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580화 (579/653)

제580화

라온은 본인의 이름이 적혀 있는 책을 보며 눈살을 깊게 찌푸렸다.

‘맞아. 그 때 식당에서 만난 용병들도 책 이야기를 했었어.’

세이피아에 오기 전에 들렸던 식당에서 마주친 용병들의 입에서도 내 이름이 제목인 책이 나왔다는 말이 나왔었다.

‘그게 이 책이었군.’

그런데 이걸 대체 언제 만든 거지?

엔시아가 본인의 시그니처 마크를 내 얼굴로 새기겠다고 한 건 실비아의 단전을 만들어주었을 때다.

그리 오래된 일도 아닌데, 어떻게 벌써 이런 책이 나왔는지 모르겠다.

‘이 정도 두께의 책이면 마법을 써도 안 될 텐데… 아!’

이제야 알겠다.

엔시아는 시그니처 마크 허락을 받고 책을 낸 게 아니라, 이미 책을 만든 상태에서 허락을 받은 것이다.

‘그래서 초상권 비율을 떼어주겠다고 한 거였어….’

절대 안 받겠다고 했는데, 끝까지 돈을 주겠다고 우긴 이유가 바로 이 책 때문인 것 같았다.

“으….”

라온이 눈을 질끈 내려감은 채 고개를 저었다.

‘사람의 행동력이 아니야.’

이럴 때의 엔시아는 멀린에게도 밀리지 않는 것 같았다.

“오, 오빠가 어떻게 존잘 라온 님이랑 같이 있는 거야?”

어처구니가 없어서 한숨을 내쉴 때 시얀이 떨리는 눈동자를 들어 올렸다.

“음?”

리메르가 시얀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가 보는 책 라온에 관해서 적혀 있는 거 아니야?”

“마, 맞는데….”

“그럼 내가 라온의 스승이라는 거 알 거 아니야?”

“무슨 소리야! 존잘 라온 님은 홀로 강해지셨어! 스승 따위는 없다고!”

시얀은 헛소리하지 말라며 조금이지만 목소리를 높였다.

“너야말로 왜 헛소리를 하냐? 얘 내가 키웠어!”

리메르가 시얀이 뒤집어 쓴 이불을 내려다보며 눈매를 찡그렸다.

“아니야! 라온 님은 날 때부터 검술을 익힌 천재셨다고!”

“그런 인간이 세상에 어디 있어! 잘 들어! 라온 쟤는 내가 업어 키운 제자고, 지금은 부하라고!”

라온은 남매의 대화를 들으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대주님이 내 스승이라는 내용이 없으면 대체 뭘 적어놓은 거지?’

떨리는 손으로 책장을 넘겼다. 불의 고리 덕분에 초 단위로 페이지를 넘겨도 내용을 이해할 수 있었다.

“뭐, 뭐라고 적혀 있어요? 제 이름은 나와요?”

“저는요?”

도리안과 유아가 궁금하다는 듯 고개를 쭉 내밀었다.

“…….”

라온은 순식간에 책을 다 읽은 후 대답 없이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이건 찬가야. 인간 찬가가 아니라, 라온 찬가.’

모든 내용이 라온으로 시작해서 라온으로 끝난다.

일단 행적이나 사건 자체는 사실이지만, 그 내용에서 라온은 못 하는 게 없는 신 그 자체였다.

리메르는 나오지도 않았고, 조장 3인방은 등장은 하지만 발목을 잡아끄는 방해꾼으로 등장했으며, 도리안은 이름도 없이 그냥 이동식 주머니라고 불렸다.

그나마 유아는 잘 보인 건지 이름이 나왔는데, 한 번 등장하고 끝이었다.

“나, 나와.”

라온은 도리안과 유아에게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여 주고서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겼다.

“아아….”

마지막 장을 보자마자, 나도 모르게 신음이 흘러나왔다.

1. 라온 지그하르트가 하늘을 향해 던진 둥근 돌을 지금은 달이라고 부른다.

2. 라온 지그하르트가 검술을 익히는 게 아니다. 검술이 라온 지그하르트를 위해 탄생했다.

3. 라온 지그하르트는 따로 집을 두지 않는다. 이 세계가 집이기 때문이다.

4. 라온 지그하르트는 불을 태울 수 있고, 얼음을 얼릴 수 있다.

이런 미친 내용들이 줄이어서 적혀 있었다. 차마 더 이상 볼 수가 없어서 책을 닫았다.

-네, 네놈이 달을 만든 것이냐! 대체 언제, 어떻게!

라스는 책에 적혀진 말을 믿는 듯 이쪽을 보며 눈동자를 부르르 떨었다.

“하아아….”

대답할 힘도 없어서 그저 한숨만 내쉬었다.

‘다 불태워 버려야 해.’

전 재산을 다 쏟아부어서라도 이 책의 존재를 모조리 지워버리기로 결심했다.

“저, 정말 존잘 라온 님 맞죠?”

이불 안에서 시얀의 떨리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방구석 백수라고 하더니, 아예 모습을 보일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이불 밖으로 삐져나온 금발 몇 가닥 덕분에 그녀의 머리카락 색만을 알 수 있었다.

“존잘은 아니고, 라온은 맞습니다.”

라온이 시얀의 이불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패, 팬이에요. 존잘 라온 님.”

시얀은 다시 존잘이라 말하며 눈동자를 빼꼼 내밀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보는 듯한 푸른 눈동자가 흐릿하게 반짝였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존잘은 빼셔도 됩니다.”

“책에는 항상 존잘이라 불러야 한다고….”

“이 책 믿지 마세요. 10 중 9가 거짓말이니까.”

라온이 시얀에게 책을 돌려주며 고개를 저었다.

“여, 역시 책에 적힌 대로 겸손하기까지 하시군요.”

시얀은 이미 세뇌가 된 건지 라온 본인을 믿지 않고, 책을 신뢰했다.

“그게 아니라. 하아….”

라온이 손끝을 떨었다. 설명하기 너무 복잡했다. 나오는 건 그저 한숨뿐이었다.

“만나서 영광이에요.”

시얀이 손만 살짝 내밀어서 책을 받았다. 투명할 정도로 하얀 손등. 정말 오랜 기간 밖에 나가지 않은 것 같았다.

“야. 시얀. 너 오랜만에 본 오빠한테 너무 관심 없는 거 아니냐?”

리메르는 너무하다며 고개를 저었다.

“아, 미안. 지금 정신이 없… 오, 오빠! 팔이!”

시얀이 숨어 있는 이불이 크게 요동쳤다.

“이거? 미래에 투자했단다.”

리메르가 라온을 보며 눈을 찡긋했다. 스테린 앞에서 본인이 했던 말이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설마 라온 님을 위해서?”

“그래. 저 녀석을 살리느라 고생 좀 했지.”

“아, 아프지는 않아?”

“잘렸을 때 처치를 잘해서 지금은 괜찮아.”

그는 시얀의 머리가 있는 이불을 툭툭 두드렸다.

“오빠.”

“응?”

“잘했어.”

“어…?”

시얀의 활력이 감도는 음성에 리메르가 눈을 끔벅였다.

“라온 님은 우량주 중에 우량주야! 분명 크게 돌아올 거야!”

그녀는 좋은 선택이었다며 이불 밖으로 손을 흔들었다.

“어, 그래….”

리메르는 이런 반응이 돌아올 줄은 상상도 못 한 듯 멍하니 고개만 끄덕였다.

“존잘 라온 님은 괜찮으신가요?”

“대주님 덕분에 저는 크게 다치지 않았습니다.

“다행이네요!”

시얀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존잘 라온 님. 하나만 여쭈어봐도 될까요?”

“존잘 소리를 빼면 해도 됩니다.”

라온은 짧게 숨을 내쉰 후 고개를 끄덕였다.

“라, 라온 님이 만약에 검술에 재능이 없었다면 어떻게 하셨을 거 같아요?”

“재능이요?”

생각지도 못하던 질문이라 조금 당황스러웠다.

“저, 저는 하이엘프로 태어났지만, 하이엘프가 가져야 할 재능을 가지지 못했어요. 그렇다고 다른 엘프들처럼 잘 싸우지도 못하고, 정령도 소환 못 하고, 오러도 운용하지 못해요. 벌레보다 무능한 하이엘프라고 불린다구요….”

시얀은 본인이 할 수 있는 건 이렇게 숨어서 숨을 쉬는 것 밖에 없다고 중얼거렸다. 그녀의 목소리에 물기가 스며들어 있었다.

“너 화살은 잘 쏘잖아. 백발백중 아니었어?”

“오, 오러를 못 쓰는데 활을 잘 쏴서 뭐해. 그리고 활도 안 쏜 지 너무 오래되었어….”

그녀는 잠시 벽에 걸려 있는 활을 바라보다가 침대에 얼굴을 파묻었다.

“음….”

라온이 짧게 입맛을 다셨다.

‘난해한 질문이네.’

아무리 팬이라고 해도 처음 만난 사람에게 저런 질문을 할 정도면 정신적으로 몰려다는 뜻이다.

시얀 본인은 나름 큰 용기를 냈을 것이기에 내 팬이나, 리메르의 동생이라는 관계를 떠나서 도움이 되어주고 싶었다.

다만 답을 해주기 전에 먼저 알아야 할 것들이 있었다.

“시얀 님이 하이엘프면 대주님도 하이엘프인 겁니까?”

“난 아니야.”

리메르가 담백하게 고개를 저었다.

“하이엘프는 태어날 때 정해져. 할아버지한테서 시얀에게 이어졌지만, 다음에는 다른 부족에서 나올 수도 있지. 매번 달라.”

그는 하이엘프는 하늘이 정해주는 존재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동시에 존재할 수 있는 하이엘프는 둘이야. 지금 세이피아에는 할아버지와 시얀 딱 둘만 있지.”

“그렇군요.”

라온이 살짝 입술을 씹었다.

‘하이엘프가 둘밖에 없다면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겠어.’

더군다나 스테린이 언제 떠날지 모르니까.

스테린의 얼굴에 주름이 진 것을 보면 그에게 남은 수명은 그리 길지 않을 것이다.

그를 제외하면 하이엘프는 시얀뿐이고, 그녀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니 주변에서나 본인이나 큰 부담을 느끼고 있을 게 분명했다.

‘안쓰럽네.’

라온은 머릿속으로 시얀이 물었던 질문에 대한 답을 떠올린 후 천천히 입술을 뗐다.

“만약 제게 목표가 없었다면 검을 쥐지 않고 평범하게 살았을 겁니다. 다만 이뤄야 할 일이 있었다면 재능이 없더라도 검을 쥐었을 겁니다.”

“끝까지요?”

“네. 절대 포기하지 않았을 겁니다.”

자세한 사실은 밝히지 않았지만, 가진 진심을 담아서 답을 내주었다.

“시얀 네가 뭘 읽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라온이 재능이 넘치는 건 맞아.”

“역시….”

“하지만.”

리메르가 옅게 웃으며 시얀의 침대에 걸터앉았다.

“저 녀석은 내가 본 그 누구보다 많은 노력을 했어. 가장 먼저 연무장에 나와서 가장 늦게 돌아갔지. 내가 장담하는데 라온과 비슷한 나이대에 저 녀석보다 더 많은 수련을 한 놈은 없을 거야.”

그는 지금 라온의 무력은 재능보다 더 처절한 노력에 의해서 만들어졌다며 이불을 툭툭 쳤다.

“맞아요. 라온 님은 처음 봤을 때부터 머릿속에 수련 밖에 없는 괴물이었어요.”

“집에 돌아와서도 매일 수련만 하세요!”

도리안과 유아도 라온의 진짜 재능은 노력이라고 말해주었다.

“하, 하지만 책에서는 검술을 한번 보면 따라 할 수 있다고….”

“따라 할 수는 있지만, 그건 검술이 아니라 묘기일 뿐입니다. 경지를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수련만이 정답입니다.”

라온은 이불 안에서 떨리는 시얀의 어깨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노력….”

시얀의 음성은 우울한 듯하면서도 밝아진 것처럼 들렸다.

“힘들면 포기해.”

리메르가 시얀의 머리를 매만지며 픽 웃었다.

“포, 포기하라니? 세계수 정화는 누가하고!”

“다음 하이엘프에게 맡기면 되지.”

그는 마음 편히 먹으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간 할아버지가 결벽증 걸린 것처럼 세계수를 정화했으니, 그분이 돌아가신다고 해도 40년은 버틸 수 있을 거야. 그 시간이면 새로운 하이엘프가 태어나지 않겠어?”

“하지만….”

“시얀.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아. 네 의무에 갇혀서 너 자신을 버리지 마.”

리메르는 진심으로 동생을 생각하는 듯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휘감았다.

라온은 대답 없이 이불 속에서 몸을 떠는 시얀을 보며 귀 아래를 매만졌다.

‘책임감이 강하네.’

리메르가 포기하라는 말을 하자마자, 시얀은 세계수 정화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다른 엘프들에게 무시 받으면서도 본인이 해야 할 일을 잊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제가 엘프의 세계에 대해 아는 게 없어서 함부로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이불 속에서 반들거리는 푸른 눈동자를 보며 말을 이었다.

“시얀 님을 무능한 하이엘프라고 무시하던 엘프들이 달라진 시얀 님을 보고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아예 말도 못 하고 입만 떡 벌리고 있을겁니다.”

훈련생 시절에 다른 아이들이 보여주었던 경악한 표정들이 떠올랐다.

“아….”

시얀은 그 일을 생각만 해도 흥분한 듯 눈동자를 떨었다.

“그리고 정말 최선을 다해서 노력했는데도 되지 않는다면 포기하는 것도 하나의 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나 자신이 최선을 다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해요. 남은 속여도 나는 속이지 못하니까.”

“최선을 다한다….”

시얀은 이불 속에서 최선이라는 단어를 중얼거렸다.

“그리고 시얀 님은 전부 못하시지 않아요.”

“네?”

“나딘빵을 만들었다고 하셨잖아요. 전 그거 좋아합니다. 저 말고 좋아하는 사람이 한 분 더 있기도 하구요.”

라온이 글렌을 떠올리며 연한 미소를 보여주었다.

“그래. 넌 아직 네 능력을 다 시험해보지 않았잖아. 잘 생각해봐.”

리메르는 시얀의 머리를 툭 누르고서 침대에서 일어났다.

“우린 가볼 테니까. 쉬어라.”

그는 나가자며 손짓을 했다.

“…….”

시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럼 저도 가보겠습니다.”

“고, 고마워요!”

라온도 리메르를 따라서 물러날 때 이불 속에서 시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름 용기를 냈는지 목소리가 반 톤 정도 올라갔다.

“와, 지그하르트에서도 그렇고, 여기에서도 그렇고. 차별받아서 못 살겠다 정말.”

리메르는 짜증이 난다고 중얼거렸지만, 입매에 웃음을 건 채 방을 나섰다.

“쉬십시오.”

라온이 피식 웃으며 리메르를 따라 나가다가 우측을 보았다.

‘그런데….’

턱을 부여잡은 채 허공에 둥둥 떠 있는 라스를 보며 눈썹을 가라앉혔다.

‘너 왜 이렇게 조용하냐?’

만나자마자 시얀을 때려죽일 거라고 했던 라스는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다.

-조금 전에 그 하이엘프 계집 말이다.

‘어?’

라스가 뒤를 돌아보며 눈매를 찌푸렸다.

-막혀 있느니라.

*     *      *

시얀은 모두가 떠난 이후에 거북이처럼 기어서 이불 밖으로 나왔다.

“그랬구나. 존잘 라온. 아니, 라온 님도….”

그저 재능만으로 지금의 위치에 오른 게 아니었어.

직접 본 라온은 다른 이들과 격이 다른 기백을 가지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시선을 끌어가는 존재감을 지녀서 책에서 본 그대로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그도 꽤 많은 고난을 겪은 것 같았다.

“최선의 노력….”

분명 노력은 했다. 아마 밖에 있는 다른 엘프들이 오러와 정령술에 힘쓰는 시간보다 더 많이 시간을 공명 수련에 써왔을 것이다.

하지만 최선의 노력을 했냐고 묻는다면 확실하게 답할 수 없다.

나태한 적도 있었고, 다른 엘프들의 시선이 신경 쓰여서 집중 못 하기도 했으며, 다 포기하고 잠만 잔 적도 있으니까.

“남은 속여도 나 자신은 속이지 못한다고 하셨지.”

그 말대로다. 내가 헛되게 보낸 시간은 모두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조금만 더 해볼까….”

책을 읽으며 우상이라고 생각한 라온에게 조언을 듣자,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고, 더 해보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

특히 눈총을 준 엘프들의 반응이 어떻게 변할지 궁금하지 않냐는 말이 가슴에 와닿았다.

솔직히 말해서 모두에게 관심과 찬양을 받고 싶은 마음이 꽤 깊었으니까.

시얀이 침대에서 내려와 눈을 내리감았다.

‘아직은 밖으로 나갈 용기는 없지만.’

그녀는 라온 지그하르트 전기를 두 손을 꼭 모아 쥔 채 세계와 합일하기 위해 정신을 집중했다.

*     *      *

라온은 지정받은 숙소를 둘러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사람들이 사는 숙소와 다를 바 없네.”

에리안은 사람의 손이 닿은 건물을 숙소로 내어주었다. 편하기는 하지만, 나무집에서 한번 지내보고 싶었기에 조금은 아쉬웠다.

라온은 짐을 풀고, 숙소를 나왔다. 세이피아의 순도 높은 마나를 더 깊게 느끼고 싶어서 주변을 살피는데, 엘프들이 하나둘 씩 걸음을 멈췄다.

“저 인간인가?”

“인간이 저런 순도 높은 마나를 지니다니….”

“우리보다 더 깨끗해. 거의 정령 수준이야.”

“에리안 님 말대로 정말 정령왕의 계약자인가.”

“계약자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가능성이 있다는 건 충분히 알겠군.”

엘프들은 라온을 보며 탄성을 흘리거나 감탄의 눈빛을 보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정령왕이 왜 인간과 계약하겠어.”

“맞아. 엘프도 아니고, 인간이 정령왕과 계약했다는 말은 들어본 적 없다고.”

“에리안 님을 이해할 수가 없군. 왜 그렇게 좋아하시는 건지….”

몇몇 엘프들은 헛소리라고 일축하며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말해서 저들이 더 고마웠다.

‘역시 그 엘프의 짓이었군.’

에리안의 이름이 나오는 걸 보면 그 외골수 엘프가 세이피아 전체에 정령왕의 이야기를 퍼뜨린 게 분명했다.

‘정말이지 대주님 주변에는 정상이 없네.’

라온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엘프들의 시선을 피해 걸음을 옮겼다. 엘프들의 눈이 비치지 않는 곳을 걷다 보니 어느새 작은 공터 앞에 서게 되었다.

‘연무장인가.’

주변에 화살이나, 목검이 있는 것을 보니 활이나 검술을 연습할 수 있는 엘프들의 연무장 같았다.

‘어디든 연무장은 마음이 편해지네.’

-그건 수련에 미친 네놈이나 그렇지.

라스가 라온을 노려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만 청승 떨고 돌아가자. 본왕은 배가 고프니라!

녀석은 리메르가 말했던 괴식들을 먹어보자며 입맛을 다셨다.

‘그전에.’

라온이 라스의 꼬리를 잡고 눈앞으로 잡아당겼다.

‘아까 시얀 님이 막혀 있다는 게 무슨 뜻이야?’

-막힌 건 막힌 것이니라.

‘그니까 자세히 설명하라고.’

-그 하이엘프 계집. 너희들이 상단전이라 말하는 부분이 꽉 막혀 있느니라.

‘보통 다 막혀 있잖아. 경지가 올라가면서 자연스럽게 뚫는 거고.’

상단전의 길은 태어날 때부터 막혀 있다. 자신 역시 그랜드 마스터에 오르며 상단전에 길을 뚫을 수 있게 되었다.

-그렇지. 하지만 그 계집은 본인의 벽 외에 다른 것이 존재하느니라.

‘다른 것?’

-그게 뭔지는 본왕도 모르느니라. 다만 꽤 깊고 짙은 무언가가 막고 있다는 건 확실하느니라.

‘그걸 왜 스테린 님은 몰랐지?’

-태어날 때부터 저랬을 테니, 자연스러운 거라 생각했겠지. 거기다 그 늙은 하이엘프는 본왕이 보는 걸 보지 못하느니라.

라스는 본인의 격이 더 높다며 콧대를 세웠다.

‘막혔다라….’

라온이 턱을 매만지며 고개를 저었다.

‘굉장히 힘들어 보였는데.’

지그하르트에서 방계로 살며 시얀과 비슷한 시선을 겪어보았기에 어느 정도는 그녀를 이해할 수 있었다.

리메르도 시얀의 방을 나오자마자 웃음을 그칠 정도로 걱정을 하고 있기에 도울 수 있다면 도와주고 싶었다.

‘상단전이라… 음?’

고민하고 있을 때 우측 숲에서 날카로운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라온은 생각을 하기도 전에 제천검을 뽑아 들었다. 급한 와중에서도 중심을 잡은 검막. 무엇이 다가와도 견딜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쩌어어어엉!

검막이 모래성처럼 바스러지고, 새하얀 화살이 경계 안으로 파고들어 왔다.

비어 있던 왼손으로 진혼검을 뽑아 염주벽을 세웠다.

화아아아아!

불길의 방패가 달빛처럼 차올라 화살의 투로를 막아섰다.

피이이잉!

다만 하얀 화살은 살아 있는 생명처럼 염주벽을 세운 좌측이 아니라, 우측 어깨를 노리며 솟구쳤다.

쩌어어엉!

라온은 제천검을 급히 회수하여 짓쳐 든 화살을 간신히 쳐냈다.

“크윽….”

손아귀가 거세게 아려온다. 화살에 담겨 있는 힘이 그랜드 마스터 급 검사보다도 강맹했다.

우우우우웅!

거기다 화살은 조금 튕겨 나갔을 뿐 다시 앞으로 돌아와 예리한 기세를 흘렸다.

“이 화살은….”

“제법이구나.”

화살이 날아왔던 숲속이 갈라지며 스테린의 모습이 드러났다. 큰 키로 거침없이 다가오는 걸음은 리메르와 꼭 닮아 있었다.

“수호자님이 갑자기 왜….”

“주저앉아 있던 손녀에게 일어날 힘을 주었으니, 나도 자그마한 보답을 할 수 밖에.”

스테린이 턱짓을 하자 허공에 떠 있던 하얀 화살이 그의 손으로 빨려들어 갔다.

“감령시를 보고 영감을 얻고 싶다고 했다지?”

그가 활시위에 화살을 걸며 오연한 미소를 흘렸다.

“가져갈 수 있다면 가져가 보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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