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79화
“이야!”
리메르가 스테린을 보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할아버지한테 사탄 소리를 들으니까. 집에 돌아왔다는 실감이 나네.”
그는 어릴 때로 돌아간 기분이라며 큼지막한 미소를 그렸다.
“사탄?”
라온이 사탄이라는 단어를 중얼거렸다. 좋지 않은 뜻이라는 건 알겠지만,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너 사탄 몰라?”
“모릅니다.”
뒤를 돌아보니, 도리안과 유아도 모르는 듯 함께 고개를 저었다.
“하긴 인간들에게는 한참 전에 잊혀진 이름일 테니까.”
리메르가 그럴 수 있다고 중얼거리며 손을 저었다.
“사탄은 마계의 군주 중 하나야. 7대 죄악 중 분노를 담당하지.”
“부, 분노요?”
“그래. 신과 천계의 대적자라는 뜻으로 사탄이라 불렸어. 나타나지 않은 지 한참 지났지만, 워낙에 폭급해서 애들을 겁주는 용도로 사용하지. 사탄이 잡아간다던가.”
그는 스테린이 자주 말하는 단어라며 픽 웃었다.
“그, 그렇군요….”
라온이 덜덜 떨리는 입술을 씹으며 라스를 향해 눈동자를 굴렸다.
‘너 사탄이라고도 불렸었어?’
-예전에 인간들이 그렇게 부르기도 했느니라.
라스는 그런 시절도 있었지라고 중얼거리며 살이 차오른 고개를 끄덕였다.
‘신과 천계의 대적자 사탄이라….’
라스는 시도 때도 없이 천계과 신을 욕하고 싸우자고 외쳤었다. 그 광기 어린 모습을 생각해보면 신의 적대자라 불리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런데 폭급하다니! 본왕은 언제나 냉철하고, 이성적이었으며, 아름다웠느니라!
녀석은 헛소리를 주절거리며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많은 마왕 중에서도 하필 사탄이라….’
라온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엘프의 수호자 스테린을 바라보았다.
그가 라스의 기척을 알아차리고 사탄이라는 말을 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긴장감이 가슴을 채우기 시작했다.
“대단하구나.”
다만 예상과 다르게 스테린의 첫 마디는 칭찬으로 시작되었다.
“인간이 우리 엘프보다 더 순수한 마나를 지니고 있는 건 처음 보는군.”
진심으로 감탄한 듯 그의 눈동자에서 옅은 빛이 번뜩였다.
“더 신기한 건 영혼의 격. 지금의 경지로는 닿을 수 없는 드높은 격이 느껴지는구나. 다른 이의 격이 너의 격과 뒤섞인 듯한데 기묘한 일이다.”
스테린은 라온의 눈을 마주 보며 무언가에 홀린 듯이 읊조렸다.
“…….”
라온이 스테린의 말을 들으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하이엘프라서 라스의 격을 느끼는 건가?’
백혈교주나, 성검련주는 물론이고, 글렌조차 라스의 존재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경지를 떠나서 자연과 소통하는 하이엘프이기에 라스의 존재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제가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에리안이 주먹을 크게 휘저었다.
“저 인간은 정령왕에게 선택받은 게 분명합니다!”
“정령왕. 그것도 불 아니면 물이라는 건가?”
“예. 수호자께서는 저보다 더 잘 느끼실 수 있지 않습니까. 저 인간의 단전에 잠들어 있는 순수한 불과 물의 기운을!”
그는 여전히 본인의 생각에 확신을 가진 채 외쳤다. 제발 좀 가만히 있었으면 좋겠다.
“흐음….”
스테린이 버릇처럼 턱을 매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령왕이든 뭐든. 일단 인사부터 하는 게 맞겠지. 세이피아의 수호자 스테린이네.”
“죄송합니다. 제가 먼저 인사를 드렸어야 했는데.”
라온이 가슴에 손을 얹고,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지그하르트의 광풍부대주 라온 지그하르트라고 합니다.”
“음?”
스테린이 라온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금 라온 지그하르트라고 했나?”
“그렇습니다.”
“용살자 라온 지그하르트. 그래. 그 무력과 격이라면 그 정도 이름값은 있어야지.”
그는 이제야 이해가 된다며 낮은 탄성을 흘렸다.
“쩔죠? 얘 내가 업어서 키웠어요!”
리메르가 라온에게 어깨동무를 하며 씩 웃었다.
“…쩔죠?”
스테린은 리메르의 경박한 어투가 적응이 안 되는 듯 눈매를 찌푸렸다.
“너 정말 리메르가 맞느냐?”
“아, 섭섭하게 왜 이래요! 할아버지가 직접 키운 손자잖아요!”
리메르는 바지라도 벗냐면서 허리춤에 손을 올렸다.
“됐다.”
스테린은 펄럭이는 리메르의 오른쪽 소매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변해도 너무 변해서 적응이 안 되는군.”
그는 한숨을 내쉬고서 다시 라온을 바라보았다.
“이곳까지 오는 도중에 몇 가지 잡음이 있었을 텐데, 내가 대신 사과하겠네.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있어서 다들 신경이 날카로웠을 게야.”
스테린은 손님에게 실례를 범했다며 눈을 내리감았다.
“다친 사람이 없으니, 괜찮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일이라면….”
스테린 만이 아니라, 에리안과 레이란 모두 민감한 시기라고 했었고, 세이피아에 인간이 한 명도 없는 것을 보면 정말 중요한 일을 앞둔 것 같았다.
“정화 의식을 준비하고 있다네.”
“정화 의식?”
“나무가 탁한 공기를 빨아들여서 대기를 정화하듯이 세계수는 이 세계의 좋지 않은 기운을 받아들이고, 정화하지.”
“아….”
예전에 리메르에게 들었던 말이다. 과장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정말이었던 것 같다.
“다만 세계수라고 해도 대륙 전체에서 퍼져나오는 사이한 기운을 홀로 정화할 수는 없네. 20년에 한 번씩 하이엘프가 세계수와 공명하여 내부의 노폐물들을 제거하는 게 엘프들의 정화 의식이지.”
스테린은 정화 의식에 관하여 간략하게 설명해주었다. 리메르의 제자이기에 받을 수 있는 배려 같았다.
“아! 맞다!”
리메르가 탄성을 흘리며 왼 주먹을 들어 올렸다.
“정화 의식을 할 때가 되었구나! 이제야 이해가 가네!”
그는 가디언들이 길을 막은 이유를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
스테린이 입을 꾹 다문 채 매서운 눈매로 리메르를 바라보았다.
“너 누구냐.”
“예?”
리메르가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눈을 끔벅였다.
“세이피아의 엘프가 정화 의식을 잊었을 리가 없다.”
스테린은 리메르가 무언가에 씌였다고 생각하는 듯 섬뜩할 정도로 날카로운 의념을 일으켰다. 대답을 잘못하면 바로 베어버릴 기세였다.
“할아버지께 처음 배운 검술이 유성검이었죠. 세계수 아래에서 구결을 말씀해주신 게 아직도 생각나는데, 무슨 소리예요!”
리메르는 손가락을 꼽으며 스테린과 함께 했던 추억을 하나씩 읊었다.
“그럼 진짜….”
스테린이 리메르를 보며 입술을 부르르 떨었다. 엘프. 그것도 초월에까지 닿은 하이엘프가 저렇게 당황하는 모습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할아버지 손자가요. 조금. 아니….”
리메르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헤헤 웃었다.
“많이 망가졌어요.”
“…….”
스테린의 목울대가 크게 요동쳤다.
‘어휴….’
-정말이지 미친놈이니라….
라온과 라스가 동시에 고개를 흔들었다.
* * *
“크흠.”
스테린이 헛기침을 하고서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네. 저 아이가 너무 많이 바뀌어서 조금….”
“이해합니다.”
라온이 고개를 저었다. 예의 바르던 손자가 저렇게 망가져서 오면 누구라도 당황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충분히 이해되었다.
“그럼 자네는 리메르를 호위해주기 위해서 여기까지 온 것인가?”
“예. 혹시 몰라서 따라온 건데, 정화 의식처럼 중요한 일이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괜찮네. 저 멍청이가 잊고 있었던 거니까.”
“할아버지! 손자한테 멍청이가 뭐야!”
“시끄럽다!”
스테린은 이 짧은 순간에 적응을 끝내고 글렌처럼 리메르를 대하기 시작했다.
“아! 그러고 보니까!”
리메르가 거침없는 걸음으로 스테린에게 다가갔다.
“제가 왜 신물을 탈취한 놈이 된 거예요!”
그는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스테린 앞에 들어 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 검은.”
스테린은 흐릿한 눈으로 리메르의 손에 들려 있는 검을 바라보았다.
“네가 가디언의 수장이 되기를 바랐기에 내어 준 것이다. 검을 받고 나서 얼마 지나지도 않아 세이피아를 떠났으니, 도둑놈이 될 수밖에.”
“윽….”
“금방 돌아올 줄 알았는데, 인간 같은 세월을 보낼 줄은 몰랐고, 네 말대로 사람 자체가 망가져서 올 줄은 더더욱 몰랐다. 아무래도 지그하르트 가주를 한번 봐야겠어.”
스테린은 정화 의식을 끝낸 후 지그하르트에 찾아가야 할 것 같다며 벽에 걸린 붉은색 활을 매만졌다.
“그건 재밌겠는데요.”
리메르는 본인 때문에 생긴 문제라는 걸 잊은 듯 입맛을 다셨다. 훈련생 때부터 느꼈지만, 정말이지 답이 없는 사람이었다.
“수호자님.”
라온이 리메르와 스테린 사이에 끼어들며 고개를 숙였다.
“대주님은 그 검을 돌려드리려고 온 겁니다.”
“맞아요.”
리메르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고서 손에 들고 있던 검을 스테린에게 내밀었다.
“돌려준다고?”
“예. 이 팔로 부족의 신물을 쓸 자격은 없는 거 같아서요.”
그는 비어버린 오른쪽 어깨를 보며 옅게 웃었다.
“그 팔은 어쩌다 잃은 것이냐.”
“…….”
리메르는 바로 답을 하지 않고, 뒤에 선 라온과 도리안, 유아를 차례로 보며 눈동자에 은은한 푸른 빛을 드러냈다.
“미래에 맡겼습니다.”
“그 선택에 후회는 없느냐?”
“없습니다.”
“그런가….”
스테린은 사정을 짐작한 듯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은 내가 알던 손자로 돌아온 듯 하구나.”
그는 굳어 있던 입매를 가늘게 풀며 에리안을 불렀다.
“에리안.”
“예.”
“리메르의 수배를 취소하도록.”
“알겠습니다.”
에리안은 잠시 리메르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할 말이 있어 보였지만, 수호자의 지시였기에 따르는 것처럼 보였다.
“수호자님. 저 인간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분명 정령왕의 계약자가 될 겁니다.”
그는 아직도 포기를 하지 않고, 라온이 정령왕의 계약자가 될 거라고 외쳤다.
“태어나지도 않은 정령왕이 계약자를 정한다는 건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일이다.”
“이토록 긴 시간 동안 불과 물의 정령왕이 사라진 것도 처음 있는 일이지 않습니까.”
“흠….”
스테린이 턱을 매만지며 라온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자네 혹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린다든가, 짙은 자연의 기운이 느껴진다든가 하는 거 없었나?”
“음….”
라온이 스테린의 가라앉은 눈을 마주하며 입맛을 다셨다.
‘있죠. 그것도 매일.’
바로 옆에 솜사탕 마왕이 있지만, 그 이야기를 말할 수는 없기에 일단 고개를 저었다.
“없습니다.”
“역시 그런가.”
“그것 보십시오. 인간이 정령왕의 계약자가 될 리가 없습니다.”
레이란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나도 그리 생각한다. 다만 시험을 해봐서 나쁠 건 없겠지.”
“수호자님?”
그녀가 예상하지 못한 듯 눈을 부릅떴다.
“나도 정령왕을 부를 수는 없으니….”
스테린이 손을 들어 올리자, 그의 손아귀 위로 빨간색 고양이 한 마리가 솟구쳤다. 쫑긋 선 귀부터 살랑거리는 꼬리까지 모두 주홍빛 불꽃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이 고양이는….’
크기는 작지만, 가진 기운은 에리안이 소환했던 최상급 정령보다 더 강대했다. 불의 최상급 정령인 것 같았다.
냐… 캬아앙!
고양이는 하품하다가 라온과 눈을 마주치자마자, 뒤로 훌쩍 물러나서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경계하려는 듯 상체를 앞으로 숙이다가 참지 못하고, 배를 까뒤집었다. 고양이과 짐승 특유의 복종의 자세였다.
“하?”
레이란은 하얀 배를 보여주는 불의 최상급 정령을 보며 헛바람을 흘렸다. 그녀의 굳건했던 눈동자조차 흔들리기 시작했다.
“내가 말이 맞잖아! 스테린 님의 정령이 괜히 저러겠냐고! 분명 정령왕의 계약자야!”
에리안은 본인의 말이 맞았다며 가슴을 두드렸다.
“쳐다볼 수 없을 정도로 격이 높은 존재라….”
스테린은 겁에 질린 고양이 정령을 역소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령왕인지는 모르겠지만, 자네가 특별하다는 건 확실하군.”
그는 어느 정도는 믿을 수밖에 없다며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답답해서 뒤지겠느니라! 정령왕이 아니라, 마계의 군주라고! 이 멍청한 귀때기들아!
라스는 본인과 정령왕을 비교하는 게 짜증 난다며 고개를 마구 흔들었다.
“만약 자네가 정말 정령왕에게 선택을 받았다면 우리 일족과도 큰 관계가 있으니, 정화 의식이 끝나면 다시 보아도 되겠나?”
“네. 상관없습니다.”
“이들을 일족 최고의 손님으로 모시도록.”
스테린은 라온만이 아니라, 모두에게 최고의 대우를 해주라며 손을 저었다.
“알겠습니다!”
“…예.”
에리안이 큼지막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레이란은 반신반의한 얼굴로 대답만 내뱉었다.
“그러지 말고 하던 일 계속 하세요. 얘도 할아버지한테 배울 게 있으니까.”
리메르가 스테린에게 다가가서 턱을 저었다.
“배울 거?”
“네. 라온에게 할아버지의 감령시를 보여주셨으면 하거든요.”
“흐음….”
스테린이 라온을 보며 턱을 매만졌다.
“네 제자라고 했으니, 보여주지 못할 것도 없겠지. 다만 지금은 안 된다. 정화 의식이 먼저야.”
“음? 정화 의식은 시얀이 하는 거 아니에요?”
리메르가 누군가의 이름을 꺼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아이는 아직 준비가 안 됐다.”
“네? 걔도 나이가 있는데….”
“지금도 공명을 이루지 못하고 있으니 어쩔 수가 없구나.”
스테린은 조금은 지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노력하지 않았다면 모를까. 매일 같이 연습하고 있음에도 여전히 실패만 하고 있지. 이젠 나도 뭐라 못하겠구나.”
그는 아쉽고 안타깝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 그러면….”
“그래. 더 방에 틀어박혀서 나오질 않아.”
“어우!”
리메르가 처음으로 눈동자에 걱정을 드러내며 이마를 매만졌다.
“시얀이 누구죠?”
라온이 그 이름을 부르자, 리메르가 눈매를 찡그린 채 고개를 돌렸다.
“내 동생이야. 네가 좋아하는 나딘빵의 제작자이기도 하지.”
“근데 나오지 않는다는 게 무슨 뜻이에요?”
“걔가 나딘빵을 만든 이유가 방에서 나오지 않으려고 만든 거거든.”
-그년이었구나! 당장 가서 때려죽이거라!
라스가 동그란 주먹을 철퇴처럼 휘두르며 괴성을 질렀다.
“방에서 나오지 않으려고 나딘빵을 만든 거면….”
라온이 라스를 밀어내며 입을 뻐끔거렸다.
“그래.”
리메르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걔 방구석 백수야.”
* * *
“2권은 언제 나오지? 용을 잡은 부분까지 나오면 좋겠다.”
시얀이 라온 지그하르트 전기라 적힌 책을 마지막 장까지 읽고서 들뜬 숨을 내뱉었다.
“멋있어. 어쩜 이렇게 못하는 게 없을까.”
그녀는 책으로 얼굴을 가린 채 볼에 홍조를 띄웠다.
‘재능이겠지. 인간 중에서도 최고의 재능.’
시얀은 조금은 우울해진 눈빛으로 책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나한테는 없는 재능….”
그녀는 입을 삐죽 내밀고 있다가 침대에서 내려왔다.
“후우….”
시얀이 천천히 심호흡한 후 눈을 감았다. 그녀의 숨결에 누구도 닿지 않은 호수처럼 청아한 마나가 흐르기 시작했다.
고오오오오!
진중한 흐름으로 요동치던 푸른 마나는 그녀의 상단전으로 나아가다가 댐에 가로막힌 것처럼 뚝 끊어졌다.
“으….”
시얀이 입술을 깨문 채 눈을 떴다.
‘또 실패했어….’
하이엘프에게는 엘프들이 가질 수 없는 몇 가지 능력이 있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건 자연과 자신을 일치시키는 공명이다.
공명을 이룰 수 있어야 진정한 하이엘프라 불릴 수 있고, 세계수를 정화할 수 있는데, 자신은 그걸 지금까지 해내지 못하고 있었다.
‘나도 하이엘프인데 대체 왜 안 되는 거야.’
할아버지를 비롯한 다른 하이엘프들은 태어났을 때부터 자연스럽게 공명을 이뤘다고 하는데, 나는 성인이 한참 지난 지금에 와서도 세계와 소통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할아버지의 호흡을 따라 무수히 많은 수련을 해왔지만, 지금까지 길이 열리질 않았다.
점점 다른 엘프들의 눈총이 따가워져서 이제는 이 방에서 나가지 않은 지 수십 년이 지나버렸다.
“왜 나만 안 되냐고!”
시얀이 두 손을 들어 올린 채 악을 질렀다.
“나도 다른 사람에게 찬양받고 싶고, 주목받고 싶은데 왜 나만 이
모양이야!”
그녀는 하이엘프답지 않은 세속적인 욕망을 드러내며 바닥을 내리쳤다.
“라온 지그하르트는 이런 적이 있었을까? 없었겠지?”
시얀은 모래처럼 흘러내리는 금빛 머리카락을 바라보다가 입술을 깨물었다.
“나도 하이엘프가 되고 싶어서 된….”
“시얀! 안에 있지?”
그녀가 짙은 열등감을 드러낼 때 문 앞에서 가슴을 시원하게 만드는 듯한 경쾌한 음성이 들려왔다.
“오, 오빠?”
어조는 많이 달라졌지만, 리메르의 목소리가 분명했다.
“역시 있구나. 들어갈게!”
“자, 잠깐! 들어오지 마!”
“에이, 섭섭하게 왜 이래. 들어간다!”
“아악!”
시얀이 다시 침대 위로 올라가 이불을 뒤집어썼다.
빠드득!
리메르는 문을 잠갔던 빗장을 깨버리고, 안으로 들어섰다.
“오, 오지 말라고 했잖아! 나가!”
시얀이 이불 속에서 눈동자만 내민 채 비명을 질렀다.
“오랜만에 본 오빠한테 너무하네.”
리메르가 섭섭하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미, 미안. 너무 갑작스러워서….”
시얀이 푸른 눈동자를 살짝 들어 올렸다.
“그래? 그러면 들어와도 되지?”
“그, 그게… 아?”
미소를 짓고 있는 리메르 옆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금발의 인간이 보였다.
푸우우욱!
시얀은 두더지가 된 것처럼 이불에 더 깊게 들어가서 부들부들 떨었다.
“저, 저 인간은 누구야!”
“얘 내 제자야. 네가 만든 빵에 흥미가 있어서 데리고 왔지?”
“빠, 빵?”
“나딘빵.”
리메르는 별나지 않냐며 씩 웃었다.
라온이 한 걸음 앞으로 나와서 고개를 숙였다.
“라온 지그하르트라고 합니다.”
“꺼흑!”
그 짧은 소개에 이불 속에서 숨이 뚝 멎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라, 라온 지그하르트요? 정말?”
시얀이 고개를 슬쩍 내밀었다. 살아 있는 듯 생기가 흐르는 금발이 이불 아래로 흘러내렸다.
“그 존잘?”
“네. 그 존… 어?”
라온이 대답하다 말고 눈을 꿈벅였다.
‘이 여자 뭐라는 거야?’
갑자기 존잘이 왜 나와?
엘프에게 존잘 소리를 들은 줄은 상상도 못 해서 머리가 돌아가질 않았다.
헛웃음을 흘리며 시선을 내리는데, 침대 밑에 떨어져 있는 두꺼운 책에 내 이름이 박혀 있는 게 보였다.
‘이건….’
책을 펼쳐보니, 맨 앞장에 라온 지그하르트 전기 1권이라 적혀 있었고, 그 바로 아래에 저자의 이름도 적혀 있었는데.
‘엔시아 요난….’
엔시아는 당당하게 본인의 이름을 저자로 박아넣고, 맨 밑에는 내 허락까지 받은 정품이라며 예전에 사용하겠다던 마크까지 새겨놓았다.
‘이 여자….’
라온이 책을 쥐고 있는 손을 떨며 눈을 꾹 내리감았다.
‘대체 어디까지 가려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