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68화
라온은 발광하는 라스의 이마를 손등으로 쳐내고서 메시지를 확인했다.
[그랜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르셨습니다.]
[전장의 중심에서 무아지경에 빠지는 광기를 드러냈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40포인트 상승합니다.]
[대륙 최초의 업적 <최연소 그랜드 마스터>를 이뤄냈습니다.]
[영혼의 격이 크게 상승합니다.]
[모든 무학의 경지가 크게 상승합니다.]
그랜드 마스터에 오른 것만이 아니라, 전장에서 벽을 깨며 무아지경에 빠진 덕분에 더 많은 능력치가 오른 것 같았다.
‘40포인트라니, 미쳤군.’
보상을 얻으면서도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의 수치였다. 다만 그보다 더 기분 좋은 메시지가 있었다.
‘모든 무학의 경지가 상승한다는 점.’
그랜드 마스터에 오른 이후 만화공의 검술과 라스의 결전기 위력이 생각보다 너무 강해서 놀랐는데, 그건 내 착각이 아니었다.
모든 무학의 경지가 상승하며 검술과 오러의 위력이 급격히 상승한 것 같았다.
-이런 썩을!
라온이 메시지를 살피며 옅은 미소를 짓고 있을 때 라스가 고개를 확 쳐들었다.
-미친 짓을 했으면 포인트를 뺏어야지 왜 더 주는 것이냐! 이 호구 놈아!
녀석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머리를 부여잡은 채 괴성을 질렀다.
-그것도 주인 허락도 없이! 왜 네 멋대로 퍼주냐고!
라스는 보상을 내어준 시스템을 향해 동그란 주먹을 휘둘렀다. 덕분인지 바로 다음 메시지가 떠올랐다.
[불의 고리가 8성에 이르렀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10포인트 상승합니다.]
[육체와 오러의 회복력이 크게 상승합니다.]
[상단전이 확장됩니다. 오러에 담아내는 의념에 더 큰 힘이 깃듭니다.]
[특별한 능력이 개화할 수도 있습니다.]
이번에는 불의 고리가 8성에 이르며 얻게 된 보상들이었다.
심상의 세계에서 꺾이지 않는 검사와 꺼지지 않는 불을 생각했기 때문일까. 육체와 오러의 회복력이 크게 증가했다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라온이 눈을 내리감고 내부를 관조했다.
‘확실히….’
회복이 굉장히 빨라졌어.
용현검주와 생사결을 벌인 덕분에 단전이 텅 비었는데,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속도로 오러가 차오르고 있었다.
나태의 회복 효과와 불의 고리의 효과가 중첩되며 회복력이 말도 안 되게 상승한 것 같았다.
-끼아악!
단전이 조금씩 무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미소를 짓자마자, 라스가 고양이 같은 비명을 터트렸다.
-보자 보자 하니까. 본왕이 보자기로 보이나! 여기서 능력치는 또 왜 주는 것이냐! 회복력? 요놈은 어차피 안 뒈져! 회복력 같은 건 필요 없다고! 의념은 개뿔!
라스는 이제 메시지 한 줄마다 시비를 걸고 있었다. 물론 녀석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라온은 털을 세운 듯한 라스를 내버려 두고 마지막 메시지를 확인했다.
‘특별한 능력은 뭐지?’
심상의 세계가 늘어났기에 상단전이 확장된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특별한 능력이 무엇인지는 전혀 감이 오질 않았다.
-그것도 모르느냐!
라스가 혀를 쯧 차고서 고개를 돌렸다.
-네놈이 넘어선 벽은 생물의 격 그 자체이니라. 인간을 어느 정도 벗어났으니, 그에 걸맞은 능력이 생길 수도 있다는 뜻이니라.
‘아….’
-그런 것도 모르는 모지리에게 능력치를 빼앗겨야 하다니, 억울해서 뒈지겠느니라!
녀석은 진심으로 아깝다며 본인의 가슴을 두드렸다. 아픈지 세게 치지는 않았다.
‘그럼 무슨 능력인데?’
-그걸 본왕이 어떻게 알아! 네놈이 어떤 인간이냐에 따라 다르고, 언제 개방될지도 모르느니라! 아예 안 생길 수도 있고!
라스는 그건 개체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며 콧방귀를 뀌었다.
‘결국 너도 아는 게 없다는 거네?’
-저놈의 주둥아리를 그냥!
라온이 라스의 주먹을 가볍게 피할 때 다시 메시지가 올라왔다.
[<암습>의 등급이 상승합니다.]
[<어둠에서 피어난 신성>의 등급이 상승합니다.]
[<사기 저항력>의 등급이 상승합니다.]
[<분노의 마안>의 등급이 상승합니다.]
[<설화의 마갑>의 등급이 상승합니다.]
마지막으로 뜬 메시지는 특성들의 등급이 상승했음을 알려주는 메시지였다. 이번 전투를 치르며 많이 사용했던 특성들의 등급이 한 단계씩 올라갔다.
-지이이이이이랄한다!
라스가 결국 참지 못하고 욕을 퍼부었다.
-여기가 구슬 아이스크림 매장이야? 아주 골고루 퍼주네! 그것도 민트초코처럼 맛난 것만 퍼주고 있느니라!
‘음, 민트초코는 별로 맛이 없는….’
-네놈은 닥치고, 망할 놈의 시스템이나 대답하거라!
녀석이 호통을 쳤지만, 시스템은 할 일을 모두 마쳤다는 듯 도도하게 사라졌다.
-끄으윽, 뼈가 시리니라….
라스는 혹한의 마왕인 주제에 춥다고 중얼거리며 포동포동한 살을 떨었다.
‘추, 춥다고?’
-맨날 빼앗기기만 하니까. 정말이지 사는 보람이 없느니라.
왠지 모르게 안쓰러워서 머리를 긁적이며 라스에게 다가갔다.
‘돌아가면 구슬 아이스크림이라도 사줄까? 3세트는 어때?”
아이스크림을 사주겠다고 말했지만, 라스는 예상과 달리 돌아보지 않은 채 자기 혼자 중얼거리기만 했다.
‘정말 삐친 건가?’
라온이 입맛을 다시며 라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어떤 맛을 골라야. 잘 골랐다고 소문이 나지?
‘…….’
녀석은 삐치거나, 화가 난 게 아니라, 아이스크림의 맛을 고르느라 집중하는 중이었다.
‘질린다….’
라온이 한숨을 내쉬고서 시선을 돌렸다.
“너 왜 혼자 실실거리냐?
리메르가 가는 헛웃음을 흘리며 손짓했다.
“제가요?”
“그래. 허공을 보면서 웃다가 찡그리던데. 뭐 있어?”
그는 라스와 메시지가 떠 있던 곳을 살피며 눈매를 찡그렸다.
“아, 좀 피곤해서요.”
라온이 어색하게 웃으며 볼을 긁적였다.
“맞아요. 싸움이 연달아 이어졌으니, 피곤할 겁니다.”
라스가 보이는 버렌이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는 입 모양으로 정령이 귀엽다고 말해주었다.
‘귀엽기는….’
요놈은 식충이 마왕일 뿐이야. 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참았다.
“하긴 그렇겠지.”
리메르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횅한 그의 오른쪽 어깨에 저절로 시선이 갔다. 체한 것처럼 가슴이 꽉 막힌 기분이었다.
“대주님.”
라온이 리메르의 앞에 서서 그의 눈을 보았다.
“팔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글쎄….”
리메르가 왼손으로 오른쪽 어깨를 만지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냥 은퇴할까?”
그의 목소리는 가벼운 대화를 나눌 때처럼 담담했다.
“은퇴요…?”
“내가 지그하르트에 꽤 오래 있었잖냐. 그것도 대주였다가 교관이었다가 다시 대주가 되어서 퇴직금이랑 연금이 꽤 될 거란 말이지.”
리메르가 구김 없이 웃으며 왼손을 흔들었다.
“그걸로 번화가에 집 하나 사고 도박장에 출퇴근하면 재밌을 거 같지 않아?”
그는 진심인지 장난이지 모를 애매한 눈빛으로 손가락을 비볐다.
“사실 팔이나 귀 하나 없는 도박꾼은 생각보다 흔하거든. 선수로 잘 먹힐 거 같은데? 어때?”
“그, 그 말 진심이에요?”
버렌이 당황하여 눈동자를 떨었다.
“대주는 퇴직금 같은 거 그날로 날릴 텐데 무슨 은퇴야!”
마르타도 평소와 달리 막나가지 못하고, 입술만 씹었다.
“…….”
루난은 어떤 선택을 해도 이해한다는 것처럼 조용히 리메르를 바라보았다.
“헛소리 말아요!”
“우리한테 빌린 돈 갚으면 퇴직금 다 사라질 텐데 가긴 어딜 가!”
“광풍대에 뼈를 묻고 빚이나 갚아요!”
“종신하라고!”
도리안과 광풍대도 이대로 리메르가 은퇴하는 건 못 보겠다는 듯 소리를 질렀다.
“하….”
리메르는 광풍대를 보며 낮은 한숨만 내쉬었다. 어릴 때부터 성인까지 지켜본 아이들이 떠나지 말라고 하니, 그도 말이 나오지 않는 것 같았다.
“대주님.”
라온이 고개를 숙인 리메르에게 한 발 더 다가갔다.
“정말 은퇴를 원하신다면 받아들이겠습니다. 다만….”
차분히 시선을 돌려 리메르의 오른쪽 어깨를 살폈다.
“팔 때문이라면 방법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리메르가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주며 시선을 들어 올렸다.
“클라우드의 팔이 조금 이상했거든요.”
라온이 클라우드의 시체로 다가가 놈의 오른팔을 만져보았다.
피부의 부드러움과 열감을 가지고 있지만, 사람의 팔을 만진 느낌은 아니다. 처음에 생각했던 대로 아티팩트였다.
뿌드득!
클라우드가 죽었기 때문인지 아티팩트 팔은 쉽게 뽑혔다.
‘마나를 이용하는 건가.’
어깨에 마나회로 같은 인공 줄기를 박아넣는 방식으로 보였다. 이대로 쓰기는 힘들지만, 엔시아에게 가져다주면 새로운 것을 만들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으으….”
리메르가 인공 팔을 보며 인상을 확 구겼다.
“나, 나는 결벽증이 있거든. 그냥 이대로 살게.”
그는 쓰레기 구덩이에서 자면서 결벽증이 있다는 헛소리를 내뱉었다.
“이걸 쓰자는 게 아니에요. 어차피 팔 길이도 안 맞을 테고.”
라온이 인공 팔을 내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럼?”
“이걸 가져가면 엔시아 님이 새로운 물건을 만들어줄 수도 있으니까요.”
“아, 하긴 그 천재 아가씨는 인공단전도 만들 줄 아니까.”
리메르도 그건 가능성이 있을 것 같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손이 없는 도박꾼들은 의수를 끼고 있었지. 그게 더 멋있어.”
그는 인공 팔을 낀 채로 도박을 하는 본인의 모습을 상상했는지 히죽 웃었다.
-저거 꼭 팔 만들어줘야 하느냐?
라스가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나도 말을 꺼낸 걸 후회하고 있어.’
라온이 라스의 말에 동의할까 고민할 때 리메르가 뒷목을 긁적였다.
“사실 내 삶의 절반은 복수였거든.”
그는 복수라는 단어와는 어울리지 않는 눈빛으로 웃었다.
“그게 너희 덕분에 이루어졌으니, 앞으로의 일은 잘 모르겠어.”
리메르는 비어버린 오른 어깨를 보며 짧게 입맛을 다셨다.
“팔을 안 붙이고, 왼손으로 검을 쥘까 하는 생각도 나고, 뒤에서 도움만 줄까 하는 생각도 나고. 정말 은퇴할까하는 생가도 있고.”
그는 아직 마음의 결정을 내리지 못한 듯 낮은 숨을 내뱉었다.
“급한 건 아니니까. 천천히 생각하세요.”
“그래.”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고서 광풍대에게 손짓했다.
“일단 정리부터 시작하자. 또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르니까. 최대한 빠르게 상황을 정리하고 이곳을 벗어난다.”
“예!”
광풍대가 대답하고 움직일 때 라스가 허공을 바라보았다.
-오느니라.
‘또 뭐가? 메시지?’
-…….
라스는 대답을 하지 않고, 가늘게 눈매를 좁혔다.
-조금 변했군.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건데.’
라온이 라스가 지켜보는 방향으로 시선을 던지다가 멈춰 섰다. 정말 저 앞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고오오오오오!
그 감각을 느꼈을 때는 이미 허공에 백발의 노인이 떠 있었다.
“어…?”
라온이 노인을 보며 눈을 부릅떴다. 장대한 기골과 칼날을 갈아 넣은 듯한 눈빛 그리고 그와 어울리지 않는 허허로운 기운까지. 몰라볼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렉타르 님?”
백발의 노인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검귀 렉타르였다. 이곳에서 검귀를 만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기에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
“여기는 어떻게 오신 겁니까?”
라온의 웃음에 반가움이 묻어났다. 하지만 검귀는 대답하지 않고, 클라우드와 용현검주의 시체만 지그시 바라보았다.
“아, 이들은 성검련의 검귀들입니다. 라키온 가문을 집어삼키려고 하다가 저희와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주변에 시체가 가득했기에 그의 의심을 풀기 위해서 간략하게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
하지만 렉타르는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고, 성검련 검사들의 시체만 살폈다.
“렉타르 님?”
“그랜드 마스터에 올랐구나.”
“렉타르 님 덕분입니다.”
라온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의례 하는 인사말 따위가 아니라, 진심이었다.
검귀와 글렌의 대화 덕분에 빠르게 벽을 깨고 그랜드 마스터에 오를 수 있었으니까.
“그런가.”
검귀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고서 시선을 들었다. 반가움 따위는 없이 말라붙은 듯 건조한 눈동자. 다만 그 메마름 속에 뜻을 알 수 없는 옅은 빛이 번들거렸다.
라온이 검귀의 눈을 보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대체 왜….’
검귀라면 내가 그랜드 마스터에 오른 것을 본인의 일처럼 기뻐해 줄 거라 생각했는데, 그는 남의 일을 들은 것처럼 관심이 없어 보였다.
‘뭔가 이상해.’
정말 검귀가 맞는지를 기감을 풀려고 할 때 그의 뒤로 성검련의 검사들이 내려앉았다.
“렉타르 님! 성검련입니다!”
라온이 손짓을 했지만, 렉타르는 물러서지도, 돌아보지도 않은 채 그 자리를 벗어나지 않았다.
성검련의 검귀들 역시 렉타르의 뒤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공격하려는 게 아니라, 꼭 보필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서, 설마….”
“결국 이리되었군.”
렉타르가 냉랭한 표정을 지으며 땅으로 내려섰다. 그의 기세는 다가가기만 해도 뼈와 살이 얼어붙을 정도로 섬뜩했다.
“당신 설마….”
손을 떠는 라온 대신 리메르가 앞으로 나왔다.
“그래.”
검귀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성검련의 혈검주가 나다.”
그는 스스로가 성검련에 속해 있음을 밝히며 살기를 두른 눈빛을 일으켰다. 피에 젖은 듯한 눈동자를 보자 등골 사이로 오싹한 소름이 피어났다.
“어…?”
“지, 지금 뭐라고?”
“성검련이라고? 검귀 님이?”
광풍대도 검귀와 짧지 않은 시간을 함께 했기에 믿을 수 없다는 듯 눈동자를 떨었다.
“어이 영감.”
리메르가 어깨를 잡고 있던 왼손으로 렉타르를 겨누며 입매를 비틀었다.
“그게 무슨 개소리야! 갑자기 왜 성검련에 들어간 건데!”
“들어간 게 아니다.”
검귀가 눈 하나 깜박하지 않은 채 답했다.
“나는 처음부터 성검련의 소속이었으니까.”
“…….”
라온은 클라우드의 시체를 보며 피나도록 주먹을 말아쥐었다.
‘저놈이 그분이라고 말한 게 렉타르 님이었어….’
클라우드가 그분의 검술이 왜 통하지 않느냐고 외칠 때 말했던 그분이 바로 검귀였다. 이제야 놈의 검술이 익숙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나도 배웠으니까.’
같은 사람에게 검을 배웠기에 클라우드의 간략한 만검이 눈에 익었던 것이다.
“그니까 대체 왜 성검련 소속이 우리에게 다가왔었냐고! 그때는 진심이었잖아!”
리메르가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악을 질렀다. 그도 검귀가 마음에 들었었는지 용현검주를 본 것처럼 화를 내고 있었다.
“내가 답을 해주어야 할 이유가 있나?”
렉타르가 냉랭한 눈빛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가 손을 뻗자, 성검련의 검귀들이 광풍대를 에워쌌다.
“그간의 정이 있으니, 빠르게 끝을 내도록 하지.”
“이익!”
“빌어먹을….”
“산 넘어 산이라니!”
광풍대는 배신감에 치를 떨면서도 중앙으로 모여들어 광풍진을 운용했다. 다만 정신적으로나 체력적으로 힘이 들어서 진이 완벽하게 굳어지지 않았다.
스르르릉!
라온은 제천검을 뽑으며 광풍대의 앞을 막아섰다.
‘못 이겨.’
용현검주 때와는 상황이 다르다. 당시의 각성 상태를 유지하고, 오러와 체력이 만전이라고 해도 렉타르의 일검조차 막을 수 없다. 이 상황은 이미 종료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해가 안 가는군요. 성검련과 지그하르트는 적인데, 왜 제게 검술을 가르쳐주신 겁니까.”
라온은 시간을 끌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진심으로 궁금했던 점을 물었다.
“그저 심심풀이일 뿐이었다.”
렉타르는 감정이 씌이 않은 듯한 음성으로 고개를 저었다.
“…….”
라온이 렉타르의 차디찬 안색을 살피며 입술을 씹었다.
‘그럴 리가 없어.’
렉타르의 가르침은 진실되었다. 그의 손짓은 항상 최선을 다했고, 조금이라도 더 많은 것을 가르쳐주기 위해 애를 썼다.
차라리 다른 이유가 있다면 모를까. 지금에 와서 심심풀이라고 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질 않았다.
다만 지금은 그 이유가 중요하지 않았다.
렉타르가 직접 손을 쓰기 위해서 다가오고 있었으니까.
“21살의 나이에 그랜드 마스터에 오른 너를 데리고 간다면 련주도 만족하겠지.”
-흐음….
라온이 라스를 보았다. 녀석은 의외로 별말 없이 턱만 긁적이고 있었다.
‘지금 라스의 힘을 빌려야 하나?’
아니야. 위험해.
정체를 들키는 것도 그렇고, 이번에 마왕 강림을 일으키면 어떤 후유증이 도질지 모른다. 그건 최후의 수단으로 남겨두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라스에게 몸 자체를 넘겨주는 것도 무리다. 폭주한 녀석이 이곳에 있는 인간을 모두 말살할 테니까.
‘잡히자. 그게 제일 나아.’
데리고 간다는 건 죽일 마음이 없다는 뜻이다. 일단 성검련에 가서 라스를 푸는 방법도 있으니, 따라가기로 마음을 정했다.
라온이 결론을 맺고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따라가면 광풍대는 놓아주실 겁니까?”
“다른 이들은 의미 없겠지.”
렉타르는 리메르와 광풍대를 쳐다도 보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야!”
“무슨 개소리야!”
“절대 안 돼!”
“라온.”
리메르와 마르타, 버렌, 루난이 검진을 깨면서 앞으로 나왔지만, 라온이 손을 저어서 막아섰다.
“가만히 있어. 데리고 간다는 것을 보면 죽일 생각은 아니라는 거니까.”
“그, 그래도….”
“죽는 게 아니라는 거지!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른다고!”
“너 정말….”
“임시 대주의 명령이다. 다 물러나.”
라온은 광풍대에게 명령을 전하고서 제천검을 다시 검집에 넣었다.
“좋은 판단이다.”
렉타르가 바람 빠진 웃음을 흘리며 손을 뻗어왔다. 그의 손아귀가 시야를 가릴 때 왼손으로 진혼검을 뽑았다.
캬아아앙!
암습을 최대한 발휘하여 검을 내질렀지만, 진혼검의 이글거리는 요기는 렉타르의 피부를 가르지 못하고 밀려났다.
“그래. 그래야 라온 지그하르트지.”
렉타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그는 가볍게 진혼검을 튕겨내고 다시 손을 뻗어왔다. 가볍게 내지르는 손에 만검의 묘리가 어려있다.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었다.
‘빌어먹을….’
입술을 깨물며 다가오는 손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찌지지지직!
라온과 렉타르 사이의 공간이 깊게 갈라지며 장대한 오러가 솟구쳤다. 공간을 뜯어내는 칼날. 몰라볼 수가 없는 공간의 참격이었다.
“으음….”
“내 조카에게서 떨어져!”
렉타르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러서는 사이 갈라진 공간을 열고 노을빛 머리카락이 파도쳤다.
“이 빌어먹을 영감탱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