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72화
“크으윽!”
카룬은 아리스를 노려보기만 할 뿐 다시 입을 열지 못했다. 입술을 씹고 있는 것을 보면 분함을 억지로 참고 있는 것 같았다.
“누님….”
데니어가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그는 제발 참아달라고 중얼거리며 두 손을 모았다.
“흡!”
발데르는 본인에게도 불똥이 튈까 봐 입을 꼭 다문 채로 정면만을 바라보았다.
“지금부터 너희들 주둥아리가 열리는 순간 나랑 생사결 뜨는 거야. 알겠어?”
아리스가 카룬, 데니어, 발데르를 차례로 가리키며 턱을 모로 틀었다.
“으음….”
무력으로는 손꼽히는 전주들도 초월자와 생사결을 뜨고 싶지는 않은지 모두 입을 다물었다.
아리스는 동생들의 말문을 틀어막은 후 다시 라온의 옆으로 돌아갔다.
“내가 내 조카를 조카라고 부르겠다는데, 불만이 있는 사람은 나와. 얼마든지 받아줄 테니까.”
그녀는 전주들만이 아니라, 다른 간부들에게도 할 말 있으면 하라는 듯 손가락을 까딱였다. 당연히 손을 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없지? 그럼 앞으로 이모 소리를 막는 인간은….”
“저기 아리스 님.”
라온이 아리스의 말을 막으며 단상 위를 가리켰다. 글렌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손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아리스 지그하르트.”
글렌이 공허함이 차오른 눈빛으로 아리스를 굽어보았다.
“나이를 먹어도 천둥벌거숭이 같은 점은 변하지를 않는구나.”
“후우, 이럴 줄 알았어.”
아리스가 낮은 숨을 내뱉고서 시선을 들어 올렸다.
“직계와 방계를 나눈 이유는 저도 알고 있어요. 필요하다고도 생각하고. 하지만 상황이 바뀌었잖아요.”
그녀는 글렌에게도 지기 싫은 듯 당당하게 허리를 폈다.
“라온은 본래 직계에 속해있어야 하는 아이고, 스스로 직계에 설 자격이 있다고 증명을 했잖아요.”
아리스가 글렌에게 한 발 더 다가가며 목소리를 높였다.
“21살에 그랜드 마스터에 오르고, 성검련주 제자의 목을 따고, 용현검주마저 베어버린 실적이라면 외부 인원도 직계에 올려줄 만한데 왜 라온에게만 이렇게 엄한 건데요!”
“아, 아리스 님!”
라온이 아리스를 말리려고 손을 뻗었지만, 그녀는 오히려 더 앞으로 나아갔다.
“라온이 다른 곳으로 빠져나가면 어쩌려고 이래요. 육황오마 신주오령 전부 다 두 팔 벌려서 환영할 텐데, 나중에 놓치고 후회하시려고?”
아리스는 라온을 돌아보며 안타까운 눈빛을 드러냈다.
“물론 저 아이가 지그하르트를 떠나지는 않겠지만, 이룬 위업과 능력에 따른 대우는 해주는 게 맞잖아요!”
그녀는 할 말을 다했다는 듯 시원하게 콧김을 뿜었다.
“네 말도 일리는 있다.”
글렌이 아리스를 보며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네가 광풍부대주보다 더 나대서 이곳에 있는 이들은 그가 무엇을 이루고 왔는지 아직 듣지 못했다.”
“으음….”
아리스도 본인이 광풍대보다 더 앞서 나간 게 민망한 듯 머리를 긁적이며 뒤로 물러섰다.
“라온 지그하르트.”
“예.”
“네 입으로 광풍대가 무엇을 했는지 말해보아라.”
“알겠습니다.”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고서 앞으로 나왔다.
“저희는 시니건 지부에 도착했을 때부터 라키온 가문을 의심했습니다. 무너진 지부에서 발견된 시체들을 자세히 살피면 백혈교의 짓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는데….”
시니건 지부를 찾아갔을 때부터 용현검주를 벨 때까지의 일을 알현실에 있는 모두에게 말해주었다.
“저, 전장에서 무아지경에 빠졌다고?”
“미쳤어. 아니, 미쳐서 저 경지까지 올라간 건가?”
“무슨 어린놈이 간땡이가….”
“우리 쪽에 오지 않아서 다행이야. 감당 못 할 녀석이다.”
“성검련주의 제자에 용현검주까지. 이번에도 위업을 세우고 돌아왔군….”
간부들은 라온과 광풍대가 이룬 업적 하나하나에 감탄하며 헛바람을 흘렸다.
“고럼! 저 미친 녀석은 나만 감당할 수 있다고.”
리메르는 간부들이 탄성을 흘리는 모습을 즐기듯 싱긋 웃었다.
“훌륭한 성과다.”
글렌이 턱을 괴고 있던 손으로 입을 가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라키온 가문의 죄악을 밝혀내고 악행을 막은 것도, 성검련주의 제자와 용현검주를 벤 것도, 어린 나이에 그랜드 마스터에 오른 것까지. 무엇 하나 흠결 잡을 수 없는 위업이다.”
그는 인정한다고 말하며 라온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입을 가리고 있는 손이 바들바들 떨리는 것처럼 보였다.
“가주님.”
라온이 앞으로 나와서 고개를 숙였다.
“라키온 가문의 죄악을 밝힐 수 있게 된 이유는 이 아이 때문입니다.”
도리안과 함께 있던 시을렌을 옆으로 불렀다.
“시을렌이 두 번이나 용기를 내주지 않았다면 라키온 가문은 속내를 숨기다가 마지막에 저희의 뒤를 쳤을 겁니다.”
라온은 시을렌의 등을 두드리며 연한 미소를 지어주었다.
“아….”
긴장감에 창백해졌던 시을렌의 안색에 붉은빛이 돌아왔다.
“그렇겠지.”
글렌이 시을렌을 보며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이지만 목소리가 부드러워진 것 같았다.
“저, 저기!”
시을렌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부탁드리고 싶은 게 이, 있습니다!”
아이는 입술을 깨문 채로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그런 예의는 차릴 필요 없다. 일어나거라.”
글렌이 가볍게 손을 젓자, 시을렌의 머리가 자연스럽게 들렸다.
“부탁이 무엇이지?”
“제, 제가 라키온 가문을 운영할 수 있게 해주세요!”
시을렌은 병상에서 라온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읊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게, 지그하르트의 힘이 되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글렌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라온을 바라보았다.
“라키온 가문의 생존 인원은?”
“기존 인원의 5분지 2가량 됩니다. 무력 자체는 그리 뛰어나지는 않지만, 가문에 대한 충성심은 높습니다.”
라온은 시을렌의 힘이 되어주기 위해서 남은 인원들이 쓸만하다는 것을 강조했다.
“가문을 운영하는 건 어린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글렌이 다시 시을렌을 보며 눈매를 살짝 찌푸렸다.
“아….”
“다만.”
시을렌의 표정이 굳어질 때 글렌의 말이 이어졌다.
“가족에게 고문당하면서도 스스로의 의지를 세웠다면 어린아이라 볼 수도 없지.”
그가 시을렌의 흔들리는 눈빛을 마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지켜보도록 하겠다.”
“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시을렌이 쿵 소리가 나도록 바닥에 이마를 박았다.
“그, 그만 일어나.”
라온은 굼벵이처럼 허리를 펴지 않는 시을렌을 억지로 끌고 왔다.
“그럼 다 된 거죠?”
아리스는 일이 잘 풀린 게 기쁜 듯 환히 웃으며 손을 저었다.
“라키온 가문도 해결되었고, 라온도 이제는 내 조카가 되어서….”
“그건 아니다.”
글렌이 아리스에게 시선을 돌리며 고개를 저었다.
“예에?”
아리스가 어이가 없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적당히 좀 해요! 직계, 방계가 뭐 별거라고!”
“직계가 될 수 있는 업적을 세웠다고 해도, 현재 광풍부대주는 방계의 위치에 있다. 직계가 되기 전까지 그 호칭을 허용할 수 없다.”
글렌의 눈빛이 어둑하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아리스 지그하르트. 네게 현재 직위가 없다고 해도, 넌 지그하르트의 가장 높은 곳에 이름을 새기고 있다. 솔선수범을 보여야 할 네가 규율을 어긴다면 다른 이들이 무어라 생각하겠느냐.”
“으음….”
아리스는 답답하지만 틀린 말이 아니라 생각했는지 반박하지 못하고 인상만 구겼다.
“이모 소리를 듣고 싶다면 라온이 직계에 오른 이후에 하도록 해라.”
“그럼 직계는 바로 올려주시는 거죠?”
“그것도 아니지.”
“아, 왜요!”
그녀는 발을 크게 구르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그가 직계에 오르는 시점은 내년 1월 1일이다.”
“1월 1일?”
아리스가 무슨 말이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맞습니다.”
라온이 아리스의 옆에 서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주님께서 내년 부왕과의 생사결에서 승리하면 어머니를 바로 직계로 올려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부왕….”
아리스가 라온을 보며 눈매를 찌푸렸다.
“부왕은 쉬운 상대가 아니야! 죽을 수도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라온이 담담하게 웃었다. 부왕을 직접 만나서 검을 나눠보았기에 그가 얼마나 강한지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상황이 바뀌었다고 스스로 정했던 바를 깨고 싶지는 않습니다. 부왕을 꺾고, 가문의 이름을 드높여서 제힘으로 어머니를 직계의 위치에 올려드리고 싶습니다.”
라온은 글렌과 정했던 맹세를 이곳에 있던 모두에게 선언하듯이 내뱉었다.
“크윽….”
“…….”
카룬은 그 약속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인상을 구겼고, 데니어는 인형이라도 된 듯 무표정으로 라온을 바라보았다.
“호오!”
발데르는 그 당당함이 마음에 들었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끄아악!”
아리스가 비명을 지르며 라온을 꽉 끌어안았다.
“어떻게 해! 너무 착하잖아! 우리 집안에서 어떻게 이런 애가 튀어나왔지?”
그녀는 실비아의 아들답다고 말하면서 라온에게 뺨을 비볐다.
“크흠!”
글렌이 아리스에게 떨어지라는 듯 크게 헛기침했다.
“너무 기특하잖아요!”
아리스는 글렌의 섬뜩한 기세도 무시한 채로 라온을 더 세게 끌어안았다.
“자중해라!”
“아, 왜 이래요!”
글렌은 인상을 찌푸리다 못해 의념을 이용하여 라온과 아리스 사이를 갈라놓았다.
리메르와 로엔은 글렌의 일그러진 표정을 보며 서로 눈을 마주쳤다.
‘지금 가주님 이모 소리 듣는 거랑 끌어안는 게 부러워서 저러는 거죠?’
‘허허허.’
* * *
라온은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되었을 때 다시 글렌의 앞으로 나갔다.
“아직 드리지 못한 말씀이 있습니다.”
“못한 말?”
“예. 용현검주를 베고, 정비하고 있을 때 다른 성검련의 인물이 습격을 해왔습니다.”
“그게 누구지?”
“후우….”
짧게 한숨을 내쉬고서 눈을 감았다. 사막의 모래처럼 건조했던 렉타르의 눈을 떠올리며 입술을 뗐다.
“혈검주 렉타르. 저희가 검귀라 불렀던 인물입니다.”
검귀 렉타르의 이름이 나오자, 조금 분잡했던 가주전이 다시 침묵으로 가라앉았다.
“…그가 성검련 소속이었다고?”
글렌도 렉타르의 일은 예측하지 못한 듯 처음으로 눈을 부릅뜬 모습을 보였다.
“그렇습니다.”
라온 역시 아직도 잘 믿기지 않았기에 입술을 깨문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을 성검련의 혈검주라 칭하며 공격을 해왔습니다.”
“…….”
글렌은 확실한 답을 듣고 눈을 내리감은 채 옥좌에 등을 묻었다. 그의 얼굴에 갑자기 피곤이 차오른 듯 보였다.
“거, 검귀가 성검련?”
“검귀는 초월자잖아! 성검련에 초월자가 늘었다고?”
“미친….”
“대체 왜 성검련에 들어간 거지?”
“들어간 게 아니라, 처음부터 성검련이라고 했어.”
“이해할 수가 없어. 그럼 왜 선행을 베풀고 다닌 건데!”
간부들 역시 검귀가 성검련에 속해 있다는 소식을 듣고서 안색이 창백하게 질려갔다.
“그가 네게 무어라 했지?”
한참 후에 눈을 뜬 글렌이 물었다.
“용현검주와 클라우드가 죽었으니, 저를 데리고 가면 성검련주도 만족할 거라고 했습니다.”
“납치하려 한 건가?”
“예. 아리스 님이 제때 와주셔서 막았지만, 절 데려가려 했습니다.”
“흠….”
글렌이 아리스를 잠시 바라보고서 눈매를 좁혔다.
“검귀 렉타르는 우리의 적이라는 뜻이로군.”
“그건….”
글렌은 어딘가 모호한 말을 꺼냈다. 바로 대답하지 않고, 렉타르의 눈동자와 그가 보여준 검술을 다시 떠올려다.
‘그가 내게 무언가를 전하려고 한 건 맞아. 하지만….’
성검련의 소속이라는 것도 변하지는 않지.
‘다른 의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은 여기서 할 게 아니야.’
렉타르를 보면서 혼자서 느꼈던 부분은 이런 공적인 자리에서 꺼낼 게 아니었다.
“맞습니다. 적입니다.”
라온은 글렌을 보며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하나 더 흑탑과 성검련, 백혈교가 동맹을 맺은 것 같습니다.”
“동맹?”
“예. 용현검주와 렉타르의 말을 떠올려보면….”
글렌과 간부들에게 용현검주의 발언을 통해 예측했던 바를 들려주었다.
“봐! 이렇게 정보도 물어오는 애를 왜 방계로 놔두냐고!”
아리스는 아직도 직계에 올리지 못한 게 아쉬운지 정보력도 탁월하다며 칭찬했다.
“수고했다. 많은 것을 가져왔군.”
글렌이 고개를 끄덕이며 손짓을 하자, 로엔이 넓은 판을 들고 단상 위로 올라갔다.
“라온 지그하르트. 앞으로 올라오라.”
“예.”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고서 단상 위에 올랐다.
“라키온 가문의 악행을 멈추고, 성검련주의 제자와 용현검주를 죽인 위업을 높게 사 금패와 부상을 내리겠다.”
글렌은 로엔이 들고 있던 판에서 금패와 적빛 상자를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라온은 금패와 상자를 받으며 고개를 숙였다. 다만 평소와 달리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다.
‘지금 바라는 건 이런 보상이 아니었으니까.’
라온은 가슴에 차오른 씁쓸함을 드러내지 않은 채 단상을 내려갔다.
* * *
광풍대와 간부들이 떠난 후 고요해진 가주전.
“에휴.”
리메르가 기둥에 등을 기댄 채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좋은 기회였는데, 그냥 받으시지!”
“무슨 말이냐.”
생각에 잠겨 있던 글렌이 느릿하게 시선을 돌렸다.
“무슨 말이겠어요. 당연히 라온이죠. 아리스가 나서줄 때 바로 직계에 올리면 좋았잖아요!”
리메르는 답답하다면서 왼손으로 본인의 가슴을 두드렸다.
“카룬, 발데르도 아리스한테 쫄아서 다 입을 다물었는데, 이런 기회가 또 어디에 있다고.”
“말했지 않느냐. 그 아이와 내가 먼저 약속한 게 있다고.”
글렌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거기다 아리스의 힘을 빌려서 직계에 바로 오르는 건 좋은 판단이 아니다. 그 아이가 스스로의 힘으로 직계의 위에 서야 실비아와 별관에 있는 이들도 편히 지낼 수 있다.”
그는 가라앉은 눈빛으로 리메르를 바라보았다.
“지금 라온을 직계에 올린다면 그 아이가 했던 위업은 가라앉고, 아리스의 입김으로 직계에 올랐다고 불만을 내뱉는 이들이 늘어날 것이다.”
글렌은 이미 모든 미래를 그려본 듯 본인의 판단에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허허허.”
로엔이 가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 생각도 같습니다. 만약 오늘 라온 님이 직계에 오르셨다면 그랜드 마스터에 오른 위업보다도 아리스 님과 친하다는 게 더 부각 되었을 겁니다.”
그는 라온이 부왕과의 대결로 직계에 오르는 게 나을 것 같다며 웃었다.
“거기다….”
글렌이 어금니를 바득 씹으며 매서운 시선을 세웠다.
“그 아이가 직계가 되어서 처음으로 불러야 하는 단어는 이모가 아니라, 할아버지다! 이모 소리가 먼저 나오는 꼴은 절대 못 봐!”
그는 이것만큼은 양보할 수 없다며 아리스가 서 있던 공간을 노려보았다.
“하….”
리메르가 눈을 내리감은 채 고개를 저었다.
“진짜 저 모습을 앞에서 좀 보여주지. 그럼 다 끝났을 텐데!”
그는 안타깝다며 고개를 저었다.
“허허허.”
로엔도 이번에는 리메르의 말에 공감하는 듯 부드럽게 웃었다.
“너는 어떻게 할 것이냐.”
글렌이 미간을 찌푸린 채로 리메르에게 시선을 던졌다.
“글쎄요.”
리메르가 입맛을 다시며 머리를 벅벅 긁었다.
“아직은 잘 모르겠네요. 어떻게 해야 할지….”
그는 지금도 결정을 내리지 못한 듯 고개를 저었다.
“다만 그보다 중요한 게 있습니다.”
“그게 뭐지?”
“저 연금이랑 퇴직금은 얼마나 나와요? 그걸 알아야 결정을 내릴 수….”
리메르가 히죽이며 말을 할 때 글렌이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빠지지지직!
리메르의 머리 위에서 뇌전의 우악스럽게 타올랐다.
“아니, 그냥 해본 소리예요! 장난이라고!”
“후….”
글렌도 차마 환자인 리메르를 후려 패지는 못하고, 인상만 구긴 채 벼락을 지웠다.
“일단 고향에 좀 다녀오려고 합니다.”
“고향?”
“예. 이제 이 검도 돌려줘야 하니까.”
리메르는 허리춤에 차고 있는 검을 툭 쳤다.
“그렇군.”
글렌이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리메르가 어떤 선택을 해도 받아줄 모양새였다.
“좋다. 바람이나 쐬고 오도록.”
그는 그 말을 하고서 옥좌에서 일어서 단상을 내려갔다.
“어디 가세요?”
리메르의 물음에 글렌이 담담하게 고개를 저었다.
“가야 할 곳에.”
* * *
“…그렇게 되었어요.”
라온은 별관으로 돌아와서 실비아에게 그간의 사정을 모두 말해주었다.
“그랬구나.”
실비아는 라온을 보며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렉타르 님이 널 잡을 수 있으면서도 놓아줬다고 했지?”
“그런 거 같아요.”
“그럼 네게 전해야 할 게 있다는 건 맞는 것 같네.”
그녀가 담담한 안색을 유지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 말했지. 그분은 네 아빠와 관계가 있어 보인다고.”
“그러셨죠.”
“그분 역시 너와 네 아빠의 관계를 알기에 그곳까지 찾아오셨을지도 몰라. 앞으로 조심하라는 경고가 아니었을까?”
“경고….”
확실히 렉타르 덕분에 성검련, 흑탑, 백혈교가 연합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셋 모두가 날 노린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다만 이건 내가 좋게 생각해서 말한 것일 뿐이야. 실제로는 어떨지 모르니까 조심하렴.”
“그렇죠.”
라온이 실비아의 손을 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생 많았어. 그만 가서 쉬렴.”
실비아는 안색에 피곤함을 담고 있으면서도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어머니도 쉬세요.”
라온이 실비아에게 고개를 숙이고서 그녀의 방을 나섰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서 바닥에 주저앉았다.
“하아….”
피곤하네.
렉타르의 일 때문에 아직도 마음의 정리가 되질 않았다.
차라리 확실한 배신이면 정신을 차렸겠지만, 렉타르가 지닌 뜻을 모르기에 함부로 마음을 정할 수가 없었다.
-흐음….
라스가 고민에 빠진 라온을 보며 눈매를 찌푸렸다.
-이건 인간성이 충만한 본왕도 잘 모르겠느니라.
녀석은 인간은 참으로 복잡하다며 혀를 찼다.
“그러게.”
라온은 침대에 가지 않고, 바닥에 드러누운 채 한숨을 내쉬었다.
“인간관계란 정말 복잡해.”
짧게 불평을 내뱉을 때 창문에 큼지막한 그림자가 차올랐다.
시선을 들어 올리니, 매서운 안색을 드러낸 글렌이 나오라는 듯 손짓을 보냈다.
“헉….”
라온이 벌떡 몸을 일으키고 바로 밖으로 나갔다.
‘알현실에서 주지 못한 보상을 주시는 건가?’
글렌은 가주전에서 준 보상이 모자라다며 밤에 찾아와서 추가적인 보상을 내민 적이 많았다. 이번에도 그 의도로 오신 것 같았다.
다만 지금 필요한 건 물질적인 보상보다 마음의 안정이었기에 글렌을 따라가면서도 큰 기대감은 들지 않았다.
조금 힘이 빠진 걸음으로 별관의 호수에 다가갔을 때 글렌이 뒤를 돌았다. 그는 이쪽을 보며 잔잔하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힘들었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