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75화
라온이 리메르의 미소를 마주하며 두 눈을 꿈벅였다.
“갑자기 세이피아가 왜 나와요?”
세이피아는 모든 엘프들의 성지이자, 고향이다. 인간은 함부로 들어갈 수도 없는 곳에 가자고 하니, 진심인지 장난인지 알 수가 없었다.
“갑자기는 아니고.”
리메르가 허리춤에 차고 있는 검을 툭 쳤다. 나뭇잎 모양 코등이가 작게 흔들렸다.
“이제 이 검을 돌려줘야 할 거 같아서.”
“그거 아끼시는 거잖아요.”
그는 도박장에서 벌거벗은 채 쫓겨날 때도 저 검만큼은 담보로 넘기지 않았다. 제천검이나, 진천검에도 밀리지 않는 명검을 왜 돌려준다는 건지 모르겠다.
“이거 내 거 아니야.”
리메르가 검을 내려다보며 씁쓸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우리 부족의 신물인데, 내가 가지고 나온 거거든.”
“시, 신물….”
라온이 다시 검을 보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훔친 건가?’
몰래 부족의 신물을 훔쳐서 도망쳐 나오는 리메르의 얼굴이 떠올랐다.
“지금 훔쳤다고 생각했지? 그거 아니니까. 머리에 떠오른 그림 지워라.”
“그럼요?”
“당연히 허락받았지!”
리메르는 날 뭘로 보냐며 발을 굴렀다.
“안 믿기는데….”
“당시에는 나도 정상이었어!”
다행히 본인이 현재 이상하다는 자각은 있는 것 같았다.
“그럼 그걸 왜 돌려주려는 거죠?”
“팔이 이 모양이 됐잖냐.”
리메르가 왼손으로 오른쪽 어깨를 매만졌다.
“새 팔을 달던, 왼팔로 검을 쥐던 이제 이 검을 가지고 있을 자격은 없는 것 같아서.”
그는 자그마한 미련도 풀었으니, 돌려주고 싶다며 웃었다.
“꼭 그럴 필요 있을까요?”
“말했잖아. 신물이라고, 신물은 그에 어울리는 사람이 써야지.”
“음….”
“어차피 집에도 한 번은 들리려고 했어. 안 간 지 오래됐으니까.”
리메르는 이미 마음을 정한 듯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알겠습니다. 다녀오세요. 그동안 광풍대는 제가 맡고 있겠습니다.”
라온은 리메르에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고 등을 돌렸다.
“잠깐! 너도 가야지!”
리메르가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다시 손목을 붙잡았다.
“제가 왜요.”
“환자를 그냥 보낼 거야?”
그는 비어버린 소매를 매만지며 목을 움츠렸다.
“으윽….”
라온이 손바닥으로 이마를 매만지며 한숨을 내쉬었다.
“세이피아는 엘프들의 성지잖아요. 인간인 제가 거길 어떻게 들어가요.”
세이피아에 들어갈 수 있는 인간은 그곳의 엘프들과 특별한 연을 맺은 자들 뿐이다. 입구에서 바로 쫓겨날 게 분명했다.
“내가 그곳에 사는 엘프잖아! 거기다 너와 나는 제자와 스승이니까. 당연히 들어갈 수 있지!”
리메르는 그런 걸 왜 걱정하냐며 이마에 주름을 만들었다.
“거기서 쫓겨난 거 아니었어요?”
“아니라고! 나도 거기 있을 때는 고귀한 엘프 그 자체였어!”
그는 다시 한번 당시에는 정상이었다고 외쳤다.
“…알겠어요.”
라온이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리메르가 어디 가서 맞고 다닐 사람은 아니었지만, 혹시 모르기에 따라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역시 내 제자라니까!”
리메르는 잘 결정했다며 왼손으로 무릎을 두드렸다.
“그런데 제가 좋아할 만한 게 있다는 건 뭐에요?”
“너 특이하고 이상한 음식 좋아하잖냐. 아까 먹은 민트초코처럼.”
“그게….”
-망할 귀때기 놈이!
사실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려고 할 때 하품을 하던 라스가 펄쩍 뛰었다.
-민트초코의 상쾌함과 달달함도 모르는 맛알못 주제에 어디서 주둥아리를 놀려! 무얼 하는 것이냐 당장 귀때기의 뺨을 후려라!
녀석은 본인이 욕을 먹었을 때보다 더 분노하여 날뛰었다.
‘생각해보니 그렇게 보이긴 하겠네.’
라스 때문에 매일 같이 이상한 음식만 먹어왔으니, 괴식가라 불려도 이상하지 않았다.
“세이피아에 특이하고 맛있는 음식들이 많거든.”
“엘프들은 보통 채소와 과일을 그대로 먹지 않나요?”
“언제 적 이야기를 하냐. 물론 그렇게 먹는 애들도 있지만, 나름 여러 조리법이 많아.”
그는 괴식도 많다며 씩 웃었다.
-무얼 하느냐!
라스는 언제 화를 냈냐는 듯 빠르게 손을 휘저었다.
-가자! 본왕은 귀때기들의 요리도 먹어보고 싶으니라! 본왕이랑 잘 맞을 것 같으니라!
녀석은 무조건 가자며 턱살이 흔들릴 정도로 머리를 흔들었다.
“아! 너 나딘빵도 좋아하지?”
“뭐, 괜찮아하죠.”
나딘빵은 정말 선호하고 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빵을 만든 애가 세이피아에 있어.”
리메르는 궁금하지 않냐며 어깨를 으쓱였다.
-나, 나딘빵?
라스가 끈적한 살의를 담으며 눈동자를 날카롭게 세웠다.
-죽이겠어. 본왕에게 끔찍한 고무의 고통을 준 그 악마를 죽이겠느니라! 당장 출발해!
조금 전에는 잘 맞을 거 같다며….
* * *
엔시아가 리메르의 팔과 어깨 치수를 재고서 담담히 고개를 주억였다.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최선을 다해볼게요.”
그녀는 리메르의 어깨를 살피며 확인한 내용들을 수첩에 적었다.
“으….”
라온은 엔시아의 수첩을 보고서 순간 입술을 떨었다.
‘저기에도 내 사진이….’
엔시아가 들고 있는 수첩의 겉면에 내 얼굴이 큼지막하게 박혀 있었다. 민망해서 쳐다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세이피아에 가신다고요?”
“네. 아마 갈 것 같습니다.”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혹시 세계수의 조각을 가져오실 수 있나요? 잎이나, 가지, 뿌리도 괜찮아요.”
“세계수의 조각은 왜 필요하죠?”
“말씀드렸듯이 의수의 착용자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면 자연의 기운이 잘 녹아 있는 재료가 필요해요. 세계수라면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아서요.”
“힘들 거 같은데….”
세계수는 엘프들이 어머니처럼 여기는 나무다. 일 년 내내 밤낮을 가리지 않고, 감시하고 있어서 무엇 하나 가져올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세계수의 잎이나, 가지 같은 건 장로회에서 관리하고 있어서 유출 자체가 안 될 거야. 외부에 세계수의 조각이 나왔다는 거 들어본 적 없잖아.”
리메르는 얻기는 힘들 거라며 입맛을 다셨다.
“그렇죠.”
“그래도 뭐 훔치면 되지 않을까?”
그는 얻지 못하면 훔치자면서 손가락을 비볐다.
“와….”
라온이 입을 떡 벌렸다. 세계수의 조각을 훔치자는 말이 엘프의 입에서 나온다는 게 경악스러웠다.
-…쟤 정말 저래도 되는 것이냐?
오죽하면 마왕인 라스가 리메르의 정신을 걱정해주었다.
“안 되면 어쩔 수 없이 다른 걸 구해야죠.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엔시아는 리메르를 안심시키려는 듯 잔잔한 웃음을 흘렸다.
“갑자기 왜 이렇게 친절해졌어?”
리메르가 엔시아를 보며 눈을 꿈벅였다.
“아까는 기분이 안 좋으신 거 같아서 장난 좀 쳐봤어요.”
엔시아가 신경 쓰지 말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그럴 줄 알았어! 내가 애매하게 생겼을 리가 없잖아!”
리메르가 다시 외모에 자신감을 찾은 듯 시원하게 웃었다.
“네. 존잘이시죠.”
“역시! 사실 내 얼굴은 라온한테도 안 밀리는….”
“태양 앞에 반딧불. 상대도 안 돼요.”
엔시아는 웃음을 뚝 그친 채 서늘한 눈빛을 드러냈다.
“어….”
리메르가 겁에 질린 것처럼 입술을 떨었다.
“그럼 전 가볼게요. 준비를 해야해서.”
엔시아는 빨리 가서 설계도부터 짜야겠다며 선물로 준 아이스크림을 가지고 별관으로 들어갔다.
“아, 아프다. 마지막 말이 너무 진심이라 아퍼….”
리메르는 왼손으로 가슴을 부여잡은 채 신음을 흘렸다.
“음?”
라온은 엔시아의 손에 들린 아이스크림을 보고 팔짝 뛰는 유아를 살피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그러고 보니 엘프들 노래도 잘하죠?”
“대부분은 잘하지.”
리메르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유아도 데리고 갈까요? 배울 게 있어 보이는데.”
“어? 그거 좋은 생각인데?”
그는 괜찮을 것 같다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그럼 출발은 언제하실 겁니까?”
“시간 끌 필요 없으니까. 모레 바로 출발하자.”
“알겠습니다.”
리메르의 말대로 다음 임무가 언제 올지 모르니, 휴가 기간에 빨리 다녀오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럼 모레 아침에 가주전 앞에서 보자고.”
리메르는 왼손을 경쾌하게 휘젓고서 별관의 정원을 떠났다.
라온은 그의 오른쪽 소매가 바람에 펄럭이는 것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뭐가 되었든 일이 잘 풀렸으면 좋겠네.’
-끄으으윽….
짧게 입맛을 다실 때 라스의 신음이 들렸다.
-죽인다! 무조건 그놈을 죽일 것이니라! 오직 그것뿐이니라!
‘…….’
무섭게 왜 이래.
* * *
“흐아아아!”
버렌이 수련검을 내려놓으며 힘에 겨운 한숨을 내쉬었다.
“망할 자식. 조금 따라잡았나 싶었는데, 이제는 하늘로 가버리네.”
그는 푸른 하늘을 올려보며 인상을 구겼다.
“너랑 생각이 똑같을 때가 다 있네.”
마르타가 벽에 등을 기대며 땀에 젖은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간신히 마스터에 올라가서 동일선상에 섰더니, 손에 닿지 않는 곳으로 가버렸어.”
그녀는 짜증난다고 중얼거리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신기한 건 분하기는 한데, 질투는 안 나.”
버렌이 시선을 내리며 피식 웃었다.
“그럴 수밖에. 그놈은 지금도 수련하고 있을 테니까.”
마르타가 동의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닌데.”
루난이 손에 든 구슬 아이스크림을 꿀떡 삼키고, 고개를 저었다.
“뭐?”
“오늘 아침에 나랑 같이 아이스크림 사 먹었어.”
그녀는 라온이 이 아이스크림을 사줬다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진짜 의외라니까. 식사도 계산해서 먹는 녀석이 아이스크림을 좋아한다는 게.”
버렌이 이해가 안 된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라온은 나랑 비슷해.”
루난은 그게 좋다는 듯 눈을 꿈벅였다.
“다 떠나서 저 바보한테도 밀렸다는 게 너무 열받네….”
마르타가 루난을 보며 아미를 찌푸렸다.
“헹.”
루난은 멍하니 마르타를 바라보다가 입꼬리를 쓱 올렸다. 눈은 웃지 않는데, 입술만 움직여서 기괴한 미소가 되었다.
“끄으윽….”
마르타가 움켜쥔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내가 따라잡는다. 밤을 새워서 수련해서라도 따라잡을 거야!”
그녀는 절대 지지 않겠다고 말하며 고개를 틀었다.
“그러고 보니까. 이제 우리 저녁 수련은 누가 봐주지?”
버렌이 마침 생각났다는 듯 운을 뗐다.
“수련?”
“이제 대주님이 저녁 수련을 봐주기는 힘들 거 아니야.”
“음, 그건 그렇지.”
마르타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도괴 님이나 라온은 새벽부터 낮까지 상대해주니까. 저녁에도 봐달라고 하기엔 그렇고….”
“어쩔 수 없이 이젠 우리끼리….”
“내가 해줘도 될까?”
버렌과 마르타가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연무장 문 쪽에서 부드러운 음성이 흘러 들어왔다.
끼이이익!
연무장의 문이 열리고, 데니어 지그하르트가 고개를 까딱였다.
“아버지?”
마르타의 눈동자가 토끼처럼 동그랗게 말렸다.
“여긴 어떻게….”
“식사 시간이 되어도 오직 않아서 찾으러 왔단다.”
데니어가 옅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아, 죄송해요. 약속했었죠….”
마르타는 이제 생각났다며 머리를 긁적였다.
“괜찮아. 그런데 저녁 훈련을 도와줄 사람을 구한다고 들었는데 맞니?”
“그렇기는 한데요….”
“너희만 좋다면 저녁 시간 정도는 내가 봐주마.”
그는 원한다면 시간을 낼 수 있다며 턱을 끄덕여주었다.
“저, 정말이십니까?”
“딱히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 물론 바쁠 때는 힘들고.”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버렌이 마른침을 삼키며 입술을 뗐다.
“정말 괜찮으세요? 요즘 일 많으시잖아요.”
마르타는 무리하는 거 아니냐며 걱정이 어린 눈으로 데니어를 바라보았다.
“딸과 조카들을 위해서 그 정도 시간도 못 낼까.”
데니어는 신경 쓰지 말라며 마르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너희가 더 위로 갈 수 있게 도와주마.”
* * *
모레 새벽.
라온은 리메르와 함께 알현실로 들어섰다. 대주와 부대주가 동시에 출타하기에 먼저 가주에게 허락을 맡아야 했다.
“가주님을 뵙습니다.”
“일어나라.”
글렌은 인사도 귀찮다는 듯 거칠게 손을 저었다.
“그래. 세이피아에 가겠다고?”
“예.”
라온이 허리를 곧게 세운 후 고개를 끄덕였다.
“광풍대주가 홀로 가기에 힘들 수도 있어서 제가 호위를 서려고 합니다.”
“흠….”
글렌의 무심한 눈동자에 연한 빛이 어렸다.
“한동안 임무가 없을 테니, 나쁜 시기는 아니로군. 다만….”
그는 리메르를 매섭게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세이피아에 들어갈 수는 있느냐? 쫓겨난 거 아니었어?”
“하아, 누가 한 핏줄 아니랄까 봐 묻는 게 똑같네.”
리메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앞으로 나왔다.
“저 쫓겨난 거 아니라니까요! 내가 내 발로 나온 거예요!”
“한 핏줄?”
“가주님이 하신 말씀을 요 녀석이 똑같이 했다구요!”
그가 인상을 찌푸린 채 라온을 가리켰다.
“커허험!”
글렌이 턱을 괴고 있던 손으로 입을 가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왼쪽 다리가 갑자기 거세게 떨리기 시작했다.
“네놈이 매일 같이 이상한 짓만 골라서 하니, 그럴 수 밖에.”
“아무튼 전 추방자가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리메르는 얼굴만 마주해도 세이피아에 들어갈 수 있다며 손을 흔들었다.
“알겠다. 들어갈 수 있다면 상관없겠지.”
글렌이 느릿하게 시선을 돌려 라온을 바라보았다.
“광풍부대주.”
“예.”
“세이피아는 평범한 도시가 아니라, 엘프들의 성지다. 지그하르트의 간부로서 언행에 주의하도록.”
“알겠습니다.”
말은 길지만, 뜻은 간단하다. 리메르를 자제시키라는 의미였다.
“그리고….”
글렌이 짧게 눈을 감았다가 뜨며 말을 이었다.
“그랜드 마스터에 오른 후에는 육체적인 변화가 그리 크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중요한 것은 깨달음과 심상이니, 최대한 많은 것을 보고 느끼도록.”
그는 진심이 어린 조언을 냉엄한 어조로 내뱉었다.
“명심하겠습니다.”
라온이 가슴에 손을 올린 채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가보거라.”
글렌은 할 말을 다했다는 듯 손을 저었다.
라온이 고개를 숙이고 알현실을 나서려 할 때 문이 거칠게 열렸다.
쿠우웅!
아리스였다. 그녀는 문이 열리기도 전에 먼저 머리부터 들이밀었다.
“세이피아에 간다고? 나도 가자!”
그녀는 본인도 함께 가자며 턱을 까딱였다.
“네가 가기는 어딜 가.”
글렌이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지금까지 쌓인 보고서 전부 다 쓰라고 했잖느냐.”
“아, 그걸 언제 다 써요! 20년 치를!”
“일을 미룬 네 탓이다. 전부 다 할 때까지는 어디에도 못 간다.”
그는 절대 도망칠 수 없다며 눈매를 찌푸렸다.
“라온아! 네가 아버지께 함께 가고 싶다고 말 좀 해줘! 나 여기 있다가 늙어 죽어!”
아리스가 라온의 소매를 붙잡은 채 손을 떨었다.
“음….”
라온이 눈을 감고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아리스 님과 함께 가면….’
반토막이 나서 쓰러지는 세계수와 그 앞에서 웃고 있는 아리스의 모습이 그려졌다. 엘프들이 악귀처럼 표정을 일그러뜨린 채 달려드는 장면까지 떠올랐다.
등골 사이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아리스와 함께 가면 적에게 죽을 일은 없지만, 왠지 엘프들에게 활을 맞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라온은 아리스를 보며 당당하게 고개를 저었다.
“사양하겠습니다.”
* * *
“이제 오세요?”
“도련님!”
라온이 가주전을 나오자, 동그란 과자를 씹어먹던 도리안과 유아가 손을 흔들었다.
“유아는 간다고 들었는데, 도리안도 같이 가는 거였어?”
리메르는 도리안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행 가는데, 배낭은 들어야죠.”
라온은 당연한 걸 왜 묻냐며 어깨를 으쓱였다.
“어….”
리메르가 헛웃음을 흘렸다.
“사람들은 나보고 미쳤다고 하는데, 내가 보기엔 네가 진짜야….”
그는 라온을 보며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전 익숙해요.”
도리안은 신경 쓰지 말라며 웃었다.
“출발도 전에 지치네. 빨리 가자.”
“라온 도련님!”
리메르가 바로 출발하자며 앞장을 설 때 뒤에서 로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엔님?”
로엔은 빠르게 다가와서 고급스러운 주머니 하나를 내밀었다.
“이건….”
“고향에 가시니 선물이라도 하나 사가라고 하시더군요.”
그는 글렌이 주었다며 허허롭게 웃었다.
“오!”
리메르가 푸짐한 주머니를 보며 헤죽거렸다.
‘역시 통했군.’
글렌에게 일부러 라온과 같은 핏줄이라고 말했는데, 그게 잘 먹혀서 저 돈이 떨어진 게 분명했다.
다리를 떨면서 입꼬리로 하늘을 찌르는 글렌의 모습이 그려졌다.
“감사히 받겠다고….”
리메르가 손을 뻗는데, 로엔이 주머니를 뒤로 뺐다.
“어?”
“리메르 님이 아니라, 라온 님께 맡기라고 하시더군요.”
그는 글렌의 지시라며 라온에게 주머니를 주었다.
“알겠습니다. 선물을 사는데만 쓰도록 하겠습니다.”
라온은 고개를 숙이며 로엔에게 주머니를 받았다.
“에휴. 쪼잔한 가주….”
리메르는 혀를 쯧쯧차며 고개를 저었다. 다만 기분은 좋은지 입가에 얇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라온.”
“무슨 말을 하셔도 안 드립니다.”
라온은 리메르에게 고개를 저으며 금화 주머니를 주머니에게 맡겼다.
“그게 아니라, 조금 전에 가주님이 하신 말씀 있잖아.”
“경험을 쌓으라는 거요?”
“그래. 거기 가면 하늘을 나는 화살을 볼 수 있을지도 몰라.”
“화살은 원래 하늘을 나는데요?”
“그, 그러네.”
리메르가 멍하니 눈을 꿈벅였다.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거예요?”
“다시 말할게.”
그가 손가락으로 화살의 궤적을 그리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곳에 가면 자유자재로 날아다니는 화살을 보게 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