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76화
아리스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단상 위로 시선을 들어 올렸다.
“지금이라도 보내주시면 안 돼요? 제가 세이피아에 갈 수 있는 날이 이번 말고 또 언제 오겠어요.”
그녀는 새로운 여행을 떠나고 싶다며 두 손을 모았다.
“말했지 않느냐. 미뤘던 일을 하기 전에는 여기서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다.”
글렌은 어림도 없다는 듯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제가 놀고 싶어서 이러는 게 아니에요.”
아리스가 엄지손가락으로 라온과 리메르가 나간 문을 가리키며 눈매를 찡그렸다.
“희대의 천재 라온을 누가 납치라도 하면 어떻게 해요! 그때 가서 찾아도 늦는다구요!”
그녀는 본인이 호위하겠다며 당차게 가슴을 두드렸다.
“너 때문에 세이피아와도 척을 지고 싶지는 않다.”
글렌은 이 이상 적을 늘리는 건 귀찮다며 손을 저었다.
“척을 왜 져요. 그냥 관광 가는 건데! 인형처럼 가만히 있다가 올게요.”
“그 폐쇄적인 곳에 가서 네가 잘도 가만히 있겠군.”
그는 차라리 리메르의 말을 믿겠다며 코웃음을 쳤다.
“거기다 리메르는 지그하르트의 사절로서 세이피아에 가는 게 아니라, 고향에 들르는 것뿐이다. 녀석들이 외부에 나가는 사실 자체가 드러나지 않을 테니 걱정할 필요 없다.”
“또 세작이 숨어 있을 수도 있잖아요!”
아리스는 알현실이 흔들릴 정도로 발을 구르며 인상을 찌푸렸다.
“시리아 슬리온은 그 홀로 미쳤다고 해도, 라키온은 가문 자체가 반기를 들었죠. 가문 내부에도 그런 놈들이 있을지 모르잖아요!”
그녀는 진심으로 라온을 걱정하는 듯 사나운 숨을 내뱉었다.
“지그하르트에 왜 찍찍거리는 쥐새끼들이 많은지 알고 계시죠? 아버지 때문이에요. 힘으로 굴복시켰으면 끝까지 짓눌러야 했는데, 고개를 쳐들 기회를 주셨잖아요.”
아리스가 글렌에게 타박하는 듯한 눈빛을 세웠다.
“오마만이 아니라, 내부도 단속하셔야 했다구요!”
“네가 맞는 말을 다 하는구나.”
글렌은 아리스의 날카로운 말을 듣고서도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저 패도만을 걸었던 시기에 새겨졌던 상흔이 지금에 와서야 벌어졌으니, 네 말대로 내 탓이 맞다.”
“아버지?”
아리스는 글렌의 평온한 반응에 놀란 듯 눈을 부릅떴다.
“다만 첩자 수색은 전부터 시작하고 있었다. 내부 감사는 이미 끝냈고, 지난달부터 봉신가를 뒤지고 있으니, 곧 결과가 나오겠지.”
글렌은 가라앉은 눈동자로 아리스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라온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앞으로 지그하르트를 향한 악의는 모두 내가 가져갈 테니까.”
“음….”
아리스는 입술을 오므리기만 할 뿐 어떠한 말도 꺼내지 못했다.
“네가 옳은 말을 해놓고, 왜 그리 놀라느냐.”
글렌은 바람 빠진 웃음을 흘리며 주먹으로 턱을 괴었다.
‘그래. 옳은 말이지.’
마에 잠식당했던 시절에는 그저 무력만으로 모든 규칙과 규율을 세웠다.
반항하면 목을 베었고, 거절하면 무엇이든 밀어버렸다. 힘에 지배당하는 악마가 되어 살았으니, 그 당시의 악행이 칼날이 되어 돌아오는 건 당연한 일이다.
다만 그 악의가 향하는 건 오롯이 나여야만 한다. 더 이상은 라온과 다른 아이들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았다.
“뭔가….”
아리스가 굳은 표정을 풀며 글렌을 바라보았다.
“달라지셨네요.”
“달라졌다?”
“네. 실비아가 태어나기 전으로 돌아가신 것 같아요.”
그녀는 너무 오래되어 이젠 잘 기억도 안 나는 과거가 떠오른다며 옅게 웃었다.
“착각이다.”
글렌은 그런 게 아니라며 손을 저었다.
“아니, 맞아요.”
아리스가 고개를 홱 들어 올렸다.
“예전의 아버지였다면 조금 전에 했던 말을 인정하기는커녕 나가라고 호통만 치셨을 테니까요.”
“…….”
글렌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옥좌에 등을 묻었다.
‘그랬겠지.’
어둠에 잠겼을 때는 그 누구의 조언도 듣지 않고, 그저 앞만을 바라보면 나아갔다. 많은 것을 얻었지만, 또한 많은 것을 잃었던 시기였다.
끼이이익.
부녀가 잠시 눈을 마주치고 있을 때 알현실의 문이 열리고 로엔이 들어왔다.
“전해드리고 왔습니다.”
로엔은 글렌에게 고개를 숙이고서 아리스의 옆에 섰다.
“라온에게 주었나?”
글렌은 가장 중요한 부분부터 물어보았다.
“예. 라온 님께 전해드렸습니다.”
로엔은 당연하다는 듯 웃었다.
“커흠! 수고했다.”
글렌은 만족스럽다는 듯 입매를 말아 올리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누가 아버지를 바꿨는지 알겠네요.”
아리스는 재밌다는 듯 글렌을 올려보며 옅은 미소를 흘렸다.
“아버지. 저는 늦은 때라는 건 없다고 생각해요. 일단 저지르고 후회 하자구요.”
그녀는 본인의 성격을 그대로 담아낸 말을 내뱉으며 주먹을 말아쥐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구나.”
“다 아시면서!”
아리스는 글렌의 생각을 읽는 것처럼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고민은 짧게, 행동은 빠르게. 아시죠?”
“…….”
“전 그럼 이만.”
“아리스.”
그녀가 손을 젓고서 알현실을 나서려 할 때 글렌이 눈매를 찌푸렸다.
“도망쳐서 라온을 따라가면 네 해적 놀이도 끝이다.”
“윽!”
아리스가 떨리는 고개를 돌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눈치도 빨라지셨네….”
* * *
“깔끔하네.”
리메르가 식당으로 들어서며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네요. 음식 냄새도 좋아요.”
도리안이 코를 킁킁거리며 웃었다.
“좋은 버터를 사용해서 그래요. 우유에 무언가를 섞은 거 같은데….”
유아도 식당의 음식에 흥미가 동한 듯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일단 앉자.”
라온은 각자 자기 할 말만을 떠드는 세 사람을 자리에 앉히고서 한숨을 내쉬었다.
하나 같이 개성이 강해서 말을 하게 놔두었다간 끝이 없었다.
“에휴, 노숙은 진짜 할 게 못 된다니까.”
리메르는 왼손으로 오른쪽 어깨를 주무르며 혀를 찼다.
“오늘은 이 마을에서 숙소를 잡자고.”
“고작 이틀 가지고 뭘 그리 엄살이세요.”
라온이 리메르의 반대편 자리에 앉으며 고개를 저었다.
“도리안의 천막과 침낭이면 고급 숙소에도 못지않은데.”
“그렇죠?”
칭찬받은 도리안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활짝 웃었다.
“그래. 네 덕분에 어제도 편하게 잤어.”
도리안은 설치할 필요도 없이 배 주머니에서 완성되어있는 천막을 꺼내주고, 요리를 할 수 있는 화덕도 세워주었다.
솔직히 말해서 웬만한 고급 여관보다 편하고 좋았다.
“필수품이잖아요.”
도리안은 별거 아니라는 듯 손을 저었다. 천막과 불은 정말 여행의 필수품이지만, 완성된 천막이나, 화덕이 바로 튀어나오는 건 역시나 신기한 일이었다.
“그럼 숙소는 나중에 생각하고, 일단 주문부터 하자. 뭐가 좋으려나. 돈도 많으니까. 다 시킬까?”
리메르가 점원이 가져온 메뉴판을 펼치며 입맛을 다셨다. 그는 글렌에게 받은 돈을 이미 자신의 것처럼 여기고 있었다.
“저는 이 고기파이랑 피자요.”
유아는 보편적인 메뉴를 시켜야 요리사의 실력을 알 수 있다면서 그리 특색 없는 음식을 시켰다.
“저는 주머니에 있는 걸로도 충분한데….”
도리안은 조금 전의 칭찬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식당에 와서 야외에서 식사할 때 사용하는 포크와 나이트를 꺼내서 테이블에 배치해주었다.
“…….”
점원이 그를 미친놈처럼 쳐다보기 시작했다.
“후….”
라온은 또 각자 할 말만을 하는 세 사람을 보며 관자놀이를 매만졌다.
‘피곤하네….’
정신이 없다고 생각하며 한숨을 내쉴 때 얼음 꽃팔찌에서 푸른 솜사탕이 튀어 올랐다.
-왜 가만히 있는 것이냐! 네놈도 빨리 요리를 시키거라!
‘딱히 먹고 싶은 게 없어서.’
-네놈의 주둥아리는 상관없고! 본왕이 먹고 싶단 말이다! 메뉴판에 있는 거 다 주문해!
라스는 모든 음식을 다 주문하라며 동그란 손을 내밀었다.
‘다 먹지도 못해.’
-알잖느냐! 본왕은 먹고 싶은 것을 먹어야 직성이 풀리느니라!
‘식당에서 나딘빵 먹기 전에 조용히 해라.’
-흡!
녀석은 나딘빵이라는 이름이 나오자마자, 입을 꽉 다물었다.
-끄으윽, 죽일 거야. 무조건 죽일 것이니라!
라스의 꽉 닫힌 입술에서 누군가를 저주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세이피아에 있다는 나딘빵의 제작자가 분명해 보였다.
“대주님.”
라온이 먼저 주문을 마친 리메르를 불렀다.
“나딘빵의 제작자가 정말 엘프 맞아요?”
“안 믿기지?
리메르가 메뉴판을 도리안에게 넘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엘프 쪽의 음식이 인간계에 퍼졌다는 것도 놀랍지만, 그게 나딘빵인 게 제일 신기해요.”
“사실 사정이 있어.”
“사정?”
“나딘빵을 만든 녀석은 나름 살기 위해서 그걸 만든 거거든.”
그는 꽤 재밌는 녀석이라며 웃었다.
“그게 무슨 말….”
리메르에게 재차 질문을 하려 할 때 옆 테이블 사람들의 목소리에서 내 이름이 들려왔다.
“라온 지그하르트가 그랜드 마스터에 올랐다는 소문 들었냐?”
“어? 광룡 카이바르를 잡고 용살자라 불린다는 건 들었는데, 갑자기 무슨 그랜드 마스터?”
라온이 슬쩍 고개를 돌리니, 용병 차림새의 중년인 두 명이 맥주잔을 비우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쯧쯧, 소식이 느리네. 그건 옛날 일이라고!”
머리가 벗겨진 용병이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라키온 가문 알지?”
“장검을 기가 막히게 쓴다는 지그하르트의 봉신가잖아.”
염소수염이 난 용병이 맥주잔을 내려놓으며 눈을 끔벅였다.
“그래. 그 잘난 가문이 성검련과 손을 잡고, 지그하르트를 배신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대머리 용병은 어디서 정보를 구했는지 라키온 가문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모두 알고 있었다.
다만 아직 검귀에 대한 이야기는 퍼지지 않았는지 그의 이름은 나오지 않았다.
“전장에서 무아지경에 빠진 것도 놀라운데, 정말 벽을 깨고 그랜드 마스터가 되었다고? 솔직히 안 믿기는데….”
염소수염 용병이 잔을 든 손을 떨며 헛바람을 흘렸다.
“네가 믿든 안 믿든 라온 지그하르트가 그랜드 마스터에 오른 건 진짜야. 소문이 파다하다고!”
“지금 라온 지그하르트가 몇 살이지?”
“21살일걸?”
“21살에 마스터가 되었어도 역대 최연소일 텐데, 21살에 그랜드 마스터? 같은 인간이라는 생각이 안 드네….”
“대륙 역사상 최고의 재능이지. 거기다 의협심까지 뛰어나잖아. 그간의 행적을 그린 책도 나오고 있다던데, 이젠 질투조차 안 나.”
“얼굴도 기가 막힌다던데, 뭐라더라 존잘?”
“세상 더럽게 불공평하네. 그냥 술이나 들어!”
용병들은 술이나 마시자며 다시 맥주잔을 들어 올렸다.
“음….”
라온은 용병들에게서 시선을 돌리며 입맛을 다셨다.
‘뭔가 신기하네.’
지그하르트의 영역도 아닌데, 모르는 사람들이 안줏거리 삼아 내 소문을 이야기한다는 게 새로웠다.
다른 사람들이 유명해졌다고 말해줘도 별 느낌이 없었는데, 저 용병들의 대화를 듣자 유명해졌다는 이야기가 피부에 와닿는 기분이었다.
“재밌지?”
리메르가 먼저 나온 맥주를 들이키며 씩 웃었다.
“강해진다는 건 유명해진다는 거기도 하거든. 이제 네 이름은 지그하르트를 넘어 대륙 전체로 퍼졌어. 네가 무엇을 하든 사람들이 관심을 기울인다는 거지. 그게 명성이다.”
그는 앞으로 평생을 함께하게 될 거라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그 말대로 이제 다른 테이블에서도 내 이름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너는 지그하르트의 그 누구보다도 좋은 명성을 떨치고 있어. 좋은 일이니까. 자부심을 가져.”
리메르는 이 순간을 즐기라며 웃었다.
“부럽네요….”
도리안이 배 주머니를 긁으며 입을 동그랗게 벌렸다.
“누구는 이름을 알리고 싶어도 안 알아주는데!”
그는 빨리 마스터를 찍어야겠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실 수 있을 거예요!”
유아는 언제나 그렇듯 방긋 웃으며 활기찬 목소리로 용기를 주었다.
-끄응….
라스는 테이블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 망할 인간 놈들이! 이런 애송이 말고, 본왕을 떠받들란 말이다!
녀석은 본인의 이름이 불리지 않은 것에 화가 난 듯 빽 소리를 질렀다.
-안 되겠느니라! 다시 한번 제대로 강림하여 이 땅의 모든 인간들에게 본왕의 무서움을….
“음식 나왔습니다.”
-먹자!
라스는 인상을 구기다가 점원이 음식을 가져오자마자 활짝 웃으며 꼬리를 살랑였다.
‘무서움은 개뿔….’
* * *
라온이 푸른 세계 앞에서 시선을 들어 올렸다. 눈앞의 모든 것이 녹색으로 번들거린다.
하늘을 향해 손짓하는 듯한 나무들과 그 나무들 사이를 가득 채운 수풀과 잔디까지. 이곳이 왜 대수림이라 불리는지 알 것 같았다.
“우와아아.”
유아가 대수림의 전경을 살피며 탄성을 흘렸다.
“여기가 세이피아에요?”
“이 숲은 대수림이고, 세이피아는 안쪽에 있어.”
리메르가 유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은은한 미소를 그렸다.
라온은 리메르의 말을 듣고서 숲 안쪽으로 기감을 풀어냈다. 다만 내부의 마나 농도가 너무 짙어서 오러를 조종하기가 쉽지 않았다.
‘오러도 오러지만, 딱히 느껴지는 게 없네.’
대수림 내부에 진법이나, 결계가 숨겨져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평범한 숲과 별 차이가 없어 보였다.
“결계 같은 건 없는 건가요?”
“있어.”
리메르가 고개를 저었다.
“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데….”
“자연적인 미로니까.”
“자연적인 미로?”
“그래. 엘프들은 조금이지만 자연과 소통을 할 수 있거든.”
그는 이 숲 자체가 엘프들의 성벽이자, 눈이라며 웃었다.
“대주님도 가능하세요?”
도리안이 리메르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당연하지!”
“근데 왜 한 번도 그런 걸 못 봤지?”
“어? 음. 까먹고 있었어.”
리메르는 본인이 엘프라는 것을 지금까지 잊고 있었다며 헤헤 웃었다.
“진짜….”
라온이 뒤통수를 긁적이는 리메르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너 정말 저 귀때기 믿고 들어가도 되는 것이냐?
라스는 본인이 걱정된다는 듯 눈매를 찡그렸다.
‘나도 이제는 좀 헷갈리네….’
다만 여기까지 온 이상 선택권은 없었다. 저 정신 빠진 엘프를 따라가야만 했다.
“어쨌든 들어가자.”
리메르가 피식 웃으며 손을 뻗자, 수풀이 갈라지며 자연스럽게 길이 열렸다.
“우와아아아! 대주님 진짜 엘프셨네요!”
유아가 신기하다는 듯 팔짝 뛰었다.
“저는 그냥 귀만 긴 사람인가 했어요!”
“나 엘프 맞다니까. 이렇게 잘생긴 사람 봤냐고!”
“라온 님이요.”
“끄윽….”
리메르는 유아의 당찬 대답에 반박하지 못하고, 숲 안쪽으로 들어갔다.
화아아아아!
그의 손짓을 따라 어린아이가 들어가기 힘들 정도로 수풀과 나무가 우거져 있던 밀림이 갈라지고, 사람이 지나갈 수 있는 공간을 열어주었다. 처음으로 리메르가 엘프처럼 보였다.
라온은 살랑거리는 수풀과 나무를 보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마나로 인한 게 아니야.’
이 숲은 리메르의 마나를 알아본 게 아니라, 리메르라는 엘프의 존재를 느끼고 길을 열어준 것 같았다.
새로우면서도 신비한 광경을 관찰하며 한참 동안 걸어갔을 무렵 앞쪽에서 작은 인기척이 느껴졌다.
작은 동물이 지나가거나, 바람에 스치는 수풀의 소리 같았지만, 그보다 마나의 향이 짙었다. 리메르와 같은 엘프의 기척이었다.
“드디어 나왔네.”
리메르도 엘프들의 기척을 느꼈는지 걸음을 멈춘 채 열리지 않는 두터운 가시덩굴을 바라보았다.
“그 이상 접근하지 마십시오.”
가시덩굴 안쪽에서 감정이 전혀 실리지 않은 여성의 음성이 들려왔다.
“지금은 외부인이 들어올 수 없습니다. 돌아가십시오.”
그녀는 북해의 바람을 두른 듯한 목소리로 다가오면 공격하겠다는 의사를 비쳤다.
-왜 귀때기들은 다 싸가지가 없는 것이냐!
라스가 덩굴 안쪽을 노려보며 이를 바득 갈았다.
-본왕의 길을 막다니, 당장 목을 치거라!
‘그게 되겠냐.’
-그럼 네놈이 잘하는 불지랄이라도 하라고!
녀석은 리메르 때문에 엘프 혐오가 생겼는지 이 숲을 다 태우라고 외쳤다.
“너희 나 모르니?”
리메르가 가볍게 손을 흔들며 가시덩굴 쪽으로 다가갔다.
“나는….”
그가 더 앞으로 걸어가려 할 때 가시덩굴 속에서 화살이 날아와 바닥에 박혔다.
피이이이익!
얼마나 강한 힘이 실렸는지 바닥에 박힌 화살이 거세게 진동했다.
“윽….”
리메르는 바닥에 박힌 화살을 보고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너, 너희 날 모르는구나.”
그는 이마에서 흘러내린 땀을 닦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접근하지 마십시오. 외부에서 태어난 동족 같은데, 만약 동족이 아니었다면 지금 화살이 목에 박혔을 겁니다.”
가시덩굴 뒤에서 조금 전보다 더 얼어붙은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긴 오랜 시간이 지났으니, 가디언도 다 바뀌었겠지. 난 외부인이 아니야. 세이피아에서 태어났다고.”
리메르가 고개를 저으며 한 발 앞으로 다가갔다.
“거짓말하지 마십시오. 세이피아에서 태어난 동족이 지금이 얼마나 중요한 시기인지를 모를 리가….”
“나를 모르겠다면 이 검은 알겠지?”
그는 여성 엘프의 말을 끊으며 허리춤에 차고 있는 검을 툭 쳤다.
“…….”
수풀 속에서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그리고.
피이이잉!
처음보다 더 빠르고 살벌한 기세를 두른 화살이 리메르의 귓불을 스치고 지나갔다.
“신물의 탈취자다! 모두 공격해!”
여성 엘프의 섬뜩한 음성과 함께 가시덩굴에서 수십 개의 화살이 동시에 튀어나왔다.
“으아아아아악!”
리메르가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섰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라온이 리메르의 앞을 막아서며 이를 바득 갈았다.
“당신 대체 뭐 하고 산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