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77화
“아, 지루해….”
아리스가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치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내가 여기서 이러고 있을 사람이 아닌데!”
그녀는 창가를 따스하게 적시는 햇살을 보며 입술을 질겅질겅 씹었다.
“허허허.”
로엔이 아리스의 책상 위에 찻잔과 과자를 내려놓으며 은은한 미소를 흘렸다.
“금방 끝내실 수 있을 겁니다.”
“아직 한참 남았어! 끝이 안 보인다고!”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이미 반 이상 하신 거지요.”
“하아, 가끔 보면 로엔이 아버지보다 더 얄밉다니까.”
아리스는 퉁명스러운 눈빛을 흘리면서도 로엔이 가져온 과자를 입에 넣었다.
“허허허.”
로엔은 아리스가 무슨 말을 해도 귀엽다는 듯 웃기만 했다.
“라온에게 온 연락은 없어?”
“오늘 정오쯤 세이피아에 도착할 것 같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오늘 정오?”
아리스는 살짝 기울어진 태양을 보며 눈매를 찌푸렸다.
“그럼 이미 세이피아에 들어갔겠네?”
“그렇겠지요.”
“아아아악!”
아리스가 노을빛 머리를 마구 헤집으며 비명을 질렀다.
“나도 갔어야 했는데! 세이피아에 손님으로 갈 일은 흔치 않다고!”
“허허허.”
“그 웃음 말고 다른 거 없어?”
“후후후.”
로엔은 아리스의 요구대로 웃음 소리를 바꿔주었다.
“그건 더 싫어! 아버지 같잖아!”
아리스는 돌아버리겟다며 책상에 머리를 박았다.
“지금쯤 라온은 엘프들의 융숭한 대접을 받고 있겠지. 과실주도 마시고, 세계수도 구경하고, 좋겠다아….”
“아마 그럴 겁니다. 리메르 님이 세이피아에서 꽤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는 듯했으니까요.”
“맞아. 귀족급 지위라고 했었던 거 같은데. 그래서 처음에 봤을 때 고고한 척만 해서 재수 없었잖아. 지금의 멍청한 모습이 훨씬 나아.”
“허허허.”
로엔은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로엔. 뭐 재밌는 거 없어?”
아리스는 정말 일하기 싫은지 책상에 이마를 비비며 로엔을 불렀다.
“음, 최근 버렌 도련님과 마르타 아가씨 그리고 루난 아가씨께서 현무전주께 훈련을 받고 계십니다.”
로엔은 그나마 아리스가 흥미를 가질 만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어? 진짜?”
아리스가 머리를 벌떡 들어 올렸다.
“데니어가 애들 수련을 봐준다고?”
“그렇습니다. 세 분 다 라온 님을 따라잡을 기세인지 열심히더군요.”
“그거 재밌겠는데, 나도 한 번 가볼까?”
그녀는 흥미가 동한 듯 길게 입맛을 다셨다.
“애들 전부 한 단계씩 올려놓으면 라온이 돌아오자마자, 이모 하면서 달려들지 않을까?”
“이모 소리를 듣고 싶으시다면 일단 오늘 일부터 끝내셔야죠.”
로엔이 아리스의 책상 위에 새로운 서류더미를 내려놓았다.
“로엔, 나 이러다가 정말 죽어….”
아리스가 로엔의 소매를 잡고 눈시울을 붉혔다.
“허허허.”
로엔은 냉정할 정도로 빠르게 손을 빼서 아리스에게서 벗어났다.
“로엔. 진짜 많이 변했다. 예전에는 안 이랬잖아!”
“사람은 변하는 법이지요.”
“하긴 로엔만이 아니지. 아버지나, 다른 사람들도 많이 달라졌더라고. 전부 라온 때문이지?”
“전부까지는 아니지만, 영향이 큰 건 사실이지요.”
그는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녀석의 진짜 재능은 무학이 아니라,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 같아.”
아리스가 살짝 눈을 감았다 뜨며 부드러운 미소를 그렸다.
“매력 넘치는 조카랑 즐거운 여행을 떠나고 싶었는데, 아쉽네….”
그녀는 펜을 집어 들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모는 고생할 테니까. 너라도 즐기렴.”
* * *
“가서 즐기기만 하면 된다며!”
라온은 제천검으로 반원의 검막을 치며 이를 갈았다.
“고향에서는 평범하게 살아왔다며!”
예상은 했지만, 또한 예상을 벗어난 상황에 짜증이 차올라 자연스레 반말이 튀어나왔다.
“신물은 왜 훔친 건데요!”
“안 훔쳤어! 진짜 정당하게 받은 거라고!”
리메르는 본인도 모르는 일이라며 고개를 마구 흔들었다.
-푸헤헤헤헤!
라스는 그저 즐겁다는 듯 배를 잡고 웃음을 터트렸다.
-본왕이 이럴 줄 알았느니라. 차라리 그리드의 말을 믿지. 저 귀때기의 말을 왜 믿냐고!
‘시끄러!’
라온은 키득거리는 라스를 밀어내고, 쇄도해오는 화살에 집중했다.
쩌어어어엉!
미리 세워둔 만화공의 검막과 화살이 마주쳤다. 화살촉이 부딪쳐올 때마다 쇳덩이에 후려 맞은 듯한 충격이 일었다.
‘이게 화살이라고?’
화살이 아니라, 오러를 가득 담은 투창에 얻어맞은 듯한 무거움이었다. 화살촉을 쇠가 아닌 나무로 만든 것 같은데, 이런 위력을 만들어내는 게 신기했다.
후우우웅!
가시덩굴 뒤에 숨은 엘프들은 더 이상 대화를 할 생각이 없는지 연달아 화살을 쏘아냈다.
쩌저저저정!
라온은 검막을 회전시켜 화살을 모조리 쳐내고서 리메르를 노려보았다.
“대체 저게 뭐예요! 환영해줄 거라면서요!”
솔직히 환영한다는 말 자체는 믿지 않았지만, 입구에서부터 공격이 들어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나, 나도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어….”
리메르는 본인도 당황스럽다며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식은땀도 닦지 않았다.
“후우, 처음부터 믿어서는 안 됐어요. 그냥 놓고 올걸.”
도리안은 당사자인 리메르를 지그하르트에 놔두고 왔어야 했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 못 들어가는 거예요?”
유아는 시작부터 침입자가 되어버린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입술을 떨었다.
“계속 쏴!”
더 날카로워진 엘프 여성의 음성과 함께 화살이 쇄도해왔다. 검막을 깨기 위해서인지 화살에 어린 기운이 처음보다 더 빠르고 강맹하게 회전했다.
‘확실히 화살에 실려 있는 힘이 다르네.’
여러 전장을 다니며 많은 궁수를 보았지만, 이 정도로 높은 수준의 궁술을 마주하는 건 처음이었다.
라온은 검막을 이루는 불꽃을 짙게 태우며 짓쳐들어오는 화살을 면밀하게 관찰했다.
‘단순히 힘만 줘서 쏘아내는 게 아니야.’
엘프들은 화살에 무학의 묘리를 담아서 활시위를 당기고 있었다.
빠름과 날카로움 그리고 무거움이 어린 화살이었기에 쳐낼 때마다 거대한 쇳덩이를 맞은 듯한 충격이 이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다른 엘프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여성 엘프의 궁술이 가장 뛰어났다. 검사로 따지자면 마스터 이상은 되는 듯했다.
‘마스터 급 무학의 묘리를 화살에 담는다니, 재밌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새로운 무학의 흐름을 보게 되니,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끄으윽! 무친놈이 또 시작했구나!
라스가 미간을 찌푸린 채 고개를 저었다.
‘무친놈이 뭐야?’
-무학에 미친놈! 네놈 말이다!
‘넌 참 이상한 말을 잘 만든다니까.’
라온은 피식 웃고서 다시 화살에 집중했다.
‘보기 편하네.’
엘프들은 살기를 두른 공격이 아니라, 제압을 위한 사격만 하고 있었다. 덕분에 그들의 화살을 쉽게 관찰할 수 있었다.
‘오해는 나중에 풀면 그만이지.’
제 실력을 발휘하면 당장 엘프들을 제압할 수 있지만, 지금은 저들의 궁술을 보며 내 심상을 넓히고 싶었다.
라온이 검막을 풀고, 쇄도해오는 화살을 직접 쳐냈다.
쩌어어엉!
제천검의 검신과 화살촉이 격돌한 순간 화살에 실려 있던 힘과 묘리가 손아귀를 깊게 파고들었다.
‘빠름과 무거움이 제대로 실려 있어. 거기다 이번에는 변화까지 넣었군.’
리메르가 말했던 대로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화살까지는 아니었지만, 화살에 담긴 변화의 묘리를 보는 것만으로도 확실한 공부가 되었다.
쩌저저저저정!
라온은 입가에 미소까지 띄운 채 사방에서 쏟아지는 엘프들의 화살에 집중했다.
빠른 화살은 둔검으로, 무거운 화살은 유검으로, 변화가 다채로운 화살은 절검으로 쳐내며 스스로의 검술을 다듬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화살을 막고 있다 보니, 갑자기 날아들던 화살이 뚝 끊겼다.
“음?”
라온이 제천검을 내리며 미간을 좁혔다.
“더 안 쏘나?”
“너 같으면 웃으면서 화살을 쳐내는 변태에게 쏠 맛 나겠냐?”
리메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앞으로 나왔다.
“벼, 변태라니요!”
“넌 무학에 있어서는 변태 중에서도 상변태야.”
그는 질린다는 듯 손을 저으며 다시 가시덩굴 앞에 섰다.
“다시 말할게. 세이피아는 내 고향이고, 이 신물은 정당한 절차를 통해서 받은 거야. 절대 훔치지 않았어.”
리메르는 당당한 어조로 본인에게 죄가 없음을 밝혔다.
“그걸 어떻게 믿죠?”
가시덩굴 뒤에서 조금은 누그러진 듯한 음성이 들려왔다.
“우리가 정말 나쁜 목적으로 왔다면 너희는 얘를 만나자마자 목이 날아갔을걸?”
리메르가 라온을 가리키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 정도는 알 수 있잖아.”
잠시 침묵이 이어지더니, 가시덩굴이 갈라지고 그 뒤에 숨어 있던 엘프가 모습을 드러냈다.
수풀을 녹여낸 듯한 녹색 머리카락에 하늘을 비춘 푸른 눈동자가 시선을 빨아들이는 미녀였다.
콧대가 너무 높지도 않았고, 눈이 그리 크지 않았지만, 이목구비의 조화가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이루고 있었다.
“이름이 뭐지?”
“레이란.”
“어? 그 이름 들어본 거 같은데? 너 혹시 코튼 가지 부족 아니야?”
“…맞습니다.”
스스로를 레이란이라 소개한 엘프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쪽에서 굉장히 예쁜 아이가 태어났다고 들어서 구경 갔었는데, 제대로 컸구나.”
리메르는 잘 큰 모습을 봐서 좋다며 웃었다.
“당신의 이름은 뭐죠?”
“리메르. 정 못 믿겠으면 스테린 영감 좀 불러봐. 그 영감이면 분명….”
리메르가 누군가를 부르라고 요청하는 순간 대화를 듣고 있던 엘프가 활시위를 튕겼다. 지금까지 중 처음으로 살의를 담은 매서운 화살이었다.
콰지직!
라온이 왼손을 뻗어 리메르를 노리던 화살을 허공에서 부숴버렸다.
“그분의 이름을 함부로 말하지 마십시오!”
그녀만이 아니라, 모든 엘프들이 살의를 드러내고 있었다. 리메르가 부른 스테린이라는 사람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대체 누굴 부른 거예요?”
“세이피아의 대빵.”
“이 망할 인간아!”
라온이 눈을 질끈 감았. 엘프들이 왜 살기를 일으켰는지 알겠다.
지그하르트에 와서 글렌에게 영감 소리를 한 것이니, 죽어도 할 말이 없었다.
“난 그렇게 불러도 되는데….”
리메르는 본인이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다는 듯 눈을 꿈벅였다.
“다 됐고. 대주님은 앞으로 말하지 마세요.”
라온은 리메르의 입을 막고서 레이란에게 고개를 숙였다.
“조금 전의 발언은 사과드리겠습니다. 멍청할 뿐 악의가 있던 건 아니니, 이해 부탁드립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희는 도둑도, 침입자도 아닙니다. 오해만 풀면….”
“무슨 오해를 말하는 거지?”
멀리서 불어온 바람에 서늘한 음성이 실려 왔다.
가라앉은 공기가 요동친 순간 우측에 솟구친 나무 위로 푸른 장발이 펄럭이는 차가운 인상의 엘프가 날아들었다.
“아!”
리메르는 그를 알아본 듯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이제 됐다! 아는 애가 나왔어!”
그는 걱정말라고 외치며 청발의 엘프에게 손을 흔들었다.
“에리안! 나야! 나 알지!”
“모를 수가 있나. 리메르.”
에리안이라 불린 엘프가 잔잔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신물의 탈취자여.”
다만 그의 다음 음성은 겨울을 녹인 것처럼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역시….”
“그럴 줄 알았지.”
“믿은 제가 바보예요.”
차가워진 라온과 도리안, 유아의 눈동자가 리메르에게 내리꽂혔다.
“그, 그게 무슨 개소리야! 너도 내가 이 검을 받는 거 봤잖아!”
리메르가 이목구비가 안 보일 정도로 빠르게 머리를 흔들었다.
“그 검은 네 것이 아니라, 네게 빌려주는 거였지. 신물을 가지고 나가서 돌아오지 않은 넌 도둑놈일 뿐이다.”
에리안이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그의 손목을 타고 오른 푸른 오러에서 살기가 풀려나왔다.
촤아아아악!
차디찬 바람의 검격이 리메르의 머리를 향해 떨어져 내릴 때 라온이 움직였다.
터어엉!
라온은 거칠게 바닥을 차고 올라 에리안이 찔러넣은 검격을 후려쳤다.
쩌어어어어엉!
검극과 검극이 마주치며 숲을 거세게 뒤흔드는 바람이 터져 나왔다.
“흥!”
에리안이 콧방귀를 뀌고서 가뿐히 몸을 휘돌렸다. 그는 새라도 된 것처럼 허공에서 중심을 잡은 후 재차 검격을 그어 내렸다.
‘몸놀림이 자유롭군.’
리메르와는 다른 방식으로 바람을 운용하는 것 같았다.
라온은 에리안이 움직이는 바람의 흐름을 피부로 느끼며 제천검으로 두 줄의 선을 그렸다. 선 사이로 차오른 불꽃이 둥근 형상을 그리며 화염의 방패를 이뤘다.
쩌어어어엉!
에리안이 내지른 바람의 칼날은 염주벽을 뚫어내지 못하고, 후덕한 바람이 된 채 사그라들었다.
“쯧.”
에리안은 미간을 찌푸린 채로 뒤로 물러섰다. 만화공의 열기에 살짝 질린 듯한 표정이었다.
“쩔지?”
리메르가 히죽 웃으며 왼손을 흔들었다.
“쟤 내가 키웠어!”
그는 아직도 사태 파악이 안 된 듯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입 닫아라.”
에리안이 인상을 구긴 채로 갈라진 대지를 박찼다. 변칙적이면서도 빠른 움직임. 실전적인 검격에서 혈향이 흘러나왔다.
많은 목숨이 저자의 칼날 앞에서 목을 내어준 것 같았다.
라온이 살짝 굽힌 무릎을 내밀었다.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며 좌측 허리에 젖혀둔 제천검을 뻗어냈다. 질주하는 은빛 칼날 뒤로 푸른 냉기의 칼날이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캬아아아아앙!
서리연의 첫 번째 칼날이 에리안의 검을 쳐내고, 그 뒤를 추적해온 서리의 칼날이 그의 어깨를 노렸다.
“흐읍!”
에리안은 냉기의 칼날을 예측하지 못한 듯 눈을 부릅떴지만, 처음에 보여준 바람을 타는 몸놀림을 이용하여 훌쩍 뒤로 물러섰다.
치이이익!
다만 냉기의 칼날은 이미 그의 어깨를 가늘게 스치고 지나가서 자그마한 상흔을 새겨놓았다.
“후우….”
에리안은 어깨의 상처를 보며 입매를 비틀었다.
“좋다.”
그가 새의 발톱처럼 세운 손으로 어깨의 상처를 짓누르며 턱을 치켜들었다.
“그리 원한다면 네 제자가 죽는 꼴을 보여주지.”
에리안은 모두 너희들의 탓이라고 중얼거리며 손을 모았다.
화아아아아아!
그를 중심으로 눈을 뜰 수 없게 만드는 강대한 바람이 출렁였다. 허공에서 녹색 빛 구체가 장대한 빛을 터트리며 거대한 날개를 펼쳤다.
‘뭐지?’
라온이 강대한 마나의 파동을 느끼며 억지로 눈을 떴다. 푸른 하늘 아래에 우악스러울 정도의 거체가 떠 있었다.
매.
드레이크라 불려도 손색이 없을 크기의 거대한 매가 푸른 바람으로 호흡하고 있었다.
키에에에에에에!
녹색 빛 매는 세계를 향해 무시무시한 포효를 터트렸다. 어찌나 강렬한지 이 숲 전체가 뒤흔들리는 것 같았다.
“저건….”
“정령이야. 그것도 최상급.”
리메르가 에리안을 보며 헛바람을 흘렸다.
“강해졌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최상급 정령을 소환할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그는 낭패라며 고개를 저었다.
“최상급 정령은 그랜드 마스터도 상대할 수 있어. 조심해.”
“확실히….”
라온이 나지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리메르의 말대로 최상급 정령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그랜드 마스터에 육박했다. 쉽게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후회해도 이미 늦었다.”
에리안이 콧방귀를 끼며 손가락으로 라온과 리메르를 겨누었다.
“저들을 갈기갈기 찢어버려라!”
“재밌겠네.”
라온이 입맛을 다시며 앞으로 나오는데, 최상급 정령은 에리안의 명령을 듣지 못한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스으으으!
아니, 움직이지 않는 게 아니라 오히려 바람을 타고, 슬금슬금 뒤로 물러섰다.
“무얼 하는 것이냐! 저놈들을 공격해!”
“끼에에엑!”
에리안이 다시 손짓을 했지만, 최상급 정령은 아예 훌쩍 물러나서 나무 뒤에 숨었다.
“음?”
“키에에….”
라온이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자, 최상급 정령이 덜덜 떨며 고개를 조아렸다. 동물들이 흔히 보여주는 복종의 자세였다.
“뭐, 뭐야! 내 정령에게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에리안이 기겁을 하며 턱을 떨었다. 그가 다가가서 말을 걸어도 정령은 일어나질 않았다.
‘뭐지?’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돌리자, 코를 파고 있는 라스가 보였다.
-뭘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