린 엘프들의 시체로 가득했고, 구름 한 점 없던 푸른 하늘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검은 균열이 돋아나 있었다.

엘프들이 하얀 화살을 쏘아내고, 강대한 정령술을 펼쳐냈지만, 불꽃의 뱀은 그 모든 것을 무시하고 세계수를 향해 붉은 송곳니를 꽂아 넣었다.

콰아아아아!

세계수를 보호하던 마나의 벽이 산산이 조각나고, 우측 밑동에서부터 시뻘건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엘프들의 눈동자에 절망이 차오를 때 스테린과 닮은 듯한 하이엘프가 앞으로 나왔다.

다른 곳에서 싸우고 왔는지 지친 기색이었지만, 눈빛만큼은 매섭게 번뜩였다.

하이엘프가 벼락처럼 쏘아낸 화살이 세계수를 태우던 뱀의 주둥이에 박혔다.

화염의 뱀이 처음으로 비명을 지르며 세계수에서 떨어져 나갔다.

다만 놈이 남긴 불꽃은 여전히 세계수의 내부와 외부를 태우고 있었다.

하이엘프가 그 불을 끄기 위해서 세계수로 다가가려 할 때 갈라진 균열에서 이마 위에 나선형 뿔이 돋아난 적발의 괴인이 나타났다.

괴인은 뱀의 혀처럼 새빨간 불꽃을 일으켜 하이엘프의 앞을 막아섰다.

하이엘프가 미간을 찌푸리며 괴인에게 새하얀 화살을 쏘아냈다.

하지만 그의 화살은 괴인의 불길을 뚫어내지 못하고 허공에서 녹아내렸다.

적발의 괴인이 열었던 균열 속에서 그와 비슷한 복장을 한 인간들이 튀어나와 엘프들을 공격하고, 화염의 뱀에게 힘을 주었다.

거대한 뱀은 다시 일어나 세계수를 강하게 조인 채로 다시 이빨을 박아넣었다.

세계수를 뒤덮은 불길이 붉은 물감을 칠한 듯 더 진하게 타올랐다.

하이엘프는 이곳에 나타났을 때부터 지쳐 있었고, 동족들의 죽음에 조급해져 결국 괴인의 일격을 허용했다.

딱 한 번의 실수였지만, 그 결과는 참담했다. 하이엘프는 복부에 시꺼먼 구멍이 뚫린 채 쓰러졌다.

적발의 괴인은 숨이 끊어지는 하이엘프에게 조롱이 섞인 웃음을 그린 채 세계수를 향해 다가갔다.

그의 수하들은 세계수만이 아니라 이 공간 전체를 지워버리고 싶은 듯 사방으로 불길을 난사했다.

쩌어어어억!

자연의 기운이 충만했던 대지가 지옥으로 바뀌며 울부짖을 때, 검은 하늘이 갈라지고 태양처럼 찬란한 불꽃이 쏟아졌다.

장대한 바람과 함께 뻗어나간 금빛 불길은 대지를 태우는 시뻘건 화염과 괴인의 수하들을 단숨에 집어삼켰다.

어둠이 갈라진 대지 위로 은색의 갑옷을 두른 검사가 내려섰다.

이제는 익숙해진 등. 지그하르트의 선조였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괴인에게 검을 겨누었다.

시종일관 여유가 넘쳤던 괴인의 입매가 비틀어졌다.

적발의 괴인은 하이엘프를 죽였을 때처럼 손아귀에 불길을 두른 채 앞으로 내뻗었다.

하지만 그 공세는 이전과는 차원이 달랐다. 허공에서 타오른 열 개의 화염구가 운석이 되어 선조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지그하르트의 선조는 쏟아지는 화염의 구를 바라보지 않았다. 괴인에게만 집중하며 검을 쥔 손아귀를 부드럽게 펼쳤다.

파아아아아앙!

그의 손을 떠난 검은 폭발적인 금빛 섬광이 되어 괴인의 심장을 뚫어버리고, 붉은 뱀의 머리마저 박살 낸 후 세계수의 중심에 박혔다.

지금은 보인다. 어검. 선조는 의념에 파괴의 묘를 담아서 어검을 날린 것 같았다.

괴인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구멍이 뚫린 본인의 가슴을 내려보다가 쓰러졌고, 불꽃의 뱀 역시 머리를 잃은 채로 버둥거리다가 먼지가 되어 흩어졌다.

“미안하다.”

선조는 죽어 있는 엘프들에게 늦게 와서 미안하다고 읊조리며 세계수를 향해 다가갔다.

그는 죽어가는 듯 시꺼멓게 변한 세계수의 밑동과 뿌리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대로라면 죽을 수밖에 없겠어.”

선조의 말대로 세계수는 너무도 큰 충격을 받았다. 외부만 탔다면 스스로 회복할 수도 있겠지만, 뱀은 이빨로 세계수에 구멍을 뚫고 내부까지 태워버렸기에 이대로라면 살릴 방법이 없어 보였다.

“이것도 운명이겠지.”

선조가 눈을 깊게 감았다가 뜬 후 아공간 주머니로 보이는 물건에서 붉은 구슬과 푸른 구슬을 꺼냈다.

아니, 구슬이 맞는지 모르겠다. 동물의 알 같기도 했고, 보석 같기도 했다.

다만 그 안에서는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순수한 자연의 기운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선조는 그 구슬을 화염의 뱀이 이빨을 박아 넣었던 구멍에 하나씩 집어넣고, 만화공의 불길을 이용하여 구멍을 막아버렸다.

“살거라.”

그는 시선을 올리며 세계수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우우우우웅!

세계수도 선조의 마음을 느낀 듯 작은 울림을 일으키며 가지와 잎을 흔들었다. 살아남은 투명한 잎들이 아련하게 흩날렸다.

선조는 한참 동안 세계수를 매만져 준 후 일어서서 뒤를 돌았다. 그의 붉은 눈동자는 꼭 나를 보고 있는 것처럼 거세게 요동쳤다.

선조의 얼굴을 자세히 보기 위해서 상체를 앞으로 기울인 순간 불의 고리가 다시 한번 공명하며 시야가 검게 물들었다.

*     *      *

“…온. 라온!”

“아….”

라온은 누군가의 부름에 가늘게 고개를 떨었다.

“어제 잠 못 잤어? 왜 선 채로 조는 거야?”

리메르는 루난도 아니고, 왜 멍을 때리냐면서 피식 웃었다.

“죄송합니다.”

라온이 이마에서 흐르는 식은땀을 닦으며 고개를 저었다.

-네놈 또 어디에 다녀온 것이냐?

라스가 어깨에 붙으며 푸른 눈동자를 흘겼다.

‘잠깐 선조님 좀 보고 왔어.’

-하여튼 헛소리는!

솔직하게 말해줬는데, 녀석은 당연히도 믿지 않고 고개를 홱 돌렸다.

라온이 피식 웃으며 세계수를 바라보았다. 과거의 화마를 잊은 듯 기억보다 더 웅대하게 자라난 세계수를 보니, 선조의 위대함이 다시 한번 느껴졌다.

‘그런데….’

그 괴인은 정체가 뭐지?’

선조의 기억을 볼 때마다 나타나는 괴인들. 흑안과 백안이 뒤바뀐 모습만 보면 악마 같지만, 느껴지는 기운은 분명 인간의 그것이었다.

‘그 구슬은 또 뭐고.’

죽어가던 세계수를 살리다 못해 더 크게 성장시킨 건 선조와 구슬의 힘일 텐데, 그 구술이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아직 저 안에 있으려나?’

지그하르트의 선조가 남긴 구슬이고, 세계수도 잘 살아남았으니, 가져갈 수 있다면 가져가고 싶었다.

“어휴….”

어떻게 구슬을 찾아야 할지 고민할 때 리메르의 한숨이 들려왔다.

“꼰대들이 있네.”

“네?”

“네가 생각한 전형적인 엘프 꼰대들이 저기 있다고.”

리메르가 손가락을 들어서 세계수 뒤편에 자리를 잡고 있던 엘프들을 가리켰다.

스테린처럼 주름이 보이는 노년의 엘프 11명이 있었고, 그 뒤에 가디언의 복장을 한 젊은 엘프들이 전열을 이룬 것처럼 서 있었다.

“저들은….”

“장로들이야.”

리메르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엘프들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윽….”

장로라는 말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던 시얀이 짧은 신음을 흘리며 전신을 떨었다.

아무래도 그동안 그녀에게 잔소리를 하고 모욕한 이들이 저 장로들인 것 같았다.

“수호자님을 뵙습니다.”

중앙에 서 있던 금발 엘프가 스테린에게 허리를 굽혔다.

“먼저 와서 의식 준비를 해놓은 건가?”

스레인은 정화 의식을 챙겨주어 고맙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저희가 해야 할 일이지요. 그런데….”

금발 장로의 시선이 라온에게 향했다.

“왜 이곳에 인간이 있는 겁니까?”

그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수준이 아니라, 노기를 드러냈다.

“이곳은 엘프들만의 성지. 인간이 들어올 곳이 아닙니다.”

“괜찮을 겁니다. 저 인간은 정령왕의 계약자가 될 테니까요.”

그에 대한 답은 리메르나, 스테린이 아니라, 장로들의 뒤에 서 있던 에리안에게서 들려왔다. 그는 여전히 라온을 정령왕의 계약자라고 외치며 주먹을 들어 올렸다.

“에리안.”

“예. 대장로님.”

에리안이 당당하게 고개를 숙였다.

“네게 묻지 않았다. 입 닫고 있도록.”

“죄, 죄송합니다.”

대장로의 서늘한 음성에 에리안이 찔끔 떨다가 뒤로 물러섰다.

“수호자님.”

대장로가 짧게 혀를 차고서 다시 스테린을 바라보았다.

“다시 여쭈어보겠습니다. 인간이 이 왜 이 신성한 땅에 들어오게 된 겁니까?”

그는 무슨 생각이냐며 냉담한 눈동자를 쏘아냈다.

“세계수를 불태우려고 한 게 인간이라는 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세이피아를 습격했던 인간과 이 아이가 같다는 소리를 하고 싶은 건가?”

스테린은 담담한 음성을 흘리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다르지 않지요! 같은 인간이지 않습니까!”

대장로가 흥분한 듯 소리를 쳤지만, 그의 눈동자는 여전히 냉랭한 빛으로 번들거렸다.

“제가 선조들께 배운 건 세계수를 인간이 불태울 뻔했다는 것뿐입니다!”

그는 아직 화마의 흔적이 남아 있는 세계수의 우측 밑동을 가리켰다.

“대장로의 말이 맞습니다.”

“감히 인간이 성지를 밟아서는 안 됩니다.”

“당장 내보내주십시오!”

“수호자님!”

다른 장로들도 받아들일 수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라온은 고집스러운 입매를 드러낸 장로들을 보며 눈썹을 찌푸렸다.

‘기록을 남기지 않으셨군.’

기억 속 지그하르트의 선조는 세계수를 살린 후 누구도 만나지 않은 채 이곳을 떠났다. 그가 세계수를 살렸다는 건 역사에 남지 않은 것 같았다.

“수호자님의 요청 때문에 인간과의 거래는 받아들였지만, 세계수는 절대 안 됩니다.”

대장로가 길을 막아선 채 당당하게 허리를 폈다.

대충 이야기를 들어보니, 스테린은 인간들과 왕래하는 조건으로 장로회와 거래를 한 것 같았다.

“음….”

스테린은 이런 방해를 해올 줄은 몰랐다는 듯 눈매에 주름을 세웠다.

“거 야박하네.”

리메르가 스테린의 옆으로 붙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쟤 내 제자예요. 그 정도라면 이해해줘도….”

“너도 문제다.”

대장로가 리메르에게 시선을 돌리며 입매를 찡그렸다.

“인간에게 물들어서 망나니가 된 놈이 여기가 어디라고 입을 놀리는 것이냐!”

그는 라온을 볼 때보다 더 날카로워진 눈빛으로 리메르를 쏘아보았다.

“이 영감탱이가! 진짜 망나니 맛이 뭔지 보여줘?”

“그만.”

리메르가 발작을 일으키려 할 때 스테린이 앞으로 나섰다.

“전부 같은 생각인가?”

“그렇습니다.”

장로들은 대장로의 의견에 힘을 실어주듯 그의 등 뒤에 섰다.

“그리고….”

대장로가 라온의 옆에 서 있는 시얀을 보며 눈매를 찌푸렸다.

“이 성스러운 공간에 저런 꼴로 오시다니, 시얀 님은 엘프의 존엄성을 어디까지 무너뜨리실 건지 궁금하군요.”

“으….”

그의 날카로운 목소리와 기세에 시얀이 부르르 떨었다.

“일단 저 인간과 리메르를 이곳에서 내보내 주십시오. 시얀 님 역시 저 꼴로는 들어가게 할 수 없습니다.”

대장로의 시선이 매서워질수록 시얀의 어깨 떨림이 심해졌다.

“지금 해보자는 건가?”

스테린도 이제 짜증이 돋았는지 서늘한 기세를 일으키며 턱을 세웠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희는 그저 엘프의 풍요만을 생각할 뿐입니다. 재고해주십시오.”

대장로가 손을 저으며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재고해주십시오!”

다만 그의 의견을 따르는 장로들과 다른 엘프들은 물러서지 않고 그 자리에서 버텼다.

“음….”

“대주님.”

스테린이 엘프들을 보며 가늘게 입술을 씹을 때 라온이 리메르에게 손짓했다.

“엘프의 수호자는 가주나 왕 같은 거죠?”

“뭐, 그렇지.”

“그런데 여기는 왕을 무시하는 자들이 많네요.”

조롱이 섞인 듯한 간드러진 음성에 장로들과 스테린의 시선이 이쪽으로 돌아갔다.

“지금 뭐라 했지?”

“그렇잖아요.”

라온이 한 발 앞으로 나오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수호자님이 제게 세계수를 보여주신다고 하신 게 이틀 전입니다. 다른 엘프들도 알고 있었으니, 장로인 여러분들이 모를 수가 없었겠죠. 그런데 바로 따진 것도 아니고, 여기까지 와서 길을 막는 건 수호자님을 무시하는 것밖에 더 됩니까?”

“그, 그건….”

장로들은 반박하지 못하고, 시선을 돌렸다.

“당신들이 무시하는 인간들도 외부의 손님들이 왔을 때는 파벌 싸움을 멈추고 가문의 좋은 모습만 보여주려고 하는데, 잘났다는 엘프들은 인간 앞에서 본인들의 치부만 보여주네요.”

“그게 아니다. 우리는….”

“아아, 사실 다 상관없고.”

라온이 대장로의 말을 뚝 끊어버렸다.

-나왔다. 말 끊기!

라스가 라온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놈의 가장 열받는 필살기 1호이니라!

녀석은 핑계조차 댈 수 없게 말을 끊을 때가 가장 짜증 난다며 입술을 씹었다.

“저는 다른 것보다 당신이 하는 말이 우습네요.”

“우습다?”

대장로의 미간이 깊게 구겨졌다. 그의 기세가 전신을 난도질할 것처럼 날카롭게 갈려서 뻗어 나왔다.

“똑바로 말하지 않는다면 손님 대우조차 받을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진심으로 화가 돋은 듯 미간을 찌푸렸다.

“대장로!”

“잠시만요.”

스테린이 직접 나서려 할 때 리메르가 손을 들어 올렸다.

“저놈 한 번 믿어봐요. 다 생각이 있을 테니까.”

리메르는 라온은 그냥 움직이는 놈이 아니라며 미소를 그렸다.

“마, 맞아요.”

시얀도 책에서 읽었다며 믿어보자고 중얼거렸다.

“흠….”

스테린은 손주들의 말을 듣고서 팔짱을 낀 채로 물러섰다.

“그렇잖아요. 세계수가 엘프의 것이라고 누가 보증이라도 섰답니까? 내가 보기에 세계수는 당신보다 나를 더 좋아할 것 같은데?”

“아예 정신이 나갔군. 나는 기어 다닐 때부터 세계수를 모셔왔다. 하이엘프만 아니었을 뿐 내 삶을 세계수에 바쳤거늘 어디서 그런 건방진 소리를 하는 것이냐!”

대장로는 헛소리만 떠든다며 비웃음을 흘렸다.

“세계수는 인간들에게 불타오른 이후 수백 년 이상 마음을 닫고 있었다.”

그는 뒤를 돌아서 세계수를 향해 다가갔다.

“허나 수많은 엘프의 노력을 통해 백여 년 전부터 마음을 열기 시작했지.”

대장로가 세계수에 손을 얹자, 가지들이 찰랑이며 청아한 마나를 피워냈다. 이 세계가 뒤바뀐 듯한 풍요로운 마나의 향이 가득 퍼져 나왔다.

“이런 나보다 네놈이 세계수를 더 잘 다룰 수 있다는 것이냐?”

그는 되지도 않는 소리 말라며 고개를 저었다.

“당장 나가는 게….”

“그럼 저와 내기 하나 하시겠습니까?”

“내기?”

“예.”

라온이 대장로의 옆에 서서 세계수를 올려보았다. 인간이 죽이고, 인간이 살린 나무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대장로님보다 세계수의 반응을 더 크게 끌어낼 수 있다면 어쩌시겠습니까?”

“하!”

대장로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미쳤군….”

“오늘 처음 세계수를 봤으면서 저 허세는 뭐야!”

“카이바르를 잡은 용살자라고 하더니, 그냥 미친 인간이었나?”

다른 장로나 엘프들도 어이가 없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만약 제가 진다면 리메르 님을 데리고 나가서 다시는 이곳에 돌아오지 않겠습니다.”

라온은 장로들이 원하는 대로 해주겠다며 옅은 미소를 그렸다.

“야, 야! 왜 나까지 내기를 걸어!”

믿어보라고 외치던 리메르도 당황하여 고개를 저었다. 다만 스테린은 처음의 신뢰를 유지하기로 했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네 입으로 한 말은 지키겠지?”

“물론입니다.”

“좋다. 만약 세계수가 널 받아들인다면 네가 원하는 모든 것을 들어주도록 하지.”

대장로는 세계수가 인간을 받아들일 일은 없다며 입매를 비틀었다.

“제 조건은 둘입니다. 첫 번째는 산래의 열매를 받는 것.”

“역시 욕심을 드러내는군.”

대장로가 그럴 줄 알았다며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두 번째는 당신과 장로들이 저와 시얀 님, 수호자님께 무릎을 꿇고 무례를 사과하는 겁니다.”

“뭐?”

“감히!”

장로들은 그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괜찮네.”

대장로가 입꼬리를 만 채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그럴 일은 없을 테니까. 뭐든 말해도 돼.”

“그럼 나중에 하나 더 추가하죠.”

라온은 잘 걸렸다고 중얼거리며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나, 나는?”

리메르가 라온과 장로들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른 이름들이 다 나왔는데, 본인의 이름만 없었다.

라온은 담담한 걸음으로 세계수에게 다가갔다. 아직 완벽하게 색이 돌아오지 않은 우측. 지그하르트의 선조가 구슬을 넣어주고 어루만졌던 그곳을 손으로 매만졌다.

‘너를 죽이려고 한 건 인간이지만, 또한 너를 살리려고 한 것도 인간이다.’

세계수가 그때의 기억을 찾도록 선조처럼 만화공과 불의 고리를 운용하며 구멍이 메워진 부분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다만 아직 그 기억이 깨어나지 않은 듯 세계수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역시.”

“세계수가 인간 따위를 받아들일 리 없지.”

“리메르는 떠날 준비나 하도록.”

장로와 엘프들은 아무런 반응도 없는 세계수를 보며 비웃음을 흘렸다.

“수호자님. 아쉽게 되었군요.”

대장로는 말과 달리 입꼬리로 초승달을 그린 채 턱을 치켜들었다.

“저 인간을 아끼신 모양인데, 스스로의 욕심으로 수호자님의 배려를 발로 차버렸습니다. 인간은 본래 저런 존재입니다.”

“…….”

스테린은 말없이 라온의 등만을 바라보았다.

“여봐라.”

대장로는 더 진한 미소를 지은 채 손을 까딱였다. 그의 뒤에 서 있던 가디언들이 앞으로 나섰다.

“저 인간과 리메르, 시얀 님을 모두 내보내도록. 인간과 리메르는 아예 세이피아에서 쫓아내….”

그가 조롱이 섞인 말을 이어갈 때 허공에서 투명한 잎이 살랑이며 떨어졌다.

“음?”

대장로가 고개를 들어 올리는 순간 세계수가 날개를 펼치듯 장대한 서기를 뿜어내며 가지를 흔들었다.

청아한 검명처럼 퍼져나가는 세계수의 울림은 그리움과 감사함을 담아낸 채 천공의 끝까지 솟구쳤다.

“이, 이게 무슨!”

“아아….”

“세계수가 이런 울림을….”

그 어느 때보다도 찬란한 푸른 빛을 드러내는 세계수의 파동에 엘프들의 입이 찢어질 정도로 벌어졌다.

“어어….”

대장로가 튀어나올 것처럼 눈을 부릅떴을 때 라온이 등을 돌렸다.

“뭐 하세요? 안 꿇고.”

그가 입꼬리를 가늘게 말아 올리며 턱짓했다.

“꿇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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