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78화
라온은 멍하니 떠 있는 라스를 보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저 최상급 정령. 너 때문에 저렇게 쫀 거야?’
-응?
라스가 통통한 배를 긁적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녀석은 기가 죽은 최상급 정령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크게 손뼉을 쳤다.
-그, 그렇느니라! 저 새는 본왕의 위엄에 질려서 저렇게 쪼그라든 게 분명 하느니라!
‘…….’
라스의 반응을 보니, 녀석이 본인의 의사로 존재감을 드러낸 건 아니었다. 최상급 정령이 혼자서 라스의 무언가를 느낀 게 분명했다.
-정령은 자연에 가장 가까운 존재이니, 본왕의 위엄을 느껴도 이상하지 않으니라!
라스는 드디어 본인을 알아주는 놈이 나왔다며 키득거렸다.
‘너 혹시 정령계도 갔었어?’
-꽤 오래전이지만 가보았느니라.
‘그, 그럼 정령을 먹어보기도 했어?’
-당연한 것을 왜 묻는 것이냐. 쫄깃쫄깃 맛났느니라.
라스는 별식이었다며 입맛을 다셨다.
-녹색 정령은 청포도 맛이고, 빨간 정령은 딸기 맛이니라.
‘정령의 맛 따위는 궁금하지 않았어!’
라온이 입술을 깨문 채 관자놀이를 짓눌렀다.
‘그 일 때문이잖아!’
아무래도 저 최상급 정령은 정령들을 먹어 치웠던 라스를 기억하고 저렇게 겁에 질린 것 같았다.
‘이러면 답이 없는데….’
정령과 소환자는 대화는 아니어도 어느 정도의 교감을 나눈다고 들었다.
만약 최상급 정령이 마왕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기라도 한다면 이곳에 있는 모두의 목숨이 위험해진다.
-그럴 리가 없느니라. 불의 정령왕과 물의 정령왕이 정령계에 있을 때의 간 거라서 저런 어린 녀석은 본왕을 만나지도 못했을 것이야.
라스는 최상급 정령이 본인을 보지 못했을 거라며 고개를 저었다.
-저건 그냥 본왕의 존재감 자체에 굴복한 것이니라!
녀석은 본인을 찬양하라며 헤헤 웃었다.
‘그러면 좋겠지만 최악의 상황에 대비는 해두어야지. 마왕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 순간….’
엘프들을 모조리 베어야 해.
리메르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마왕에 관한 이야기를 꺼낸다면 모두 죽일 수 밖에 없었다.
라온은 제천검의 검자루를 꽉 움켜쥐고, 무릎을 굽혔다. 언제라도 튀어 나갈 수 있는 준비를 할 때 에리안에 고개를 쳐들었다.
“뭐?”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라온을 보며 눈을 부릅떴다.
‘들킨 건가?’
입술을 꽉 깨물며 태화보를 밟으려는 순간 다시 에리안의 입이 열렸다.
“위, 위대한 존재?”
그는 마왕이 아니라, 위대한 존재라고 중얼거리며 턱을 떨었다.
“어…?”
라온이 다급히 뛰쳐나가려다 멈춰서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지?’
위대한 존재라니?
마왕이라고 할 줄 알았는데, 갑자기 위대한 존재라는 말이 튀어나와서 내가 더 당황스러웠다.
“위대한 존재가 설마 정령왕을 말함이냐?”
끼에에에.
바람의 최상급 정령이 낮게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래도 본인도 잘 모르겠다는 것 같았다.
“으….”
에리안이 떨리는 턱을 들어 올리며 검을 쥔 손을 떨었다.
“인간! 설마 정령왕과 계약을 한 것이냐?”
그는 본인이 묻고서도 믿을 수 없다는 듯 눈동자가 크게 출렁이고 있었다.
“….”
라온이 에리안을 보며 멍하니 눈을 꿈벅였다.
‘뭔 개소리야….’
상황이 이해되질 않아서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정령왕이라니요?”
어이가 없다는 듯한 물음은 뒤에서 대기하던 레이란이 대신해주었다.
“저 인간에게서는 정령의 기운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정령왕이라는 것이다! 정령왕은 정령의 격 자체를 벗어난 존재! 우리가 그 기운을 느낄 수 없는 건 당연해!”
“그럴 리가 없습니다. 현재 남아 있는 두 정령왕은 정령계를 유지하느라 외부에 나올 수가 없지 않습니까.”
“그럼 새롭게 태어나는 정령왕이겠지. 곧 왕이 될 불 혹은 물의 정령이 저 인간을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이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왜 말이 안 된다는 거지? 위대한 이들을 너의 작은 머리로 판단하려 들지 마라.”
레이란은 믿을 수 없다며 고개를 저었지만, 에리안은 이미 본인의 생각을 확신한 듯 입술을 꾹 다물었다.
“너 언제 정령왕이랑도 계약했어? 역시 내 제자!”
리메르가 눈을 끔벅이며 다가왔다. 이 인간은 왜 속는 건지 모르겠다.
“정령왕이라니! 불이에요? 물이에요?”
도리안은 흥분했는지 콧김을 뿜어내며 불의 정령왕인지 물의 정령왕인지를 물었다.
“아닌 거 같은데….”
유아만 유일하게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런 정신 빠진 놈들이!
라스가 앞으로 날아들며 빽 소리를 질렀다.
-감히 본왕을 정령 따위와 비교하다니! 뒤지고 싶어서 환장했느냐!
키에에엑….
녀석이 발광하며 난동을 부리자, 최상급 정령이 더욱더 기가 죽어서 눈을 감은 채 머리를 땅아 박아 넣었다.
라온은 어지러운 상황을 보며 숨을 골랐다.
‘이제 대충 감이 잡히네.’
저 최상급 정령은 마계에서 먹자판을 벌렸던 라스를 기억하는 게 아니라, 라스가 지닌 지독한 냉기와 규격 외의 영혼의 격을 느끼고 위대한 존재라 여긴 게 분명했다.
정령이 자연에 가장 가까운 존재였기에 벌어진 일 같았다.
‘최악은 아닌데, 좋지도 않아.’
마왕와 함께한다는 사실이 밝혀지지 않은 것만으로 최악은 면했지만, 정령왕의 계약자라고 알려지는 것도 좋은 일이 아니었다.
“후….”
라온이 짧게 숨을 내뱉고서 고개를 저었다.
“전 정령왕의 계약자가 아닙니다. 정령을 보는 것도 처음이라, 뭔가 착각이….”
“그거다!”
에리안이 걸렸다는 듯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본래 정령왕은 다른 정령과 계약한 이들과 계약을 맺지 않아. 새롭게 왕이 될 준비를 마친 존재가 너를 지켜보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는 곧 정령왕이 말을 걸어올 것이라며 입술을 씹었다. 이미 본인만의 세계에 빠진 듯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았다.
“쟤는 원래 지 세계에 빠져 사는 놈이라서 남의 말을 듣질 않아.”
리메르가 에리안을 처음 봤을 때부터 느껴지지 않았냐며 손을 휘휘 흔들었다.
“그런 거 같네요….”
라온이 입술을 질겅질겅 씹었다.
‘미치겠네….’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흘리다가 조금 전에 라스가 한 말이 떠올랐다.
‘근데 불의 정령왕이랑 물의 정령왕이 없다는 게 무슨 말이야?’
-모르느냐? 정령계에 그 두 놈이 사라진 지 한참 되었느니라.
라스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왜?’
-두 놈이 생사결을 벌이다가 같이 뒈졌다고 하던데, 사실인지는 모르겠느니라.
녀석은 본인보다 약한 놈들에게는 관심 없다며 손을 저었다.
‘정령왕이 없는데 정령계가 유지가 되나?’
-땅이랑 바람의 정령왕이 피똥싸고 있으니까. 거기다 다른 놈이 하나 더 들어가 있고.
‘다른 놈?’
그게 누구인지를 물어보려고 할 때 에리안의 입이 다시 열렸다.
“정령왕과 계약할 인간을 이렇게 둘 수는 없겠지.”
에리안은 검을 검집에 집어넣고, 바람의 최상급 정령까지 정령계로 되돌려 보냈다.
“따라와라.”
그는 세이피아로 들어가자며 손을 까딱였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레이란이 활은 들고 있는 손으로 길을 막았다.
“저 인간이 정말 정령왕의 계약자라고 해도 지금 세이피아에 들여서는 안 됩니다.”
그녀는 이 중요한 시기에 외부 인물을 들이는 건 불가하다며 고개를 저었다.
“수백 년 만에 나온 정령왕의 계약자다. 거기다….”
에리안이 리메르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저놈의 처리를 위해서도 지금은 데리고 가는 게 옳다.”
“하지만….”
“책임은 내가 진다.”
그는 정말 라온을 정령왕의 계약자라 확신하며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이야, 역시 내가 제자는 잘 뒀다니까.”
리메르는 안 싸워서 좋다는 듯 씩 웃으며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라온은 리메르를 보며 이마를 부여잡았다.
‘웃을 때가 아니에요. 이 화상아!’
* * *
“흐음….”
얼굴에 얇게 세월의 흔적을 새긴 적발의 엘프가 턱을 매만졌다.
“집 나간 녀석이 이제야 돌아오는구나.”
“네에?”
이불 속에 숨어서 머리만 빼꼼 내놓고 있던 여성 엘프가 고개를 슬쩍 들어 올렸다. 백금을 녹인 듯한 금발이 샘물처럼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누, 누가 오는데요?”
그녀는 흥미가 동하는 게 아니라, 걱정되는 듯 붉은 입술을 떨었다.
“네 오빠.”
“아!”
금발의 엘프가 토끼처럼 귀를 쫑긋 세웠다. 하지만 그녀의 상체는 여전히 이불 속에서 빠져나오질 않았다.
“저, 정말이에요?”
“그래. 다만 기질이 조금 변한 듯하구나.”
적발의 엘프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여성 엘프를 바라보았다.
“시얀. 오빠를 만나보지 않으련?”
“아….”
시얀이라 불린 여성 엘프는 다리를 슬금슬금 움직여서 거북이처럼 이불 안으로 들어갔다.
“차, 창피해요.”
“오랜만에 가족을 만나는데, 뭐가 창피하다는 게냐.”
“많은 시간이 지났잖아요….”
“가족이란, 시간으로 따질 수 있는 존재가 아니란다.”
적발의 엘프가 시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고개를 저었다.
“흠? 인간 셋도 함께 오고 있군.”
“이, 인간이요?”
“굉장히 강하구나. 아직 어린 나이 같은데, 그랜드 마스터라니 말도 안 되는 재능이로군.”
적발의 엘프는 진심으로 감탄한 듯 탄성을 흘렸다.
“어떠냐? 너도 함께 가보지 않으련?”
“…….”
시얀은 적발의 엘프의 말에 답을 하지 않고, 이불 속에서 눈동자만 꿈벅였다.
“저, 저는 여기 있을게요….”
“후….”
적발의 엘프가 짧은 한숨을 내쉬고서 시선을 들어 올렸다. 그의 눈가에 잡힌 주름이 가늘게 떨렸다.
“시얀. 이제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단다.”
“…….”
“이번까지는 내가 할 수 있겠지만, 다음에는 정말 안 될 수도 있다. 마음의 준비를 해두는 게 좋을 거야.”
“아, 알겠어요.”
이불 속에서 시얀의 기어들어 가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래. 그럼 난 나가보마.”
적발의 엘프는 가볍게 손을 젓고서 방을 나섰다.
“…….”
시얀은 여전히 이불 속에 숨은 채 숨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녀는 적발의 엘프가 이곳을 떠나는 걸음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이불을 걷고 밖으로 튀어나왔다.
“미안해요. 하지만 저도 하이엘프로 태어나고 싶지 않았다구요.”
시얀이 한숨을 푹 내쉬고서 고개를 저었다.
“그것도 평범한 엘프보다도 못나서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는….”
그녀는 어깨를 축 내린 채로 침대에 놓여 있는 책자를 손에 쥐었다.
시얀은 평범하게 살고 싶다고 중얼거리며 책을 펼쳤다. 새것인지 말끔해 보이는 책의 표지에는 라온 지그하르트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나도 라온 지그하르트가 되고 싶다….”
* * *
라온은 에리안을 따라가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이쪽은 진짜 엘프 같네.’
리메르와 달리 에리안은 그저 걷는 것만으로 숲에 길을 열고 있었다.
무력 자체는 리메르가 뛰어나지만, 자연 친화력은 이쪽이 더 높은 것 같았다.
옆에서 쏘아져 오는 따가운 시선에 눈동자를 돌리자, 레이란이 대놓고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정말 네가 정령왕의 계약자가 될 수 있냐는 듯한 의심을 가득 담은 눈빛이었다.
“왜 그렇게 보시는 겁니까?
라온이 레이란을 보며 어색하게 손을 저었다.
“죄송합니다. 인간들에게 빤히 쳐다보는 건 실례였죠.”
레이란은 실수했다고 말하며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정령왕의 계약자라는 건 정말….”
“맞다고 했지 않느냐.”
에리안이 레이란을 돌아보며 미간을 찡그렸다.
“너는 나를 믿지 못하는 것이냐.”
“이번 일만큼은 믿기가 힘듭니다.”
역시나 엘프인지 레이란은 본인의 상사에게 신뢰하기 힘들다는 말을 그대로 내뱉었다.
“흥. 나중에 가면 알게 될 것이다. 누구의 말이 맞는지.”
-저거 답정너네.
라스가 에리안을 노려보며 이를 바득 갈았다.
‘답정너?’
-답은 정해져 있으니까. 너는 대답만 하라는 거지. 꼰대 그 자체이니라!
녀석은 볼수록 짜증이 난다며 움켜쥔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그렇죠. 나중에 알게 되겠죠.”
레이란은 실례했다는 듯 라온에게 머리를 숙였다.
“괜찮습니다.”
라온이 고개를 젓고서 미간을 찌푸렸다.
‘미치겠네. 이 오해를 어떻게 풀어야 하지?’
-당장 본왕을 강림시켜라!
라스가 본인이 해결해주겠다며 가슴을 두드렸다.
-이곳에 있는 엘프를 모두 산 채로 얼려 버리면 앞으로 본왕을 정령 따위와 비교하는 놈이 나오지 않겠지!
녀석은 존재하는 모든 엘프를 얼음 동상으로 만들겠다며 살벌한 웃음을 흘렸다.
‘지금 머리 복잡하니까. 너라도 가만히 있어.’
-싫으니라! 몸 넘겨!
‘그냥 들어가라고!’
라온이 라스를 팔찌로 밀어넣을 때 에리안의 걸음이 멈췄다.
“이곳이 세이피아다.”
그의 말을 따라 시선을 들어 올리자, 푸른 초목이 가득한 세계가 눈동자를 채웠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황금빛 햇살이 나무와 잔디에 생기를 전해주어 꼭 현실이 아닌 세계를 보는 듯했다.
대수림과 비슷할 정도로 나무와 수풀이 많았지만, 길이 열려있어서 복잡하거나, 답답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나무 속에서 살아가는 건가?’
엘프들은 다람쥐처럼 나무 안에서 생활하는 것처럼 보였다.
다만 인간도 왕래하는 곳이기 때문인지 사람의 손이 닿은 듯한 건축물들도 하나씩 보였다.
‘마나의 순도가 높은 이유가 있었군.’
엘프들은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 공생하는 삶을 걸어가기에 이곳의 마나 농도가 외부보다 훨씬 진한 것 같았다.
‘세계수는 보이지 않네.’
결계로 감춰두었기 때문인지 하늘에 닿는다는 그 거대한 나무는 눈에 띄지 않았다.
“아….”
“와아!”
도리안은 놀라서 눈만 끔벅였고, 유아는 짙은 마나의 향에 활짝 핀 웃음을 터트렸다.
라온은 세이피아의 안쪽을 살피며 입맛을 다셨다.
‘사람은 없군.’
세이피아에 왕래를 하는 사람들이 조금 있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그 어떠한 인간도 보이지 않았다.
레이란이 세이피아 내부에 중요한 일이 있다고 했는데, 그것 때문인 것 같았다.
“여긴 그대로네.”
리메르는 세이피아의 전경을 살피며 그리움이 차오른 듯한 눈빛을 드러냈다.
“네놈은 많이 변한 것 같군.”
에리안은 리메르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세상은 쉴 새 없이 변하니까.”
리메르는 에리안의 사나운 눈빛을 마주하며 웃었다.
“안내나 계속하셔.”
“재수없는 놈.”
에리안은 입매를 비틀고서 세이피아 내부로 들어갔다.
“음?”
“…리메르?”
“맞아. 리메르 님이야.”
“이제야 돌아오신 건가?”
세이피아 내부에 있던 엘프들이 리메르를 알아보고 눈을 부릅떴다. 엘프들의 특성인지 크게 놀라는 이들은 없었지만, 확실하게 리메르를 알아보고 있었다.
“죽은 게 아니었나?”
“오른팔이 잘린 것 같은데….”
“검 때문에 도망쳤다고 하던데 왜 돌아온 거지?”
“흐음. 그 일 때문인가?”
“하지만 리메르 님은 하이엘프가 아니잖아.”
“인간들은 또 뭐지? 왜 지금….”
엘프들은 걸음을 멈춘 채 리메르를 보며 조심스럽게 입술을 뗐다.
“오랜만이야! 다들 잘 지냈어?”
리메르는 엘프들을 향해 시원하게 손을 흔들었다.
“왜, 왜 저러시지?”
“무슨 인간처럼….”
“고고했던 리메르 님이 어찌 저런 말투를….”
“복장도 이상해.”
“인간에게 물이 든 건가?”
엘프들은 리메르의 경박한 어조에 당황한 듯 눈밑을 떨었다.
그들은 리메르의 팔이 떨어져 나간 것보다 그의 어투에 더 놀란 것처럼 보였다.
라온이 리메르의 등을 보며 눈섭을 찡그렸다.
‘이 엘프. 대체 어떻게 살아온 거야.’
엘프들의 반응을 보면 이전의 리메르는 정말 차분했던 것 같다. 점점 더 리메르의 성격이 예측되질 않았다.
“스테린 님께 갈 것이다. 각오해두는 게 좋을 거야.”
에리안이 냉랭한 눈동자로 리메르를 노려보고서 걸음을 빨리했다.
“각오는 무슨.”
리메르는 코웃음을 치며 에리안의 뒤를 따라갔다.
‘스테린….’
아마 하이엘프겠지.
스테린은 리메르가 세이피아의 지도자라고 했던 엘프다. 무력은 어느 정도일지, 어떤 정령을 소환할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에리안을 따라갈수록 길이 좁아지고, 마주치는 엘프들이 줄어들었다.
인간의 지도자에게 갈 때는 점점 더 길이 화려해지고 사람들이 많아지기에 신기했다.
“이곳이다.”
그가 낡은 문이 박혀 있는 큼지막한 미루나무 앞에서 멈춰 섰다. 나무가 꽤 크기는 하지만, 한 종족의 지도자가 이런 곳에 산다는 게 믿기질 않았다.
“경박하게 굴지 말고 예의를 차리도록.”
에리안은 헛소리하면 죽이겠다는 듯 검자루를 쓸어내렸다.
“아니까. 걱정 마.”
리메르는 빨리 들어가기나 하라며 손을 흔들었다.
똑똑.
에리안은 혀를 차고서 나무에 붙어있는 문에 노크했다.
“수호자님. 외부에서….”
“들어오거라.”
그가 사정을 말하기도 전에 나무 안쪽에서 나지막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몸과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듯한 청아한 목소리였다.
“예.”
에리안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는 겉에서 보는 것보다는 넓었지만, 예상 이상으로 소박하여 종족의 수호자가 사는 곳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 종족이 엘프였기에 또 이해는 되었다.
덩굴로 만든 듯한 흔들의자 위에 적발의 엘프가 몸을 누이고 있었다. 가라앉은 눈매가 어딘지 리메르와 비슷한 엘프는 눈가에 주름을 만들며 상체를 들어 올렸다.
‘이 남자가 엘프의 수호자인가.’
글렌이나, 성검련주와 같은 영역에 섰지만, 기질이 전혀 다르다.
세계를 향해 스스로를 드러내는 둘과 달리 이 엘프는 세계에 본인을 동화시키고 있었다.
육체와 정신에 자연을 담아내는 독보적인 경지를 이룬 듯했다.
“리메르. 많이 늦….”
스테린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리메르를 바라보았다.
“할아버지!”
리메르는 스테린에게 달려가 그를 꽉 끌어 안았다.
“어? 리메르?”
스테린은 갑작스러운 리메르의 포옹에 당황한 듯 턱을 부르르 떨었다.
‘저 인간 심지어 지도자의 핏줄이었어?’
라온도 당황하여 입을 떡 벌렸다.
“이런 미친놈!”
에리안이 리메르를 억지로 떼어내며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이놈의 복귀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사라졌던 정령왕의 계약자가 나타났습니다!”
그는 리메르를 뒤로 밀어버리고 라온을 가리켰다.
“너희….”
스테린은 리메르와 에리안을 차례로 보며 눈매를 찌푸렸다.
“사탄 들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