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67화
복수는 언제나 내 머릿속을 유영했다.
광풍대 아이들을 키우면서도 용현검주에 대한 복수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웃고, 즐기고, 화를 내고, 아이들에 대한 애정이 깊어질 때도 복수는 그림자처럼 항상 내 곁을 함께했다.
가족보다 더 가까웠던 이들을 모두 잃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용현검주과 성검련주에 대한 복수를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준비를 시작했다.
내 목숨을 제물로 바쳐서라도 용현검주를 죽이겠다고 먼저 간 이들에게 맹세했다.
하지만 난 그 맹세를 이루지 못했다.
꿈에서조차 그리던 용현검주를 만났건만, 목숨을 걸고 싸우지 못했다.
죽인 이들보다 살아 있는 아이들을 우선시하며 길을 막는 데만 온 정신을 다 쏟아부었다.
누구 하나 죽지 않았으니, 정말 다행이었다. 후회는 없었다.
하지만 죄책감이 내 어깨를 짓눌렀다. 가문으로 복귀한 후 바로 죽은 이들의 무덤을 찾아갔다.
미안하다고, 어쩔 수 없었다고 외치며 다음에는 정말 목숨을 걸고 내 손으로 용현검주의 목을 따겠다고 다시 한번 맹세했다.
그날 이후로 라온과 광풍대 녀석들과 조금씩 거리를 두었다.
내가 없더라도 라온을 중심으로 광풍대가 유지되도록 연무장에도 거의 나가지 않았고, 아이들의 수련도 봐주지 않았다.
가주님의 개인 연무장을 빌려 수련에만 집중했다.
공방의 균형이 잡힌 폭풍의 눈은 버리고, 위력이 강한 바람과 벼락의 노래만을 다듬어서 용현검주의 목을 물어뜯을 이빨을 세웠다.
광풍대와 정이 너무 많이 들었는지 생각 이상으로 괴로운 시간이었지만, 아이들에 대한 애정과 용현검주에 대한 복수심 덕분에 견딜 수 있었다.
이젠 모든 것을 버리고 복수에 집중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난 이번에도 용현검주에게 전력을 다하지 못했다.
광풍대가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않고, 용현검주의 목만을 베겠다고 결심했지만, 난 결국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서 많은 양의 오러를 소모했다.
죽은 이들에게 죄스러워야 했건만,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했다.
가시덩굴에 옥죄여 있던 영혼이 풀려난 것처럼 더 자유롭게 육체를 움직일 수 있었다. 끝이 다가왔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내 마지막을 떠올리며 라온에게 모두를 이끌고 도망치라고 말한 후 결착을 이루려고 했는데, 결국 그 망할 놈이 사고를 쳤다.
전장 한복판에서 무아지경에 빠지는, 글렌조차 못할 미친 짓을 해버리고 말았다.
결국 용현검주와 동귀어진을 하려 했던 내 계획은 모두 어그러졌다.
도망치는 것도, 여기서 끝을 보는 것도 하지 못한 채 라온과 광풍대를 지키기 위해서 가진 힘을 쏟아부을 수밖에 없었다.
다만 그 난잡한 전투 중에 마지막 기회가 찾아왔다.
용현검주는 각성 직전의 라온을 보고 당황하여 광풍대가 있는 방향에만 온 힘을 집중했다.
그 순간 틈이 드러났다. 용현검주의 목을 가르고, 놈의 숨통을 끊어버릴 치명적인 공간이 열렸다.
하지만 내가 그 빈틈을 찌른다면 라온과 광풍대는 뼛조각 하나도 남기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
찰나의 판단?
아니, 판단조차 하지 않았다.
내 몸은 생각을 하기도 전에 이미 용현검주의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놈을 죽이기 위해서 갈고 닦았던 바람과 벼락의 노래를 지우고, 모두를 지키기 위한 태풍의 눈을 일으켰다.
복수를 이루지 못했다는 아쉬움 따위는 없었다. 그저 뒤에 있는 녀석들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아이들을 살리기 위해 내 몸으로 마기를 받고, 마검에 바람의 기운까지 밀어 넣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복수를 이루지 못한 죄는 저승에 가서 동료들 앞에 무릎을 꿇어야겠다고 다짐하며 눈을 내리감았다.
죽음을 떠올린 그 순간.
망할 라온 녀석이 마검을 막아섰다. 연한 금색 눈동자. 신비로움과 고고함을 휘감은 눈이 용현검주를 짓눌렀다.
라온은 늦잠을 자서 늦었다고 말하며 웃었다.
그건 내 대사인데.
내가 광혈귀를 막아설 때 했던 말을 그대로 읊으며 앞으로 나아가는 제자의 등은 지금까지 봤던 것 중 가장 넓어 보였다. 내 미래를 맡겼던 글렌조차 따라가지 못했다.
라온의 무력은 강대했다. 각성 직후였기에 본인이 할 수 없는 기예까지 발휘하며 용현검주를 압박했다.
저 아이는. 아니, 나의 어렸던 왕이 용포와 왕관을 쓴 채로 옥좌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내 손으로 복수는 못했지만, 마기를 받아들인 채 죽어가는 보람이 있다고 여겼다.
아쉽게도 시원함은 없었다. 처음부터 누군가가 아니라, 내 손으로 용현검주의 목을 따고 싶었으니까. 남이 해주는 복수 따위는 원하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생각할 때 라온이 연한 금빛의 화염으로 용현검주를 꺾었다.
“너의 패배. 아니, 우리의 승리다.”
그 짧은 말에. 그 단호한 음성에 내 영혼이 구제된 느낌이었다.
죽은 이들과 항상 함께 했던 정신과 육체가 악몽에서 깨어나는 듯한 감각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여한이 없었다. 이제 죽어서도 동료들에게 죄를 고할 필요는 없었다.
내 제자가 나와 함께 복수를 해줬다고 말할 수 있었으니까.
눈을 감았다.
지금 내 몸 전체에는 억지로 흡수한 마기가 가득 차올라 있다.
넝마의 성자 패드릭이 곁에 있어도 살릴 수 없는 상태였기에 살고 싶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다시 눈을 뜨고, 광풍대를 한 명 씩 바라보았다.
어린 시절부터 키웠던 아이들과 눈으로 인사를 하고 있을 때 묵직한 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라온이다. 전투를 끝내고 돌아온 녀석이 흐릿한 눈동자를 굽히고 있었다.
마지막 인사인가.
죽기 전만큼은 진심이 어린 인사를 나누고 싶었다.
“라, 라온. 고맙다. 네 덕분에 난….”
고개를 들어 올리며 말라붙은 입술을 벌릴 때 라온이 눈살을 찌푸렸다.
“엄살 그만 부리고 일어나요.”
야이 새끼야!
* * *
라온은 파르르 떨리는 리메르의 눈동자를 보며 입술을 씹었다.
‘좋지 않군.’
리메르는 마기에 전신이 중독된 상태였다.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고, 실제로 그의 육체는 빠르게 생기를 잃고 있었다.
“심각해. 마나 회로는 물론이고, 장기까지 마기가 퍼졌어.”
마르타는 의술을 계속 공부하고 있었는지 짧은 시간에 리메르의 상세를 모두 파악하고 있었다.
“이 인간 살릴 수 있어?”
“라온….”
버렌과 루난이 긴장한 듯 손끝을 떨었다.
“부대주님….”
“이 인간이 이렇게 죽는 건 보고 싶지 않아요!”
“죽더라도 도박장에서 맞아 죽는 게 낫지. 이렇게는 못 보냅니다!”
광풍대 검사들도 리메르를 이대로 보낼 수 없다며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걱정마. 살릴 수 있으니까.”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고서 리메르의 상태를 살폈다. 마르타의 말대로 그의 장기에서까지 마기의 악취가 느껴졌다.
-네놈 같은 애송이가 뭘 할 수 있다고 까부는 것이냐.
라스가 어림없다는 듯 손을 저었다.
-괜한 희망 주지 말고, 본왕에게 몸을 넘겨라. 본왕을 마주하면 마기 따위는 겁을 먹고 알아서 물러나지. 운이 좋다면 살 수 있을 것이니라!
‘…….’
라온은 라스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멍하니 녀석을 바라보았다.
-뭐, 뭘 봐!
‘역시 넌 아낌없이 주는 호구야.’
-호, 호구? 이 망할 놈이!
화를 내며 버둥거리는 라스를 밀어내고, 리메르의 왼쪽 가슴에 손을 얹었다.
영혼의 밑바닥에 잠겨 있는 분노의 기운을 끌어 올려 리메르의 몸속으로 밀어 넣었다.
-어억!
라스는 분노를 이용할 줄은 몰랐다는 듯 입을 떡 벌렸다.
‘역시 정답이군.’
무아지경에 빠졌을 때 마기가 마왕의 권능에 맥을 못 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상성 관계를 이용한다면 리메르의 몸을 가득 채운 마기를 쫓아낼 수 있을 것이다.
“야이. 썩을 놈아. 우리 마지막은 좁 곱게… 커헉!”
주절거리는 리메르의 입을 막고, 분노의 기운을 계속 주입했다.
고오오오오오!
분노의 권능이 리메르의 육체를 파고든 순간 그의 몸을 잠식하던 마기가 겁에 질린 것처럼 부르르 떨다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예상했던 대로 마기는 마왕의 권능 앞에서 압도적인 을이었다.
“크흑!”
리메르가 숨을 쉬지 못하는 것처럼 가슴을 헐떡였다. 그의 안색이 시퍼렇게 질리며 푸른 핏줄이 돋아났다.
“너, 너 대체 뭐 하는 거야!”
마르타가 기겁했지만, 함부로 말리지는 못하고 발만 동동 굴렀다.
“괜찮아.”
라온은 그녀와 광풍대에게 믿으라고 손짓을 하고서 리메르의 몸속을 파고든 분노의 기운을 심장에서부터 퍼뜨렸다.
‘모두 잡아먹어.’
분노의 기운은 본인의 영역에 마기 따위가 있는 게 역겹다는 듯 스스로 움직여서 리메르의 육체와 마나 회로를 파고든 마기를 모조리 집어삼켰다.
하지만 계속 잘 풀리지만은 않았다. 분노의 기운이 숨은 마기를 먹어치우려고 동시에 달려들다가 한쪽에 과하게 응집되는 경우도 있었다.
“으아아아! 내 손! 하나 남은 내 손이!”
리메르의 왼손이 바람을 집어넣은 고무공처럼 부풀다가 터지기 직전까지 차올랐다. 거인의 손을 보는 듯했다.
“아, 잠시.”
라온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고서 리메르의 손에 몰린 분노를 빼냈다.
다만 너무 빠르게 움직였기 때문에 이번에는 리메르의 오른쪽 다리가 건물 기둥처럼 빵빵하게 부풀었다.
“아, 여기가 아닌가?”
“이런 미친 제자 놈아! 제대로 안 하냐! 난 네 장난감이 아니야!”
리메르는 마기에 대한 고통도 잊어버렸는지 악을 지르며 어깨를 떨었다.
“좀 가만히 있어요!”
“읍읍!”
라온은 리메르의 입에 검집을 물리고 다시 정신을 집중했다. 오른 다리에 몰린 분노를 빠르게 순환시켜서 그의 육체 구석에 숨은 마기까지 모조리 지워버렸다.
혹시나 해서 오러를 이용하여 리메르의 전신을 살펴보았지만, 마기의 악취는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끝났군. 이제 회수만 하면….’
마기는 외부에 버리고, 분노만 회수하려다가 멈춰 섰다.
‘아니야. 버릴 필요가 없지.’
라온은 분노만이 아니라, 리메르의 몸을 파고들었던 마기까지 모두 자신에게 가져왔다.
찌이이이이잉!
마기는 몸에 들어오자마자, 난동을 부리려고 했지만, 분노와 나태, 질투의 기운이 기다렸다는 듯 일어나서 마기를 에워쌌다.
쿠구구구구!
마기는 세 군주의 권능에 얻어터진 후 개과천선을 한 것처럼 순수한 마나로 뒤바뀌어서 마나 회로를 한 번 순환한 후 단전에 안착했다.
-아니….
라스가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떨었다.
-본왕은 시키지도 않았는데 왜 제멋대로 움직여!
녀석은 리메르를 구하고 돌아온 분노에 어이가 없다는 듯 눈을 부라렸다.
‘이제 나도 어느 정도는 통제할 수 있으니까.’
그랜드 마스터가 되었기 때문인지 분노가 예전보다 말을 잘 들었다.
시리아를 상대할 때처럼 아예 정신을 맡기지만 않으면 크게 위험하지 않을 것 같았다.
“아이고! 나 죽는다! 부하 놈이 날 죽여!”
리메르가 버둥거리며 소리를 질러댔다.
“죽을 때도 그냥 안 죽이고 고문하다 죽이네! 내 팔자야!”
그는 아까와 달리 힘찬 목소리로 죽겠다고 외쳐댔다.
“죽는 게 아니라, 살아난 거 같은데요?”
버렌이 리메르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 뭐야! 마기가 다 사라졌어!”
리메르의 상태를 확인한 마르타가 말도 안 된다고 외치며 입을 떡 벌렸다.
“너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그녀는 이렇게 빠르게 마기를 지울 줄은 몰랐다는 듯 눈으로 비명을 질렀다.
“인나.”
루난이 리메르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어떻게 일어나. 아파서 죽… 어라?”
리메르가 팔다리를 버둥거리다가 우뚝 멈췄다.
“왜, 왜 안 아프냐?”
그는 뼈와 살만이 아니라, 내장을 으깨는 듯한 통증이 모두 사라진 것을 깨닫고 입술을 떨었다.
“너 무슨 짓을 했어! 어떻게 오러로 마기를 지운 건데!”
리메르가 어이가 없다는 듯 왼손을 뻗었다.
“…….”
라온은 하나뿐인 팔을 보며 눈매를 찌푸렸지만, 리메르 본인은 아무런 신경도 안 쓴다는 듯 마기를 어떻게 지웠냐고만 물었다.
“엄살이었으니까요. 처음부터 죽을 게 아니었어요.”
안타까운 표정을 감추며 손을 휘휘 저었다.
“어, 엄살 아니라고! 진짜 죽을 뻔 했단 말이야!”
“네. 네. 그러시겠죠.”
라온은 고개를 까딱이며 리메르를 일으켜 세웠다.
“원수의 마지막은 봐야죠.”
리메르를 부축해서 마지막 숨을 내쉬는 용현검주에게 다가갔다.
“음….”
리메르가 용현검주에게 말을 하려할 때 라온이 손을 들어 올렸다.
“저 먼저 하나만요.”
“이럴 거면 데리고 오지 말던가….”
라온은 리메르의 말을 무시하고, 용현검주를 굽어보았다.
“내, 내 입에서 나올 말은 없다.”
용현검주가 눈동자를 파르르 떨며 고개를 저었다.
“걱정 마. 네 대답을 원하지는 않으니까.”
“뭐?”
“성검련, 흑탑, 백혈교가 손을 잡은 건가?”
그 말에 용현검주의 안구가 잠시 떨림을 멈췄다.
“역시 그랬군.”
육황 그리고 오마는 각자 동맹을 이룬 것처럼 보이지만, 서로를 견제하기 위해 모였을 뿐 실제로는 제대로 된 합의를 이루지 못했다.
이전에 흑탑이 카멜룬을 습격하고, 성검련과 백혈교가 바레네를 습격했을 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그 세 단체가 임시로나마 동맹을 맺은 것 같았다.
“흑탑과 백혈교라니, 너희도 타락했군.”
리메르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다, 닥쳐.”
용현검주는 닥치라는 반응으로 그 예측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어쨌든 이제야 솔직하게 말할 수 있겠어.”
리메르가 라온의 부축을 밀어내고 홀로 섰다. 다리가 흔들렸지만, 용케 쓰러지지 않은 채 담담한 눈빛으로 용현검주를 내려다보았다.
“이전 싸움의 패자는 나다. 난 수하들을 모두 잃고, 단전까지 깨졌지만, 너는 팔만 잃었지. 인정한다. 네 승리였어.”
“무, 무슨….”
용현검주는 리메르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마른침을 삼켰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라. 네놈이 네 무력을 회복시키는 동안 나는….”
리메르가 왼팔로 라온의 어깨를 잡았다.
“이 괴물 제자 놈을 키웠거든. 요놈이 널 아작 냈으니, 이번 싸움의 승자는 우리다.”
그는 라온이 했던 우리라는 말이 마음에 와닿았는지 그 말을 그대로 읊으며 연한 미소를 그렸다.
“크윽….”
용현검주는 분하고, 처연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네, 네 손으로 하지 않으면 의미가….”
“응. 의미 있어. 꼬우면 너도 제자 키워오던가! 다 늙어 빠진 주제에 무력을 되돌리겠다고 까불다가 꼴좋다!”
리메르는 헤죽거리며 용현검주를 조롱했다. 몸 상태만 좋았다면 춤까지 출 기세였다.
“누구도 네 명복을 빌지 않는 곳에서 죽는 게 너답군.”
리메르는 이제야 모든 미련을 떨친 듯 구김 없는 미소를 지었다.
“비, 빌어먹을 놈….”
용현검주는 눈동자에 핏줄을 세운 채 천천히 숨이 멎어갔다. 죽기 전 그의 표정은 라온에게 패배했을 때보다 더 일그러져 있었다.
“잘 꺼져라. 지옥으로.”
리메르는 숨이 끊어진 용현검주를 보다가 주저앉았다. 그는 사라진 오른팔을 쓸어내리고서 어색하게 웃었다.
“고맙다.”
“예?”
라온이 리메르를 보며 눈을 꿈벅였다.
“고맙다고. 덕분에 시원해졌어.”
리메르가 한숨을 길게 내쉬고서 환히 열린 하늘을 바라보았다.
“저 녀석들을 구해줘서 고마워. 한 명이라도 죽었다면 이런 기분을 느끼지 못했을 거다. 다행이야.”
“대주님이 그런 말도 하실 줄 알았습니까?”
“날 뭘로 보는 거야!”
“그런데 하나 틀린 게 있습니다.”
“어?”
“대주님도 함께 살아서 다행인 거죠.”
라온이 리메르의 등을 돌려서 광풍대를 바라보게 했다. 광풍대는 모두 동의한다는 듯 웃고 있었다.
“어딜 도망가려고!”
“지금까지 수련 안 시켜준 거 돌아가서 다 해주세요.”
“게으름뱅이.”
“도박꾼!”
“빈털터리!”
“거지!”
“지그하르트의 쓰레기!”
광풍대 검사들은 리메르의 사정을 모두 이해하고 있었는지 미소를 지으며 그의 별명을 불렀다.
“쓰레기 누구야!”
리메르가 쓰레기라 부른 사람을 찾으며 이를 바득 갈았다.
라온은 난동을 부리는 리메르와 도망치는 광풍대를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제 다 끝….’
-끄으응….
기분 좋게 웃고 있을 때 라스가 굉장히 심각한 얼굴로 눈동자를 굴리고 있었다.
‘너 왜 그래? 마려워?’
-무슨 개소리를 하는 것이냐! 곧 온다! 곧 올 거라고!
그 섬뜩한 말에 바로 기감을 풀었다. 하지만 한참 동안 마나를 휘돌려도 느껴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대체 뭐가 온다는 건데.’
-온단 말이다! 느껴져! 지금 근처에 있느니라!
라스는 대답하지 않고 먹잇감을 노리는 고양이과 동물처럼 몸을 숙였다.
‘너 혹시 뭐 잘못 먹었냐?’
이상하다고 중얼거릴 때 허공으로 메시지가 떠올랐다.
[그랜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르셨습니다.]
[전장의 중심에서 무아지경….]
[모든 능력치가….]
연속으로 메시지가 떠올라 시야를 가렸다.
-끄아아아아악!
라스가 기다렸다는 듯 비명을 지르며 튀어 올랐다.
-역시 왔어! 악마가 찾아왔느니라! 당장 꺼지거라!
라온은 허우적거리는 솜사탕을 보며 멍하니 눈을 꿈벅였다.
‘악마의 왕이 너잖아….’