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74화
라온은 땅바닥에 드러누운 채 한참동안 별을 바라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글렌과 검을 나누며 체력과 오러를 대부분 소모했는데, 신기하게도 머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맑았다.
‘기분 좋네.’
가슴을 꾹 누르고 있던 응어리도 완전히 사라졌다. 라키온 가문에서 렉타르를 만나기 전으로 돌아온 것만 같아서 저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정말이냐?
라스가 폭죽처럼 튀어 올라 얼굴을 들이밀었다.
‘뭐가?’
-정말 기분이 좋아진 거냐고!
‘그렇긴 한데 갑자기 왜?’
-그럼 본왕이 네게 해야 할 말이 있느니라!
녀석의 바다색 눈동자 위로 진중한 빛이 맺혔다.
‘해야 할 말….’
라온이 라스의 가라앉은 눈동자를 보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솜사탕이 갑자기 진지한 표정을 지으니, 조금 긴장이 되었다.
‘말해봐.”
-네놈….
라스가 동그란 주먹을 들어 올리며 미간을 구겼다.
-가문에 도착하자마자 본왕에게 아이스크림을 사주겠다는 약속을 아직 안 지켰느니라!
‘…….’
라온의 붉은 눈동자가 열기를 잃은 것처럼 차갑게 식었다.
‘어휴….’
-그 눈은 무엇이냐! 네놈이 약속했잖느냐!
‘했지. 했는데. 그걸 왜 지금 말하냐고. 그것도 진지한 척하면서. 이 식충아!’
-시, 식충이?
라스가 입술을 부르르 떨며 고개를 쳐들었다.
-감히 마계의 군주에게 식충이라니! 본왕은 오직 그 약속만을 기다렸단 말이다!
녀석은 분하다는 듯 빽 소리를 질렀다.
‘기다렸다고?’
라온은 얼굴이 붉어져서 딸기 맛 솜사탕이 된 라스를 보며 눈매를 좁혔다.
‘그동안 참았던 건가?’
생각해보니 라스는 조금 전에도 기분이 좋아졌냐고 물어본 후에야 아이스크림 이야기를 꺼냈다.
‘하긴 예전이라면 약속한 당일에 바로 아이스크림 사 오라고 생떼를 부렸을 테니까.’
라스는 렉타르를 만난 이후에 아이스크림의 아 자도 꺼내지 않았다. 감정이 상한 날 배려해준 것 같았다.
‘라스도 바뀌는 건가.’
시간과 인연이 변화시키는 건 사람들과의 관계뿐만이 아니었다. 라스와의 관계도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알겠어.”
라온이 픽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바로 가자.”
-어…?
라스는 그 말에 놀란 토끼 눈이 되었다.
‘왜 놀라. 네가 가자며.’
-청개구리 같은 놈이 웬일로 바로 말을 들어 먹는 것이냐?
‘가끔은 이래야지.’
-이제 네놈도 정신을 차리는군! 잘 생각했느니라! 앞으로 말 잘 들으면 본왕의 부하로 삼아주겠느니라!
‘안 사요.’
라온은 가볍게 손을 저어주고서 다시 별관으로 돌아왔다.
늦은 시간이라 주방에 붙은 뒷문으로 조용히 들어가려는데, 어둠 속에서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졌다.
“어! 존잘 님!”
한 단어로 본인의 정체를 드러내는 엔시아였다. 그녀는 입에 빵을 문 채로 고개를 꾸벅였다. 연구를 하다가 배가 고파서 나온 것 같았다.
“언제 오셨어요? 존잘 님?”
이젠 존잘 라온도 아니고, 그냥 존잘이다. 이름 자체가 사라졌다.
“오늘 도착했습니다. 몇 시간 안 됐어요.”
“아아아악! 연구하고 있느라 도착하신 줄도 몰랐어요! 이 멍청이!”
엔시아는 분하다고 탁자에 본인의 이마를 찍었다.
“라온 님을 볼 기회를 몇 시간이나 놓치다니! 내가 죽어야지!”
“그, 그만 하세요.”
라온이 침을 꼴깍 삼키며 엔시아의 어깨를 잡았다. 만날 때마다 느끼지만, 정말 감당하기 힘든 사람이었다.
“그런데….”
엔시아가 빵을 문 채로 눈을 꿈벅였다. 그녀는 이마에서 핏물이 한 줄 흘러내리고 있음에도 신경 쓰지 않고, 라온만을 바라보았다.
“라온 님 염색하셨어요?”
“아뇨.”
“금발이 조금 짙어진 느낌이에요.”
그녀가 확실하다고 중얼거리며 품에서 두꺼운 책자 하나를 꺼냈다. 펼쳐보니, 라온의 사진이 날짜별로 박혀 있었다.
“윽.”
라온은 수없이 많은 본인의 사진을 보며 입술을 떨었다.
‘이건 좀 무서운데….’
저 정도로 많은 사진을 찍었을 줄은 몰랐기에 등골 사이로 오싹한 소름이 돋아났다.
-저, 저러다가 그 광녀처럼 되는 것이니라! 지금 집착의 새싹이 나고 있느니라!
라스는 씨앗이 발아하기 직전이라며 고개를 돌렸다.
“맞네요! 머리 색이 더 짙어지셨어요.”
엔시아는 보라면서 임무를 떠나기 전의 사진을 내밀었다.
“…그런가요.”
솔직히 잘 모르겠어서 고개만 끄덕였다.
“무슨 일이지. 갑자기 금발이 진해지다니, 더 존잘이 된다는 뜻인가? 여기서 더 잘생겨지면 인간을 초월하는 건데?”
엔시아는 떡밥이 생겼다며 헤헤 웃었다.
라온은 혼자만의 세계에 빠진 엔시아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내일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차라리 잘됐군.’
엔시아에게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
“엔시아 님께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말씀만 하세요!”
그녀는 부탁이 뭐냐고 묻지도 않고, 바로 말만 하라고 외쳤다.
“혹시 이게 뭔지 아시나요?”
라온이 클라우드가 착용하고 있던 인공 팔 아티팩트를 꺼냈다.
“흐음….”
엔시아의 시선이 처음으로 라온에게서 떨어졌다.
“의수로 쓸 수 있는 아티팩트네요. 고대의 물건이 아니라, 최근에 만들었고.”
“최근이요?”
“네. 만든 방식이나, 재료가 요즘 것들이에요. 꽤 실력 있는 장인이 만든 것 같아요.”
그녀는 팔을 만든 사람이 이름 있는 사람일 것 같다며 웃었다.
“그럼 이 아티팩트를 다른 사람에 맞게 만들어 주실 수 있을까요?”
“가능해요. 다만 쉽지는 않을 것 같네요.”
엔시아가 인공 팔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혀를 찼다.
“쉽지 않다는 게 무슨 말이죠?”
“이 상태로는 쓰기 힘들어요. 착용자에게 무리를 주는 방식이라서 설계도를 아예 다시 짜야 할 것 같아요.”
그녀는 처음부터 오래 쓸 수 없게 만든 거라며 눈매를 찡그렸다.
“거기다 팔에 닿아야 하기에 자연적인 재료가 필요해요. 수급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은데….”
재료를 구하기 어렵다는 말과 달리 엔시아는 이 일에 흥미를 느낀 듯 눈동자를 반짝였다.
“그런데 이걸 쓸 사람은 누구예요?”
“리메르 님입니다.”
“네?”
엔시아가 눈을 부릅떴다.
“임무 중에 일이 좀 있었습니다.”
“…그렇군요.”
그녀는 그 이상 묻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리메르 님을 만나봐야 정할 수 있을 거 같아요.”
“알겠습니다.”
“그럼 이것 좀 가져가서 볼게요.”
엔시아는 모든 관심이 인공 팔에 쏠린 듯 먹던 빵도 챙기지 않은 채 본인의 방으로 들어갔다.
‘대단하네.’
평소에는 장난기도 많고, 존잘이라는 이상한 단어로만 부르지만, 엔시아는 본인의 일에서만큼은 누구보다 진지했다. 여러모로 배울 점이 많은 사람이었다.
라온은 조금은 난잡해진 주방을 정리한 후 방으로 돌아왔다.
똑똑똑.
씻기 위해서 옷가지를 준비하는데, 문에서 세 번의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노크를 세 번 하는 사람은 정해져 있기에 바로 들어오라고 말했다.
주디엘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와서 고개를 숙였다.
“별일 없었지?”
“지금까지는 특별한 일 없었습니다.”
“그럼 지금 생겼다는 건가?”
“예. 조금 전에 중무전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나에 관한 거겠네.”
라온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다만 다른 요구가 하나 있었습니다.”
주디엘이 짧게 고개를 저었다.
“다른 요구?”
“현무전에 관하여 알게 된 정보가 있다면 사소한 거라도 보고하라는 지시였습니다.”
“현무전….”
라온이 고개를 숙이며 눈매를 찡그렸다.
“현무전이면 데니어 지그하르트가 전주로 있는 곳이잖아.”
“맞습니다.”
“왜 갑자기 거길 조사하라는 거지?”
카룬은 오싹하리만큼 차가운 눈빛으로 알현실을 나섰다. 내게 분노를 드러낸 그가 갑자기 왜 현무전의 정보를 모으는 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데니어 지그하르트라….’
데니어가 문제를 일으키거나, 이상한 발언을 한 적은 없었다. 나나 실비아를 특별히 챙기지는 않았지만, 다른 이들처럼 무시하지도 않았다.
다만 그의 눈빛을 보고 있으면 기이하게도 데루스 로베르트가 떠올랐다.
“무슨 일인지 알아볼까요?”
“그래. 다만 조심해. 근데 이번 일은 섣부르게 접근해서는 안 될 거 같아.”
“알겠습니다. 라온 님에 대한 보고도 제가 적당히 조절해서 쓰겠습니다.”
“고마워.”
“그럼 쉬십시오.”
주디엘이 고개를 숙이고서 몸을 일으켰다.
“잠깐만.”
라온이 문으로 나가려던 주디엘을 막아세웠다.
“동생에 관한 정보는?”
“…아직 없습니다.”
주디엘은 담담한 눈빛으로 고개를 저었다.
“주군.”
그녀가 다시 몸을 돌리며 고개를 숙였다.
“이제 제 동생에 관한 조사는 그만해도 될 것 같습니다.”
“뭐?”
“암시장의 힘을 빌렸는데도 아직까지 찾지 못한 걸 보면 이미 늦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주디엘은 감정을 잃은 것처럼, 보고할 때와 별다르지 않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금액도 많이 늘어났고, 일도 복잡해질 것 같으니, 여기서 포기하는 게….”
“진심이야?”
라온은 주디엘의 가라앉은 눈동자를 보며 뇌까렸다.
“…….”
주디엘은 대답없이 손끝만 떨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예전에는 네가 내 밑에 들어왔기 때문에 네 동생을 찾아주어야겠다고 생각했어. 감정 따위는 조금도 없이 그저 너를 받아들이기 위한 조건이었지. 하지만….”
라온이 흔들리기 시작한 주디엘의 눈꺼풀을 보며 옅게 웃었다.
“지금은 진심으로 네가 동생과 만났으면 좋겠어.”
거짓이 아니다.
가족, 스승, 친구를 비롯한 인연이 무엇인지를 깨달아가고 있기에 주디엘과 했던 약속의 가치도 변했다. 지금은 무슨 짓을 해서라도 그녀의 동생을 찾아주고 싶었다.
“네가 먼저 포기하지 마.”
라온이 주디엘의 어깨를 잡았다. 힘을 주지는 않았지만, 진심이 담긴 온기는 전하고 싶었다.
“네….”
주디엘이 어깨를 떨며 고개를 숙였다. 이 방에 들어온 후 처음으로 그녀가 감정을 드러낸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주디엘은 숙인 고개를 들지 않은 채 인사를 하고서 방을 나갔다.
-네놈도 조금은 인간답게 변해가는구나.
라스는 심통이 난 듯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뿌듯해보이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난 원래부터 인간이야.’
-네놈은 겉만 인간이었지, 속은 악마보다 더 사악하지 않았더냐!
‘하긴 그간 인간답지는 않았지.’
녀석의 말대로 처음에는 암살자로 살아왔던 그림자를 벗지 못했다.
하지만 많은 사람과 만나며 전생의 그림자가 옅어지고 있었다.
‘앞으로는 더 바뀔 거야.’
-본왕이 네가 더 인간갑게 변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랴?
‘그런 게 있어?’
-세상에 안 되는 건 없느니라.
라스는 히죽 웃으며 턱을 치켜들었다.
‘그게 뭔데?’
-약속이니라!
‘약속?’
-그렇느니라. 약속을 지켜야 진짜 인간이라고 볼 수 있지. 즉! 지금 당장 본왕에게 아이스크림을 가져다 바치면… 커헉!
라온은 라스를 걷어차버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질린다….’
* * *
라온이 별관의 벽에 등을 기댄 채 민트초코 아이스크림을 한 입 먹었다.
-크으으으으!
라스는 오동통한 뺨을 부여잡은 채 솜사탕이 녹아내리는 듯한 탄성을 흘렸다.
-이게 행복이고, 이게 사는 거지! 본왕은 마계에 돌아가는 즉시 아이스크림 매장을 창업할 것이니라!
녀석은 마계 전역에 1,000개의 점포를 열겠다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건 알아서 하시고….’
라온은 다 먹은 아이스크림 상자를 내려놓으며 엔시아와 리메르가 있는 우측으로 시선을 돌렸다.
“흐으으음….”
엔시아가 충치를 앓는 듯한 신음을 흘리며 리메르를 바라보았다.
인공 팔을 만들려면 그 대상을 직접 봐야 한다고 해서 데리고 왔는데, 그녀는 리메르의 팔이 아니라 얼굴만을 바라보았다.
“잘생긴 건 맞는데, 조금 애매하네요.”
“뭐, 뭐가?”
리메르가 떨떠름한 얼굴로 눈을 깜박였다.
“라온 님이 더 잘생겨지셔서 엘프를 봐도 별로 마음에 와닿지가 않아요.”
엔시아는 조금 빛이 바랜 얼굴이라며 짧게 입맛을 다셨다.
“무슨 헛소리야!”
리메르가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났다.
“유화 가지 부족의 최고의 미남인 내가 어디가 부족해서! 아니지! 난 세이피아의 최고의 미남 소리까지 들었다고!”
그는 본인보다 잘생긴 엘프 따위는 없다며 고개를 흔들었다.
“라온 님은 대륙 1위라, 엘프 1등이 와도 안 돼요.”
엔시아는 동일선상에 놓을 수도 없다며 손가락을 흔들었다.
“거기다 장발은 제 취향이 아니에요.”
“자, 장발의 호쾌함을 모르는 네가 불쌍하네!”
리메르는 식은땀을 흘리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호쾌함은 무슨. 귀찮아서 안 자르신 게 보이는데.”
“끄어억….”
그는 갈라진 머릿결을 만지며 입술을 떨었다.
-쟤네들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나도 몰라.’
라온이 고개를 저었다. 팔을 살피라고 리메르를 데리고 왔더니, 갑자기 왜 외모 품평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거기다 중간중간 내 이름이 나와서 민망했다.
“저기.”
라온이 한숨을 내쉬고서 엔시아와 리메르에게 다가갔다.
“야. 라온. 얘 이상해! 원래도 이상했지만, 더 이상해졌어!”
리메르는 엔시아가 정말 돌아버린 것 같다며 고개를 마구 흔들었다.
“라온 님. 일단 합격이에요.”
“일단 합격?”
“네. 외모가 조금 애매하기는 했지만, 라온 님과의 친분이 있으시니, 해드릴게요.”
“야!”
리메르가 비명을 지르며 펄쩍 뛰었다.
“애매한 외모라니! 내 평생에 그런 말을 들어본 적 없어!”
“라온 님 앞에 서면 누구라도 애매해지니까. 걱정마세요.”
“이 망할 라온 바라기….”
“어머. 칭찬 고마워요.”
“칭찬 아니거든!”
본인의 외모를 자랑하는 엘프나, 그 엘프의 외모를 애매하다고 평가하는 엔시아나 정상으로 보이지 않았다.
“저기 지금 팔을 붙이려는 거 아니었나요? 왜 어깨를 안 보시고….”
“이런 작업을 할 때는 영감이 중요하거든요. 리메르 님 얼굴 정도면 딱 선에 걸친 정도라….”
“서, 선….”
리메르는 진심으로 충격을 받은 듯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내 얼굴이 선에 걸친 수준이라고?”
그는 나름 얼굴에 자신을 가졌던 듯 절망에 빠진 눈빛으로 손을 떨었다.
“어머니 부탁을 들어주실 때는 바로 해주시지 않았나요?”
라온이 인공 팔을 매만지는 엔시아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두 분은 존예에 존잘이잖아요. 물어볼 것도 없죠!”
엔시아는 존잘 존예는 하던 일도 그만두고 들어주는 게 맞다며 고개를 저었다.
“음, 알겠습니다. 어쨌든 되기는 한다는 거죠?”
점점 대화가 미궁으로 빠지는 것 같아서 빠르게 본론을 꺼냈다.
“네에! 애매하지만 라온 님을 봐서요!”
엔시아는 다시 한번 리메르를 죽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크윽….”
리메르는 이제 아예 바닥에 드러누웠다. 안색이 백지장처럼 창백해졌다.
-너무 아쉽느니라! 저 얼빠 계집이 본왕의 얼굴을 보았어야 했는데!
라스는 외모 대결을 해보고 싶었다며 미간을 찌푸렸다.
-본왕의 외모라면 네놈에게도 저런 굴욕을 줄 수 있었을 텐데!
‘난 그게 왜 분한지 모르겠다….’
라온이 고개를 저으며 리메르에게 다가갔다.
“괜찮으세요?”
“이런 굴욕은 처음이야….”
리메르가 흙을 움켜쥐며 어깨를 떨었다.
“얼굴로 밀린 적은 한 번도 없는데!”
그는 진심으로 분한 듯 이를 바득 갈았다.
“그런 거 신경 쓰지 마시고….”
“어! 그대로 계세요!”
라온이 리메르를 위로하려 할 때 엔시아가 사진기를 들었다.
찰칵!
그녀는 라온과 리메르의 사진을 찍고 방긋 웃었다.
“이야. 어중간한 사람 옆에 존잘이 서니까. 더 잘생겨 보여요! 이게 대비효과인가?”
엔시아는 사진기에서 떨어진 두 장의 사진 중 하나를 라온에게 건네주었다.
“으음….”
라온은 그와 리메르가 담긴 사진을 보고서 턱을 긁적였다. 그녀가 하도 존잘이라고 해서 그런지, 리메르가 조금 처져 보이기는 했다.
“아….”
리메르는 힘겹게 고개를 들어 사진을 보고서 해파리처럼 늘어졌다.
“죽고 싶다. 팔이 떨어졌을 때보다 더 아파. 거기서 죽을 걸!”
그는 반박할 수도 없다며 눈을 내리감았다.
“오른팔이 없어서 뒤를 닦기도 힘들고, 연금이랑 퇴직금도 안 준다고 하고, 이젠 못생기기까지….”
“대, 대주님. 힘내세요.”
라온이 리메르에게 다가가 어깨를 주물러주었다. 평소라면 무시했겠지만, 심각해 보여서 일단 위로부터 했다.
“돈이라도 빌려드려요? 아니면 드시고 싶은 거라도, 뭐든 말만 하세요.”
그 말이 끝나자마자, 리메르의 왼손이 라온의 손목을 꽉 움켜쥐엇다.
“지금 말만 하라고 했지?”
리메르가 히죽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어…?”
“그럼 나랑 여행 좀 가자. 여행경비는 물론 네가 내고.”
“예? 갑자기 어딜….”
여기서 여행경비를 따지는 그가 경악스러웠지만, 먼저 물어봐야 할 게 있었다.
“대륙에 남은 엘프들의 성지. 세이피아.”
그가 손을 저으며 씩 웃었다.
“거기에 네가 좋아할 만한 게 하나 있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