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570화 (569/653)

제570화

라온은 렉타르가 떠난 방향을 보며 입술을 질겅 씹었다.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어.’

렉타르는 무언가를 전하고 싶어하면서도, 전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 같았다. 말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미친 소리지만, 정말 그렇게 느껴졌다.

사막처럼 메말랐다가 결국 물기를 드러냈던 눈빛, 아리스와 전투를 치르면서도 검술 지도를 할 때처럼 만검의 흐름을 보여주는 방식을 생각해보면 그는 끝맺음을 내지 못했던 가르침을 마치기 위해서 이곳에 찾아온 듯했다.

‘내가 생각해도 정신 나간 소리네.’

성검련 소속임을 밝히고 나를 납치하겠다고 했던 렉타르가 검술 지도를 위해서 이곳에 왔다니, 스스로 생각해도 허황된 이야기였다.

하지만 나름 냉철하다고 생각했던 내 이성은 계속해서 그쪽으로 손을 뻗었다.

‘이게 자기합리화인가.’

렉타르의 배신을 믿고 싶지 않기에 내 정신이 억지로 좋은 쪽으로 생각하는 것 같기도 했다.

“후우….”

라온은 머릿속에 차오른 혼란을 한숨으로 뱉어낸 후 아리스에게 다가갔다.

“괜찮으세요?”

“그 영감탱이. 제 실력을 안 냈어.”

아리스가 검집에 검을 넣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예?”

“검귀 말이야. 마음먹었다면 내 팔 하나쯤은 날릴 수 있었는데, 적당히 하다가 물러났다고.”

그녀 역시 렉타르가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조금 무시했었는데, 역시나 대륙은 넓네.”

아리스는 푸른빛을 되찾는 하늘을 보다가 무너진 가주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아군처럼 친근하게 서 있는 멀린을 보며 검집을 톡톡 두드렸다.

“도와준 건 고맙지만, 결국 너도 내 조카를 노리는 거지?”

“그런데?”

멀린은 아리스와 눈을 마주치며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와, 납치범이 저렇게 당당한 건 처음 보네.”

아리스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물론 지금은 아니야.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그럼 왜 검귀를 방해한 건데?”

“내 걸 남이 가져가면 열 받잖아.”

멀린은 당연한 걸 왜 묻냐는 듯 가볍게 손을 저었다. 그녀의 몸을 휘감은 검은 로브가 신기루처럼 반짝였다.

“다음에 기회를 잡아서 다시 올게.”

“누가 보내준대?”

“잠깐….”

말리기도 전에 아리스가 벼락처럼 검을 뽑아 들었다. 그녀의 검격은 칼날을 모두 드러내기도 전에 멀린에게 닿아 있었다.

화아아아아!

하지만 멀린은 본체가 아닌 듯 로브만 흐릿하게 지워질 뿐 자그마한 상처도 입지 않았다.

“허상이었나?”

“비슷해.”

멀린은 놀리듯이 아리스에게 혀를 날름거렸다.

“또 보자.”

그녀는 라온에게 손을 흔들어주고서, 물거품이 되어 사라졌다.

“쯧. 망할 놈의 마법.”

아리스는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중얼거리며 다시 검을 검집에 넣었다.

-방심하지 말거라!

멀린이 등장했을 때부터 쫄아서 숨어 있던 라스가 고개를 홱 들어 올렸다.

-저 미친 인간이 그냥 갔을 리가 없느니라! 분명 숨어서 지켜보고 있을 것이야!

‘듣고 보니….’

라스의 말대로 멀린은 사라진 척만하고, 다른 동물에 빙의해서 이곳을 지켜보고 있을 것 같았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리메르가 미간을 구긴 채 다가왔다.

“배신할 인간으로는 보이지 않았는데….”

그 역시 렉타르가 성검련에 속해 있는 게 믿기지 않는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너 팔….”

아리스는 이제야 리메르의 오른팔이 잘린 것을 발견하고 눈을 부릅떴다.

“그렇게 볼 필요 없어. 미래를 위해서 투자했을 뿐이니까.”

리메르는 피식 웃으며 왼손을 저었다.

“미래?”

“대주님은 저희를 지키시다가 팔을 잃었습니다.”

라온이 리메르의 어깨를 보며 손끝을 매만졌다.

“너희를 지키다가?”

아리스가 무슨 일인지 설명해보라는 듯 시선을 굴렸다.

“이 미친놈이 전장에서 무아지경에 빠졌거든.”

“그건 어쩔 수 없잖아. 무아지경에 들고 싶어서 드는 것도 아니고.”

“쟤는 일부러야.”

리메르가 고개를 젓자, 아리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 정말이야?”

“네.”

라온이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가 전멸당할 상황이어서 도박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

아리스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그럼 전장 한폭판에서 무아지경에 빠진 후 각성해서 남은 놈들을 다 때려잡은 거야?”

“비슷합니다.”

“크으으으!”

그녀가 맥주를 들이킨 듯한 탄성을 흘리며 양팔을 쫙 뻗었다.

“역시 우리 조카! 그래. 칼을 쥐었으면 그런 미친 짓은 해야 지그하르트지!”

아리스는 라온이 했기 때문인지, 결과가 좋았기 때문인지 칭찬을 반복하며 라온을 품에 끌어안았다.

“윽, 자, 잠시만.”

라온이 벗어나려 버둥거렸지만, 아리스는 풀어주지 않고 라온에게 뺨을 비볐다. 그녀만이 지닌 시원하면서도 청아한 바다향 때문인지 울렁이던 가슴이 가라앉았다.

“이모! 그만!”

“어! 조카!”

이모라고 부르고 나서야 아리스가 억세게 조이던 팔을 풀어주었다.

“그래. 이모라고 부르라니까. 기껏 입에 익게 해놨더니, 왜 또 아리스 님으로 돌아간 건데!”

“가문에서는 그 호칭으로 부르기 힘들어서요.”

“어떤 새끼가 막는데? 내가 다 조져줄게!”

“가주님이요….”

“…….”

아리스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 그 사람은 괜찮아. 우리 아버지니까.”

그녀는 이럴 때만 글렌을 아버지라 칭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아리스 지그하르트 님을 뵙습니다.”

광풍대 검사들이 아리스에게 고개를 숙였다. 현재 아리스는 지그하르트 내부에 아무런 지위도 없었기에 이름을 부르며 예를 취했다.

“가족끼리 뭔 그런 딱딱한 인사를 하냐.”

아리스가 방긋 웃으며 손을 저었다.

“편하게 아리스라고 불러. 아, 그러고 보니 여기에 내 조카 두 명 더 있지?”

“버, 버렌 지그하르트입니다.”

“마르타입니다! 존경합니다!”

버렌은 쭈뼛 거리면서 앞으로 나왔고, 마르타는 아리스의 힘을 보았기 때문인지 반짝이는 눈으로 냉큼 튀어 나갔다.

“그래. 조카들 반가워!”

아리스는 버렌과 마르타를 끌어안아주며 진한 웃음을 흘렸다.

“너희도 라온 못지 않네. 둘 다 그 나이에 마스터라니! 나보다 훨씬 빨라!”

그녀는 버렌과 마르타의 실력에 감탄하며 두 사람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

홀로 남은 루난은 멍하니 서 있다가 아리스에게 다가가서 자기가 먼저 포옹을 했다.

“너, 너는 누구니?”

아리스도 루난의 행동에는 당황한 듯 눈동자를 떨었다.

“루난 슬리온이에요.”

“아, 로칸의 딸이구나!”

그녀는 로칸을 이름으로 부르며 씩 웃었다.

“그래. 너도 이리 와! 아니다. 다 와!”

아리스는 무거워진 공기를 풀기 위해서인지 광풍대 검사 모두와 인사를 나눴다. 그녀 특유의 친화력과 시원시원한 성격 덕분에 금세 분위기가 밝아졌다.

“그런데….”

아리스가 눈매를 찌푸리며 시선을 돌렸다.

“너희 검귀와는 무슨 관계였던 거야?”

그녀는 모두와 인사를 나누고 나서야 가장 민감한 질문을 꺼냈다.

“음….”

“그게….”

광풍대 모두가 검귀와 친분을 나누고 검술 지도도 받았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만 숙였다.

“렉타르 님이 저희에게 여러 가지 가르침을 내려주셨습니다.”

라온이 가는 한숨을 내쉬고서 입술을 뗐다.

“전에 아리안 가문에 갔을 때….”

어떻게 검귀를 만났고, 그와 어떻게 지냈는지를 간단하게 말해주었다.

“그랬군.”

아리스가 왜 이런 분위기가 되었는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의외로 위로도, 격려도 하지 않았다. 본인이 직접 겪은 일이 아니었기 때문인지 말을 아끼는 것 같았다. 나서야 할 때와 나서지 않아야 할 때를 정확히 아는 어른이었다.

“넌 나랑 이야기 좀 하자.”

“엥? 날 왜! 난 환자인데!”

아리스는 광풍대에게 손을 흔들어주고서 리메르를 끌고 사라졌다.

“검귀 님이 성검련이라니, 진짜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버렌은 질질 끌려가는 리메르를 보며 탁한 숨을 내뱉었다.

“심심풀이라잖아! 우리를 조롱한 거라고!”

마르타는 렉타르에게 정을 주었다는 게 분한 듯 입술을 꾹 씹었다.

“…….”

루난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시리아의 일을 겪었으니, 이번 사건이 더 크게 다가오는 것 같았다.

“부대주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정말 배신일까요?”

도리안이 불안한 듯 배 주머니에서 과자를 꺼내 씹으며 턱을 떨었다.

“나도 모르겠어.”

라온은 평소와 달리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광풍대 이상으로 당황스러워서 할 말이 없었다.

“다만 렉타르 님이 적이라는 건 분명해. 그건 꼭 기억해두도록.”

“예….”

광풍대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힘이 쭉 빠진 대답이었지만, 타박하지는 않았다.

“일단 보고부터 하자.”

“네에….”

라온이 손을 뻗자, 도리안이 보고용 연락지를 꺼내주었다. 평소보다 물건을 꺼내는 시간이 5초 느린 걸 보면 녀석도 크게 지친 것 같았다.

“고맙다.”

도리안의 어깨를 두드려주고서 보고서에 펜을 얹었다. 뭐라고 쓸까 고민을 하다가 이곳에서 있었던 일들을 모두 적고 나서 마지막에 적은 검귀의 부분을 찢어버렸다.

‘이건 직접 가서 말하고 싶어.’

글렌은 렉타르와 검술 지도로 경쟁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도 나름의 친분을 쌓았다.

나중에는 두 사람이 대화하는 모습도 자주 보았기에 이런 일을 서면으로 전하고 싶지 않았다.

‘대신….’

평소에는 쓰지 않았을 내용을 뒷장에 작게 적은 후 도리안에게 돌려주었다.

“바로 보낼게요.”

도리안은 등에 업고 있던 시을렌을 크레인에게 넘겨주고서 보고서를 봉투에 넣고 가문에 보낼 준비를 했다.

라온은 기절한 상태에서도 표정이 굳어 있는 시을렌을 보며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주 조금이지만, 네가 얼마나 힘들지 알 것 같다.’

*     *      *

비연회주 채드가 부리나케 달려가 알현실의 문을 두드렸다.

“가주님!”

노크 소리가 내부에 울리기도 전에 문이 열리고, 옅은 미소를 지은 로엔의 얼굴이 튀어나왔다.

“들어오시지요.”

“감사합니다.”

채드는 로엔에게 고개를 숙이고서 알현실 내부로 들어갔다.

옥좌에 앉아 있는 글렌은 기분이 좋지 않은지 미간을 찌푸린 채 다리를 떨고 있었다. 그의 다리가 흔들림에 따라 가주전도 진동하는 것 같았다.

“무슨 일이냐.”

글렌은 용건만 빨리 말하라는 듯 공허한 눈을 들어 올렸다.

“과, 광풍부대주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뭐라?”

채드가 품에서 봉투를 꺼내 들자, 글렌의 눈동자에 시뻘건 생기가 차올랐다. 그는 옥좌에서 등을 떼며 경쾌하게 손짓했다.

“아이들은 괜찮은 것이냐?”

“예. 중상자는 있지만, 사망자는 없다고 합니다. 다만 중간에 문제가 하나 생겨서….”

“문제?”

“예. 성검련의 책임자로 보이는 용현검주와 성검련주의 제자 클라우드가 예상보다 빨리 찾아왔다고 합니다. 두 사람과 바로 전투가 이어져서….”

“음….”

글렌은 채드가 보고서를 읽는 속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인상을 찌푸렸다.

“조금 더 빨리 못 읽나?”

“아, 빠, 빨리 읽겠습니다!”

채드가 긴장했는지 이마를 닦다가 들고 있던 보고서에 땀을 떨어뜨렸다.

“이런!”

글렌이 깜짝 놀라서 손을 뻗자, 채드가 쥐고 있던 보고서가 그의 손아귀로 빨려 들어갔다.

“크흠….”

글렌은 보고서에 새겨진 땀을 증발시킨 후 채드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이 귀한 것에 땀 따위를 흘리다니!’

리메르가 아니라, 라온이 보고서를 쓰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평생을 보관해야 할 물건에 감히 땀을 떨어뜨린 채드에게 분노가 일었다.

하지만 그걸 그대로 드러낼 수는 없기에 인상만 구기며 보고서를 읽었다.

라온의 글귀는 차분하면서도 냉정했다.

라키온 가문의 배신을 미리 저지하려 했지만, 물러서지 않는 후안 때문에 많은 숫자의 무인들을 즉결참한 것. 그 이후에 찾아온 성검련주의 제자와 용현검주를 처치한 내용이 담담한 글자로 적어 내렸다.

‘내가 도려내야 할 썩은 싹을 그 아이가 대신 베어주었군.’

지그하르트의 진격이 멎은 지 수십 년이 지났다. 내외부에서 문제가 생기는 건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 내부를 정리했기에 외부의 봉신가를 하나씩 살피려고 했는데, 라온은 그럴 필요 없다는 듯 알아서 일을 처리해 주었다. 대견하다는 칭찬으로도 한참 부족했다.

“대단한 성과입니다.”

채드가 슬쩍 고개를 들어 올렸다.

“라키온 가문이 저대로 속셈을 숨기고 있었다면 언제가 저희의 뒤통수를 쳤을 겁니다. 그 전에 막아냈다는 건 훌륭하다는 말로도 부족합니다.”

“슬리온 가문도 마찬가지지요. 라온 도련님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시리아의 손에 가문이 떨어졌을 겁니다.”

로엔이 그의 말에 한마디를 보탰다.

“크흠….”

글렌은 무조건 좋아하지는 못하는 애매한 눈빛으로 고개만 끄덕였다.

“어찌 되었든 리메르 녀석도 이제 좀 편해졌겠군.”

그는 라온보다도, 리메르의 복수가 끝난 것을 떠올리며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죠.”

로엔도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놈도 이전처럼 돌아가려나?”

“음,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예상 이상으로 타락하셔서….”

“저, 저기….”

채드가 뻘게진 얼굴로 손을 들어 올렸다.

“혹시 뒷장은 안 보셨습니까?”

“뒷장?”

“예. 뒤에도 내용이 하나 있습니다.”

그는 꼭 봐야 한다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흠….”

글렌이 보고서를 뒤로 돌렸다. 딱 한 줄의 내용을 본 순간 그의 입술이 푸르르 떨렸다.

“그, 그랜드 마스터? 그 아이가 그랜드 마스터에 올랐다고?”

글렌은 옥좌의 팔걸이를 뭉개버리고서 벌떡 일어섰다.

“허허….”

로엔도 깜짝 놀랐는지 허허로운 웃음이 뚝뚝 끊어졌다.

“빌어먹을!”

글렌이 단상이 무너질 정도로 강하게 발을 굴렀다.

“히익!”

채드가 당황하여 뒤로 훌쩍 물러섰다.

‘왜, 왜 저러시지?’

기뻐할 거라고 생각하고 알려준 내용인데, 저렇게 화를 낼 줄은 몰랐다.

‘광풍부대주를 아끼는 게 아니었던 건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글렌을 바라보고 있을 때 그의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아직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벌써 벽을 넘다니! 그걸 내가 못 보다니!”

글렌은 라온이 벽을 넘는 순간을 보지 못한게 억울하다며 하나 남은 옥좌의 팔걸이마저 가루로 만들었다.

빠지지직!

붉은 뇌기가 저절로 일어나서 단상 주변을 에워쌌다. 곧 있으면 시뻘건 폭풍이 몰아칠 것 같았다.

“아리스. 그 망할 것만 아니었다면 그 아이가 벽을 넘는 모습을 직접 보았을 텐데!”

“아….”

채드가 입을 떡 벌렸다.

‘그거였나?’

글렌은 라온이 그랜드 마스터에 오른 게 기쁘지 않은 게 아니라, 그 모습을 직접 보지 못한 것을 뼈가 시릴 정도로 아쉬워하고 있었다.

‘생각을 하지 말자.’

그냥 라온 지그하르트에게만 잘 보이면 되는 거야.

채드는 라온과 광풍대를 그 어느 때보다 성대하게 맞이하겠다고 다짐하며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     *      *

라온은 시을렌이 깨어났다는 소리를 듣고 그녀의 방으로 향했다.

“라, 라온 님!”

시을렌이 침대에서 굴러 떨어지면서도 바로 일어나서 달려왔다. 더 퍼렇게 변한 허벅지와 팔뚝의 멍이 아릿하게 눈을 채웠다.

“아빠랑 오빠들은요?”

아이는 가족에게 고문을 당했어도 일어나자마자 아버지와 오빠들을 찾았다.

“후….”

라온이 낮은 한숨을 내쉬고서 한쪽 무릎을 꿇어 시을렌과 눈을 마주쳤다.

“미안하다. 최선을 다했지만, 약속을 지키지 못했어.”

“…….”

시을렌이 침을 꿀꺽 삼키고서 뒤로 주저앉았다.

“그, 그럼….”

“마검의 마기가 골수까지 미쳐서 다른 방법이 없었다.”

후안 라키온은 수하들만이 아니라, 본인이 낳은 친아들과 딸의 생명까지 빨아먹을 정도로 미쳐 있었다. 시간을 되돌려도 그를 죽이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사실은….”

시을렌이 눈꺼풀을 떨면서 작은 주먹으로 카펫을 움켜쥐었다.

“깨어나자마자 알고 있었어요. 제 바람과 결과가 달라졌다는 걸.”

“…….”

“그래도 혹시나 기대를 해봤는데, 좋지 않은 예감은 틀리질 않네요.”

“미안하다.”

“아니에요. 최선을 다하셨다고 했잖아요.”

아이는 억지로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제 전 어떻게 되나요?”

시을렌이 떨리는 눈동자를 들어 올렸다. 두려움보다 슬픔이 더 깊게 박혀 있는 것 같았다.

“배반한 가문의 딸이니, 지그하르트의 감옥에 갇히는 건가요?”

“그럴 일은 없어.”

라온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의 글렌이라면 절대 그런 일을 저지를 일 없고, 있다고 해도 막을 것이다.

“넌 뭘 하고 싶지?”

“저는….”

시을렌은 고개를 내린 채 잠시 생각을 정리한 후 머리를 세웠다.

“저는 이 집을 지키고 싶어요.”

“집을?”

“네. 아빠, 엄마 그리고 오빠들과 살던 곳이니까요.”

아이는 가족과 남은 추억만이라도 지키고 싶다며 입술을 씹었다.

“음….”

라온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할 수 있을까?’

라키온 가문의 무인 중 반절 정도는 살아남았지만, 그들이 시을렌을 따른다는 보장이 없었다. 만약 따른다고 해도 어린아이에게는 힘든 길이 될 것이다.

“힘들 거야.”

“괜찮아요.”

시을렌은 이미 마음을 정한 듯 당당히 고개를 들었다. 이 짧은 순간에 마음을 다졌는지 아이의 눈빛은 곧고 맑았다.

‘하긴 가문의 패악을 알리려고 한 아이인데.’

이 아이는 가문을 구하기 위해서 지그하르트 지부를 직접 찾아가서 가족들의 치부를 밝혔다. 가문을 되살리는 어려움 따위는 충분히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나와 함께 지그하르트로 가자.”

“지그하르트요?”

“그래. 가주님을 만나 뵈어야 할 거야.”

“음….”

“걱정하지 마. 가주님은 현명하신 분이니까.”

“아, 알겠어요.”

시을렌이 작은 주먹을 움켜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바로 떠날 거니까. 쉬어.”

라온은 시을렌에게 쉬라고 말해준 후 그녀의 방을 나왔다.

-어린 녀석이 기특하느니라!

라스가 코를 훌쩍였다.

-이 동네는 너처럼 미친놈도 있지만, 저리 대견한 아이들이 있어서 미워할 수가 없느니라!

녀석은 칭찬만 하지 날 까기도 하면서 눈시울을 붉혔다.

‘그러게. 저 때는 조금 더 철이 없어야 하는데.’

이제야 실비아가 내게 철이 좀 늦게 들었으면 좋겠다고 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라온이 어둑한 밤하늘을 보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피곤하네.’

부상은 심하지 않았지만, 렉타르의 배신 때문에 정신적으로 굉장히 지친 느낌이었다. 집이 그리워지고, 실비아와 별관의 식구들이 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 사람도.’

신기하게도 글렌의 얼굴까지 그리워졌다. 그가 냉정한 음성으로 수고했다고 하는 말이 듣고 싶었다.

“다 보고 싶네.”

라온이 어색하게 웃고 있을 때 숙소 우측의 수풀이 바스락거리더니, 너구리 한 마리가 튀어나와서 스스로를 가리켰다.

“나?”

“…….”

라온이 눈을 질끈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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