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582화 (581/653)

제582화

라온이 바닥에 내려놓은 진혼검을 바라보며 깊은숨을 내뱉었다.

‘떠올라라.’

상단전의 의념을 일으켜 진혼검을 움직이려고 해보았지만, 검은 뭐 하냐는 듯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우우우웅!

스테린과 대련할 때처럼 불의 고리를 공명시키며 격을 끌어올려 보았지만, 진혼검은 자그마한 흔들림도 없이 간지럽다는 듯 나지막한 검명만 울렸다.

“끄응….”

라온이 두 팔로 바닥을 짚으며 앓는 듯한 신음을 흘렀다.

‘왜 안 되는 거지?’

대련에서 얻었던 영감을 잊지 않기 위해서 숙소로 돌아오자마자, 진혼검에 의념을 불어넣는 연습을 했는데, 떠오르기는커녕 움직이지도 않을 줄은 몰랐다.

-본왕이 왜 안 되는 건지 알려줄까?

라스가 슬금슬금 다가와서 어깨를 잡았다. 손이 통통해서 부드러운 고무 같은 느낌이 들었다.

‘왜 안 되는 건데?”

-이유는 간단하느니라!

녀석이 당차게 주먹을 들어 올렸다.

-배가 고파서 안 되는 것이니라!

‘…….’

-본래 인간의 힘은 뱃심에서 나오는 법. 이곳에 와서 밥을 먹지 않았으니, 힘이 날 리가 있겠느냐!

라스는 마왕 주제에 인간의 힘은 뱃심에서 나온다며 밥을 먹으러 가자고 떠들어댔다.

다른 건 몰라도 일관성 하나는 최고였다. 일관성의 마왕이라고 부르고 싶었다.

‘지치네….’

-진짜라니까! 본왕 한 번 믿어 보거라!

‘좀 가라.’

라온이 버둥거리는 라스를 밀어내고 다시 의념에 집중하려고 할 때 숙소의 문이 거칠게 열렸다.

콰아아앙!

문을 걷어찬 것으로 보이는 발이 성큼 안으로 들어섰다.

“대주님….”

라온은 집에 와서도 문을 발로 차는 리메르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생각해보니, 이쪽도 일관성이 끝내준다.

“밥 안 먹었지?”

리메르는 왼손에 들고 있던 쟁반을 침대 옆에 있는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여긴 알아서 밥 안 줘. 자기가 찾아 먹어야 해.”

그는 이미 도리안과 유아에게도 식사를 주고 왔다며 씩 웃었다.

-오오!

라스가 쟁반을 덮고 있는 은색 뚜껑을 보며 탄성을 흘렸다.

-귀때기가 웬일인 것이냐! 드디어 정신을 차린 건가?

녀석은 쟁반을 요리조리 살피며 입맛을 다셨다.

“챙겨주셔서 감사합니다.”

라온이 일어나서 리메르에게 고개를 숙였다.

“내일부턴 이런 호사 없을 거야. 그런데….”

리메르가 라온의 전신을 훑어내리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너 왜 이렇게 피곤해 보이냐?”

“조금 전에 수호자님과 대련을 하고 왔습니다.”

“대련 좋지. 어? 대련?”

그는 스테린과 대련을 했을 줄은 몰랐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정말?”

“대주님의 말씀대로 수호자님의 궁술은 격이 다르더군요.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라온은 스테린과의 대련을 가볍게 설명해주었다.

“허! 가르침을 내리고, 세계수를 보러 오라는 말도 했다고?”

“예.”

“우리 할배는 가디언도 직접 가르치지 않는데,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리메르는 이해가 되질 않는다며 헛웃음을 흘렸다.

“할배가 줬다는 열매 좀 보여줘 봐.”

“아, 네.”

라온이 아직 먹지 않은 붉은 열매를 꺼내서 앞으로 내밀었다.

“이거 산래의 열매야.”

“산래의 열매?”

“세계수 주변에는 정령계의 영향을 받아서 식물과 영물의 경계에 서게 된 나무들이 자라거든. 자연의 기운을 가득 머금은 나무에서 딴 열매라 웬만한 영약보다 효과가 좋을 거야.”

그는 오러가 크게 늘지는 않아도 회복에는 최고라며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그 귀한 걸 제가 받아도 됩니까?”

“본인이 준다는데 어떻게 해. 싫으면 나 주던가.”

리메르는 본인이 받아준다며 손을 내밀었다.

“됐습니다.”

라온은 고개를 젓고서 산래의 열매를 뒤로 뺐다.

“가만 보니까. 너는 할배들한테 인기가 많은 것 같아.”

리메르가 재밌다며 웃었다.

“제가요?”

“그래. 성자 영감도 너 좋아하고, 검귀 영감도 지금은 좀 그렇지만 당시에는 만나자마자 가르치겠다고 했었고, 가주님도 너 좋아하잖냐.”

“글쎄요….”

라온이 담담히 고개를 저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가주님은 이룬 실적대로 평가를 해줄 뿐이었다.

예전보다는 관계가 나아졌지만, 개인적인 호감은 그리 크지 않을 것이다.

“역시 모르네.”

리메르가 한숨을 내쉬며 바닥을 살짝 걷어찼다.

“조손 관계는 나와 우리 할배 같아야 해. 내가 보자마자 안기는 거 봤지?”

그는 지그하르트로 돌아가면 글렌에게 안겨보라면서 포옹하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

“누구 죽는 꼴 보려고 이러세요?”

라온이 리메르의 올라간 입꼬리를 보며 눈매를 찡그렸다.

‘바로 목이 날아갈 텐데 무슨.’

글렌의 살벌한 표정을 보면 안기려다가도 무릎을 꿇게 될 것이다.

“진짜인데….”

“이상한 소리 말고. 대주님은 어디 다녀오신 건가요?”

스테린과의 대련이 꽤 시끄러워서 다른 엘프들도 알고 있을 텐데, 그가 몰랐다는 게 신기했다.

“에리안이 외부에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고 해서 잠깐 나갔다가 왔지.”

리메르가 맞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한 일이라면….”

“대수림에 사는 야생동물들이 세이피아의 입구 앞에 서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거든.”

“동물들이요?”

“그래. 원래라면 결계 때문에 아무것도 느끼지 못해야 하는데 꼭 들어가고 싶은 것처럼 서 있더라고. 이상하지?”

“그, 그러네요.”

세이피아에 들어오고 싶어 하는 동물이라는 말을 듣자, 머릿속에 한 여자가 그려졌다.

‘아닐 거야.’

아무리 그 여자라고 해도 여긴 못 와.

-보, 본왕은 맞다고 보느니라.

라스는 턱을 부르르 떨며 고개를 저었다.

-그 광녀가 맞느니라!

녀석은 갑자기 동물들이 이상해질 수가 있냐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 보니 이 안에는 동물이 없네요.”

“세이피아에는 엘프의 초대를 받지 않은 자가 들어 올 수 없는 결계가 있으니까.”

리메르는 처음 세이피아에 왔을 때 보이던 찬란한 빛이 결계라며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우리가 나가니까 동물들이 다 사라진 걸 보면 별일은 아니었던 것 같아.”

그는 정화 의식 직전이라 동물들도 날카로운 기운을 느낀 것 같다며 웃었다.

“그, 그렇군요.”

정말 멀린이라면 포기하고 어떻게 해서든 방법을 찾을 것이다. 정화의식 후에 나가서 멀린인지 확인해봐야 할 것 같다.

“세이피아에 온 소감은 어때?”

“제 상상 이상으로 신비로운 곳입니다. 다만….”

“다만?”

“엘프들은 제 생각과 다르게 사람이나, 남에게 관심이 많은 것 같더군요.”

리메르 같은 사고뭉치는 아니지만, 소수의 엘프들에게서 떠들기 좋아하는 사람과 비슷한 냄새가 났다.

“너나 시얀의 소문을 퍼뜨리는 걸 보고 말하는 거지?”

“맞습니다.”

“잘 봤네.”

리메르는 반박하지 않고 평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는 덜했는데, 오늘 보니까 남 일에 관심 많더라고. 나도 인간 마을을 보는 줄 알았어.”

그는 본인이 세이피아에 있을 때보다 심해졌다며 고개를 저었다.

“사람과의 관계 때문인가요?”

“그것도 있고, 이탈자들이 나오기도 해서.”

“이탈자?”

“그래. 세이피아의 삶을 견디지 못하고, 아예 떠나버린 애들이 좀 있거든. 걔들이 이곳의 분위기를 많이 바꿔놔서 그래.”

좋은 기억이 아닌지 리메르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그래도 아직 많은 숫자의 엘프들은 자연을 벗삼고, 자기자신에게만 집중하는 삶을 살고 있어.”

그는 엘프가 아예 인간처럼 변할 일은 없을 거라며 작게 웃었다.

“아, 밥을 가져와놓고 시간을 너무 오래 끌었네.”

리메르는 식기 전에 식사부터 하라며 손을 저었다.

-본왕에 입맛에 딱 맞을 과일 파이를 가져왔을 것 같느니라!

쟁반 앞에서 바둥거리던 라스가 침을 꼴깍 삼켰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식사는 뭐죠?”

라온은 리메르에게 고개를 끄덕이고서 쟁반을 덮은 은색 뚜껑을 열었다.

“음?”

-어어억….

라스가 접시를 보며 입을 떡 벌렸다. 기뻐하던 녀석이 저리 기겁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하얀 접시 위에 갈색 빵 두 덩이가 놓여 있었으니까.

-나, 나딘빵….

“여기까지 왔으니까 오리지널 한 번 먹어봐야지.”

리메르는 원조의 맛은 다를 거라며 웃었다.

“아, 네.”

라온이 나딘빵을 잡으며 눈을 꿈벅였다.

‘나는 괜찮은데….’

솔직히 난 나딘빵을 선호해서 상관은 없었지만, 음식을 기대하고 있던 라스가 어떤 꼴일지는 뻔했다.

-죽이겠느니라!

라스가 전신을 부들부들 떨며 머리를 들어 올렸다.

-귀때기 남매를 모조리 죽여버리겠느니라!

‘가만히 좀 있어.’

라온은 불의 고리를 운용하여 라스를 짓누르며 고개를 저었다.

“잘 먹을게요. 감사합니다.”

“정말 좋아할 줄은 몰랐네. 내일부터는 제대로 된 밥을 먹도록 해.”

리메르는 어깨를 으쓱이고서 문을 닫고 사라졌다.

-어딜 도망가는 것이야! 당장 튀어 나오거라!

라스는 진심으로 분노했는지 눈동자에 푸른 귀화를 피워내며 팔다리를 펄럭였다.

‘어쩔 수 없지.’

라온은 라스를 진정시키기 위해서 바로 나딘빵을 씹었다. 조금 전에 만들었는지 따끈했지만, 고무를 씹는 듯한 맛과 식감은 그대로였다.

-끄어어억!

발작을 일으키던 라스가 바람이 빠진 것처럼 축 늘어졌다.

-따, 따뜻한 빵이 이렇게까지 맛없을 수가 있다니….

녀석은 임종을 맞은 것처럼 숨을 헐떡였다.

-진정 악귀의 음식이니라….

라스는 더이상 버틸 수가 없다며 머리를 땅에 박았다.

‘괜찮은데?’

따뜻하니까. 차가울 때보다 조금은 맛이 좋았다. 데운 고무랄까.

-부, 부탁이 있느니라.

‘부탁?’

라온이 반 남은 나딘빵을 씹으며 라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까 그 과일이라도 먹어주거라….

라스는 산래의 열매로 입가심을 시켜달라며 손을 모았다.

‘음, 내상 치유도 해야 하긴 하니까.’

라온은 아기 고양이처럼 변한 라스의 눈망울을 외면하지 못하고 스테린에게 받았던 열매를 입에 넣었다.

체리와 딸기를 섞은 듯한 상큼한 단맛이 고무로 가득 찬 입 안을 씻어 주었다.

-다, 달아….

라스가 주저앉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느니라.

녀석은 거의 처음으로 고맙다고 말하며 훌쩍였다.

‘이 정도로 뭘.’

라온이 고개를 저으려고 할 때 눈앞으로 메시지가 올라왔다.

[<분노>에게 감사의 인사를 받았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2포인트 상승합니다.]

‘이런 것도 주나?’

신기해서 메시지를 보고 있을 때 라스의 머리가 땅을 찍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

라스는 멍하니 메시지를 바라보다가 스스로의 손으로 목을 잡았다.

-그냥 죽을란다! 맨날 나딘빵만 먹고! 살아서 뭐해!

라온은 두 번째 나딘빵을 씹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는 못 죽어….’

-꿱!

*     *      *

시얀이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붉은 입술을 씹었다.

“역시 안 되네.”

할아버지에게 배웠던 방식대로 공명을 이루려고 해봤지만, 뚜껑이 꽉 닫혀 있는 물병처럼 내 정신은 이 비루한 육체를 벗어나지 못했다.

라온의 조언을 듣고 나도 조금은 변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가져봤지만, 역시나였다.

“하아….”

시얀이 피곤에 찌든 듯한 얼굴을 이불에 파묻었다. 그녀의 금빛 머리칼이 낮은 파도처럼 쓸려 올라갔다.

‘최선의 노력이라.’

솔직히 최선까지는 아니어도 꾸준한 노력은 해왔다. 할아버지처럼 모두에게 찬양받는 하이엘프가 되고 싶어서 시도 때도 없이 공명을 연습했었다.

이 세계는 단 한 번도 내게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이제 와선 공명이 진짜 되는 건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지치네. 정말 지치지만….’

시얀이 주먹을 쥐었다. 투명한 손등에 핏줄을 세우며 몸을 일으켰다.

‘그래도 해야지.’

평소라면 어차피 안 될 거라는 생각을 하며 침대에 드러누워서 내가 찬양을 받는 상상이나 했겠지만, 라온을 만났기 때문에 조금 더 노력하고 싶어졌다.

시얀이 다시 눈을 감고 공명을 연습하려 할 때 문에서 둔탁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저렇게 노크를 하는 사람은 한 명뿐이다.

“드, 들어오세요.”

그녀는 이불로 반쯤 얼굴을 가린 채 들어오라고 중얼거렸다.

스테린이 조심스럽게 들어와 침대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네가 대단하다고 했던 그 인간.”

그는 팔짱을 낀 채로 진한 미소를 그렸다.

“진짜 물건이더구나.”

“어….”

시얀은 스테린의 웃음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할아버지가 다른 사람을 저렇게 칭찬하는 건 처음이었다.

“저, 정말요?”

“그래. 타고난 재능에 끝없이 검을 휘두른 시간이 느껴지더구나. 오랜만에 만나는 진짜 검사였어.”

“그렇죠? 그렇다니까요!”

자신이 칭찬받은 것처럼 기뻐서 이불을 들추고 일어섰다.

“존잘 라온은 불을 태우고, 얼음도 얼릴 수 있어요!”

“큼, 그건 모르겠고.”

스테린은 헛소리를 시작한 손녀의 입을 막기 위해서 손을 저었다.

“그 녀석을 정화 의식에 불렀다.”

“저, 정화 의식에요?”

“리메르의 제자이니, 도움을 줄 수 있다면 주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그는 팔짱을 풀고, 시얀의 어깨를 잡았다.

“너도 함께 오는 게 어떻겠느냐.”

“저는….”

사실 전에 오라고 했을 때는 거절했었다. 다른 엘프들을 마주치기 싫어서 방에 있겠다고 한 것인데, 라온과 리메르가 함께 간다니 이상하게도 용기가 났다.

시얀은 얼굴에 이불을 뒤집어쓴 채로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 갈게요.”

*     *      *

라온이 푸른 머리카락의 엘프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최선을 다하죠.”

세상이 무너져도 꿈쩍도 안 할 듯한 무거운 눈빛의 엘프가 유아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엘프는 리메르가 소개해준 음악가로 세이피아에서도 손꼽히는 실력자라고 한다. 그녀에게 유아를 맡기고 싶어서 직접 찾아왔다.

“저도 열심히 배울게요!”

유아는 두 주먹을 불끈 쥐다 못해 미간까지 구겼다. 양갈래 머리가 살랑이는 게 귀여웠다.

“그래. 금방 돌아올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라온은 유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서 등을 돌렸다.

“저는요?”

도리안이 자신은 뭘 하냐는 듯 눈동자를 빛냈다.

“너는….”

딱히 생각 안 했는데.

입맛을 다시다가 손가락으로 유아를 가리켰다.

“너는 유아가 잘 배우나 감시해. 딴짓 안 하도록.”

“넵!”

도리안은 경례를 하듯 손을 올리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통했네.’

라온은 고개를 젓고서 뒤에서 기다리던 리메르에게 다가갔다.

“너도 참 악마다.”

그는 무섭다고 중얼거리며 어깨를 떨었다.

“대주님만 하겠어요.”

라온은 지지 않은 채 고개를 저었다.

“다 끝났으면 빨리 가자. 영감이 기다리고 있을 거야.”

리메르는 스테린이 시간 약속을 중요시한다면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들었어? 저 인간 세계수를 볼 자격을 얻었다고 하던데?”

“그럴 만하지. 정령왕의 계약자잖아.”

“하긴 정말 정령왕과 계약을 하게 된다면 세계수와 관계없는 것도 아니니까.”

“인간이 세계수를 보는 건 최초 아닌가?”

“최초는 아니지. 전에도 누군가 왔다고 하던데….”

엘프들은 지나가는 라온과 리메르를 보며 자기들끼리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이 귀때기 놈들아!

라스가 엘프들을 향해 악을 질렀다.

-본왕은 정령왕 따위가 아니라, 분노의 군주란 말이니라!

녀석은 정령왕과 비교하지 말라며 손을 마구잡이로 흔들었다.

‘그래. 그렇지.’

라온이 악을 지르는 라스를 보며 피식 웃었다. 내게는 라스라는 찰거머리 호구가 붙어 있어서 정령왕이 왔다가도 도망갈 것이다. 정말 정령와의 선택을 받아도 계약자가 되기는 힘들 거다.

엘프들끼리 마음대로 떠들라고 놔둔 채로 리메르를 따라가자, 얼마 지나지 않아 어제 보았던 수호자 스테린의 집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왔느냐.”

스테린이 가볍게 손을 들어 올렸다. 그는 이미 집 밖에 나와서 나무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그건 뭐예요?”

리메르가 스테린의 옆에 꽁꽁 묶여 있는 이불을 가리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겠냐. 네 동생이지.”

“윽….”

스테린이 손가락으로 툭 찌르자, 이불이 부르르 떨렸다.

“시얀? 너 왜 밖에서도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는 건데!”

“이, 이게 편해. 난 신경 쓰지 마.”

시얀은 이불로 전신만이 아니라, 얼굴까지 가린 채 목소리만 흘려보냈다.

“이불에서 나오면 죽는 병이라도 걸린 거야. 뭐야.”

리메르가 짧게 혀를 차고서 시얀에게 다가갔다.

“시, 신경 쓰지 말라고….”

시얀은 외부로 나왔기 때문인지 어제보다 목소리가 더 작아졌다.

“그래도….”

“그만 하세요.”

라온이 리메르의 어깨를 잡았다.

‘저것도 크게 용기를 낸 걸 테니까.’

어제까지만 해도 시얀은 세계수 정화에 큰 관심도 없었다. 정화 의식을 보기 위해서든 다른 의도가 있어서든 나왔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칭찬할 만한 일이다.

“아, 안녕하세요. 존잘 라온님.”

시얀이 이불을 뒤집어쓴 채로 고개를 숙여왔다. 금발로 가득 찬 정수리만 보였다.

“아, 네….”

라온이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 부끄러워하는데 저놈의 존잘은 왜 계속 말하는 거지?’

이해가 되질 않았지만, 겁에 질릴까 봐 따지지는 않았다.

“할배. 그저께 라온이랑 한 판 하셨다면서요.”

리메르가 스테린을 보며 눈가를 씰룩였다.

“어땠어요? 내 제자 좀 치죠?”

“그래.”

스테린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그의 눈동자에는 아직 놀라움의 잔재가 남아 있었다.

“네놈의 제자로 있기에는 아까울 정도였다.”

“오오!”

리메르는 본인이 칭찬을 받은 것처럼 몸을 배배 꼬았다.

“인간계에 가끔 괴물이라는 게 나온다는 건 알고 있지만, 저 녀석은 그중에서도 좀 심해. 신과 마왕이 실수를 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스테린은 당시의 놀라움을 그대로 담아서 표현했다.

-실수가 맞지.

라스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놈은 어디를 가도 그곳을 지옥으로 바꿀 악마이니라!

녀석은 꼭 마계에 데리고 가서 난동을 피우고 싶다고 중얼거렸다.

“저도 처음부터 그렇게 생각했어요.”

리메르가 콧대를 세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놈은 크게 될 녀석이라고.”

그는 본인의 안목을 칭찬하라며 히죽였다.

“잡설은 이만하면 됐고, 바로 들어가도록 하지.”

스테린은 잠시 라온을 지켜보다가 턱짓을 했다.

라온이 스테린이 한 말을 떠올리며 입맛을 다셨다.

‘들어간다고?’

세계수가 있는 곳으로 가는 게 아니라, 들어간다는 표현이 이상했다.

다만 그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스테린이 본인의 나무집에 손을 얹자, 허공에 호수로 변한 것처럼 출렁이며 푸른 빛의 길을 열었다.

지금까지 보고 있던 세이피아가 모두 환상인 것처럼 녹색 빛이 푸른 빛으로 전환되며 투명한 풀잎들이 눈앞을 가득 채웠다.

녹색의 바람이 머리카락을 휘적이고, 푸른 물방울이 피부를 적셨으며, 황색 대지가 부드러운 안락함을 피워주었다.

마지막으로 후덕한 불길이 내 호흡을 따라 춤추는 듯 대기에 자욱한 손을 그렸다.

라온은 손끝을 떨며 원형으로 뚫린 푸른 빛의 길을 바라보았다.

한눈에 다 들어오지 않는 두터운 나무가 보인다.

뿌리는 이 대륙 전체에 뻗어 있는 것처럼 장대하게 뻗어 있었고, 밑동의 둘레는 지그하르트에 사는 모든 사람이 모여도 잡을 수 없을 덩도로 두터웠으며, 높이는 하늘을 받치는 기둥이 된 것처럼 시선을 들어 올려도 그 끝을 볼 수가 없었다.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의 가지에 붙은 투명한 잎들이 환영한다는 듯 나풀거리는데, 이 세계가 아닌 듯한 신비로움이 느껴졌다. 아름답다는 단어로도 세계수를 표현할 수가 없었다.

‘이게 세계수 아드리안인가….’

라온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푸른 길로 들어섰다.

‘그런데 저건 탄 자국인가?’

세계수의 우측 부분이 조금 검게 물든 것을 보며 이상하다고 생각할 때였다.

화아아아아!

불의 고리가 저절로 요동치며 눈앞을 시뻘겋게 물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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