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573화 (572/653)

제573화

쿠우웅!

카룬이 거칠게 발을 굴렀다. 짜증과 분노가 그대로 담긴 울림이 본관의 정원을 뒤흔들었다.

“빌어먹을!”

그는 몇 번이고 발을 내리찍고서도 울분이 풀리지 않는 듯 이를 바득 갈았다.

“좀 참아.”

발데르가 한숨을 내쉬며 카룬의 옆으로 다가갔다.

“나도 기분 더럽지만, 이번 일은 어쩔 수 없잖아. 21살에 그랜드 마스터에 올라서 용현검주의 목을 친 놈을 안 챙겨주겠냐고.”

그는 다 알면서 왜 그러냐며 눈매를 찌푸렸다.

“기분이 더럽다?”

카룬이 발데르를 노려보며 입매를 비틀었다.

“배알도 없는 놈. 입가에 걸린 웃음이나 지우고 그딴 소리를 해.”

“어, 음…….”

발데르가 황급히 입꼬리를 매만졌다.

“그 어린놈에게 그렇게 망신을 당하고서도 정신을 못 차린 것이냐.”

“그, 그게 아니라…….”

“물론 가문의 명성이 높아지고, 신성이 떠오르는 건 좋은 일이다. 허나!”

카룬이 입술을 꾹 내리 씹은 후 말을 이었다.

“그 대상은 방계의 라온이다. 어떤 버러지의 피를 이었는지도 모르는 원숭이 같은 놈이라고!”

“으음…….”

“거기다 이제 놈은 우리의 손아귀를 벗어났어.”

“벗어나다니?”

“너나 내가 손아귀에 넣고 부릴 수 있는 놈이 아니라, 함께 가주 위를 경쟁할 적이 되었다는 뜻이다. 아직도 머리가 안 돌아가는 거냐.”

그는 글렌과 아리스가 라온을 챙겨준 상황을 다시 생각하라며 손가락으로 머리를 두드렸다.

“아, 그래서…….”

발데르도 이제야 위기감을 느낀 듯 입술을 떨었다.

“지, 지금이라도 움직이면…….”

“이미 늦었어.”

정원의 수풀 뒤에서 튀어나온 데니어가 가볍게 손을 저었다.

“뭐?”

“아버지가 라온에게 직접 검술을 가르치신다는 소문은 들어봤지? 그거 진짜야. 그것도 꽤 길게 가르치셨지.”

데니어는 연한 웃음을 흘리며 정원의 기둥에 등을 기댔다.

“전부터 경고했잖아. 아버지는 이미 라온을 후계자 후보 중 하나로 보고 있다고.”

“아, 아니! 너무 어리잖아!”

발데르는 말이 안 되는 거 아니냐며 고개를 흔들었다.

“실비아도 아니고, 라온이라니! 조카랑 가주를 경쟁해야 하는 게 말이 되냐고!”

“어려서 더 마음에 드실 수도 있지. 대륙 최연소 그랜드 마스터에 나름 협행도 쌓았잖아. 라온이 가주가 되면 우리 가문의 인기와 인지도가 상당히 올라갈걸? 난 나쁘지 않다고 봐.”

데니어가 여유롭게 어깨를 으쓱였다.

“오늘 부왕과의 생사결 이야기를 꺼내신 걸 보면 아마 내년 1월 1일에 라온을 직계로 받고 바로 후계자 후보라고 선언을 하실 거 같은데. 형은 어떻게 생각해?”

“…….”

카룬은 데니어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구겨진 눈빛만 던졌다.

“내가 라온도 아닌데, 뭘 그리 무섭게 쳐다봐.”

데니어가 픽 웃으며 등을 돌렸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괜히 라온을 건드려서 벌집을 깨우지 말라는 거야. 누님이 난동을 부리면 막을 사람 없는 거 알지? 우리 조용히 살자고.”

그는 가볍게 손을 젓고서 정원을 떠났다.

‘데니어…….’

카룬은 정원의 어둠 속으로 사라진 데니어를 보며 미간을 좁혔다.

‘무슨 생각이냐.’

*     *      *

라온은 글렌의 가라앉은 눈빛을 보며 손끝을 떨었다.

‘힘들었겠구나라….’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지만, 누구도 해주지 않았던 말. 글렌이 꺼낸 짧은 한마디는 조금 전까지 가슴을 꽉 막고 있던 검은 응어리를 녹여주었다.

‘내가 저 말을 듣고 싶었구나.’

이제야 가주전에서 글렌에게 금패와 부상을 받았을 때 그리 기쁘지 않았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지금 나는 물질적인 보상이 아니라, 정신적인 안식을 찾고 싶었던 것 같다.

‘나도 약해졌네.’

아니, 약해진 게 아니라, 이게 사람다운 걸지도 모르지.

암살자로 살았던 전생은 죽이라면 죽이고, 납치하라면 납치하는 끈 달린 인형의 삶이나 다름없었다.

평생을 목줄 달린 사냥개로 살았기에 누군가에게 배신감을 느낄 새가 없었다.

불의 고리 덕분에 세뇌를 풀고, 도망칠 준비를 하다가 데루스에게 죽임을 당했을 때도 놈을 믿지 않았기에 배신감이 찾아오지는 않았다. 그저 분노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번 삶은 달랐다. 많은 사람을 만나고, 그들 모두에게 정이자, 내 속을 나누어 주었다.

렉타르 역시 마찬가지다. 그를 할아버지처럼 여기며 검술과 인생을 배웠기에 생각지도 못하게 찾아온 배신감이 더욱 깊고 크게 속을 찔렀다.

“넌 인복이 있는 편이다.”

글렌이 차분히 시선을 돌렸다. 그는 호수를 바라보며 담담한 음성을 이어갔다.

“어린 시절 널 괴롭혔던 아이들은 진심으로 반성하며 널 받쳐줄 수 있는 수하들이 되었고, 네 스승은 널 위해 목숨을 걸 수 있는 상사가 되었지. 그들은 네가 어떤 모습이 된다고 해도 지금의 마음이 변하지 않을 거다. 별관의 이들은 말할 필요도 없겠지.”

“…….”

라온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대로 버렌과 마르타를 포함한 광풍대 녀석들은 어릴 때의 치기 어린 잘못을 말하며 용서를 구했고, 리메르는 게으름을 부리면서도 검사들 각자에게 적합한 훈련을 시켰었다.

실비아와 헬렌을 비롯한 별관의 식구들 역시 평생을 함께할 수 있는 이들이기에 인복이 있다는 말은 틀리지 않았다.

“지금 네가 힘든 이유는 정을 주고, 좋은 인연이라 생각했던 사람의 배신을 처음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처음은 힘든 법. 그게 배신이라면 더더욱 아플 수밖에 없지.”

글렌은 그 심정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음….”

라온은 멀게만 보이던 글렌의 등이 조금은 가까워진 듯한 기분을 느끼며 입맛을 다셨다.

‘예상외야.’

글렌이라면 호통만 칠 줄 알았는데, 저렇게 말로 위로를 해주실 줄은 몰랐다.

“네게 호감을 주며 다가온 이들이 항상 선할 수는 없다. 발데르처럼 겉과 속이 그대로 드러나는 녀석은 흔하지 않아.”

글렌이 발데르로 예를 들 때 그의 음성에 가는 웃음이 담긴 것 같았다.

“따라오거라.”

그가 손가락을 까딱이고서 호수를 넘어 북망산 쪽으로 걸어갔다.

평범하게 걷는 것 같은데 공간을 초월한 것처럼 나아가서 보법을 밟아도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글렌은 북망산 초입에 있는 널찍한 공터에서 걸음을 멈췄다.

트득.

그는 수풀에서 작은 나뭇가지 하나를 꺾은 후 라온에게 턱짓을 했다.

“검을 뽑아라.”

“예?”

“머리가 복잡할 때는 아무 생각도 없이 몸을 움직이는 게 좋은 법이지.”

글렌이 나뭇가지를 들어 검처럼 겨누었다.

“네가 무슨 뜻을 품고, 그랜드 마스터에 올랐는지 보여 보거라.”

“음….”

라온이 제천검의 검병을 꽉 움켜쥐며 글렌이 들어 올린 나뭇가지를 바라보았다. 밤바람에 나뭇잎 몇 개가 흔들거렸다.

‘대련을 해주신다는 건가.’

글렌의 가르침은 여러 번 받아보았지만, 그와 검을 나눈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기연 중에서도 기연이었다.

“머리를 비우라고 하셨으니, 전력을 다해도 되겠습니까?”

“그게 아니라면 의미가 없지.”

“그럼….”

라온이 떨리는 손으로 제천검과 진혼검을 뽑아 들었다.

“바로 가겠습니다.”

두 검을 역수로 잡아서 땅에 박아넣으며 심상의 세계를 개방했다.

하단전에서 일어난 열기와 냉기가 단숨에 중단전을 치고 올라와 상단전에 이르렀다.

시야가 새하얗게 물들며 이전까지의 검계보다 한층 더 단단하고 날카로워진 심상이 세계를 향해 뻗어 나왔다.

등 뒤로 이질적인 금빛 태양과 은색의 달이 떠오른다.

오른손에 움켜쥔 신검에 태양의 금빛이 스며들었고, 왼손에 솟구친 마검에서 은색의 달빛이 여물었다.

그랜드 마스터에 오르며 성장한 상단전 덕분에 신검과 마검에도 새로운 변화가 깃들었다.

“보기에는 그럴싸하구나.”

글렌이 담담한 입매를 드러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거라.”

라온은 글렌의 말을 불씨 삼아서 글렌의 정면으로 뛰어들었다.

바닥에 깔린 잔디가 뽑혀 나갈 정도의 속도로 나아가 신검의 불꽃과 마검의 서리를 쏟아부었다.

쌍검술의 묘리를 휘감은 두 자루의 검이 꺾여서 떨어지며 강대한 파동을 일으켰다.

스으으으!

글렌은 눈앞을 가득 메운 불꽃과 서리를 향해 아이도 부러뜨릴 수 있을 듯한 얇은 나뭇가지를 내밀었다.

쿠와아아아아앙!

어마어마한 폭발이 연쇄적으로 터지며 주변의 수풀과 나무가 비명을 질렀지만, 글렌이 쥐고 있는 나뭇가지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든 광경이었다.

“위력 하나는 봐줄 만하군. 계속해 보거라.”

“예!”

라온이 왼발을 구르며 글렌의 좌측을 파고들었다.

‘평범한 공격은 통하지 않아.’

글렌의 방어를 정면에서 뚫어내는 건 무리다. 그가 방어할 수 없는 곳을 노려야 했다.

치이이잉!

태화삼보를 밟았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글렌의 우측 후방으로 이동하여 적섬과 서리연을 동시에 뻗어냈다.

시뻘건 열선과 푸른 칼날이 글렌의 사각을 노리고 시간 차로 나아갔다.

“생각을 멈추는 순간 싸움도 끝나는 법이지.”

글렌은 옅게 웃으며 나뭇가지를 모로 세웠다. 그가 가볍게 휘젓는 나뭇가지가 먼저 나아간 적섬을 쳐내고, 그 뒤를 파고든 서리연의 두 가지 칼날을 차단했다.

‘뭘 어떻게 하셨는지도 모르겠어.’

그에게만 시간이 따로 흐르는 것 같았다.

라온이 입술을 씹으며 태화보를 운용했다. 공간을 접어서 나아가 글렌의 코앞에서 신검과 마검을 찔러넣었다.

칼끝에 어린 불꽃과 서리가 만화경처럼 펼쳐지며 글렌의 전신을 휘감았다.

만화공 천화.

적섬삼십육결.

일검에 삽십육방을 찌르는 검격을 두 자루의 검으로 운용했다. 총 칠십이 방위를 동시에 노리는 괴랄한 검격이 글렌의 전신 급소를 노리고 뻗어나갔다.

“두 손을 놀리는 게 여유로워졌구나. 속도와 위력 모두 발전했어.”

글렌은 이전에 혹평했던 검술을 짧게 칭찬하고서 나뭇가지를 흔들었다.

연하지만 굳건한 바람이 퍼져 나와 적섬삼십육결의 흐름을 단숨에 꺾어 버렸다.

쿠구구구구!

라온은 육체만이 아니라, 영혼까지 밀어내는 듯한 바람에 밀려나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고 다리에 힘을 주었다. 신검과 마검은 내 의지에 호응하듯 더 짙은 불꽃과 서리를 피워냈다.

쩌어어어엉!

다시 한번 글렌의 정면 공간에 들어가 나뭇가지를 향해 신검과 마검을 쳐올렸다.

대지를 긁으며 솟구친 두 자루의 칼날이 나뭇가지의 양 끝을 후려쳤다.

하지만 전력을 다 쏟아내고 있음에도 글렌이 쥔 나뭇가지는 흔들리지 않았다.

“조금 거칠게 해볼까.”

글렌이 손목을 가늘게 틀었다. 나뭇가지에서 붉은 뇌전이 솟구치며 신검의 불꽃과 마검의 서리를 짓눌렀다.

빠지지지직!

하지만 불꽃과 서리는 지독한 뇌기에 일방적으로 밀리면서도 자신만의 빛을 잃지 않았다.

“그랬군.”

글렌은 신검과 마검을 굽어보며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눈빛이 은은하게 반짝이는 것 같았다.

“네 선택은 꺾이지 않는 것이었군. 절대 부러지지 않는 검이었어.”

그는 몇 번 검을 나눈 것만으로 내가 어떤 의지를 가지고 그랜드 마스터에 올랐는지를 알아차렸다.

“그렇다면 더 제대로 덤벼라, 네 불꽃이 꺼지지 않도록.”

“물론입니다!”

라온이 기합을 터트리며 달려들었다. 신검이 나아간 궤적을 마검으로 따라잡으며 붉고 푸른 빛의 강환을 일으켰다.

쿠와아아아아아!

찬란한 빛을 일으키는 두 개의 광환이 글렌에게 뻗어나갔다. 그는 대지가 거칠게 깎여나가는 강대한 힘의 파동 앞에서 옅은 미소를 흘렸다.

“검술에 대한 정리도 어느 정도 이루었고.”

글렌은 아이가 장난을 치듯 가볍게 나뭇가지를 내리그었다. 가늘게 흔들리는 나뭇가지의 끝에서 붉은빛의 파동이 일어나 두 개의 광환을 막아섰다.

콰아아아아아앙!

신검과 마검이 세웠던 강환은 글렌에게 닿지도 못한 채 흔들리는 나뭇잎 앞에서 녹아내렸다.

‘역시.’

이런 상황을 예측하고 있었기에 숨을 내뱉고서 다시 두 검을 들어 올렸다. 글렌에게 한발 다가가 신검으로 염룡결을 운용하고, 마검으로 화령을 일으켰다.

쿠와아아아아!

푸른빛의 화령으로 글렌의 뒤를 막아선 순간 염룡결을 내질렀다.

금색으로 물든 불꽃을 본 글렌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나뭇가지를 뻗어냈다.

쿠와아아아아!

화룡의 포효는 나뭇잎이 그린 궤적을 뚫지 못하고 허무하게 사그라들었다.

치이이잉!

라온은 염룡결의 열기가 아지랑이가 되어 솟구치는 틈을 이용하여 글렌의 우측으로 들어섰다.

그에게 근접하여 신마조화결의 마지막 칼날을 들이밀었다.

라온 지그하르트류 검식.

제6형 신마조화결 연계기 청홍무적검.

하늘과 땅을 가르는 화염과 서리의 휘광이 글렌을 뒤덮었다.

“좋은 검이다.”

글렌은 처음으로 은은한 탄성을 흘리며 나뭇가지를 세웠다.

나뭇가지의 중심에서부터 솟구친 붉은 뇌전이 청홍무적검의 흐름과 정면에서 부딪쳤다.

쩌어어어어어엉!

무시무시한 뇌기와 불꽃 그리고 서리가 경합하며 지축을 뒤흔들었지만, 글렌이 발을 딛고 있는 대지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다만 그가 쥐고 있던 나뭇가지에서 나뭇잎 한 장이 팔랑거리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하….”

라온이 헛웃음을 흘리며 주저앉았다.

‘고작 나뭇잎 하나인가.’

최선을 다한 결과가 나뭇가지에 붙어 있던 나뭇잎 하나라니, 웃음만 나왔다.

-고작 나뭇잎 하나가 아니니라.

‘그게 무슨 말이야?’

-네 나름대로 해냈다는 뜻이니라.

‘응?’

라스는 의외로 비웃지 않고, 정확한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흠….”

글렌은 떨어진 나뭇잎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수풀로 향했다. 그가 꺾었던 나뭇가지를 본래 있던 곳으로 가져가 손가락을 비비자, 나뭇가지가 처음부터 꺾이지 않은 것처럼 자연스럽게 붙었다.

“그, 그건….”

부러뜨렸던 나뭇가지가 다시 붙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기에 나도 모르게 입이 벌어졌다.

“죽일 수 있는 검이 있으면 살릴 수 있는 검도 있는 법이지. 나도 깨우친 건 얼마 되지 않았으니, 그리 놀랄 것 없다.”

글렌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간 나뭇가지를 가볍게 두드리고서 라온을 바라보았다.

“그래. 속은 좀 풀렸느냐.”

“예? 아, 네….”

라온이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완전히 잊고 있었어.’

글렌과 대련을 하는 동안 렉타르에 관한 것을 잊었고, 답답했던 가슴도 평소대로 돌아간 듯 시원해진 기분이었다.

“너는 너무 생각이 많다. 가끔은 머리를 비워줄 필요가 있어.”

“명심하겠습니다.”

“정리가 되었다니, 하는 말인데.”

그가 짧게 혀를 차며 밤하늘을 올려보았다.

“렉타르 그자는 내가 보기에도 배신 같은 걸 할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글렌은 조금은 아쉽다며 고개를 저었다.

“저기….”

라온이 글렌을 보며 짧게 손을 들어 올렸다.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뭐지?”

“사실….”

렉타르가 했던 일들과 상황을 말해주었다.

“그런가.”

글렌은 헛소리라고 하지 않고, 잔잔하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일단 알아두겠다. 하지만 그가 우리의 적이라는 점은 변하지 않아.”

“알고 있습니다.”

“그럼 되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서 등을 돌렸다.

“이만 가보도록 하지.”

“오, 오늘 감사합니다.”

라온은 진심을 담아서 글렌에게 고개를 숙였다.

“네가 이번 임무에서 이룬 실적에 대한 보상일 뿐이다.”

글렌은 조금은 냉정한 음성을 흘리고서 본관이 있는 방향으로 떠났다.

“하아아….”

라온은 글렌의 모습이 사라지고 나자마자, 땅바닥에 누우며 시원한 숨을 내뱉었다. 방에서 누울 때보다 딱딱했지만, 마음은 편했다.

“좋네.”

*     *      *

글렌은 그대로 가주전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북망산의 중턱에 솟구친 나무에 등을 기댄 채 라온을 지켜보고 있었다.

“힘들겠지.”

라온은 본인이 왜 힘들고 괴로운지도 잘 모르고 있었다.

저 아이는 냉정한 척하지만, 사람들에게 많은 정을 나눠주며 커왔기에 렉타르에 대한 배신감이 더 깊고 크게 다가왔을 것이다.

‘모든 사람은 선하지 않다. 그리고 모든 이가 악하지도 않지.’

라온이 배신감에 다른 사람들을 멀리할까 봐 이런 자리를 만들었는데, 나름 잘 토한 것 같았다.

‘너라면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글렌은 라온의 발밑에 떨어져 있는 나뭇잎 하나를 보고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그건 그렇고….’

대단한 검계를 만들어냈군.

직접 본 라온의 검계는 기대 이상이었다.

위력과 내구력, 유지력이 굉장히 뛰어났고, 가장 큰 장점은 아직도 미완성이라는 점이다.

‘아니, 미완성이라기보다는 성장한다고 봐야겠지.’

라온의 검계는 그의 심상을 그대로 담아냈다. 상단전이 성장할수록 검계도 함께 성장한다는 뜻. 라온의 검계는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었다.

실제로 라온의 검계는 대련을 하는 중에도 성장했다.

라온의 힘을 예측하여 적당한 의념으로 본래의 형상을 유지시켰던 나뭇가지의 잎이 한 장 떨어진 게 그 증거였다.

‘그리고….’

글렌이 눈을 내리감았다.

‘그 황금색 불꽃.’

라온의 검에 비쳤던 불꽃은 붉은색 속에 옅은 금빛을 담아내고 있었다. 지그하르트가 걸어온 긴 역사 속에서도 오직 한 번만 모습을 드러냈던 금색의 불꽃. 초대 가주의 불길이 라온의 영혼에 스며들어 있었다.

“네게 어울리는 길은 패도가 아니다.”

글렌이 느릿하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세상의 악의도, 오욕도 내가 가져가마. 라온. 너는….”

그는 애틋함이 담긴 붉은 시선에 라온을 담으며 미소를 그렸다.

“곧은 길을 가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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