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569화 (568/653)
  • 제569화

    “아리스 지그하르트인가.”

    렉타르는 라온의 앞을 막아선 아리스를 보며 아쉽다는 듯 짧게 혀를 찼다.

    “아니, 너만이 아니로군.”

    그는 아리스를 마주한 채 우측으로 눈동자를 굴렸다.

    “어라?”

    아리스가 검으로 렉타르의 손을 밀어내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성검련의 멍멍이들은 검만 쓸 줄 알고, 정보력은 꽝이잖아. 내 이름을 어떻게 알았대?”

    “신주오령의 해적왕을 몰라봐선 안 되지.”

    “해적왕 아니거든!”

    그녀는 어금니를 강하게 씹으며 렉타르의 왼쪽 가슴을 향해 검을 찔러넣었다.

    치이이이잉!

    렉타르가 오른손으로 반원을 그렸다. 저무는 달처럼 유려하게 내려서는 수도가 아리스의 검격을 꺾어버렸다. 오러 자체를 지우는 듯한 신묘한 흐름이었다.

    쿠와아아아앙!

    투로가 뒤틀린 아리스의 검격이 대지를 강타하며 살벌한 크기의 균열을 일으켰다.

    후우우우욱!

    검은 연기가 치솟으며 아리스와 렉타르 사이에 얇은 벽을 만들었다.

    “아리스 님이 여기는 어떻게….”

    라온은 검을 고쳐 쥐는 아리스를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

    아리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렉타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연기를 노려보며 사나운 기세를 일으켰다.

    ‘전투 중에 괜히 말을 걸었군.’

    -네놈은 정말 이런 쪽으로 눈치가 없느니라!

    실수했다고 생각하며 뒤로 물러서려 할 때 라스가 손가락을 흔들었다.

    ‘뭐?’

    -전투 중이라서가 아니라, 호칭이 잘못됐기 때문이잖느냐.

    ‘호칭….’

    생각나는 게 있었지만, 설마 그것 때문인가 싶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기에 그 호칭으로 불러보았다.

    “이모.”

    “그래! 우리 조카!”

    아리스가 냉큼 고개를 돌리며 생글생글 웃었다. 렉타르에게 살기를 보낼 때와는 다른 사람 같았다.

    “여, 여기는 어떻게 오신 거예요?”

    오랜만에 느끼는 아리스의 과한 반응에 자신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하도 불러대서 어쩔 수 없이 가문에 복귀했는데, 네가 없더라고. 너만 보고 돌아가려고 기다리고 있는데, 광풍대에서 지원 요청이 왔다고 해서 바로 달려왔지.”

    “아….”

    라온이 아리스의 당당한 눈빛을 보며 잠시 말을 잊었다.

    ‘무슨 행동력이.’

    아리스는 글렌의 지시조차 무시하고 혼자서 여기까지 달려왔을 것이다.

    처음 보았을 때부터 느꼈지만, 그녀는 지그하르트의 이름과 상관없이 자기 마음대로 사는 자유인 같았다.

    “이모라…. 그렇군. 이모가 되겠어.”

    렉타르가 라온과 아리스를 차례로 살피고서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빛이 더 깊게 가라앉은 것처럼 보였다.

    “왜, 부러워?”

    아리스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고개를 모로 꺾었다.

    “하긴 부럽겠지. 21살에 그랜드 마스터가 된 조카가 있다면 댁이라도 동네방네 다 떠들고 다닐 거잖아.”

    “헛소리.”

    “그게 아니라면 왜 데려가려고 한 건데?”

    “…….”

    렉타르는 대답하지 않고, 서늘한 눈빛을 드러냈다. 사막처럼 메마른 그의 눈동자를 보자 조금 전의 상황이 다시 떠올랐다.

    ‘그런데….’

    조금 전에 날 잡을 수 있지 않았나?

    진혼검으로 렉타르를 기습하기 위해서 근접 거리에 있었기에 그가 손가락만 움켜쥐었어도 나를 잡을 수 있었다.

    아무리 아리스가 공간검을 펼쳐냈다고 해도 렉타르가 더 빨랐을 텐데, 꼭 일부러 놓아준 것처럼 느껴졌다.

    -네 생각이 맞느니라.

    라스가 렉타르를 보며 고개를 까딱였다.

    -저 영감 일부러 널 잡지 않았느니라.

    ‘역시….’

    라온이 렉타르를 보며 입술을 가늘게 씹었다. 라스의 말이라면 확실하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렉타르는 일부러 나를 잡지 않은 게 분명했다.

    ‘눈빛도 좀 이상해.’

    렉타르에게 일대일 지도를 받아 보았기에 알 수 있다. 삭풍이 이는 듯한 눈빛 속에는 직접 검술을 시연하고 설명을 해주던 그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특히 그는 아버지와 관계가 있다고 여겨지는 사람이다. 이렇게 갑작스러운 변화라면 무언가가 끼어 있을 게 분명했다.

    ‘세뇌? 아니면 약점이라도 잡혔거나.’

    초월자를 세뇌할 수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지만, 상황이 너무 이상하기에 그쪽으로 생각이 쏠렸다.

    “렉타르 님.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혹시 세뇌에 걸리거나 약점을 잡힌 거라면….”

    “세뇌?”

    렉타르가 차가운 눈빛 그대로 시선을 돌렸다.

    “너는 초월자를 세뇌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는 살짝 말려 올라간 입술로 비웃음을 그렸다.

    “내가 성검련에 있는 건 나의 의지다.”

    렉타르는 담담하게 사실을 밝히며 검을 뽑았다. 그에게 검술 지도를 받았던 검이 이쪽으로 향하여 살기를 드러내자, 칼에 찔린 것처럼 가슴이 아려왔다.

    ‘이것도 인연인가….’

    그림자로 살던 전생의 라온이었다면 배신당했다고 생각하자마자, 아무런 감정도 없이 렉타르에게 검을 찔러넣었겠지만, 인연이라는 것을 알게 된 지금은 그저 악의만을 드러낼 수 없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안다는 건 장점만 있는 게 아니었다.

    “렉타르.”

    아리스가 마른 입술을 축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역시 검귀였군. 천하의 검귀가 성검련 소속이었다니, 지금까지 쌓은 명예가 전부 시궁창에 처박히겠는데?”

    “남들이 따지는 명예는 중요치 않다.”

    렉타르는 부끄럽지 않다는 듯 당당히 시선을 들었다. 그의 의지가 어린 검이 오연한 빛을 드러냈다.

    “중요한 건 내가 어떤 뜻을 지니냐일 뿐이지.”

    “추잡한 인간이 좋은 말을 할 줄도 아네.”

    아리스가 픽 웃으며 검을 다시 검집에 넣고, 자세를 낮췄다. 공간을 가르는 발검술로 단숨에 우위를 점하려는 것 같았다.

    “어쨌든 빨리 끝내는 게 당신한테도, 나한테도 좋을 거야.”

    “뭐?”

    “곧 이 녀석의 할아버지가 올 거거든. 누구인지 알지?”

    그녀가 라온을 가리키며 웃었다.

    “아….”

    라온이 눈을 부릅떴다. 드래곤 로드에게 했던 거짓말을 다시 이용하려는 것 같았는데, 이건 렉타르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확실히 그럴 수도 있겠군.”

    하지만 예상과 달리 렉타르는 아리스의 말을 믿는 듯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서 검을 쓸어 올렸다. 거북이가 기듯이 천천히 다가오는 검이 너무도 거대하게 보였다.

    쿠구구구구구!

    이 땅. 아니, 이 세상 자체를 검으로 찌르는 것처럼 보였다. 완성에 가까운 만검을 적의 입장에서 보고 있자니, 오싹함이 등골을 가득 적셨다.

    ‘이게 진정한 만검인가.’

    불의 고리가 스스로 회전하며 렉타르의 만검에 어린 묘리들을 분석했다.

    중검, 유검, 둔검, 환검, 절검 그리고 패검까지. 오케스트라에서 악기끼리 합을 맞추듯 각자의 묘리가 절묘하게 어우러지며 검술이라는 격을 벗어난 힘이 뻗어 나왔다.

    쿠웅!

    아리스가 왼발로 대지를 찍어누르며 발검했다. 찬란한 빛과 함께 치솟은 공간의 참격이 렉타르의 검격을 후려쳤다.

    쩌어어어어엉!

    검과 검이 아니라, 기둥과 기둥이 맞부딪친 듯 어마어마한 굉음이 터지고, 오러의 파동이 대지를 뒤집었다.

    “크으….”

    라온이 그 무시무시한 광경을 마주하며 입술을 떨었다.

    ‘물러나서는 안 돼. 여기에 있어야 해.’

    렉타르를 기습하기 위해서라도 아리스와 거리를 유지하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기습보다는 아리스와 렉타르가 이뤄내는 예술 같은 검격의 연쇄에 눈이 갔다.

    나도 정말 검사가 다 되었는지 이렇게 당황스럽고, 목숨이 위험한 상황임에도 검술의 발전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치이이잉!

    아리스가 렉타르에게서 한 걸음 물러서며 뒤로 젖힌 검을 찔러넣었다.

    렉타르의 가슴 앞의 공간이 갈라지며 벼락같은 검격이 솟구쳤다.

    하지만 렉타르는 아리스의 공간검이 어디로 향할지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어깨를 틀어 여유로운 회피를 보여주었다. 그는 지금 이 싸움의 흐름을 읽고 있었다.

    ‘역시….’

    라온은 렉타르의 평온한 표정을 보며 눈매를 찌푸렸다.

    ‘저쪽이 위야.’

    같은 초월의 경지였지만, 렉타르가 아리스보다 윗급이었다.

    “그렇게 여유 부려도 돼? 시간 끌면 쟤 할아버지 온다니까?

    아리스가 도발을 하듯 손가락을 까딱였다. 렉타르를 조급하게 만들어서 빈틈을 열려는 것 같았다.

    “흠….”

    렉타르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은 채 검에 어린 빛을 흩뿌렸다.

    회전하는 손목을 따라 뻗어나가는 빛무리가 한순간에 아리스의 간격을 파고들어 왔다. 그녀의 공간검과는 결이 다른 새로운 공간의 참격이었다.

    “쯧.”

    아리스가 혀를 차면서 두 손으로 말아쥔 검을 사선을 쳐올렸다. 형태를 이루지 못한 오러가 강하게 맞물리며 공간을 막아서는 벽을 밀어냈다.

    갈라진 균열 속에서 아리스의 검막과 렉타르의 검격이 마주쳤다.

    쩌어어어어엉!

    균열 내부에서 어마어마한 충격파가 폭발하며 허공에 새겨진 가느다란 금이 두껍게 뜯겨나갔다.

    투우우웅!

    자욱하게 퍼져나간 의념의 파동에 땅이 폭삭 무너지고, 뭉개진 듯한 하늘에서 용오름이 떨어져 내렸다.

    치이이이잉!

    렉타르와 아리스는 의념의 부딪침으로 생겨난 폭풍의 안쪽에서 서로를 향해 검격을 쏟아부었다.

    호각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아리스가 조금씩 밀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상처를 입어도 물러서지 않고, 더욱더 사납게 검격을 내질렀다. 정말 글렌이 오기 전에 시간을 끄는 것처럼 렉타르와 정면에서 검을 부딪쳤다.

    쿠우우우웅!

    초월자들의 결전에 천지가 요동친다. 더는 갈라진 곳도 없는 대지가 파이고 파여 시꺼먼 구멍을 드러냈고, 하늘이 쪼개져서 은은한 붉은 빛을 뿜어냈다.

    아리스와 렉타르는 으깨진 듯한 공간의 균열 속에서도 멈추지 않고 검을 나눴다. 두 사람의 오러는 무한하고, 호흡은 끊어지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렉타르의 검이 급격하게 꺾이며 투로가 전환되었다. 벼락처럼 뻗어나가는 칼날에 공방일체의 검격이 휘감겼다.

    쩌어어어어엉!

    아리스의 검이 더 뻗어나가지 못하고, 막혔다. 그녀가 나갈 방향 전체가 렉타르의 의념에 의해 막혀 있었다. 말 그대로 의념의 감옥이었다.

    라온은 렉타르의 검이 가느다란 바람처럼 혹은 매서운 벼락처럼 변화하는 모습을 보며 손끝을 떨었다.

    ‘이상해….’

    초월자들의 전투라면 아무리 내가 그랜드 마스터에 올랐어도 많은 것을 볼 수 없어야 한다.

    실제로 아리스의 공간검은 내 이해를 뛰어넘고 있어서 많은 것을 파악할 수 없었다.

    하지만 렉타르의 검은 지도 대련을 해줄 때처럼 곧으면서도 정직하게 뻗어 나왔다. 그의 가르침이 뇌리에 떠오르며 만검을 어떻게 이뤄야 하는지가 피부로 느껴졌다.

    “훌륭한 재능이다. 허나….”

    렉타르가 검을 내린 채 고개를 저었다.

    “아직 미숙해.”

    “당신과 달리 나는 아직 한창이거든!”

    아리스가 붉은 입술을 말아 올리며 의념의 감옥을 억지로 비틀었다. 팔과 다리만이 아니라, 입술에서 피를 흘리면서도 끝까지 내지른 칼날이 렉타르의 거센 압박을 풀어냈다.

    “실력은 볼 만큼 보았으니, 끝을 내도록 하지.”

    렉타르가 차분히 고개를 끄덕이며 검을 세웠다. 그가 아리스를 향해 검극을 겨누자 순간 이 세상에 오직 그 홀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다. 인간이 검으로 화한 듯한 절대적인 존재감이 드러났다.

    “나이를 그냥 먹은 게 아니네.”

    아리스 역시 본인이 밀린다는 것을 깨닫고 입술을 꾹 씹었다. 두 손으로 검을 말아 쥔 채 오러 그 자체를 베어버리는 공간의 참격을 일으켰다.

    쿠와아아아아아!

    광룡 카이바르의 숨결마저 베어버린 장대한 칼날이 렉타르의 공간을 찢고 들어왔다.

    렉타르는 당연히 그 정도는 할 거라 예상한 듯 평온한 눈빛으로 만검의 묘리가 차오른 검을 뻗어냈다. 장엄한 빛이 공간을 채우려 할 때 라온이 움직였다.

    라온은 검집에 넣어둔 제천검을 뽑으며 초상승에 이른 무리를 담아냈다.

    라온 지그하르트류 검식.

    제4형 청우.

    검집을 갉아 먹으며 솟구친 칼날에서 아릿한 검명이 울린다. 푸른 소리의 칼날이 렉타르의 귀를 파고들었다.

    하지만 기습을 생각한 자는 나 혼자가 아니었다.

    파아아아아앙!

    무너진 가주전의 벽 뒤편에서 시뻘건 빛살이 줄기줄기 뻗어나갔다.

    펄럭이는 로브 위로 드러난 노파의 가면이 찬연하게 번들거렸다. 멀린이었다. 언제부터 준비했는지 그녀의 마법은 섬전처럼 쇄도해 렉타르의 우측으로 쏟아졌다.

    쿠와아아아아아앙!

    아리스, 라온, 멀린에게 세 방향의 공세에 렉타르가 서 있던 공간에서 어마어마한 빛의 폭풍이 차올랐다. 마법과 검격이 연달아 폭발하며 무수한 광채가 하늘로 치솟았다.

    “우리 천생연분인가?”

    멀린이 옅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타이밍이 딱 맞네.”

    그녀는 평소와 달리 농염함이 스며든 음성으로 턱을 들어 올렸다.

    “멀린?”

    아리스가 멀린을 보며 눈매를 찌푸렸다.

    “저 광녀가 왜?”

    그녀는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질 않는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저쪽도 저를 노리고 있을 겁니다.”

    라온은 아리스의 옆으로 붙으며 고개를 저었다.

    “일단 이 상황부터 끝내죠.”

    “그래야지.”

    아리스가 손을 젓자, 바람이 불어와서 먼지 폭풍을 밀어냈다.

    후우우우웅!

    렉타르는 처음 그 자리에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옷이 조금 그을리거나 찢어졌지만, 큰 피해는 입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다만 멀린이 찌른 우측 어깨에서는 미세한 상처가 벌어져 있었다.

    “기습의 때 그리고 칼날의 날카로움까지. 예전보다 훨씬 나아졌군.”

    렉타르가 이쪽을 바라본다. 그의 눈빛은 당장에 목을 찌를 것처럼 서늘했지만 또한 대견해 보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내가 미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멀린. 지금 이 기습은 타천의 뜻인가?”

    렉라트는 우측으로 고개를 돌려 멀린을 바라보았다.

    “아니, 네가 라온 지그하르트를 데리고 가는 게 빡쳐서 나왔을 뿐인데.”

    “초월자 하나에 그랜드 마스터 둘이라….”

    그는 어깨에서 흘러내리는 핏물을 훔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은 걸려도 나쁘지는 않겠어.”

    “혈검주 님.”

    렉타르가 다시 움직이려 할 때 성검련의 검귀 중 책임자로 보이는 중년인이 다가와서 조용히 속삭였다.

    “물러나야 합니다.”

    “뭐?”

    “련주께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지금은 그와 부딪쳐서는 안 됩니다.”

    중년인은 련주의 이름을 꺼내며 고개를 저었다.

    “쯧.”

    렉타르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혀를 차고서 검을 집어넣었다.

    “다음에는 이런 기회가 없을 것이다.”

    “아, 말 많네.”

    아리스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얘 할아버지가 온다니까. 도망가는 거면서 왜 이렇게 주절거려!”

    그녀는 부딪쳐서는 안 되는 그가 누구인지 단번에 파악한 듯 이죽거렸다.

    “…….”

    렉타르는 그녀에게 대답하지 않고, 라온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는 아주 짧은 시간 눈을 마주치고 사라졌다.

    “…….”

    라온은 차가움만이 가득했던 렉타르의 눈을 떠올리자 가슴이 울렁이는 것을 느꼈다.

    ‘분명해.’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하셔.

    렉타르가 정말 성검련에 있고 싶어서 있다고 해도 그는 내게 무언가를 전하고 싶어 했다.

    처음부터 경고와 가르침을 주기 위해서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도 마지막 가르침을.

    ‘대체 뭐지?’

    *     *      *

    렉타르는 성검련의 검귀들을 따라가다 말고 멈춰 섰다.

    “혈검주님?”

    “먼저 가서 보고부터 하도록. 나는 상처를 치료하고 움직이겠다.”

    그는 갑자기 피가 흘러내리기 시작한 귀를 가리키며 고개를 저었다.

    “음, 알겠습니다.”

    중년인은 고개를 끄덕이고 수하들을 데리고 먼저 숲을 빠져나갔다.

    렉타르가 귀를 매만지자 끈적한 핏물이 줄줄이 흘러내렸다.

    “역시나….”

    “스승님.”

    그가 미소를 지을 때 숲 안쪽에서 무스턴이 걸어나왔다.

    “괜찮으십니까?”

    무스턴은 전과 달리 맑은 눈을 한 채로 입술을 씹었다.

    “말도 안 되는 재능이로군.”

    렉타르는 귀에서 흘러내리는 핏물을 닦으며 라온이 대단하다고 중얼거렸다. 처음으로 그다운 미소가 그려졌다.

    “그게 아니라, 스승님의 마음이 괜찮으시냐고 물었습니다.”

    무스턴은 모든 사정을 알고 있는 듯 침울한 안색으로 시선을 내렸다.

    “…….”

    렉타르는 대답하지 않았다.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려 맑아진 하늘을 바라보았다.

    “괜찮고 말고가 어디 있겠나. 내가 해야 할 일이니 할 뿐이지.”

    그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라온 님께 말을 하는 게 좋을 텐데요.”

    “아니.”

    렉타르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내가 끼어든다면 그 아이의 빛이 바래진다. 이제 후회는 질렸어. 그저 뒤에서 지켜줄 수 있는 것으로 만족하겠다.”

    그는 이미 모든 결정을 내린 듯 미소를 지었다.

    “너도 라온을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다고 말했지?”

    “그렇습니다.”

    “그럼 따라오거라.”

    렉타르가 무스턴의 어깨를 잡고 몸을 일으켰다.

    “오늘 일로 길이 열렸으니, 곧 끝이 다가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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